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elst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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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JH&DK Collaboration

부서진 고리
쓰계
* 고잉 세븐틴 '배드클루'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수위가 높지는 않으나 '배드클루' 세계관이 반영된 만큼 고어, 학대, 근친, 트라우마와 같은 트리거 워닝이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고 열람해주시길 바랍니다.

* 추가로 사람에 따라 공포를 느낄 수 있는 묘사 역시 포함되어 있으니 이 점 역시 주의하시어 열람 부탁드립니다.

* 글 읽는 순서는 부서진 고리 > 고리의 순환 > 단락 > 원환 입니다.




1




구름이 많은 밤이었다. 석민은 다리 위를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한참을 걷기만 하던 석민은 문득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아래에서는 물소리만 들렸다. 석민이 몸을 일으키려는 그때, 아래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석민은 아까보다 좀 더 몸을 숙여 아래를 살폈다. 홀로 반짝이던 것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반딧불처럼 보였으나 점점 뚜렷해지는 것이 반딧불은 아니었다.
아래로 내려가면 알아볼 수 있을까. 석민이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계속 수가 늘어나던 그것은 자기들끼리 뭉치더니 하나의 덩어리가 됐다. 아까보다 더 밝아졌고 더 기괴해진 모습에 석민은 난간에서 황급히 떨어졌다. 그러자 그것이 물에서 튀어 올랐고 석민의 팔을 낚아챘다. 그제야 석민은 그것의 형체를 똑바로 살펴볼 수 있었다. 그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렇거나 시뻘건 촛농으로 뒤덮여있었다.
놀란 석민이 숨도 제대로 뱉지 못할 때, 그것은 석민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석민은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마치 석민이 물에 빠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덩어리져 있던 그것들은 하나하나 조각나더니 석민에게 달려들었다. 석민은 이대로 죽는 걸까 싶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이 지났다. 살이 찢기는 소리도, 비명도 없었다. 대신 누군가가 석민을 물 밖으로 끌어냈다. 이상함을 느낀 석민이 천천히 눈을 뜨자 처음 보는 사람이 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면 피했어야지.”
“…네?”

석민은 자신을 도와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흐린 날씨 탓에 형체만 겨우 파악할 수 있었다. 석민은 덜덜 떨리는 양손을 마주 잡고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는 석민의 인사에 대답 대신 석민에게 다가갔다.

“석민아, 저기 좀 봐.”

그는 몸을 숙여 물 쪽을 손가락질했다. 석민은 무언가 홀린 사람처럼 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하늘이 맑아졌다. 석민은 아까 자신을 해치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니, 그것들은 실지렁이 군단처럼 하나로 뭉쳐 알 수 없는 소리를 뱉으며 꿈틀거리고 있었고 군단에 속하지 못한 몇몇은 물 밖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석민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그는 석민이 더는 뒤로 도망가지 못하게 어깨를 꽉 잡고 속삭였다. 자세히 봐. 어떻게 생겼는지. 저들이 왜 너를 죽이려고 했는지.


*


“…꿈이구나.”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석민은 가쁜 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물에 빠졌던 일. 끔찍한 몰골의 물귀신을 봤던 일. 누군가가 도와줬던 일.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 모든 것이 다 꿈이었다는 생각에 석민은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다 주저앉았다. 꿈에서 봤던 시뻘겋고 시퍼런 것이 떠올라서였다. 온몸에 촛농을 뒤덮은 채 괴성을 지르는 모습이 생생했다. 석민은 끔찍한 광경을 잊으려 머리를 때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몸이 축축하다는 걸 깨달았다. 식은땀이라도 흘렸나 싶어 몸을 살피던 석민은 발밑을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갓 물에서 나온 사람처럼 석민의 발밑에는 물이 흥건했다.


*


꿈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꿈일 수 없었다. 그날 석민은 동기인 민규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 민규가 잠시 자리를 떠났을 때, 술을 잔뜩 마신 석민의 기억은 끊겼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집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채로.
석민은 폰에 잔뜩 쌓인 민규의 연락을 보고 긴 한숨을 쉬었다. 뭐라 답장해야 좋을지 몰라 대충 미안하다는 말로만 둘러댄 상태였다. 그 뒤로 민규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꼬치꼬치 캐물을 민규의 성격을 알기에 석민은 계속해서 한숨만 쉬었다. 뭐라고 말은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사실대로 말할까? 그런데 믿어줄까? 이 일을? 본인조차 믿기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나 고민하던 석민은 오늘 시간표가 어떻게 되더라 수업 다 끝나고 연락해봐야 하나 곱씹으며 남자 화장실 문을 열었다. 한참 강의시간이라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석민은 혹시나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칸마다 확인 후 아무도 없는 걸 알자마자 팔에 붙여둔 파스를 떼어냈다. 팔 한쪽을 빙 둘러 붙인 파스를 떼니 사람 손 모양으로 시퍼렇게 든 멍이 보였다. 석민은 집에서보다 색이 진해진 멍을 매만지다가 거울에 비친 사람 형상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너 오늘 수업 있었어?”
“오냐, 있었다. 그것도 너랑 같은 수업. 그나저나 이석민! 전화 받고 돌아오니까 사라졌길래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전화도 안 받고. 자취방 찾아가니까 거기에도 없는 것 같고. 얼마나 놀랐는데! 문 쪽에 서서 한참을 투덜거리던 민규는 석민의 팔을 보자마자 빽 소리 질렀다. 석민은 다시 파스를 발라 멍을 숨기려고 했으나 한번 떼어낸 파스는 다시 붙지 않았다.

“누구랑 싸웠어?”
“아니.”
“그럼 뭔데? 어? 다쳤어? 아니지? 이게 어떻게 다친 모양이야. 사람 손자국인데! 싸운 거 맞지?”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대체 뭔데? 싸운 거 맞지? 나 잠깐 나간 사이에 시비라도 붙었어? 아니, 평소에 싸움 한번 안 하는 애가 뭔 싸움이야, 싸움을! 누구야! 우리 학교 애야? 선배? 후배? 처음 보는 사람이야?”

쉴 틈 없는 심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진 석민은 자신도 모르게 “이래서 오늘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을 내뱉었고 급히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민규는 석민의 반대편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야, 아파!”
“미친. 거기도 맞았어?”

민규가 황급히 손목을 놓자 석민은 맞은 것도 싸운 것도 아니라며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그럼 대체 뭐냐는 민규의 질문에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석민이 눈만 도르륵 굴리자 민규는 석민을 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자.”
“어, 어딜. 어딜 가? 나 맞은 거 아니라니까?”
“알겠다고. 맞은 거 아니니까 왜 그렇게 됐는지 들어나 보자고.”

민규는 석민의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다 석민의 옷을 잡고 끌어당겼다. 마치 따라오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옷을 찢을 것 같은 모습에 석민은 가기 싫다고 꿍얼거리면서도 민규가 잡아끄는 대로 따라갔다.


*


민규와 석민이 도착한 곳은 민규의 집이었다. 카페 아니면 술집이라도 갈 거라고 생각했던 석민은 뜬금없는 장소에 들어갈 생각은 못 하고 눈만 끔뻑였다.

“왜 우리 집 처음 온 사람처럼 구냐?”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이런 때는 보통 카페를 가지 않냐?”
“저번처럼 사라질까 봐 그런다, 왜?”

어서 들어오기나 하라는 민규의 투덜거림에 석민은 순순히 안으로 들어갔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석민은 민규를 술집에 두고 간 빚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석민은 화난 민규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니 거실에는 민규의 아버지와 한솔이 앉아있었다. 한솔은 민규의 사촌 동생인데, 어릴 때부터 민규 집에 자주 놀러 와 민규와 소꿉친구였던 석민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민규는 벌써 집에 돌아오냐는 아버지에게 석민을 가리키며 “얘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 방에서 조용히 얘기할게요.”라고 설명했다. 석민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둘에게 인사하며 앞서가는 민규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넌 왜 들어와?”

석민이 방문을 닫으려는 순간, 거실에 있어야 할 한솔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무리 사촌지간이라고 해도 각자 지켜야 할 선은 단 한 번도 넘은 적 없던 한솔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한솔은 나가 달라는 민규의 말에도 꿋꿋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한솔의 알 수 없는 고집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민규는 혼자서 “오케이, 좋아. 생각이 있겠지.” 중얼거리더니 석민에게 침대에 앉으라고 명령했다.

“이제 말해봐. 무슨 일 있었는지. 아주 상세하게.”

쟤 왜 안 내보내? 순순히 침대에 앉은 석민은 한솔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봤지만, 민규도 한솔도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에 고개를 푹 숙였다. 이를 어쩌지? 석민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직접 일을 겪은 자신도 아직 꿈 같은 일인데, 하나도 아닌 둘에게 동시에 말할 자신이 없었다. 말해도 믿어줄지 모르고. 그냥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싸웠다고 둘러댈 걸 속으로 후회하던 석민은 침대 아래에 튀어나온 무언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벌레인 줄 알고 황급히 발을 들어 올렸던 석민은 자신의 발을 따라 침대를 기어오르려는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촛농이 덕지덕지 붙은 손가락이었기 때문이었다.

“형도 보여요?”

갑작스러운 석민의 반응에 한솔이 질문했다. 한솔은 석민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빛바랜 종이 한 장을 꺼내 손가락을 감쌌다. 한참 꿈틀거리던 손가락은 한솔의 손안에서 점차 움직임을 잃더니 나중에는 종이와 함께 사라졌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석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솔을 바라보자 내내 아무 말 않던 민규가 한숨을 쉬었다.

“내 주변은 왜 다 이렇냐.”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석민의 표정에 민규는 턱짓으로 한솔을 가리켰다.

“한솔이 무당이잖아.”
“언제부터?”
“우리 집에서 같이 살게 됐을 때부터.”

한솔은 몇 달 전부터 민규네에서 지냈다. 원래 머물던 집도,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민규와 함께 살게 된 것이 석민은 이상했으나 굳이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사람마다 설명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하나쯤은 있겠지 싶어서였다.
그냥 안 좋은 일이 있어서겠거니 생각은 했었는데, 무당이라니? 석민은 상상도 못 한 대답에 두 눈만 끔뻑였다.

“어, 어떻게 무당이 된 거야?”
“귀신이 보여서요.”
“그, 그럼 나도 무당이야?”
“그건 아닐걸요.”

신내림 받은 것도 아니고. 한솔은 어깨를 으쓱하며 석민에게 다가가 석민의 팔을 살폈다. 접착력이 다 된 파스 위에 밴드를 덧발라 숨긴 멍 자국이 다시 드러났다. 한솔은 천천히 멍 상태를 살펴보다 귀신에게 당한 게 맞다고 명쾌하게 진단했다.

“뭐야, 사람에게 당한 게 아니라 귀신에게 홀린 거였어? 어쩌다가?”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데 너. 귀신 믿어?”
“내 사촌 동생이 무당인데 못 믿을 건 또 뭐가 있어.”

우리 아빠도 얘가 봐줘. 석민이 고민했던 것과 달린 민규는 귀신의 존재 여부에 관해 별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여전히 긴가민가한 석민보다 귀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괜히 고민했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석민은 한솔이 아까 꺼냈던 종이를 자신의 팔에 감는 걸 지켜봤다. 자세히 보니 단순히 빛바랜 종이가 아니라 무언가 적혀 있었다.

“부적이에요. 궁금해하는 것 같길래.”

한솔이 석민의 팔을 꽉 잡았다. 그러나 부적이 사라짐과 동시에 색이 죽어가던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여름에 계속 파스를 바르고 다녀야 하나 고민하던 석민은 순식간에 나은 팔을 보고 방긋 웃었다. 동시에 ‘그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에 석민이 주변을 둘러봤으나 방 안에는 민규와 한솔 그리고 자신밖에 없었다.
혹시 또 다른 귀신인가 싶어 잔뜩 날이 선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석민은 무당인 한솔이 가만히 있는 걸 보고 밖에서 들린 소리인가보다 생각하며 넘겼다. 애초에 흐릿한 목소리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석민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나저나 얘 어쩌다가 귀신 보게 된 거야?”
“그러게. 영안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혹시 이상한 곳 혼자서 다녀온 적 있어요?”
“얘가 나보다 더 겁쟁이인데 이상한 곳 혼자 갈 일이 뭐가 있…, 아.”

여전히 정신없는 석민 대신 한솔과 얘기를 나누던 민규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석민의 어깨를 세게 내리쳤다.

“너 그때 별장 가서 이상한 꿈 꿨다고 하지 않았냐? 그거 꿈 아닌 거 아냐?”
“어?”

석민은 민규에게 맞은 어깨를 문지르며 별장에 갔던 날을 떠올렸다.
몇 달 전, 석민과 민규는 과대의 부탁을 받아 엠티에 참석했다. 워낙 타인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민규는 흔쾌히 참석했으나 석민은 영 탐탁지 않았다. 숙소로 정해진 별장 때문이었다. 별장에는 유명한 소문이 있었는데, 몇십 년 전 지금은 사라진 그룹의 회장과 그 회장과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다 살해당한 곳이라는 소문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때 죽은 사람들이 귀신이 되어 아직도 별장에 머물고 있다는 괴담까지 도는 곳이었다. 괴담은 사실이 아닐지 몰라도 수많은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건 실제 뉴스에도 나왔던 사건이었기 때문에 석민은 찝찝하고 무서웠다. 그러나 별장은 이미 오래전에 다 리모델링 됐으며, 소문 때문에 안 가기에는 너무 겁쟁이 같다는 민규의 도발에 석민은 이를 갈며 엠티에 참석했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는 어제 지어진 듯 깨끗했고 소문처럼 으스스한 모습의 귀신도 없었다. 대신 석민은 모두가 다 자는 한밤중에 복도에서 장총을 끌고 어슬렁거리는 형체와 마주치기는 했다. 날이 어두워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석민은 그것이 무섭지 않았다. 자다 깨 꿈인지 현실인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던 것도 있었고, 그 사람이 석민을 보고 한동안 아무 말 하지 않다가 석민을 잡고 조심스럽게 원래 방으로 데려다줬기 때문도 있었다.

“꿈 아니었나?”

잠꼬대도 심하고 별 특이한 꿈은 다 꾸는 석민이었기에 귀신 본 거 아니냐고 놀리던 민규의 말에도 아무렇지 않게 넘겼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다시 곱씹어보면 꿈이 아닐 수도 있었다.
석민이 혼잣말을 하자 한솔이 민규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속삭였고 민규는 그때 석민에게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줬다. 민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한솔은 별장에서 만난 귀신이 석민을 잡았다는 부분에서 탄성을 내뱉더니 석민에게 부적 꾸러미를 쥐여줬다.

“왜?”
“귀신이 형 잡았다면서요. 귀신이랑 접촉하면 영안이 생기는 사람이 간혹 있거든요. 물론 좋은 건 아니니까 꼭 가지고 다녀요. 귀신은 자기 보는 사람을 좋아하니까.”
“지, 진짜?”
“아닐 때도 있는데, 아무튼.”

잔뜩 겁먹은 석민이 허겁지겁 달린 주머니마다 부적을 집어넣는 걸 지켜보던 한솔은 여전히 고민이 많은 얼굴로 석민을 살피다 자기가 차고 있던 옥구슬로 된 팔찌를 빼내 건네줬다. 구슬에는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중에 눈 목(目)과 귀신 신(神)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 하고 다니면 귀신 안 보여?”
“그건 아닌데요.”
“그럼 왜?”
“이거 차고 있으면 본인에게 붙은 귀신을 먼저 알아챌 수 있어요.”

그때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홀리지 말라고요. 딱딱한 말투였지만, 석민은 한솔의 목소리에서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석민은 한솔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려다 자신을 구해준 귀신의 얼굴이 떠올라 한솔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민규의 비명에 질문하지 못했다.

“야! 우리 전공! 이번에도 빠지면 F인데!”
“뭐? 네가?”
“아니, 이 바보야! 우리 둘 다!”

석민은 자신이 F 받을 전공이 뭐가 있었나 떠올리다가 민규와 술 마신다고 한번, 민규와 꽃구경 간다고 한번 빠진 수업이 생각났다. 단순히 수업 세 번 빠진다고 F 주는 전공은 드물었으나 하필 빡빡하다고 소문난 교수의 수업이었다. 석민은 급히 시간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전공 수업 시간이었다. 석민은 한솔에게 대충 고맙다는 인사만 남긴 뒤 먼저 뛰쳐나가는 민규를 뒤따라갔다.

“맞아, 아까 무슨 말이야?”
“뭐?”
“아버지 얘기!”

헐레벌떡 집을 나와 학교까지 뛰어가던 중, 석민이 민규에게 질문했다. 민규는 석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가 아아아, 소리 냈다.

“요새 아빠 몸이 안 좋아. 한솔이 말로는 아빠 노리는 귀신이 있어서 아픈 거라더라.”
“뭐? 누가 노려?”
“그건 비밀이라고 말 안 해주던데…, 초록 불 십 초!”

민규가 신호등을 가리켰다. 신호등은 이제 구 초 남았다고 깜빡이고 있었다. 앞지르던 민규가 먼저 건널목을 건넜고 석민이 뒤따랐다. 그때, 저 멀리서 커다란 트럭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둘에게 달려왔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민규보다 석민이 먼저 트럭을 발견하고는 민규를 앞으로 밀쳤다.
끼익- 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석민이 밀치는 바람에 인도로 미끄러지듯 넘어진 민규가 급히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석민의 바로 앞에 차가 멈춰 서 있었다. 민규가 미쳤냐고 차 쪽으로 소리치려는 순간, 차 안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주저앉은 채 중얼거리는 민규와는 다르게 석민은 모든 게 보였다. 차 안에 탄 촛농으로 얼룩진 귀신과 석민의 앞에 서서 귀신을 향해 장총을 겨누고 쐈던 정장 입은 남자를.
남자는 쭈그려 앉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석민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석민에게 속삭였다.

“보이면 피했어야지.”

그때 그랬던 것처럼.


*


교통사고가 날 뻔했던 날, 석민과 민규는 수업을 포기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갔고 한솔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전해 들었다. 하나는 귀신은 보통 한곳에 머물러 있으므로 보여도 보이지 않고 들려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면 피할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원래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나 쫓아다니는 귀신은 원한이 있거나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귀신의 생김새는 석민이 본 모습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싶으면 무조건 피하라는 것. 마지막 하나는 사람을 죽이려는 귀신은 악귀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한솔은 무당답게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었다. 한곳에 머물러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지도 않는 귀신. 오히려 매번 석민을 살려줬던 남자. 그자가 한솔의 바로 옆에 있었지만, 한솔은 그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팔찌 때문인가?”

석민은 옥으로 된 팔찌를 매만졌다. 팔찌를 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석민은 남자를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었다. 한솔이 말한 대로 용한 팔찌였으나 걸리는 점이 있었다. 팔찌를 찬 뒤 보였다는 건 남자가 석민에게 붙은 귀신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무당인 한솔이가 다른 귀신은 먼저 알아채면서 남자는 눈치채지 못한 것도 이상했다.

“그때 말했으면…”
“그때 말했으면, 뭐?”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하던 석민은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잔뜩 놀란 석민은 버둥거리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왜 그렇게 놀라? 내가 무서워?”
“아, 아뇨!”

석민이 급히 고개를 젓자 남자는 씩 웃었다. 뜻 모를 웃음에 석민은 한솔에게 모든 걸 실토하려던 순간이 생각났다. 사실 귀신에 홀렸을 때 날 도와준 남자가 있었는데, 그게 펜션에서 봤던 남자고, 그 남자가 이번에도 구해줬으며, 지금도 옆에 있다고. 그러나 한솔을 불러 세우기도 전에 한솔의 뒤에서 엑스자를 만들어 ‘안 돼.’라고 입을 뻐끔거리던 남자 때문에 석민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부정해봤자 다 알아. 넌 내가 무섭잖아.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남자의 웃음이 석민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소름이 돋은 석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겁에 질리다 못해 도망가고 싶을 때 나오는 석민의 버릇이었다. 석민이 계속 고개를 들지 못하자 남자는 침대에서 내려와 석민의 턱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겁이 많네. 똑같이.”
“…네?”
“아무것도 아냐.”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기지개를 켜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걱정하지 마. 난 나쁜 사람 아니거든.”

대체 무슨 말이지. 석민은 남자의 말을 곱씹어보다 조심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석민을 바라보자 석민은 기분 나쁘게 듣지 말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귀신이 사람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한 것… 같아서요. 뭔가 좀… 이상하다고 할까요? 물론 생전에는 사람이셨으니까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귀신… 이시니까?”

석민이 횡설수설하자 남자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혹시 화난 걸까 싶어 석민이 냅다 죄송하다고 사과하자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자주 짓는 뜻 모를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즐거워서 짓는 웃음이었다. 석민은 남자가 사실 귀신이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사람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맞아. 귀신이니까 벽도 통과하고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도 있고 사람은 못 하는 짓 다 할 수 있지. 그런데 말이야, 귀신이랑 사람이랑 둘 다 할 수 있는 일이 뭔 줄 알아?”
“…아뇨.”
“사람 죽이는 거. 그건 둘 다 가능하더라고.”

남자의 말에 석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입 다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사과해야 할까? 그런데 어떻게 사과하지? 석민이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을 때, 남자가 손가락을 들어 석민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난 너 죽일 생각 없어. 죽일 생각 있었다면 만나자마자 죽였겠지.”
“…그럼 왜 제 곁에 있어요? 한솔이가 원한이 있는 거 아니면 저한테 바라는 게 있어서 그렇다고 했는데. 혹시 원하는 게 있어요?”
“그건 왜 물어? 원하는 게 진짜 있다면 어쩌려고. 도와주게?”

남자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석민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 도와주셨잖아요. 은혜는 갚고 싶어요.”

왜 옆에 있는지 알려주면 더 좋겠지만. 석민은 마지막 말은 꾹 삼켰다.
남자는 석민을 따라다니며 석민을 도와줬다. 석민이 남자를 인식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석민의 침대에 눕거나 좁은 석민의 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익숙한 것 보아 석민의 옆에 있게 된 건 꽤 오래된 듯했다. 심지어 남자는 석민에게 장난치는 걸 좋아해서 그렇지(석민 몰래 옆에 누워있다가 놀라게 하거나, 석민이 씻고 있는데 불쑥 화장실로 들어온다거나) 대체로 석민에게 친절했다. 하지만 본인에 관한 건 단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다. 왜 죽었는지. 바라는 게 뭔지. 왜 석민은 도와줬는지. 하다못해 이름도 알려주지 않아서 석민은 남자를 ‘저기요’나 ‘있잖아요’식으로 불러야 했다.
은혜를 갚고 싶다고 말해놓고 혹시나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 봐 잔뜩 긴장한 석민에 비해 남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기도, 기분이 나빠 보이기도 한 표정. 그러다가 석민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는데, 석민은 자기만 보면 웃는 남자가 이상하게 불길했다.

“은혜는 침묵으로 갚아. 우선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람. 석민은 입을 비죽인 채 남자를 훑어보다가 갑자기 흐려지는 남자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이미 불투명해진 남자를 잡을 수는 없었지만, 석민은 아까보다 좀 더 힘차게 “그, 그럼 이름이라도 알려주세요!”라고 소리쳤다.

“이름은 갑자기 왜?”
“저, 저희 만난 지 그래도 꽤 됐는데 이름도 모르잖아요.”
“난 알지. 석민. ㅂ…, 이석민. 그리고 너 나 보기 시작한 건 며칠 안 됐는데?”
“처음 봤을 때부터 치면 오래됐잖아요! 아니면 저 따라다녔을 때부터 치던가!”

그렇게 따지면…. 남자는 무언가 중얼거리다가 좀 더 크게 말해달라는 석민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정한. 성은 두 개 있는데. 윤이랑 박 중에 뭐로 부를래?”
“왜 두 개예요?”
“그거까지 말해줘야 해?”

묘하게 날이 선 말투에 석민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 조심하자. 석민은 남자의 눈치를 보며 몰래 박정한과 윤정한 이름 두 개를 번갈아 곱씹어보다 윤정한이 좋겠다고 손뼉 쳤다. 왜 그게 좋냐는 질문에 석민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더 친숙하고 입에 잘 붙는다고 둘러댔다.

“저기, 기왕 물어본 김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그렇게 자꾸 물어볼 거면 은혜 갚고 싶다는 말은 왜 한 거야?”
“딱! 딱 하나만! 딱 하나만 물어보고 더는 안 물어볼게요!”

남자의 표정이 점점 구겨지자 석민은 연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남자를 설득했다. 남자는 내키지 않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며 팔짱을 꼈다.

“혹시 언제까지 있을 예정이신가요?”

이 질문은 석민에게 제일 중요한 질문이었다. 물론 남자가 옆에 있는 게 불편하다거나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석민에게 이득 될 점이 많았다. 남자를 보기 시작할 때부터 석민은 다른 귀신도 보였는데, 그들은 틈만 나면 석민을 공격했고(귀신들은 매번 형태가 달랐지만, 촛농에 뒤덮여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때마다 남자가 나타나서 귀신을 없애줬다. 석민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남자가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왜.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어?”

남자의 말에 석민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며 변명하던 석민은 같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뭔가 해주고 싶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남자는 석민이 “요리를 잘하기는 하는데 귀신이 그걸 먹을 수 있나? 아, 제삿밥처럼 차리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중얼거리는 걸 지켜보다가 다시 한번 석민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석민은 따가운 이마를 부여잡고 남자를 노려보려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남자가 몸을 숙여 석민과 시선을 맞췄다.

“은혜는 침묵으로 갚을 것.”
“…”
“그리고 한 가지 더.”

남자는 말을 잇지 않고 가만히 석민을 바라보기만 했다. 석민은 남자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가만히 기다렸다가 계속 아무 말 않자 다시 슬금슬금 시선을 내리깔았다. 겁에 잔뜩 질린 석민의 모습에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숙였던 허리를 폈다.

“제삿밥처럼 밥 차려줄 생각 마. 엎을 거야.”
“…귀신이잖아요?”
“나랑 같이 귀신 하고 싶으면 차려주던가.”

조곤조곤 말하던 남자는 갑자기 왁! 큰소리를 냈다. 깜짝 놀란 석민이 뒤로 나동그라지자 남자는 석민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깔깔 웃었다. 그러다가 석민이 벌떡 일어서는 걸 보고는 메롱, 하며 황급히 벽을 통과해 사라졌다.

“저, 저, 또라이같은 귀신이!”

남자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석민은 남자가 있을 때는 하지 못했던 험한 말을 뱉으며 씩씩거렸다. 그러면서도 남자가 알려준 이름을 곱씹었다. 정한. 윤정한. 박정한이라 부를 수도 있었으나 석민은 윤정한을 택했다. 아까 남자에게 말한 것처럼 윤 씨가 좀 더 친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있었지만, 박씨 성을 얘기할 때 자신도 모르게 일그러졌던 남자의 표정을 석민이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박씨 성이랑 무슨 일 있었나 봐. 석민은 남자가 때렸던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남자, 그러니까 정한이 대체 무슨 삶을 살았길래 자신의 곁에 머물며 도와주는지 나름의 이유를 추측했다. 그러나 마땅히 떠오르는 이유는 없었다. 한참 머리를 붙잡고 이유를 찾아보던 그때, 순간 석민의 머리에 스쳐 지나간 얘기가 있었다. 별장에 얽힌 이야기. 석민은 급히 폰을 켜 관련 뉴스를 검색했다. 하지만 워낙 오래된 얘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또 법적으로 얽힌 문제가 많아 회사와 관련된 내용은 조용히 사장되어 있었다. 물론 살아남은 정보도 있었다. 회사 이름은 BSK 그룹. 회장 이름은 박태산. 그리고 박태산의 증명사진. 또, 딥웹이나 다크웹에는 별장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정보와 사진 역시 존재한다는 정보도 찾았으나 워낙 겁이 많은 석민은 관련 사이트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괜히 들어갔다가 해킹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그나저나 회장 성이 박씨네. 이 사람이랑 정한 씨가 관련이 있을까?”

석민은 박태산의 사진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박태산은 정한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박태산은 정한보다는…
석민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건너편에 있는 거울을 봤다. 거울에는 석민 혼자 바닥에 앉아있었다. 석민은 다시 박태산의 사진을 살폈다가 고개를 들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늙은 박태산의 얼굴과 젊은 자신의 얼굴. 석민은 갑자기 찾아온 현기증에 머리를 붙잡고 헛구역질했다. 왜 이러는지는 몰랐다. 몸이 안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점점 토기가 올라왔다. 석민은 급히 인터넷 앱을 끄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더는 보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석민은 자신이 직접 BSK 그룹에 관해 찾아보지 말고 별장 괴담을 들려준 민규에게나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


석민은 꿈을 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자신에게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어눌한 말투로 용서를 빌던 자신. 그리고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던 사람.
그자는 박태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숙소 괴담? 그때 말해준 게 전부인데?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 우리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사건을 어떻게 아냐? 그런데 그건 왜?”

막대사탕 봉지를 까 막 입에 집어넣은 민규는 대답 대신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석민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탕 먹고 싶어? 민규가 주머니에서 막대 사탕 한 개를 꺼내 건네주자 석민은 사탕을 받을 생각은 않고 한숨만 푹 내쉬었다.

“뭐야. 뭔데? 무슨 일 있었냐?”
“…일이야 많았지.”
“무슨 일? 그게 괴담이랑 관련 있어?”
“알면 내가 물어봤겠냐?”

연신 마른세수만 하던 석민은 쉴 틈 없는 민규의 질문 세례에 버럭 짜증 내며 막대사탕을 뺏듯이 가져갔다. 갑작스러운 석민의 반응에 민규는 줘도 난리라며 투덜거리면서도 수업 안 겹친 며칠 사이에 다크서클이 심해진 석민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문제 있는 거 맞지?”
“…”
“말 못 하는 거 보니 맞네. 내가 분명 무슨 일 있으면 우리 집 오라 했지? 일 풀릴 때까지 우리 집에서 살아도 된다고 해도 고집부리지.”

석민이 트럭에 치일 뻔했던 날, 한솔에게 석민의 상태를 들은 민규는 석민에게 일이 해결될 때까지 같이 살자 권유했다. 한솔 역시 갑자기 영안이 트인 석민을 바로 옆에서 돕고자 했지만, 석민은 둘의 배려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정한 때문이었다. 침묵을 강요한 정한은 석민이 민규 집에 머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너 지금 당장 자취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 집안사람들 모두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힐 거야. 석민은 자신에게만 들리는 정한의 목소리에 둘의 걱정을 뒤로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고집은 무슨. 내 집 두고 친구 집에서 먹고 자고 할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거든.”
“그거 우리 아버지가 들으면 섭섭해하신다. 울 아버지가 너 얼마나 예뻐하는데. 네가 그때 거절만 하지 않았으면 입양까지 하려고 했던 거 기억하지?”

민규 말대로 민규의 아버지는 석민을 제 자식처럼 예뻐했다. 이는 민규의 아버지가 석민의 부모와 오랜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갑작스러운 화재로 집과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어린 석민을 민규의 아버지가 입양하고자 했다. 친척 한 명 없는 석민이었기에 석민이 거절하지만 않았다면 쉽게 입양될 수 있었으나 석민은 민규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민규 아버지도 입을 꾹 다문 석민을 재촉하거나 조르지 않았다. 그저 어린 석민이 홀로 설 수 있게 집을 다시 구해주고, 대소사가 있으면 곁에서 함께해줬다. 그러면서 종종 입양 의사를 물어봤으나 그때마다 석민은 침묵했다. 민규 아버지도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게 석민은 혼자서 자랐지만, 곁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석민은 우직하게 제 옆을 지켜준 민규 아버지가 고마웠고 좋았다. 이제는 사진을 보지 않으면 잘 기억나지 않은 친부모보다 더 친근했고 편했으며 사랑했다. 그런 민규 아버지의 입양제의를 거절한 건 석민 본인도 이해되지 않는 결정이었다. 친부모처럼 믿고 따르는 사람인데 같이 사는 것만은 거부감이 들까. 석민은 평생을 고민했으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거부감의 정체를 찾지 못했다.

“그래. 아저씨가 나 예뻐하는 거 잘 알지. 너보다 예뻐할걸.”
“야이씨, 그건 아니지.”
“어어, 그래. 아니야. 아니니까 한솔이가 준다고 했던 거나 내놔.”

석민은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학년인 석민과 민규는 전공 수업 두 개만 빼고는 사실상 시간표가 다른 수준이었는데(수강 신청 날 늦잠 잔 석민과 늦잠 자지는 않았으나 사이트 접속에 실패한 민규의 콜라보였다), 오늘은 일주일 중 유일하게 같은 수업을 듣는 날이었고(하나는 F 확정이라 포기했다), 둘의 시간표를 알고 있는 한솔이 민규에게 석민에게 전해줄 물건을 맡긴 뒤 석민에게 연락했다. 새로 만든 부적이 있으니 가져가라고.

“근데 이거 효과는 있어?”
“…있을걸?”
“사용해본 적 없냐?”
“어…”

민규가 건네준 부적을 주머니에 고이 접어 넣던 석민은 갑작스러운 민규의 질문에 우물쭈물했다. 왜 사용 안 했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그럼 정한의 존재를 말해야 하나? 하지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하면 큰일 나는데. 어떻게 둘러대지? 석민이 열심히 머리를 굴릴 때, 민규가 석민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다행이네. 그동안 이상한 일 없었다는 거잖아. 그런데 대체 얼굴이 왜 그러냐? 잠이 안 와? 하긴 그런 일 있었으니까 잘 자는 것도 웃기긴 하네. 그래도 좀 자라.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겠다.”

부적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민규에게는 석민이 안전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듯했다. 요 며칠 일어난 일들 때문에 눈치가 빨라진 석민은 재빨리 웃었다. 하하하. 맞아. 영안 생긴 것 치고는 평범하게 살고 있지. 하하하하.

“한솔이 네 걱정 많이 하던데 너 멀쩡하다고 전해줄게. 대신 잠은 좀 자라. 혼자서 자기 무서우면 우리 집으로 오고.”
“네 침대 내줄 거야?”
“아니. 바닥에서 자, 이 새끼야.”

남의 자리를 뺏으려고 하고 있네. 민규가 혀를 끌끌 찰 동안 석민은 최대한 덜 어색하게 웃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석민은 민규 뒤쪽 천장을 보고 순식간에 미소를 잃었다. 거기에는 촛농에 뒤덮인 귀신이 민규와 석민 쪽으로 빠르게 기어오고 있었다. 석민은 부적을 어떻게 사용하더라? 던지던가? 던지면 붙던가? 피하면 끝장 아닌가? 그런데 지금 이걸 사용하면 민규가 난리 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며 주머니에 밀어 넣던 부적을 빠르게 꺼냈다.
그때였다. 귀신이 석민과 민규를 덮치듯 뛰어내림과 동시에 석민의 뒤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석민은 놀랐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며칠 들었다고 벌써 익숙해진 탓이었다. 대신 석민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귀신을 지켜봤다.

“뭐 보냐?”

민규는 석민의 눈앞에 손을 흔들다가 석민이 부적을 꺼낸 걸 보고 혹시 여기 귀신이 있냐며 눈을 부릅떴다.

“아니. 귀신은 아니고… 어! 벌레가 있었어. 진짜 큰 벌레…”
“벌레!!!”

민규가 펄쩍 뛰며 어디 있냐고, 도망갔냐고, 혹시 자기한테 붙은 건 아니냐고 난리를 쳤다. 그러면서도 설마 벌레 잡는 데에 한솔이가 쓴 부적을 사용할 생각이었냐고, 그게 종이이긴 하지만 얼마에 팔리는 건지 알기는 하느냐고 따지는 걸 잊지 않았다. 석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민규 등에 부적 하나를 붙였다. 그러자 민규가 이리저리 펄쩍 뛰더니 석민을 두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사실 저게 귀신 아닐까?”

석민이 내 친구지만 덩칫값 못한다고 생각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석민의 곁으로 다가왔다. 총소리의 주인이자 석민이 부적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아도 될 삶을 만들어준, 석민의 영안이 생기게 된 원흉인 정한이었다. 석민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콧방귀를 뀌며 다시 부적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귀신은 무슨. 영안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석민은 귀신을 알았다. 귀신은 절대 비명 지르며 도망가지 않았다. 마치 악만 남은 듯 가루가 되어 사라지면서도 어떻게든 석민에게 닿으려 발악했다. 도망가는 건 오로지 공포를 느끼는 사람만이 하는 행동이라는 걸, 영안이 트인 석민은 가슴 서늘한 경험을 통해 배웠다.

“아, 맞다. 혹시 사탕 좋아하세요?”

부적을 주머니 깊숙이 넣은 석민은 여전히 제 손에 들린 사탕을 정한에게 내밀었다. 정한은 사탕을 보고 석민 한번, 사탕 한번 번갈아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사탕 안 좋아하세요? …아! 혹시 제사 지내야 드실 수 있나요?”

석민은 자신이 실수했다며 당장이라도 사탕을 앞에 두고 절을 할 것처럼 굴었다. 정한은 제사 같은 거 지내지 말라고, 너나 먹으라고 짜증 내면서 석민의 곁에서 멀어졌다. 석민은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화까지 낼 필요가 있나 구시렁거리며 막대사탕 껍질을 깐 뒤 입에 물었다. 사탕 특유의 단맛이 진하게 느껴졌다. 원래 사탕이 이만큼 달았던가? 석민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여전히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민규를 찾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


그것은 어렸다. 서류상으로만 봤던 그것을 눈으로 직접 봤을 때 석민이 느꼈던 첫 감정이었다. 먹을 만큼 먹은 석민에 비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어려서 석민은 만나기 전까지 쌓아둔 모든 감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래서 석민은 그것에게 손을 내밀 때 반갑다는 말을 먼저 했던 걸 수도 있다. 돌아온 말은 가시가 가득한 ‘착하시네요. 보통 이러면 싫어하시던데.’ 말이었지만, 석민은 괜찮았다. 그것은 어렸으니까. 주변을 잔뜩 경계하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제 조카처럼 사탕 그릇에 담긴 사탕을 하나 집어 입에 넣고는 했으니까. 그렇게 어린 것을 석민은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몰래 사탕을 까먹는 그것에게 사탕 그릇을 통째로 들어 내밀었다.

사탕 좋아하니?


*


꿈은 현실을 반영한다. 과학적인 얘기에 큰 관심이 없는 석민이었지만, 꿈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꿈과 현실과 같은 거라고는 ‘사탕’밖에 없었다. 내 상상력 진짜 풍부한가 봐. 석민은 꿈은 현실뿐만 아니라 상상까지도 반영한다는 얘기를 떠올리며 눈앞의 피자를 집어 물었다. 피자 특유의 짠맛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석민은 인상을 잔뜩 쓰며 몇 번 씹지도 못한 피자 조각을 도로 뱉었다.

“와, 미쳤다.”

석민이 피자를 씹고 도로 뱉는 걸 지켜본 민규가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그건 한솔과 석민도 마찬가지였다. 피자는 삼시 세끼 다 먹어도 간식으로 또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석민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피자 귀신이던 석민이었는데, 그런 석민이 피자 몇 번을 씹더니 도로 뱉어냈다. 짜다는 이유로.

“심각한데?”
“그러게요. 그동안 어떻게 참으셨어요, 형.”

안타까움이 섞인 둘의 말에 석민은 울상을 지었다. 둘의 생각과는 달리 석민은 일부러 참지 않았다. 그저 감각이 하루가 다르게 예민해졌을 뿐이었다.
단맛을 시작으로 신맛, 쓴맛, 감칠맛이 몇 배는 강하게 느껴지더니 오늘에는 짠맛까지 예민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미각뿐만 아니라 청각과 시각 역시 평소보다 몇 배는 예민해져서 전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멀리 떨어진 귀신의 모습과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귀신이 보이기 전만 해도 없었던 증상에 석민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며칠을 더 끙끙 앓던 석민은 결국 민규의 집까지 찾아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한솔과 민규를 붙잡고 울었다.

“영안이 생겼다고 몸의 모든 감각이 눈뜨지는 않거든요.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 봐요.”
“미안한 말이지만 한솔이 네가 어리니까 다른 무당 중에 나 같은 경우를 겪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그냥 영안 생긴 사람 중에서는 없을까?”
“형,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자료를 찾아봤는데 모든 케이스를 뒤져봐도 없어요. 형이 유일해요.”

그나마 끝까지 멀쩡했던 감각 중 하나가 짠맛을 느끼는 감각이었는데. 석민은 해결할 방법은커녕 자신이 유일한 사례라는 사실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피자… 피자를 못 먹는다니… 피자를…

“형, 혹시 주변에 우리 말고 다른 게 있어요?”

다른 거라면 많았다. 민규의 집 주변에는 생각보다 귀신이 많았다. 빨갛고 퍼런 촛농으로 뒤덮인 귀신들. 사실 귀신보다는 신체 일부들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알맞았다. 집 뒤편에는 다리들이. 집 앞편에는 팔들이. 그리고 집 외각 벽에는 몸통같이 생긴 것들이 시체에 꼬인 벌레처럼 붙어있었다. 그것들은 평소에는 다 따로 굴러다니다가 가끔 하나로 뭉쳐 사람의 형태로 변하고는 했는데, 민규와 민규의 아버지가 볼 일 때문에 집 밖으로 나올 때만 그랬다. 사람의 형태로 변한 그것들은 괴성을 지르며 둘에게 달려들었다가 둘이 언제나 지닌 부적의 힘에 의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밖에?”
“게네들 말고요. 좀 더 뚜렷한 형태의 귀신이요. 마치 사람처럼 보이는.”

석민이 대충 얼버무리며 설명하자(자세하게 얘기했다가는 영안도 없고 석민만큼 겁 많은 민규가 눈 뜬 채로 기절할 것 같아서였다) 한솔이가 상세하게 설명했다. 산 사람의 기운을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뚜렷한 귀신이요.

“귀신은 원래 다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형 영안 생기고 사람 형체로 나타난 귀신 몇이나 봤어요?”

한솔의 질문에 석민은 곰곰이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산 사람처럼 보이는 귀신은 정한밖에 없었다. 매번 나타나 공격해대는 촛농 귀신도 사람의 형체만 갖췄을 뿐이지, 산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석민은 한 명밖에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본 적 없다고 말을 바꿨다. 절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말하지 말라던 정한이 생각나서였다. 한솔은 뚜렷한 귀신은 본 적 없다는 석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무언가 혼자 중얼거렸다. 너무 작은 소리라 석민은 “가봐야겠다.”라는 말만 겨우 알아들었다.

“어딜 가?”
“뭐가요? 제가요?”

한솔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뗐다. 석민은 한솔의 반응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뚜렷하게 보이는 거랑 얘 감각이 예민해진 거랑은 뭔 차이냐?”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민규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석민 역시 민규가 한 질문이 궁금했기에 반짝이는 눈으로 한솔을 바라봤다.

“사람 흉내를 내는 것들과 달리 산 사람 그 자체로 보이는 것들은 윤회의 고리를 포기한 것들이거든요.”
“…뭔, 뭐?”
“전생을 전생으로 두지 못하고 새롭게 시작할 기회조차 포기한 채 이승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럴 수가 있어?”
“원래는 그러면 안 되죠.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고요. 그런 것들이 주변에 있으면 산 자는 점점 기운을 빼앗기거든요.”
“나, 나, 건강한데?”
“지금은 그렇게 보여도 감각이 예민해지고 있는 것부터 시작이에요. 자연스럽게 죽는 게 아니라 죽은 것에게 기력을 빼앗기다 죽으면 점점 모든 것들에 예민해지면서 쇠약해지고 죽거든요. 쉽게 말해 미쳐가다가 기 다 빨리면 죽는 거죠.”

설명하는 한솔은 덤덤했으나 설명을 들은 둘의 안색은 퍼렇게 질렸다. 특히, 민규가 이석민 이러다가 갑자기 급사하는 거냐며 석민의 뺨을 부여잡고 꽥 소리 질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석민이 지금 당장 쓰러져 죽은 것처럼 굴자 석민은 자기 아직 살아있으니까 맘대로 죽이지 말라고 버럭 소리쳤다.

“아무튼. 형의 변화가 단순히 영안이 생겨서 벌어지는 건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정말. 정말로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석민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이거 어쩌지. 정한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지만 기가 빨려서 변화한 거라는데. 그런데 기가 누구한테 빨린 거지? 산 사람처럼 행동하는 건 정한밖에 없는데. …정한 때문에 변화한 건가?

“한솔아,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나를 도와주는 귀신이 뚜렷하게 보이면 그건 어떤 경우야?”

한솔의 말을 들은 석민은 정한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가 정한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한은 언제나 석민을 지켜줬고 무작정 석민을 공격하는 것들과 달리 정한의 석민에게 그 어떤 악의도 없어 보였다. 혹시 수호신 같은 건 아닐까? 석민은 한솔이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길 바라며 꿀꺽 침을 삼켰다.

“뚜렷하게 보이는 건 전부 다 악귀예요.”
“…”
“애초에 타인을 지켜주기 위해 순환의 고리를 끊은 자는 없어요. 죽은 자들은 알아요. 자신이 이승에 억지로 머물면서 가져올 파급력을. 그 어떤 것도 산 자에게는 도움 되지 못한다는 걸. 만약 정말로 산 자를 지켜주고 싶은 귀신이 있다면 성불을 택하겠죠.”
“…으응. 그렇구나.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대답…, 고마워.”

석민의 바람과 달리 한솔의 대답은 차가웠다. 석민은 볼을 긁적이다가 자신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한솔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형. 사실대로 말해줘요. 정말로 산 사람 같은 귀신을 본 적 없어요? 사실대로 말해야 제가 형 도울 수 있어요.”

한솔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까지 실려있었다. 유일하게 석민을 도울 수 있는 사람. 그게 한솔이었다. 석민은 자신이 씹다 뱉은 피자를 보다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석민이 마주한 것은 한솔이 아닌 정한의 눈이었다.


*


최한솔이 너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내 존재도 볼 수 없는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야. 생각해 봐. 네가 물에 빠졌을 때 구해준 건 누구였지? 너만 보면 죽이고 싶어 안달 난 그것들을 없애준 게 누구지? 나지.
걔는 널 지킬 수 없어. 생각해 봐. 널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왜 집 주변의 귀신들을 퇴치하지 못하지? 왜 막는 게 고작일까?
하지만 난 할 수 있어. 감각이 예민해지는 게 대수야? 난 널 살릴 수 있어. 만약 내가 사라지면 넌 어떻게 될까? 최한솔이 널 구하러 올까? 김민규와 김준기를 두고 너한테 달려올까?
생각해 봐. 걔는 언제나 너보다 그들이 우선이야.
다시 한번 물어볼게.
네가 위험할 때 구한 건 누구지?
나야.
나라고. 이석민.


*


석민은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한솔에게 대답했다. 없어. 아무것도 못 봤어. 한솔은 분명 자신을 보고 있으나 다른 걸 보는 듯한 석민을 지켜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를 찾아보겠다는 말과 함께.


*


한솔과 민규는 상태가 나빠진 석민이 자기 집에서 머물기를 바랐다. 그러나 석민은 제 자취방이 편하다는 이유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민규는 가는 길 배웅이라도 해주겠다며 집을 나서는 석민을 따라갔다.

“우리 집에서 지내도 진짜 괜찮다니까. 침대 없어서 그래? 내 침대라도 내줄게.”
“됐어. 진짜 집이 편해서 그래.”
“야. 그렇게 좋아하는 피자도 못 먹는 애를 어떻게 혼자 두냐?”
“한솔이가 방법을 찾아본다고 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안 그래도 한솔이 요즘 우리 아빠 때문에 바쁜데…, 두 배로 바빠지겠네.”
“아저씨가 왜?”

돌아가는 내내 퍼렇게 질린 얼굴이었던 석민은 민규의 아버지 얘기에 민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낀 채 걷던 민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 갑자기 몸이 더 안 좋아져서. 한솔이 말로는 집 주변에 귀신이 계속 늘어서 그렇다는데. 사실 그거랑 우리 아빠가 몸 아픈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귀신을 볼 줄 몰라서 그런가?”

나도 귀신 볼 수 있었으면 덜 답답했으려나. 민규가 구시렁거리자 석민은 코웃음을 쳤다. 만약 민규가 귀신을 보게 됐다면 지금 민규는 생기마저 잃고 시름시름 앓고 있을지도 몰랐다. 매사 긍정적인 민규가 제일 싫어하는 게 첫째는 귀신이고 둘째는 벌레인데 지금 민규 집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것들은 최악과 최악이 혼합된 모습이었다.
퍽이나 덜 답답했겠다. 석민은 괜히 투덜거리며 팔짱을 껴오는 민규를 뿌리쳤다.

“더워. 왜 그래.”
“너 저번에 신호등 건네려다가 사고 났으니까 그러지. 왜.”

덥다고 석민이 팔을 뿌리쳐도 민규는 더 세게 석민의 팔을 옥죄었다. 팔을 쥐어뜯을 듯 구는 민규의 모습에 뿌리치는 걸 포기한 석민은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초록 불로 바뀌기만을 기다리며 민규 아버지의 상태에 관해 좀 더 자세히 물었다.

“너처럼 감각이 예민해지거나 몸이 아픈 건 아닌 것 같은데 악몽을 자주 꾸셔. 무슨 악몽인지는 설명 안 해줘서 모르겠지만, 꽤 안 좋은 꿈인가 보더라. 점점 살이 빠져. 아, 나온 김에 삼계탕용 닭이나 사서 돌아가야겠다. 너도 사줄까?”
“나 감각 예민해져서 아무거나 못 먹는다니까?”
“아, 맞다. 미안.”

둘이 대화가 끊김과 동시에 매미가 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었고 석민이 건널목을 건너려는 순간, 내내 석민의 옆에 떠다니던 정한이 “건너지 마.”하고 석민을 붙잡았다. 석민이 우뚝 멈춰서자 민규도 따라 멈춰 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민규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 할 때, 하늘에서 커다란 바위가 둘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민규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입을 벙긋거리다가 한솔이에게 전화해야 한다며 팔짱을 풀고 폰을 꺼냈다.

“어! 한솔아! 무슨 일이냐고? 미친. 야, 하늘에서 커다란 돌이 떨어졌어! 석민이가 갑자기 멈춰서지만 않았더라면 우리 그대로 깔려 죽었어! 뭐? 여기가 어디냐고? 석민이 집 근천데! 지금은 나갈 수 없다고? 야! 우리 죽을 뻔했다니까? …뭐? 아빠? 아빠가 왜?”

매미 소리가 거세지자 민규는 한쪽 귀를 막고 전화에 집중했다. 석민은 민규가 전화에 온통 정신이 팔린 걸 보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민규 몰래 정한의 손을 잡았다. 정한은 석민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맞잡은 손을 꽉 쥐며 “내가 한 말이 맞지?” 질문했다.

“…있잖아요. 한솔이가 한 말 맞아요?”

석민은 대답 대신 아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그러자 건널목 중앙에 박힌 바위가 작게 흔들렸다. 정한은 손을 뻗어 주먹을 쥐었고 바위는 순식간에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통화에 집중하던 민규가 눈앞에서 부서진 바위를 보고 악! 비명 질렀고, 석민은 차마 비명도 못 지르고 눈만 끔뻑였다.

“뭐가 사실이든 너는 내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 텐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지금 상황도, 네가 갚고 싶다고 했던 은혜도.”
“…”
“우선은 침묵. 아무것도 말하지 마.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

정한은 다시 한번 침묵을 강조했다. 석민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렇기에 정한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


너는 내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할 거다.

석민의 말에 그것은 크게 동요했다. 이번 일에 성공해야지만 그것은 병원에 있을 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계획에 큰 구멍이 있었다. 회사를 제 손으로 꾸리는 게 익숙한 석민과 달리 전공이 경영도 아닌 그것은 기업을 이끌어가는 게 어려웠다. 그러니 실수하는 것도 당연했다. 문제가 있다면 회장님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잘 알고 있잖니. 나는 네가 꽤 영특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고집인지.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짓던 석민은 그것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것은 느릿하게 서류를 받아 살피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민을 바라봤다.

…저에게 왜 이런 걸 알려주시는 겁니까.

그것은 서류가 잘못된 게 아닌지 수차례나 뒤적이며 확인했다. 석민은 투명한 반응에 웃어야 할지 비웃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경쟁 회사 비리 하나 알려줬다고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원한 적 없습니다.
그럼 뭐, 완전히 실패하고 회장님 눈 밖에 나서 어머니 치료비도 못 받고 쫓겨나던가.

빠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고개 숙이는 법을 남들보다 일찍 배웠으나 제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결국, 석민은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에게 다가갔다.

성공해. 그리고 자리 하나 차지해.
제가 성공하면 당신에게는 어떤 이득이 돌아가죠?
글쎄…. 딱히 이득은 없는데 그렇다고 가족이 지는 건 못 봐주어서.
저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시나 봐요.

나는 당신 가족이라 생각 안 하는데. 석민은 그것이 삼킨 뒷말이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었다. 저렇게까지 날을 세우고 있는데 어찌 모를까. 석민은 피가 섞였는데 가족이 아닐 건 또 뭐냐며 그것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것은 석민의 손만 빤히 바라보다가 또 이를 갈았다.

박씨 성을 선택한 건 너다. 내가 아니야.
어머니 괜찮아지시면 버릴 성입니다.
어어, 그렇게 해. 네 이름은 박씨보다 *씨가 더 어울린 것 같더라. 그거…, 어머니 성이던가?

그것은 고개를 끄덕였다. 석민은 어머니라는 단어 하나로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그것이 재미있었다. 어려서 그런가. 내 조카도 저런가. 아닌데. 내 조카는…

보면 사장님께서는 조카분에게도 살가우셨죠.
그랬던가?
가족애가 넘치시나 봐요.

그런가? 석민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이 봤을 때 그렇게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그냥 둘 다 자신보다 한참 어리다는 점이 컸다. 어린 것들. 한 명은 어머니라는 단어에만 목을 매고 한 명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저보다 어린 것들. 너무나 어리기에 석민은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그것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이미 수십 년 기반을 다져온 자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뭐. 편한 대로 생각하렴. 너를 끔찍이도 아끼는 형이 준 자료로 일 처리 제대로 하고.
아뇨. 이건 안 쓸 겁니다. 공정하지 못해요. 물론 이 일에 실패하면 회장님이 실망하시겠지만. 잘 설명만 드린다면…
무슨 소리야?

석민은 그것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것은 갑자기 떨어진 석민의 온기를 붙잡으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허공을 꽉 쥐었다.

넌 회장님을 몰라.

뭐, 모르는 게 좋겠지. 하지만 이거 한가지는 기억해라. 너는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해. 내 도움이라도 안 받으면 넌 실패할 거야. 그럼 회장님은 널 쳐다도 안 보겠지. 말이 안 돼? 내 도움을 회피하고 공정이니 뭐니 말하는 네가 더 말이 안 되는 거다. 이런 술수 쓰는 거 누가 제일 먼저 했다고 생각하니? 내가 누구한테 이런 걸 배웠다고 생각해? 그러니 입 싹 닫고 내가 준 자료나 잘 활용할 생각이나 해.

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네? 정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면 가족애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던지. 나도 그쪽 회사에 내 가족이 지는 건 좀 싫어서.

슬슬 얘기 나누기가 귀찮아진 석민은 비서를 시켜 그것을 내보내려 했다. 그때, 그것이 석민에게 다가와 석민과 마주 섰다.

예전에 제가 다정하다고 한 적 있었나요?
그랬지. 왜.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웃기니?
아뇨. 진짜 다정하신 것 같다고요. 말은 그렇게 하셔도 절 생각해주신 거잖아요. 자료는 잘 쓰겠습니다.

그것은 석민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사장실을 나갔다. 석민은 굳게 닫힌 문을 보다 콧방귀를 뀌며 의자에 눕듯이 앉았다. 가족애는 저쪽이 넘치는 것 같은데.


*


영차. 꿈에서 막 깨어난 석민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주변을 쭉 둘러봤다. 드넓은 사장실에 있었던 꿈속의 ‘자신’과 달리 현실의 석민은 자취방에 있었다. 그리고 꿈에서는 ‘그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곁에 없었다.
상황파악을 끝낸 석민은 두 손으로 뺨을 짝짝 소리 나게 때린 뒤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꿀까 고심했다.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고 섬세한 것도 많고 세세하게 이어지는 얘기들도 많았다. 우선 저번에 꿨던 꿈과 이어봤을 때 꿈속의 주인공은 석민과 똑같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꿈속 석민은 어린 조카가 있고 회장님이라 부르는 아버지가 있으며, 배다른 동생이 있고, 한 회사의 사장이었다. 사장이라는 지위에 맞게 꿈속 석민은 재수가 없는 편이었는데, 막상 하는 행동은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기에 석민은 마냥 욕할 수 없었다. 자신과 이름이 같아 욕을 하면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이 느껴져 꺼림칙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회장님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석민은 꿈을 꿀 동안 꿈속 석민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기에 꿈속 석민이 제 아버지인 회장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석민은 아버지를 아주 싫어했고 또 두려워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궁금해하던 석민은 자신이 제일 처음 꿨던 꿈을 떠올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설마…. 제 자식인데…?”

살려달라고, 용서해달라고 비는 석민을 학대하던 아버지. 만약 그 꿈도 상상이 아닌 이어지는 꿈 중 하나라면 꿈속 석민이 왜 그렇게 아버지인 회장님을 겁내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식을 그렇게 다루는데 당연히 싫고 밉고 무섭지. 석민은 꿈속 석민이 느끼는 감정을 격하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어머니의 성…, 윤이겠지?”

마치 그 부분만 까만 화면을 덮어씌운 듯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꿈을 꿀 때는 분명 마주 보고 있었는데, 막상 눈을 뜨면 그것만 흐려져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꿈을 꿈으로써 석민은 몇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석민이 꾸는 꿈은 윤정한과 관련되어 있으며 동시에 예전에 묻힌 BSK 그룹 이야기와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요즘 예민해졌더니 감도 같이 예민해졌나 봐! 석민은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얼굴로 방긋 웃었다. 예민해진 감각 때문에 하루하루가 고역이었으나 동시에 이렇게 예민해졌기 때문에 예전 같으면 개꿈이라고 치부했을 꿈을 단순한 꿈이 아니며, 정한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까지 추리할 수 있었다. 석민은 모든 걸 다 잃기만 한 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면서 정한과 접촉하면서 BSK 그룹 사람들의 기억이 넘어오는 것 같은데 잘하면 정한의 소망이 뭔지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까지 생겼다.

“혹시 내가 배다른 형과 이름이 같아서 내 곁에 있나?”

아, 이건 아닌가? 이리저리 데굴데굴 머리 굴리던 석민은 한 가지 가설을 중얼거렸고 이내 폐기했다. 아무리 한이 많아도 그렇지, 이름 같다는 이유만으로 석민의 곁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보니까 성격도 하는 행동도 다 다르더만! 석민은 본인 기준 재수 없는 꿈속 석민을 떠올리자마자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꿈꾼다는 거, 말할 거 그랬다.”

석민은 모든 걸 말해달라는 한솔에게 너무 많은 걸 숨긴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정한의 정체도, 꿈도 말하지 못했다. 물론 매일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이번이 세 번째이긴 했지만, 한솔은 석민의 증상을 유일하게 해소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말할까 고민하던 석민은 문득 민규 아버지 역시 꿈을 꾼다고 들은 걸 떠올렸다. 혹시 아저씨도 나랑 비슷한 꿈을 꾸나? 꿈이 전염될 수도 있나. 석민이 머리만 긁적이고 있을 때, 석민의 폰이 반짝였다. 확인해보니 한솔이었다. 석민은 정한이 제 주변에 있나 다시 한번 쭉 둘러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혹시라도 소리 듣고 나타날까 봐 석민이 속삭이듯 말하자 한솔은 혹시 감기라도 걸렸냐고 되물었다.

“감기는 무슨. 맞아. 그나저나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정신이 없어서 못 물어봤네. 아저씨한테 무슨 일 있었던 것 같던데.”
- 아저씨 쓰러졌었어요.
“엉?”
- 걱정할 일은 아니에요. 잠시 기절했던 거라. 요즘 잘 못 주무시거든요. 잘 때마다 꿈을 꿔서.

또 꿈 얘기. 석민은 지금이야말로 자신도 꿈을 꾼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뒤이은 한솔의 말에 석민은 또다시 꿈 얘기를 하지 못했다.

- 형. 나, 형이 갔다던 숙소에 왔어요.
“어? 왜?”
- 와봐야 했으니까. 형, 추리물 본 적 있죠? 거기서 그러잖아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건 현장을 방문해야 한다고. 그래서 왔죠. …별로 오고 싶진 않았지만.
“왜? 거기가 살인현장이라서?”
- 그걸 어떻게 알아요?
“유명하던데? 사람 죽어 나간 곳이라고. 지금이야 싹 다 리모델링 해서 무섭지는 않던데.”
- 아아, 소문.

한솔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숙소는 아무도 없는지 한솔의 발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어왔다. 평소 성격처럼 느긋하게 들리던 발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다급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뚝 그쳤다. 의아해진 석민이 한솔의 이름을 부르자 한솔은 한참 대답하지 않다가 서늘한 목소리로 형.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요? 라고 물었다.

“어? 뭘?”
- 다른 귀신 곁에 없다고 했잖아요.
“어?”
- 그 귀신이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석민은 침묵했지만, 한솔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 형. 귀신이 오랫동안 한 장소에 머물면 그곳에 묶이게 돼요. 만약 그 귀신이 장소를 떠난다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고. 지금 내가 찾은 흔적이 총 두 개예요. 형. 정말 형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

있어. 석민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석민은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뒤에서부터 감아오는 팔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늦게 찾아갔냐고 물어봐. 뭐가 무서워서 문제가 생겨도 찾아가지 못 했냐고.”
“…”
“싫어? 말이 너무 길어? 그러면 이걸로 하자. 따라 해. 박태산은.”
“…박태산은.”
“내가 풀어줬다.”
“내가 풀어줬다…. 뭐?”

순식간의 일이었다. 당황한 석민이 뒤를 돌자마자 정한은 석민의 폰을 뺏어 창문 밖으로 집어 던졌다. 눈 한번 깜빡였더니 폰을 잃어버린 석민은 비명을 질러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석민이 얼어붙어서 입만 뻐끔거리자 정한은 석민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리고 석민을 문밖으로 끌어당겼다.

“최한솔. 박준기 곁에 없다며. 지금. 그러면 박준기한테 갈 거야. 죽더니 남 탓하는 버릇이 심해져서 모두 다 찢어 삼키겠다고 매일 발악을 했거든.”
“그, 그런 걸 풀어줬다고요?”
“응. 내가 그곳에서 나와서 따라 나왔어.”

귀신이 귀신을 잡아둘 수 있나?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 가지 않았지만, 석민은 정한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민규 아버지가 위험했다. 어쩌면 같이 있을 민규도.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 한솔이가 쓴 부적이 있으니까!”

부적은 통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그것들은 제대로 된 형체를 갖추지도 못하고 부적의 힘에 의해 사라지고는 했다. 그러니 한솔이 곁에 없다 한들 부적이 집을 지키고 있으니 괜찮을 거였다. 하지만 석민은 키득키득 웃으며 따라오는 정한이 불길했다.


*


민규의 집 앞에 도착한 석민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절대 하나로 뭉칠 리 없어 보였던 그것들은 이리저리 뒤엉키더니 집보다 큰 살덩어리가 되어 몸집을 부풀려가고 있었다. 석민은 점점 사람 형체로 변하는 것을 보고 당장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는 피거품을 물고 쓰러진 민규의 아버지와 아버지를 업고 밖으로 나가려던 민규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석민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볼 새 없이 민규의 팔을 잡고 집 밖으로 달려나갔다. 도망가야 했다. 어디로? 그건 몰랐다. 그저 저 귀신을. 촛농으로 얼룩져 이목구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귀신에게서 도망가야 했다.

“박석민.”

뚜렷한 목소리였다. 잔뜩 쉬어있기는 했으나 석민은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꿈에서 석민을 그렇게나 학대했던 아버지. 회장님. 박태산.

“박준기.”

박태산이었다.

“박민규.”

석민은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둘을 데리고 도망가야 하는 데 도저히 힘이 나지 않았다. 바닥을 기어서라도 도망치려니 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바닥만 벅벅 긁는 석민에 민규는 갑자기 너까지 왜 그러냐며 연신 주변을 살폈다. 도와줄 사람을 찾는 듯 보였다.

“박석민.”

박태산은 촛농이 뚝뚝 녹아 흐르는 커다란 손을 석민에게 뻗었다. 화끈한 열기에 석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름밖에 불리지 않았지만, 석민은 박태산이 자신에게 무엇을 할지 알았다. 죽일 것이다. 산 채로 찢어 삼켜 죽일 것이다.

“회장님. 저는 안 보이십니까.”

박태산은 석민을 공격하지 못했다. 석민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선 정한이 박태산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정한은 총을 바닥에 탁탁 치며 박태산의 시선을 끌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박태산의 손은 석민이 아닌 정한에게 갔다

“박정한.”
“윤정한이죠. 죽어서까지 박씨 성으로 불려야 하나?”

정한의 도발에 박태산의 몸이 이상하게 변했다. 꿀렁꿀렁 움직이던 몸에서 작은 사람의 형태들이 튀어나와 비명을 질렀다.
하등쓸모도없는놈들너희들이나를죽였다박준기박민규박정한박석민너희들이회사를말아먹었다너희들이나를이렇게만들었다너희들의사지를찢고영혼골수까지빨아먹어다시힘을되찾을테다너희들이밉다증오스럽다버러지같은새끼들그냥먼저죽였어야했는데

“비록 내가 박씨 집안을 싫어하긴 하지만, 말은 바로 합시다. 당신이 말아먹은 거지. 당신 인생은.”

정한은 총을 들어 박태산에게 겨눴다. 박태산은 이제 그깟 총으로 자신을 막을 수 없을 거라며 꽥꽥 소리 질렀다. 그러나 총알이 얼굴 부위를 뚫고 지나가며 얼굴을 이루고 있던 촛농과 작은 형태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왜 못 막아요. 당신을 여태까지 막은 게 난데. 왜. 살아생전에는 장기 말로 쓰던 것이 죽고 나니 더 강해져서 불만이에요?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요. …아. 내가 방금 없앴구나.”

끼에에에에엑!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얼굴 부위를 벅벅 긁던 박태산은 피 대신 촛농을 철철 흘리며 정한에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손이 날아갔다.

“몸을 만들고 나니까 저보다 강해진 것 같았어요? 웃기네. 한때 회장직에 있었던 사람이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나.”

총알을 다시 장전한 정한은 이번에는 반대편 손과 다리를 향해 총을 쐈다. 박태산이 무너지며 몸을 구성했던 신체 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정한은 그것들을 밟으면서 신체 크기마저 작아진 박태산에게 다가갔다.

“보통 원귀는 복수 때문에 구천을 떠돌죠. 회장님처럼. 하지만 저는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정한은 괴이하다 못해 듣기 싫은 소리만 내는 박태산을 꾹 밟더니 머리에 총을 겨눴다.

“그래서 난 당신보다 강한 거야. 난 당신한테도 복수할 마음 없거든. 단지 갖고 싶을 뿐이지. 무언가를 갖고 말겠다는 마음이 복수하겠다는 마음보다 더 질척거리는 거 알죠? 그게 악귀한테는 꽤 좋은 감정이더라고. 강해지기도 하고.”

마지막 총소리와 함께 박태산과 박태산에게서 나왔던 것들이 가루가 되어 정한에게로 모였다. 한참 정한의 주변을 떠돌던 가루는 정한의 손짓에 정한의 몸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평온해진 주변에 석민은 그제야 민규를 찾았다.

“형!”

저 멀리서 한솔이 뛰어오고 있었다. 석민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민규를 못 봤냐고 물어봤더니 안 그래도 마주쳤는데 다시 돌아와서 석민을 돕겠다는 걸 겨우 진정시키고 병원으로 보낸 참이었다고 했다.

“형.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 있길래 주변이 이렇게 깨끗해졌어요?”
“설명하려면 긴데. 우선 주변 깨끗해진 건…”

부회장 살인 최 비서한테 맡겨도 되겠죠? 주변 깨끗하게 정리하는 거. 어렵지 않죠? 걱정 마요. 회장님 살인은 내가 할 거니까. 어린 것들이 모르게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더러운 건 우리 선에서 다 해결해야지.

갑작스러운 기억. 석민이 비틀거리자 한솔이 괜찮냐고 석민을 부축했고 석민은 그런 한솔의 팔을 붙잡았다.

“최 비서?”

혼란스러운 석민과 다르게 한솔은 잠시 놀라워했을 뿐 이내 평소와 같은 얼굴을 했다.

“기억나셨군요.”

평소와 다른 말투. 석민은 한솔의 부축을 뿌리치고 뒷걸음질 치다가 벽에 부딪혀 주저앉았다. 그런 석민의 곁에 정한이 다가왔다. 그리고 속삭였다.

“이제 내가 보인다고 말해도 돼. 모든 게 다 해결됐으니.”

그 새끼도. 네 기억도. 키득키득. 정한이 웃었다. 키득키득. 씁쓸하게 웃거나 장난스럽게 웃는 게 아니었다. 미쳐버린 것처럼 그렇게 웃었다.
아. 그렇구나.
그제야 석민은 인정했다. 한솔의 말처럼 순환의 고리를 끊은 자는 악귀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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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에 이유는 없어
나의 모든 이유를 네가 가르쳐줘서
세상 어느 곳에서도 난 너라고 말해

영원한 작품 안에서 우리 함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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