Maelst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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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JH&DK Collaboration

고리의 순환
쓰계

* 고잉 세븐틴 '배드클루'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수위가 높지는 않으나 '배드클루' 세계관이 반영된 만큼 고어, 학대, 근친, 트라우마와 같은 트리거 워닝이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고 열람해주시길 바랍니다.

* 추가로 사람에 따라 공포를 느낄 수 있는 묘사 역시 포함되어 있으니 이 점 역시 주의하시어 열람 부탁드립니다.

* 글 읽는 순서는 부서진 고리 > 고리의 순환 > 단락 > 원환 입니다.




2





박정한에게 박석민은 형제가 아니었다. 유전자 쪽으로 따지자면 맞았으나 정한에게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과학으로 모든 게 설명됐다면 정한의 어머니가 고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정한에게 석민은 형제가 아니었지만, 가족이 아닌 건 아니었다. 비록 바람직한 형태의 가족은 아니어도 둘은 가족이었다. 정한은 ‘가족’으로 묶이는 석민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석민이 허락해준다면 지금과 다른 의미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 평생 허락해주지 않을 걸 알기에 마음에만 품었지만.
죽고 난 뒤로 정한에게 남은 건 아득바득 힘을 키워 펜션을 탈출하려는 박태산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사건의 원흉. 제일 먼저 죽었으면서 환생도 포기하고 복수만 꿈꾸는 악귀. 살아생전 모든 걸 쥐고 흔들었으나 죽고 난 뒤에는 정한보다 약해 정한이 허락하지 않으면 장소를 떠날 수도 없이 변한 자. 정한은 왜 자신이 박태산과 함께 살해된 장소에 묶이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삶에 집착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오직 박태산과 정한만이 환생하지 못했다. 꾸역꾸역 부정한 기운을 먹어 힘을 키우는 박태산을 보면 왜 환생하지 못했는지 알 만했으나 정한은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해 펜션이 리모델링이 되고 숙소로 사용될 때마다 사람들을 겁주는 대신 피해 다니곤 했다.
욕심이 없는 악귀. 절대 성립될 수 없는 말이었다. 심지어 정한은 힘을 키워나가는 박태산보다 강해 수십 년이 지나도 박태산을 제 발밑에 두고 관리했다. 혹시 이 짓을 하려고 환생을 못 하나. 박태산이 산 자를 통째로 씹어 삼키지 못하도록 뜯어말리던 정한은 문득 박태산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이 환생하지 못한 건가 싶었다. 내가 책임감이 크던 사람이었나.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타적인 성격은 아니었는데. 아니면 죽어서나마 이 새끼를 내려다보고 싶었던 걸까. 평소 같으면 벌써 도망치고 남았을 박태산이 도망은커녕 정한에게 덤볐다. 정한은 장총을 들어 박태산을 향해 쐈다. 박태산이 총에 맞고 쓰러지자 마치 실지렁이 군단처럼 박태산의 몸을 이루던 것들이 조각조각 나 뿔뿔이 흩어졌다. 정한은 그것들을 잘근잘근 밟으며 내려다봤다. 정말 이 역겨운 꼴 하나 보려고 떠나지 못하는 걸까.
시간이 지나자 흩어졌던 조각들이 다시 뭉쳐 박태산이 되었다. 그리고 정한을 공격했다. 정한의 총에 의해 신체가 흩어지기 전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채로. 정한은 악만 남은 박태산의 공격을 피하며 총을 꺼내 쏘려다 주저했다. 정한이 죽었을 때부터 함께 했던 장총은 박태산이 일을 치려 할 때마다 제지용으로 요긴하게 쓰였으나 말 그대로 제지용이었다. 총에 맞고 몸이 분해되고 나중에 다시 합쳐진 박태산은 전보다 더 강한 살기를 뿜어댔다. 정한이 가진 힘에 비하면 발치에도 못 미칠 힘이었으나 총에 맞을 때마다 강해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정한은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총보다 손으로 직접 사지를 찢어 박태산을 저지했다. 박태산이 자신보다 강해질 여지를 조금이라도 주기 싫어서였다.
사실 정한은 총을 쏴서 박태산을 제지한 것보다 더 강력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정한은 악귀였다. 악귀는 온갖 부정한 것을 먹어치워 힘을 키울 수 있었고 거기에는 악귀도 있었다. 즉, 정한은 박태산을 먹어치움으로써 박태산의 혼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우고 박태산의 힘 역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정한은 그 방법이 내키지 않았다. 힘을 원하지도 그렇다고 타인을 위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무엇보다 정한은 박태산을 이루는 그 어떤 것도 취하고 싶지 않았다. 생전, 윤정한이란 이름을 버리고 박정한이 된 것만 해도 충분했다.


*


석민은 제 옆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정한을 곁눈질했다. 박태산이 정한에게 흡수된 뒤로 정한의 기분은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언제나 웃는 낯이었고 석민에게 장난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석민은 정한의 장난을 받아주지 못했다. 정한이 치는 장난은 주로 전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너 옛날에 맨날 형이, 형이 했던 거 기억나? 맨날 내가 어린놈이라서 그렇다. 형이 도와주겠다. 못하면 형이 하는 거 보고 배워라. 이제는 내가 더 오래 살았으니 내가 형인가?

정한은 매번 그런 식이었다. 빈정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고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본인에게는 좋을 거 하나 없는 그 시절에 왜 머물러있는지 석민은 알 수 없었다.
추억이랄 게 있나. 석민은 물어보고 싶었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정한은 전생의 석민과 관련된 인물이지 지금 석민의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게 떠오르긴 했어도 석민은 전생을 마주 보려 하지 않았다. 전생에 현생의 자신을 모조리 다 빼앗겨버릴 것 같아서였다.
갑자기 한기가 든 석민이 두 팔을 부여잡은 채 몸을 웅크리자 정한은 석민의 자취방 벽에 달린 에어컨을 살폈다. 에어컨은 코드가 뽑혀있었다.

“추워?”
“…아니.”
“그래. 그렇겠지. 넌 더워도 껴입고 다녔으니까. 몸에 남은 학대 흔적을 감추려고.”
“난 그 사람이 아니야.”
“아니, 맞아. ”
“아니야. 아니라고!”
“맞아. 맞으니까 나한테 반말하는 거잖아.”

석민은 그제야 자신이 정한에게 반말로 대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 석민이라면 정한과 쉽게 말을 트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의 석민은 마치 자신보다 어린 사람과 대화하듯 정한을 대하고 있었다.

“…기억 때문에 그래, 요. 갑자기 모든 게 떠올라서. 그래서 혼란스러운 것뿐이에요.”
“그래도 넌 지금까지 잊을 수 있었잖아. 나는 아무것도 잊지 못했는데 ”
“그야 저는 당신이 기억하는 그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석민은 서늘한 정한의 눈을 보고 입술만 꽉 깨물었다. 몇 번을 말하고 설득해봐도 정한은 석민을 박석민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석민은 정한과 말하기를 포기하고 침대에 누워 정한을 등졌다. 정한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이불을 가져와 석민에게 덮어준 뒤 사라졌다. 석민은 그제야 점점 더워지는 방 온도에 덮었던 이불을 발로 찼다. 이불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고 가만히 누워만 있던 석민은 꾸물꾸물 일어나 이불을 끌어당겨 발밑에 뒀다.


*


석민의 하루는 정한이었다. 눈을 뜨면 정한과 마주쳤고 밥 먹을 때도 정한이 옆에 있었으며 씻고 옷을 갈아입을 때도 옆에 있었고 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석민이 일을 할 때도, 일 끝나고 민규 아버지의 상태를 보기 위해 민규 집에 찾아갈 때도, 다시 집에 돌아와 침대에 앉아 정한을 곁눈질하며 제발 나는 박석민이 아니니 그만 따라다니라고 귀신도 이제 없으니 걱정할 거 없다고 설득과 애원을 할 때도, 통하지 않는 정한에 지쳐 먼저 누울 때도 옆에 있었다.

“제 말 들을 생각 없는 거 알겠어요. 더는 뭐라 하지 않을게요. 대신 씻을 때나 옷 갈아입을 때는 피해 주세요.”

해탈한 석민이 애원하듯 말하자 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헉, 드디어 내 말을 들어주나? 석민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정한이 입을 달싹이는 걸 지켜봤다.

“응, 싫어.”

아, 단명할 것 같다. 석민은 두통이 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옷을 갈아입었다. 몰라. 볼 테면 보라지. 뚱한 표정으로 반소매 티를 벗었을 때, 정한이 석민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감각에 석민이 펄쩍 뛰었고 정한은 뭐 그렇게 놀라냐며 흐흐 웃었다.

“깔끔하네. 듣기와는 다르게.”
“몇 번이나 말했던 것처럼 저는 박석민이 아니니까요.”

석민은 정한의 손길을 슬쩍 피하며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 아르바이트 없지 않나?”
“아저씨는 찾아봬야죠.”
“안 불편해?”

정한의 말에 신발을 신던 석민이 굳었다. 기억이 돌아온 석민은 민규의 아버지가 자신의 형이었던 박준기의 환생임을 알 수 있었다. 박준기와 똑같이 생겼으니까.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형을 박석민은 평생 잊지 못했다. 다만 덮어뒀다. 박준기의 트라우마는 곧 박석민의 트라우마였다. 박석민은 형의 죽음이 자신에게 경고한 거라고 생각했다. 잊어. 잊지 않으면 너도 나처럼 죽을 거다. 박석민은 죽지 않기 위해 모든 걸 덮는 연습을 했다. 자신의 트라우마나 아버지를 향한 증오와 두려움 그리고 감정을.
박석민은 형을 마주하기 무서워 장례식 이후로 박준기가 있는 납골당을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혹시 같이 가지 않을 거냐는 박민규의 부탁에도 박석민은 거부했다. 그러나 지금 석민은 준기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준기는 박준기가 아닌 김준기였다. 김민규의 아버지이기도 했으며 친구 아들을 친자식처럼 아껴주고 사랑해준 사람이었다. 법적으로 엮이지는 않았지만, 준기는 석민의 가족이었다. 그러니 석민은 민규 아버지를 피하지 않았다.

“그러면 당신은요? 당신은 안 불편해요?”

석민의 물음에 정한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사진으로도 본 적 없는 사람이 뭐가 불편해?”
“아뇨. 아저씨말고 민규요.”

내가 박석민으로 보이면 민규도 박민규로 보일 거 아냐. 석민은 혹시 정한이 민규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나설까 봐 겁났다. 정한은 오로지 제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박태산에게 이용당했을 뿐, 박준기의 자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때 박민규에게 살해당한 이유는 오로지 박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석민은 정한이 얼마나 박씨 성을 싫어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얼마나 억울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마 환생을 못 한 것도 박태산처럼 복수하고 싶은 게 아닐까? 가장 가능성 큰 가설에 석민은 정한은 경계했다. 박민규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민규는 김민규였다. 심지어 기억도 없었다. 그런 사람을 복수랍시고 죽이는 것은 예전 정한의 상황이 재현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억울하게 죽은 건 맞지. 하지만 내가 환생하지 않은 건 그 이유가 아닌데.”
“그럼 대체 뭐에요? 그때 그랬잖아요. 시간 지나면 다 알게 될 거라고.”
“나도 몰라.”
“예?”
“대충은 아는데 정확히는 몰라. 대신 네가 알 거야.”

왜 내가…. 석민은 서늘한 정한의 눈빛에 말을 이어가는 것 대신 서둘러 외출하는 걸 선택했다.


*


“왔냐.”

석민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부엌에서 민규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인사했다. 석민은 자신도 모르게 어린놈이 왔냐가 뭐야 싹수없이 하고 할 뻔했다가 본인 뺨을 내리쳤다. 정신 차려라. 나는 이석민이다.

“뭐 만들어?”
“어엉. 아빠가 배고프다 해서.”
“요새는 잘 드셔?”
“응. 입맛 돌아와서 좋다고 하루 다섯끼 드신다.”
“괜히 네 아버지가 아니구나.”
“뭐 인마?”

둘이서 티격태격할 동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솔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석민은 한솔을 보자마자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고 한솔도 미적지근 인사를 받아줬다. 그런 둘은 보던 민규는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면서 왜 낯 가리냐며 의아해했다.

‘당연하지. 쟤는 기억이 있으니까.’

사실 정한의 질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석민은 민규와 민규 아버지를 보는 것은 어려워하지 않았지만, 한솔은 아니었다. 전생에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불편한 건 더했다. 차라리 친한 사이였으면 덜 불편했을까. 석민이 끙끙 앓을 동안 한솔은 석민의 주변을 쭉 훑어보더니 갑자기 석민을 잡고 끌어당겼다.

“형. 나 석민이 형이랑 대화 좀.”
“무슨 대화? 내가 들으면 안 되냐?”
“응.”

민규의 얼굴이 순식간에 서운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뀌었으나 한솔은 신경 쓰지 않고 석민을 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꽉 닫고는 방안을 쭉 둘러봤다. 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한솔은 한참을 둘러보고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창문까지 닫았다.

“박정한은 어디 갔어요?”
“그거 때문에 이런 거야?”
“아뇨. 박정한 없는 김에 대화나 좀 나눠보려고요. 저희 그날 이후로 제대로 대화 나눠본 적 없잖아요.”

한솔의 말대로였다. 매일같이 민규 집에 드나들던 석민이지만, 민규나 민규 아버지하고만 얘기를 나눴지 한솔과는 눈인사만 대충하고 넘어갔다. 한솔도 석민이 불편해하는 걸 알고는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그랬던 한솔인데 정한이 없다는 걸 알자마자 석민에게 다가와서는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전에 감각 예민해지던 건 많이 나았는지, 다른 귀신은 보이지 않는지, 혹시 정한이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는지. 석민은 평소와 다르게 우다다 쏟아내는 한솔을 보고 식겁했다. 얘가 지금 왜 이래?

“천천히 말해. 너 숨넘어가겠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 급해서 그래요. 저희 얘기하다가 박정한이 돌아오면 어떻게 해요.”
“감각 이상은 그날부터 원래대로 돌아왔고. 귀신도 그날 이후로 정한이 빼고는 안 보이고. 정한이는 처음 봤을 때보다 감정 기복이 더 오락가락한 것 같지만 특별히 이상하게 행동하는 건 없어. 그런데 대체 왜?”

석민이 괜찮다는 걸 안 한솔은 깊은숨을 뱉어내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악귀에게도 등급이 있다는 거 아세요?”

한솔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평소 석민이 궁금했던 부분까지 얘기해줬다.

“등급은 사실 무당들이 임의로 나누는 거긴 한데, 보통 지박령을 가장 약한 악귀로 취급하고 떠돌아다니는 귀신을 중간 정도. 사람에게 붙어산 자의 수명을 갉아먹는 귀신이 가장 독하다고 말해요. 박정한은 제일 마지막이고요. 그래도 여기까지는 저희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데…. 악귀를 먹어치운 건 어떻게 못 해요.”
“왜, 왜?”
“너무 강해서. 그래서 우리끼리는 그런 걸 우스갯소리로 귀(鬼)를 잡아먹고 자란 신(神)이라고 해요. 아마 사장…,형이 감각을 되찾은 것도 박정한이 변해서 그런 것 같은데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귀신도 신이라서?”
“좋아하는 말은 아닌데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요. ”
“왜 싫어?”
“그건 신이 아니니까. 하지만 형한테는 신일수도.”

한솔이 손을 뻗어 석민에게 돌려달라고 했다. 석민이 멀뚱히 한솔을 보고만 있자 한솔이 팔을 가리켰다. 팔찌 얘기였다. 한솔이 준 뒤로 단 한 번도 빼지 않았던 석민이었기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혹시 이게 사라져서 다른 귀신이 안 보여서 그대로 공격받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걱정 가득한 석민을 한솔도 알아차렸는지 이제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달라고 했던 거라며 석민을 다독였다.

“죽은 것들은 형 못 건드려요. 이건 확신할 수 있어요. 왜냐고요? 형이 이쪽으로는 둔해서 모르는 것 같은데 사실상 무당이 된 거나 다름없거든요. 영안도 생기고 박정한이라는 귀신이 신 행세를 하며 곁에 붙어있고. 무당의 재능만 없을 뿐이지 구색은 다 갖추고 있잖아요. 죽은 것들은 괜히 귀찮아질까 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안 건들거든요.”

충격적이었다. 석민은 한솔이 자신을 다독여주며 하는 말에서 위로를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무당? 내가 무당? 윤정한 이 자식이 신이 되어 나한테 붙어있어?
석민이 이를 바득바득 갈자 한솔은 다독이던 손을 슬쩍 떼어냈다.

“귀신이 주변에서 안 보이니까 좋죠?”
“으응. 그건 좋네.”
“원래는 이렇게 없지 않아요. 생각보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길을 잃은 거죠. 우리는 그 길을 다시 찾아주는 역할이고. 그런데 박태산이 몸집을 불러보겠다고 이곳저곳 귀신을 먹어치워서 많이 사라졌고 그 뒤로 다른 놈이 나타나서 그나마 남아있는 악귀를 보이는 족족 먹어치우고 있어요.”
“귀신이 귀신을 먹는 게 문제가 되는 거야? 너무 강해질까 봐?”
“그런 것도 있는데 윤회의 고리가 끊어지는 게 가장 커요. 한 사람의 꼬리가 끊어지면 그 고리에 매여있던 다른 고리들도 방향을 잃거든요. 그러다가 연 없는 곳에 붙어서 문제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얌전히 윤회의 길로 가게 이끌어야 하는데 박태산이 망쳤고 박정한이 그것들을 다 먹어치우니. 고민이 크네요.”

똑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물으니 민규 아버지였다. 민규 아버지는 곧 음식이 다 되니까 나와서 같이 저녁이라도 하자며 둘을 불렀다. 석민은 혹시 민규 아버지가 둘의 얘기를 들었을까 걱정했지만, 한솔이 지금 하는 것만 끝내고 바로 가겠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겠다고 대답한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고 이내 사라지자 석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괜히 기억을 건드릴 뻔했다.
민규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매일 꿈으로 보던 과거뿐만 아니라 아팠던 시기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박준기의 삶을 알고 있는 석민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삶은 그를 지탱해줄 게 많이 있었으나 기억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았다.

“더 할 말 있어?”

혹시 몰라 석민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고 한솔 역시 전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까 이 주변 악귀를 다 먹어치운다는 거 박정한이에요. 말하지 않으면 다른 귀신으로 착각할 것 같아서.”
“언제나 내 옆에 붙어 다닌다고 바쁜데 그럴 수가 있어?”
“물리적인 제약이 없으니까 가능하죠.”

씻을 때도 옷 갈아입을 때도 붙어있던 정한이 유일하게 석민의 곁을 떠나는 시간이 새벽이었다. 석민은 자기가 자니까 그동안 심심해서 자리를 뜬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힘을 키우려는 이유가 뭐지?

“원하는 걸 이루려고 그러겠죠. 악귀가 왜 환생을 포기하고 이곳에 있겠어요. 하지만 박정한이 하나 모르고 있는 게 순환의 고리라는 건 단순히 현재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에요. 그걸 깨닫게 하고 얼른 환생시켜야 하는데, 형이 중요해요. 박정한은 언제나 형 곁에 있으니까.”
“나 하나도 이해 못 했어. 무슨 말이야?”
“간단하게 말해서 전생에 인연이면 현생에도 인연이고 다음 생에도 인연이라고요. 형, 민규 형과 만남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세요?”

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님들끼리 친하게 지냈으니 절대 우연일 수 없었다. 그러나 집에 불이 나 고아가 되고 민규 아버지가 석민을 보살피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어야 했다. 그것도 운명이 정해놓은 필연이라면 가혹했다. 석민은 씁쓸해진 입안에 주먹만 꽉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했다.

“박정한도 환생해야 해요. 고리가 하나라도 빠지면 그와 관련된 다른 이들에게도 모두 영향을 줘요. 그걸 박정한이 모르지 않을 텐데, 어떠한 욕망 때문에 형 곁을 떠나지 않고 있죠. 저는 그게 형이라고 봐요.”
“그, 그러고 보니 환생하지 않은 이유를 내가 알 거라고 했어. 하지만 왜…? 난 걔랑 친하게 지낸 적이 없었는데.”
“친하게 지낸 적이 없다니요. 두 분 가끔 식사도 같이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착각한 거 아니야?”
“…기억이 다 돌아온 게 아니군요.”

석민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한솔의 말에 석민은 자신이 아직도 잊은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뭐 아는 게 있냐고 물어보려고 하는 그때, 민규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밥 먹어, 이 자식들아!”라고 소리쳤다. 한번 부르면 바로 튀어와야지, 또 이렇게 찾아오게 만드냐며 씩씩거리는 민규를 석민은 어영부영 따라갔다. 그러면서 갑자기 아파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가 뭘 잊고 있지? 한솔의 말대로라면 같이 밥 먹을 정도의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석민이 기억하는 정한과 자신의 추억은 자신이 어리다고 깔보거나 제대로 일하라며 다그치던 모습밖에 없었다. 혹시 한솔이 착각한 거 아닐까 싶었지만, 최 비서의 눈썰미는 믿을 수 있었다. 비록 뛰어난 눈썰미만큼 입 다무는 재능도 철저했지만.
정한을 환생시켜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식탁에 앉아 밥숟가락을 든 석민은 민규가 끓인 된장국을 한입 먹자마자 허겁지겁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먹지 않는 정한이 신경 쓰여 제대로 먹지 못하고 보낸 날이 많았다. 석민은 오랜만에 먹는 맛있는 밥상에 우선 밥부터 먹고 생각해보자며 정한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다.


*


사장님 정도면 비싼 술을 마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주방에서 남몰래 소주를 까 마시고 있던 석민은 갑작스러운 정한의 방문에 고대로 술을 뱉었다.

놀라셨어요?
왜 기척도 없이 와. 네가 귀신이니?
저 신발 끄는 소리도 냈는데. 그냥 사장님이 취하신 거 아닐까요.

정한은 석민의 옆에 놓인 소주병들을 가리켰다. 서너 병이 쭉 줄 세워 서 있었다. 석민은 언제 자신이 이만큼 마셨더라, 생각하다가 다시 소주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마시려는 순간, 정한이 석민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다 간 상해요. 지금 안주도 없잖아요.
상하는 건 내 간인데?
그래도요. 차라리 제가 대신 마실게요.

정한이 술잔을 뺏어가 마시자 석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요즘 애들이 하는 흑기사인가 뭔가 하는 거냐?
사장님 젊었을 때는 그런 거 없었나 봐요.
있었는지 없었는지 몰라. 옛날에는 술 별로 안 마셨거든.
친구가 없었던 게 아니라요? 왜요. 지금도 혼자 드시고 계시잖아요.
어른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나.
매번 본인이 어른이라고 강조하시는데 진짜 어른은 애들 앞에서 자기 조절할 줄 알아요.

정한은 아예 석민의 옆자리에 앉아 빈 술잔에 술을 따라 다시 마셨다.

술친구 없으시면 제가 해드릴까요.
…넌 내가 안 밉니?
안 그런 척 회장님이 곤란한 자리에 저를 부를 때마다 도망갈 수 있도록 도주로 만들어주는 거 다 알아요. 회사일 가지고는 겁나 뭐라 하지만 제가 못해서 그런 거니까 할 말 없고.
눈치도 빠르구나. 그 눈치를 회사 일에 좀 써라. 어째 다른 건 다 잘하면서 회사 일만 못 해.
하기 싫어서 그런가? 하하.

실없기는. 빈 잔에 술을 따르던 석민은 자신이 마시려다가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고는 정한에게 건네줬다. 정한은 그 술도 좋아하며 한 번에 다 들이켰다.

그나저나 왜 혼자서 술을 드세요?
우리가 그것까지 말해줄 친분인가.
…가족이잖아요.

가족이란 말에 이번에는 석민이 웃었다.

너와 네 어머니는 그랬을지 몰라도 우리는 아니야. 속마음을 털어놓는 순간 약점이 되는 게 우리 집안이지. 언제나 서로 물어뜯으려 난리니까.
그런데 저한테는 왜 말해주세요?
이게 속마음일 것 같니? 경고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말라고.

석민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한도 따라 일어나 석민을 부축해주려 했지만, 석민이 정한의 팔을 뿌리치며 소주병 쪽을 가리켰다.

형님을 위해 치워줄 수 있겠지? 고생해라, 아우야.

대충 손을 흔들어준 석민이 비틀비틀 방 쪽으로 걸어갔고, 정한은 석민이 방으로 들어가는 걸 쭉 지켜보다 문이 닫히자마자 석민이 썼던 잔을 들어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입을 뗀 순간, 정한은 구석에서 숨죽여 서 있던 최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


우와. 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뜬 석민은 에어컨을 틀자마자 탄식을 내뱉었다. 전에 꾸던 꿈이랑은 뭔가 좀 달랐는데, 덕분에 석민은 정한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우와. 걔 날 좋아했었구나. 누가 봐도 명백한 간접키스였다. 그것도 남몰래 즐기는. 최 비서한테 들키긴 했지만.
석민은 이 얘기를 정한에게 할까 한솔에게 할까 고민했다. 이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걸렸잖아. 어떻게 된 건데? 혼났나? 최 비서는 그런 성격 아니니까 그냥 눈 감고 넘어갔을 수도 있지. 하지만 박정한은 엄청 신경 썼을 것 같은데. 이 뒤에 박정한이 나를 어떻게 대했지? 그 전에 이거 언제 일이지?
기억도 안 나는 과거 일에 석민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그러다가 언제 옆에 왔는지 침대 옆에 쪼그려서 석민을 지켜보던 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석민이 비명을 질렀고 정한은 기분이 좋은지 하하 웃으며 석민의 옆에 앉았다.

“요새 꿈 안 꾸지 않았나. 무슨 내용이야? 악몽?”
“악몽은 아닌데…”

물어봐도 되나? 석민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슬쩍 허공을 보며 “그때 왜 술잔에 입 맞췄어요?”라고 물었다. 정한은 뜬금없는 질문에 눈만 깜빡이다 석민의 어깨를 잡아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아, 아파요!”
“기억이 나요?”

평소 정한은 석민에게 반말을 썼기에 지금은 이석민이 아닌 박석민에게 하는 말임을 알았다. 석민은 정한 역시 무의식적으로 이석민과 박석민을 분리하고 있었다는 것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빴다. 석민이 인상을 찌푸린 채 정한을 보고 있자 정한은 아차 하며 꽉 쥐었던 어깨를 놓아줬다.

“그때 그 일만 기억났어요.”
“그 뒤는요?”
“몰라요. 이것만 기억났다니까요? 그나저나 왜 저한테 존댓말을 쓰는 거예요.”
“…그렇네.”

평소대로 말투가 변한 정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라도 받은 듯한 표정에 석민은 정한을 달래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무언가 결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석민을 좋아했어요?”
“그걸 본인한테 얘기하려니까 좀 그런데.”
“저는 이석민이에요.”
“기억은 다 가지고 있잖아.”
“감정은 아니죠.”
“…예나 지금이나 덮어두고 얘기하는 거 참 좋아해. 그래. 좋아했어.”
“그럼 환생하지 않은 이유도…, 박석민 때문이에요?”
“넓게 보면 그렇지.”
“따라서 환생할 생각은 없었어요? 한솔이에게 들었어요. 전생의 인연은 현생에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그 인연이 악연인지 아닌지는 정할 수 없고. 그것까지는 설명 안 해줬나 보네.”

아. 그럴 수도 있구나. 여태까지 석민은 전생의 인연들과 다 좋은 방향으로 만났기 때문에 정한이가 환생했다면 똑같이 좋은 인연으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필연적으로 만날 수는 있다고 했지, 만남이 언제나 좋을 거라고는 장담하지 못했다. 즉, 아직 만나지 못한 전생의 인연들이 현생에는 지독한 악연이 되어 만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전생에 사이가 그렇게 좋다고 할 수 없는 박민규와 박준기 그리고 최한솔까지 이번에는 다 좋은 인연으로 만났어요. 나는 평범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환생했다면 저와 좋은 인연으로 만났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인연으로 만날 수 있는지는 모르잖아. 나는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택하고 싶지 않거든. 그리고 이제 와 환생하라고?”

집 안이 순식간에 냉기로 가득 찼다. 단순히 에어컨을 켰기 때문은 아니었다. 냉기는 정한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한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석민의 뺨을 부여잡았다. 뺨이 얼어붙을 듯했으나 놔달라고 할 수 없었다. 석민과 마주한 정한의 눈은 검은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동자는 찾아볼 수 없는 눈에 석민을 벌벌 떨기만 했다.

“너에게 나는 과거의 망령일 뿐이지. 기억이 돌아와도 난 그저 환생시켜야 할 놈일 뿐이고. 하지만 내가 왜? 네가 나 없이 웃고, 떠들고, 행복하게 살 걸 뻔히 아는데. 내가 왜?”

그냥 내 품에 있어, 석민아. 정한이 석민을 껴안으며 속삭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떠나려고 하지 마. 자꾸 그러면 다 죽여버린다? 키득키득. 정한이 키득키득 웃자 석민의 낯빛이 퍼렇게 질렸다. 귀신은 죽었기 때문에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고 한솔에게 듣긴 했지만, 최근 들어 정한의 감정변화 폭이 더 심해졌다. 예전에는 아무리 화나도 타인을 죽인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았었는데. 뭔가 많이 변했다. 석민은 어서 이 일을 한솔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혹시 너 우리 집으로 피신 오냐?”
“무, 뭐?”
“아니, 맨날 올 때마다 얼굴이 허옇게 질려 오길래. 진짜 피신하러 와? 왜. 누구한테 쫓겨? 뭐 잘못했어?”
“아니거든. 비켜, 자식아.”

부엌에서 빵을 굽던 민규가 빵 트레이를 든 채로 석민에게 다가왔고, 민규의 말에 괜히 찔린 석민은 괜히 민규에게 툴툴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한솔이의 방에 들어가려는 순간, 민규가 갓 구운 쿠키 하나를 석민의 입에 넣어줬다.

“당 보충하라고. 너 요즘 짜증 많이 늘었잖아. 당 보충하고 좀 웃어라. 예전에 이석민 어디 갔나 몰라.”

뒷말은 노래처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다시 들어간 민규는 이번에는 갓 구운 빵과 쿠키가 담긴 접시와 주스가 올려진 쟁반을 석민에게 건넸다.

“한솔이랑 뭐 그렇게 심각하게 얘기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나중에 일 다 끝나면 꼭 말해주기다. 아니면 나 섭섭해서 삐질 것임.”
“너 나이가 몇인데…, 고맙다. 짜샤.”
“알면 됐어, 짜샤.”

서로의 다리를 툭툭 치다가 민규가 먼저 부엌으로 돌아갔다. 석민은 쟁반에 비친 제 얼굴을 살폈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석민은 전보다 말라보였다. 민규 집에 온 김에 많이 먹고 가야지, 속으로 생각하던 석민은 갑자기 한솔의 방이 벌컥 열려서 그대로 쟁반을 떨굴 뻔했다.

“왜? 왜!”
“아…, 안 좋은 기운이 주변에 느껴져서. 형 왔으니 박정한이었겠네요. 그 기운.”
“지금도 옆에 있어?”
“아니요, 사라졌어요. 형 눈에도 안 보이죠.”
“응.”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따라 조심스럽게 한솔의 방으로 들어간 석민은 쟁반 먼저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혹시나 떨어트렸다가는 민규가 난리를 칠 게 뻔해서였다. 석민은 아까 먹었던 쿠키 맛이 떠올라 다시 하나 집어 먹었다. 이번에는 초콜릿 쿠키였다.

“혹시 박정한이 왜 저를 피하는지 아시나요.”
“몰라. 물어봤는데 그냥 보기 껄끄럽다고 했어. …혹시 그 일 때문인가?”

쿠키를 우물거리던 석민이 손뼉을 쳤다. 그리고는 자신이 꿨던 꿈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솔은 진지한 표정으로 석민의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일 이후로 기억이 없다니 말하는 거지만, 저는 침묵했고 박정한도 별말 하지 않았어요. 두 분 사이도 나쁘지 않아 보였고요.”
“그럼 그 일 때문은 아니네.”
“아니겠죠. 수십 년이 지나기도 했고 더는 숨는 입장이 아니니까.”

숨는 입장이 아니라고 하니 새벽 일이 떠올랐다. 석민은 이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솔직하게 모든 걸 다 얘기했다. 꿈을 꾸고 호기심이 생겨 물어봤던 것, 꿈 얘기를 하니 존댓말을 한 것, 그게 불쾌해 따졌던 것, 환생 얘기를 꺼내 봤던 것. 그리고 석민의 주변을 협박한 것. 평소처럼 묵묵히 석민의 얘기를 들어주던 한솔은 모두 다 죽여버릴 거라고 했다는 얘기에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악귀는 진짜 그럴 수 있는 거 아시죠.”
“어, 응.”
“사실 박정한 정도면 악귀라고 부르기 모호했죠. 누군가를 죽이지도 그렇다고 순환을 방해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그냥 하는 말이 아닐 거예요. 진짜로 죽일 수도 있어요.”
“그런 사람 아니었지 않아?”
“악귀는 대부분 다 미쳐있어요. 분노에. 욕망에. 그리고 집착에. 예전 박정한이 유별났던 것뿐이에요.”

말 그대로 요즘 정한은 이상했다. 기분 변화가 심한 건 기본이고 석민을 대하는 태도도 오락가락했다. 석민은 어제 정한에게 붙잡혀 멍이 든 어깨를 꾹 눌렀다. 저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통제할 방법은 있어?”
“없어요.”
“강제로 환생시키는 방법은?”
“없어요.”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해?”
“계속 얘기해볼 수밖에 없어요.”
“자꾸 그러면 너희를 죽일 수도 있는데? 너도 박정한은 못 막는다며.”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실타래를 받은 기분이었다. 석민은 답답함에 주스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러다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고 한솔이 준 휴지로 얼른 입가를 닦았다.

“딱 하나 있어요. 형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뭔데?”
“고백이요. 다음 생에서 너를 사랑하겠다는.”

그게 무슨 방법이야? 입을 쩍 벌린 채 한솔을 보던 석민은 한숨만 푹 내쉬었다. 정한은 석민을 사랑했다. 환생을 포기한 것도 오로지 석민 곁에 있고자 함이었다. 그런 정한의 사랑이 석민은 싫지 않았지만, 딱 그뿐이었다. 고백해오면 고맙지만 사귀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둘러댈 수 있는 정도의 감정이었다. 무엇보다 석민은 이석민이었다. 정한이 사랑하는 박석민이 아니었다. 기억이 있다고 해도 전부가 있는 건 아니었고 박석민의 감정을 느꼈다고 해도 이석민의 감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석민은 박석민의 감정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상황을 들은 한솔이 과거의 박석민과 현재의 이석민이 제대로 융합되지 않아 그렇다고 설명 해줬으나 석민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난데 왜 내가 아닌 전생을 받아드려야 해?

“고백은 아닌 것 같아. 남 속이는 일 하고 싶지 않아.”
“다음 생에 맡기면 돼요. 다음 생은 지금의 이석민이 아니잖아요.”
“어쨌든 나 때문에 미래의 내가 피해를 볼 수도 있잖아.”
“미래의 형이 아니라 다음 생의 형이라니까요. 박석민이 형의 과거가 아니듯.”

맞았다. 다음 생의 석민은 ‘이석민’이 아니었다. 그건 석민도 정한에게 매번 말했던 문제였다. 자신은 ‘박석민’이 아닌 ‘이석민’이라고. 그러나 정말 무 자르듯 자를 수 있을까? 여태까지 석민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한솔의 말에 그럴 수 없다고 생각을 바꿨다. 현재 내가 편해지자고 다음 생의 나에게 모든 걸 미뤄버리는 짓은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환경도 생각도 다 바뀌어도 그건 자신이었으니까. 미뤄서 고통받는 건 현재 자신의 선에서 끊어내야 했다.

“이번 생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그것밖에 없어?”
“제가 아는 건 이게 다예요. 다른 방법이 있다면 형한테 있겠죠. 대체 박정한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형은 알겠죠.”

그렇게 말하며 한솔은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갓 구운 빵이 너무 뜨거웠는지 퍼덕거리는 한솔에게 석민이 주스를 쥐여줬다. 빠르게 주스를 마시고 시원한 숨을 뱉는 한솔을 보고 석민은 어떻게 최 비서의 환생이 이렇지 싶었다. 언제나 각이 서 있는 최 비서와 다르게 한솔은 편안한 복장과 행동을 추구했다. 심지어 지금 입고 있는 복장도 무지개색이었다. 최 비서는 정장 입은 모습밖에 못 본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전생을 받아들였어?”
“그냥 뭐, 전생을 보니까 후회가 많길래요. 그리고 지금이라면 후회하던 걸 하나하나 갚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았고.”

빵을 후후 불던 한솔은 다 식은 빵을 앙 하고 먹으며 대답했다. 석민도 빵을 하나 집어 후후 불다가 조심스럽게 뜯어 먹었다. 나도 전생에 후회 많은 사람이었나. 박석민은 후회보다는 분노가 많은 사람이었다. 살고 싶다는 집념도 강해 자신의 감정을 돌보는 것보다 생존 방법 먼저 갈고 닦으며 익혔다.
그래서 박석민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걸까. 나와 너무 달라서. 당장 최 비서를 향한 박석민의 감정과 최한솔을 향한 이석민의 감정도 정반대였기에 석민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


춥지 않아요? 음…, 덥지 않으냐고 물어봐야 하나.

사장실로 들어온 정한은 맨 처음 사장실 온도에 한번 놀랬다가 더운 날에도 목까지 잠글 수 있는 긴소매를 입고 있는 석민을 보고 경악했다. 차라리 옷을 벗으면 되지 왜 이러고 자고 있나. 사장실에 배치된 소파에 누워 낮잠 자는 석민은 정한이 옆에서 아무리 조잘거려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팔이라도 거둬주자. 정한은 들고 온 서류를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석민의 셔츠 팔 부분을 접어 올렸다. 그러자 얼룩덜룩한 피부가 보였다. 마치 뜨거운 거로 지진 듯한 상처였다. 오래됐는지 연한 상처였지만, 팔만 조금 거뒀음에도 상처가 가득하다는 것에 정한은 제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게 대체 뭐지. 왜 이런 상처가 있을까. 있는 거 하나 없이 살아온 자신도 피부에 상처 하나 없는데 평생 다 가지고 살았을 사람이 왜 이런 상처를 달고 있을까.
떨리는 손으로 석민의 팔을 더듬던 정한은 여전히 잠에 빠진 석민을 흔들어 깨웠다. 놀란 석민이 크게 움찔했고 자신을 깨운 게 정한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했으며, 팔이 거둬져 있다는 사실에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이랬어?
너무 더워 보여서…, 그나저나 대체 어쩌다 난 상처들이에요? 팔만 그래요?
알아서 뭣하게.

석민은 접힌 소매를 풀고 단추까지 꽉 채운 뒤 그대로 뒤돌아 누웠다. 좀 더 잘 거니까 서류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가라는 지시에도 정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린놈이 고집하고는. 석민은 혀를 차며 어릴 때 난 상처라고 답했다.

자연적으로 난 상처는 아닌 것 같은데요. 누가 인위적으로…
그렇게 보이니? 그럼 바로 알 만하지 않아? 어린 나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 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니.

알았으면 이제 그만 가라. 석민은 귀찮은 듯 손만 뒤로 휘저었다. 그러나 정한은 석민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잡았을 뿐, 어디론가 가지는 않았다. 진짜 귀찮아 죽겠네. 석민이 뭐라 한소리 하려던 찰나, 정한이 가볍게 손끝에 입을 맞췄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다 하나같이 미쳤네.
…안타까워서 그랬어요.
어린놈이 어른한테 동정심 품는 거 아니다.
매번 어리다, 어리다 하시는데 혹시 그게 선 긋는 거예요?

진짜 어리니까 그렇게 말하는 건데. 별소리를 다 한다 생각했으나 석민은 정한의 착각을 바꿔 줄 마음이 없었다. 정한은 석민에게 너무 많은 정을 줬다. 석민이 정한에게 큰 애정을 베푼 적이 없음에도 막 알에서 깨어난 새끼오리처럼 석민을 따랐다. 이 상황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불필요할 뿐이었다.

유언장 때문에 최근 회장님과 싸우셨다고 들었어요. 혹시 어떻게 할 계획이 있으신가요? 있다면 저도…
네 어머니가 달려 있는데 그렇게 막, 말할 수 있어? 내가 실패하면. 네 어머니는 끝인데?

석민은 정한의 손에서 제 손을 뿌리치듯 빼냈다. 그리고 잘 거니까 어서 나가보라고 소리 질렀다. 정한은 그제야 사장실을 떠났다. 그러고 보니 윤정한 어머니는 잘 계신가. 전 닥터한테 한번 물어볼까. 석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꼬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전 닥터는 정한의 어머니가 이미 죽었다고 말해줬다. 회장님의 명령으로 함구하고 있을 뿐이라며. 박석민은 전 닥터에게 회장님과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절대 윤정한 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것. 이유는 달랐다. 회장님은 윤정한을 계속 이용하기 위해. 박석민은 제 계획 전에 윤정한이 미쳐 날뛸까 봐. 날뛰면 피곤해지니까.

“에이, 시발.”

침대 위에 쪼그려 앉은 석민이 욕을 뱉었다. 꿈에서 깨어난 석민은 누운 상태로 훌쩍거리다 앉은 상태로 몸을 바꾸고는 또 울었다. 그러다 보니 석민의 얼굴은 퉁퉁 불어 있었다. 석민은 벌겋게 변한 눈두덩이를 다시 문질렀다. 한참을 닦아내도 계속 눈물이 나왔다.
박석민은 정한의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제 상처를 보고 입을 맞춰준 건 처음이라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전 닥터에게 정한의 어머니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도 심장이 뛰었다. 귀찮아서 그런 거라고 자신을 속였으나 그때 석민은 회장님의 눈 밖에 나 처참하게 버려질 정한을 걱정하고 있었다.
억울해. 석민은 지금 자기 상황이 너무 어이없고 웃음도 안 나왔다. 석민은 울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날 상황도 아니었다. 정한이 외면받는 건 꽤 마음 아픈 일이었으나 그게 울 정도냐고 물으면 절대 아니었다. 그런 석민이 울고 있는 건 다 ‘박석민’ 때문이었다. 그때 외면하고 묵혀뒀던 박석민의 생각과 감정이 이석민에게 그대로 옮겨졌고 석민은 제가 벌인 짓이 아님에도 슬피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왜 그렇게 말을 해애…”

아이고, 억울해. 너는 울지도 않았으면서 왜 내가 울어야 해. 그때 그냥 솔직해지지. 왜 지금 와서 슬퍼해. 왜 그때는 그러지 못했을까, 결국 그렇게 다 죽을 거였으면 말이라도 해볼 걸 하고 왜 후회해 이제 와서. 석민은 눈을 벅벅 닦다가 못해 베개로 얼굴을 막았다. 흐어어어엉. 베개에 막혀 울음소리가 석민에게만 들렸다. 석민은 이것마저도 억울해 발로 이불을 찼다가 슬쩍 다시 주워 올렸다.
역시 이거 못 할 짓이다. 정한과의 문제는 여기서 끊어야 한다. 다음 생의 내가 고생하는 꼴 못 보겠다. 화장실로 가 대충 얼굴을 씻은 석민은 비척비척 다시 침대로 갔다. 거기에는 아까는 없었던 정한이 앉아 있었다. 정한은 석민의 얼굴이 퉁퉁 부은 걸 보고 뭐 혹시 누구한테 맞았냐며 양손으로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살폈다. 박석민의 기억 속 윤정한과 똑같은 행동에 석민은 또 주르륵 울었다.

“왜 이래? 어디 아파?”
“…슬픈 영화를 봐서.”
“뭐? 뭔…. 박석민일 때는 바늘에 찔려도 안 울 것 같이 굴었으면서 지금은 완전 울보네.”

그렇게 말한 정한은 석민을 꼭 안아줬다. 그만 울어. 당신은 우는 것보다 웃는 게 훨씬 좋아. 정한의 다정한 속삭임에 석민은 더 크게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 없었다. 정한의 등을 감쌌던 석민의 손이 축축했다. 분명 화장실에서 나올 때 손을 닦고 나왔으므로 물기는 아니었다. 석민은 희미하게 들어오는 달빛에 내 손을 확인했다. 검붉은 것. 그것은 피였다. 정한은 귀신이라 다칠 일이 없었으니 이것은 필시 산 사람의 피였다.

“…뭐 하고 온 거야?”

정한은 석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무슨 뜻이냐고 되묻다가 얼마 안 있어 웃음을 터트렸다.

“뭐하고 왔긴. 주변 정리 좀 하고 왔지. 걱정하지 마. 그 사람들 아니야. 그냥 길에서 담배를 피우길래. 꼴 보기 싫어서. 아마 죽지는 않았을걸?”

키득키득. 정한은 또 그렇게 웃었다. 석민은 아까까지 애틋했던 정한이 무서웠다. 맨 처음 정한을 봤을 때와 비교하면 정한은 매우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


악귀화가 되어가고 있다. 원래부터 악귀였던 자를 그렇게 설명해도 되는지 혼란스러웠지만, 지금 정한의 상태는 그 말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복수에는 관심 없던 정한은 호시탐탐 민규와 민규 아버지를 죽이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 중 불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면 공격하려 들고 자신과 비슷한 악귀가 주변에 있으면 찾아가 먹어치웠다. 정한의 외모도 조금씩 변했는데,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에는 푸른 실핏줄이 돋아났고 눈동자는 절반 이상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석민은 제발 더 변하기 전에 정한에게 환생하자고 애원했으나 정한은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정말 미쳤구나. 석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정한을 곁눈질했다. 혹시나 해 외출하지 않은 지도 며칠째였다. 미쳐버린 정한은 언제나 석민의 옆에 있었고 그건 밤에도 같았다. 석민은 타인을 위해 스스로 가둬두는 걸 선택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한솔에게는 정한의 상태를 문자로 보내둔 상황이었다. 정한을 막을 준비를 해두라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한참 정한을 노려보던 석민은 제 눈이 뻑뻑해짐을 느끼고는 연신 눈을 비볐다. 그러자 정한이 콧노래 부르는 걸 멈추고 석민의 손을 잡아 내렸다.

“다쳐.”

오랜만에 들어본 정한의 목소리였다. 잔뜩 다 갈라져 남이 들으면 겁먹었을 목소리였지만, 석민은 한없이 반갑기만 했다.

“졸려?”

석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은 석민이 제 다리를 베고 눕도록 도왔다. 석민이 엉거주춤 눕자 정한이 석민의 어깨를 천천히 도닥였다.

“자. 어디 가지 않을게.”


*


회장님의 주최로 모임이 생겼다. 거기에는 석민과 정한을 포함한 박씨 일가와 관련된 모두가 모였다. 대외적으로 정한과 별다른 교류가 없었기에 석민은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자리를 떴다. 오늘이었다. 유언장을 바꾸고 회장님을 암살할 날이.
만만의 준비를 해놨지만 실패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기에 석민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빈방을 찾아 헤맸다. 계획 전에 잠시라도 쉬고 싶었다. 한참 펜션을 두리번거리던 석민은 드디어 아무도 없는 빈방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석민이 눕기에 딱 좋은 소파도 있었다. 석민이 소파에 누우려고 할 때, 누군가가 석민에게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니 정한이었다.

왜.

정한은 꾹 입을 다문 채 석민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석민은 혹시 저놈이 어머니의 소식을 듣기라도 한 건가 싶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만약 왜 소식을 숨겼냐고 따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최대한 자연스러운 말을 다듬고 있었다.

결혼… 하신다면서요.
내가?
네. 회장님께 들었어요.
내가? …허. 또 자기 멋대로 상대를 골라놨나 보네.

시큰둥한 석민의 반응에 정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만 해도 부루퉁한 얼굴에 빛이 생겼고 석민은 읽기 쉬운 정한의 애정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좋아해야 할지 정신 차리라고 꾸짖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럼 결혼 안 하시는 건가요?
아마 그러지 싶다.
왜요?
너도 알잖니. 나는 하자 있는 몸이다.
…말을 왜 그렇게 하세요. 몸에 상처 있는 게 뭐가 어때서.
그렇지. 하지만 이쪽 세상은 그렇게 생각 안 하더라.

석민은 끼고 있던 안경을 벗어 품에서 안경 닦기를 꺼내 닦았다. 아까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 먼지가 묻은 듯했다. 하- 하- 입김을 불어 부드럽게 안경알을 닦던 석민은 어느새 제 앞으로 온 정한의 구두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렇구나.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요.
그래. 정한아. 알고 있다.

정한은 쉽게 뒷말을 잇지 못했다. 뭐가 그리 어려워 끙끙댈까. 석민은 안경을 높게 들여 빛을 비춰 남은 먼지가 없는지 확인한 뒤 다시 안경을 썼다.

정한아. 만약 회장님이 죽으면 어떻게 할 거니.
…갑자기요?
연세가 있으시니까.
아마 엄마랑 같이 살지 싶은데…
어디에서?
엄마 몸이 약하니까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 좋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곳 내가 아는데. 그 집 너 줄까?
저한테요? 갑자기 왜…
그냥 주고 싶어서. 거기서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그 사람과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애 싫으면 둘이서 살아도 되고.
사장님, 저는.
소유도 아예 네 쪽으로 넘겨줄까 싶다. 그럼 그 집에서 자유롭게 사는 거지.

친절은 거절이기도 했다. 너와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는. 영특한 정한은 석민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바로 알아챘고 고개만 푹 숙였다. 곤란할 때마다 나오는 정한의 습관이었다.

형. 그래도 형이 준 집이니까 가끔은 와서 둘러봐 주면 안 될까요?
그래. 가끔 찾아갈게.
제가 있을 때 와주세요.
그래. 네가 있을 때.


*


정한은 지루했다. 왜 자기가 이 펜션에 묶여 이러고 있는지.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욕심에 미쳐 사는 박태산도 지긋지긋했고 분명 원하는 게 있으니까 여기에 묶인 걸 텐데. 정한은 그 이유를 몰랐다.

거기 누구 있어요?

오늘은 이곳에 산 사람이 들어왔기에 정한은 박태산을 평소보다 더 쥐어 잡았다. 괜히 박태산이 산 자를 죽여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였다. 이렇게 잡고 휘두르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십 년이니 지겨웠으나 정한은 박태산 잡기를 멈추지 않았다. 억울하게 죽는 일은 없어야 했다. 자기처럼.

거기… 누구예요?

박태산을 잡는다고 정작 제 몸을 감출 생각은 못 한 정한은 이대로 도망칠까 하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수십 년 전 끊겼던 그 목소리.
구름이 사라지고 달이 뜨자 정한은 앞에 있는 사람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정한이 기억하고 있는 석민보다 이십 년은 어려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아. 가끔 찾아온다더니. 이제야 찾아왔구나. 한 삶을 뛰어넘어 드디어. 정한은 석민으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리웠던 온기. 정한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석민이었다.


*


헉!
석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은 평소에 꾸는 꿈처럼 진행되다가 갑자기 석민의 기억에는 없는 일들이 재현됐다. 석민은 지금의 자신과 정한이 처음 만났을 때 일임을 알았다.
그때 정한은 그런 감정을 품었구나. 내가 흘러가듯 한 약속 하나 믿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이 아닌 습하고 어두컴컴한 곳을 집 삼아 머물며 기다리고 있었구나.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채로.
석민은 연신 마른세수를 하며 계속해서 멍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정한의 다리를 베고 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윤정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정한은 석민을 혼자 둔 채 어디론가 훌쩍 떠난 상태였다. 왜 몰랐지? 당황한 석민이 폰을 키자마자 한솔의 이름으로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와 있는 걸 확인했다. 석민은 전화를 걸어보지도 않고 집을 나섰다. 걸어 볼 필요도 없었다. 한솔이 저렇게 다급하게 석민을 찾는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


민규의 집 앞에 도착하니 석민의 입에서 입김이 저절로 나왔다. 더운 날에 입김이라니. 석민은 덜덜 떨며 민규 집 문을 열어젖혔다. 팔찌가 없어 전처럼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옛날 박태산의 몸을 이뤘던 것들이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것 말고도 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귀신들이 오물처럼 바닥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부적을 태운 흔적도 있는 것 보아 집 안에서 일이 터진 듯했다.
석민은 정한의 이름을 부르며 이곳저곳 문을 다 열어보다 민규 아버지 방을 딱 열자마자 제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민규 아버지와 민규는 이미 바닥을 구르며 피를 토하고 있었고 한솔은 정한의 손에 목이 잡힌 채 가파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윤정한! 정신 차려! 왜 이러는 거야.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했잖아!”

석민이 정한의 손에 매달렸다. 그러나 정한의 손은 펴질 줄 몰랐고 한솔은 점점 숨이 막히는 듯 컥컥거렸다.
이러다가 정한이 모두를 죽이고 환생도 평생 못하는 채로 미쳐 날뛰다가 사라지는 걸까. 최악의 미래가 자꾸 눈앞에 그려지자 석민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부적이 감긴 칼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석민이 그걸 줍자 내내 석민을 무시했던 정한의 고개가 석민 쪽으로 돌아갔고 동시에 팔에 들어가던 힘이 풀렸는지 한솔이 잔뜩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박태산! 박정한 몸에 아직 박태산의 흔적이 남아있어! 어서 찔러! 어차피 박정한은 안 죽어!”

정한이 한솔을 벽 쪽으로 던지며 석민에게 달려들었다. 석민은 한솔을 걱정할 새도 없이 저에게 달려오는 정한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칼은 정확히 정한의 목을 통과했으나 잠시 주춤할 뿐, 정한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왜, 왜 이래? 이러면 된다며!”

석민은 한솔이 대답해주기를 바랐으나 한솔은 숨 내쉬기에도 고작인지 팔만 움찔거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석민은 두려움에 가득 찬 상태로 다시 칼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정한이 검붉은 손가락들을 토해냈다. 박태산의 흔적이 이거인가 싶은 석민이 칼을 휘두르려고 하자 정한이 석민을 막았다.

“내 힘이야.”
“뭐? 그게 어떻게 네 힘이야?”
“이게 있어야 해. 이게 있어야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어.”

마이너스 마이너스는 플러스. 박태산은 정한에게 하등 쓸모없는 존재였다. 석민은 꿈을 통해 정한이 박태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었고 그렇기에 정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정한이 평생 증오했다면 증오했을 사람은 박태산이었고 그런 박태산을 집어삼킬 정도로 사랑한 것은 석민이었다.

“먹지 마. 그거 때문에 미쳐가고 있잖아.”
“그게 뭐가 문젠데?”

정한이 키득키득 웃었다. 박태산의 흔적이 빠져나왔음에도 정한은 소름 돋게 웃었다. 석민은 그걸 보고 아, 정한의 의식 역시 악귀가 되었구나. 하고 탄식했다.

“원래 그러지 않았잖아. 정한아.”

석민은 정한의 앞에 무릎 꿇고 주저앉아있는 정한과 시선을 맞췄다. 경우 정신 차린 한솔이 위험하다고 외쳤으나 석민은 피하지 않았다.

“가끔은 찾아가겠다는 말, 취소하고 싶어.”
“…왜?”
“그거 말고 다른 약속 해주고 싶어.”

박태산이 빠져나간 정한은 석민의 생기를 순식간에 빼앗아갔다. 그 증거로 석민의 손이 정한에게 닿자 파사삭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놀란 정한이 석민에게서 떨어졌고 석민은 그만큼 정한에게 다가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때 너한테 말 못 한 게 있었어. 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 나도 알고 있었어. 그러나 숨겼지.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네가 계획에 방해될까 봐 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어. 네가 박태산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 그 사람은 그러고도 남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것도 변명이지.”
“…”
“나도 꽤 너를 좋아했어. 그걸 한 삶을 건너뛰어 말하는구나.”

석민의 볼이 정한의 어깨에 닿았다. 그러자 석민이 볼도 파사삭 소리 내며 사라졌다.

“난 네가 윤회의 굴레를 선택했으면 해. 이건 박석민이자 이석민의 소원이야.”
“…”
“저번 삶에서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았으니까 이번 삶을 줄게.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하자. 새 삶에서 새롭게.”

정한을 가볍게 밀친 석민은 칼을 정한에게 휘두르는 대신 자신을 찔렀다. 정한이 급히 석민을 잡았을 때는 이미 석민의 몸에서 많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석민의 피를 그대로 덮어쓴 정한의 눈이 점점 원래대로 돌아왔다. 피부도 외모도 생기있던 시절 그대로 돌아왔고 그러자 맞닿아있는 석민의 몸이 더는 가루가 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한솔이에게 미안하네. 해결해달라고 나 불렀을 텐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석민은 비통한 표정을 한 채 곁으로 다가온 한솔을 보고 힘겹게 웃었다. 이걸 원한 게 아니었어. 한솔이 주저앉아 울자 석민은 자신이 선택한 거니 괜찮다고 다독였다.

“한솔아. 부탁이 있어.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무 얘기 하지 말아줘. 기왕이면 내 흔적도 지워주면 더 좋고.”
“…전생에서 평생 후회했던 일을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침묵과 뒷정리. 최 비서가 평생 해오던 것들. 한솔은 점점 숨이 끊기는 석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석민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긴 숨을 내쉬고는 자신을 꼭 껴안은 채 우는 정한에게 말했다.

“또 먼저 가서 미안해.”

그 말을 끝으로 석민은 더는 숨 쉬지 않았다. 정한은 석민의 두 눈을 감겨준 뒤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고는 퀭한 얼굴로 한솔을 바라봤다.

“그때. 술잔 때. 제 행동을 보고도 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나요.”
“제가 할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딱딱한 대답에 피식피식 웃던 정한의 몸이 조금씩 가루가 되어갔다. 가루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 창문을 넘어 높은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정한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럼 알아서 잘해주세요. …부탁할게요.”

한솔이 대답하기 전에 정한의 몸은 완전히 분해되어 사라졌다. 정한이 떠나자 꿈틀거리던 박태산의 흔적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솔은 품에서 부적을 꺼내 가지런히 누워있는 석민의 몸 위에 올려뒀다.

“어떤 형태로 만날지 모르지만, 우리 다음 생에 또 만나요. …형.”

부적이 불타며 석민의 몸도 함께 타올랐다. 그 불길은 석민의 몸만 태우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한솔은 재가 된 석민을 모아 손에 담아 집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재는 한솔을 가볍게 한 바퀴 돌더니 천천히 사라졌다.
구름이 걷히고 달이 보였다. 한솔은 여전히 쓰러져 있을 민규와 민규 아버지를 위해 정리를 시작했다.


*


최근 들어 민규는 운이 좋았다. 심심풀이로 산 로또가 당첨되거나 운 좋게 좋은 가격으로 나온 주택을 구매하거나. 이렇게 큰 것 외에도 자잘하게 운이 따라오던 민규는 오늘로써 자신의 운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트럭이 민규의 차를 간발의 차로 지나쳐 민규의 앞에 서 있던 차를 그대로 들이박은 거였다. 민규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사고가 난 차량 쪽으로 다가갔다. 이 정도 사고면 즉사였다. 실제로 민규의 추측이 맞았는지 앞 좌석에 탄 사람들은 축 늘어져 있었다.
빨리 119에 신고해야겠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119를 누를 때, 차 안에서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애? 민규는 폰도 집어던지고 뒷좌석을 확인했다. 아이가 차 시트 밑에 떨어져 울고 있었다. 차가 박살 나면서 아이가 있는 쪽은 다행히도 피해간 듯했다. 민규는 아이라도 얼른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있는 힘껏 차 문을 열어 재치고 아이를 꺼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이를 얼굴을 마주한 순간,

“이석민?”

민규는 익숙한 얼굴에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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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타 버리고 남은 재 한 줌이여
방주를 새롭게 지어 나아가 저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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