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마주치지 말 것 上
01.
어스름한 새벽, 지나가는 사람의 형체만 겨우 눈에 들어올 시간. 원래라면 늘어지게 넷플릭스나 둘러보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할 심성은 안 됐던 석민은 간곡한 점장의 부탁에 결국 빵꾸난 알바 시간을 메꿔주고 오는 길이었다. 뭔 가로등이 불이 이렇게 약해... 답지 않게 짜증이 올라오던 참이었다.
툭-.
어어라, 이 시간에 여기에 또 누가 있었나. 뒤를 돌아보니 한 사내가 떨어진 비닐봉지를 황급히 주워 담는 중이었다. 이런 걸 가만히 두고만 못 보는 성격이라 석민은 바로 달려가 같이 주워줬다. 아유, 그래도 술은 안 깨져서 다행이네요. 사람 좋게 말을 걸며 다 정리된 봉지를 그에게 건네주던 석민은 그대로 굳었다. 음, 이거 뭔가 이상한데. 저 손가락이, 저렇게 꺾여있으면 안 되는데. 순식간에 식은땀이 제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떨리는 손을 황급히 숨기며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자,
마주쳤다. 아무리 제가 눈치가 없대도 단번에 알아챘다. 어두운 시야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서슬 퍼런 그의 퍼런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사내는 사람이 아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애써 움직여 뒷걸음질 치자 눈이 마주쳤던 그것은 석민을 천천히 따라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석민의 속도에 맞춰서. 마침내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그는 본색을 드러냈다. 우두둑거리며 고개를 푸는 몸짓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차피 이 시간에 아무도 없을 걸 알아 석민은 그저 눈물범벅인 채 눈만 꾹 감을 뿐이었다.
“찾았다.”
인기척도 없이 홀연히 나타난 사내가 태연히 걸어왔다. 그 인외의 존재는 불쾌한 듯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뒤돌아 사내를 마주했다. 크르릉- 낮게 울리는 짐승의 소리에 석민은 벌벌 떨며 있는 대로 몸을 구겼다. 제 귀에 들리는 기분 나쁜 소리에 두 손으로 귀도 막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저기,”
“으압,”
“시끄러워... 지금 새벽인 거 잊었어?”
“아, 아... 아, 저 살려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진짜, 진짜...”
아까의 그 괴물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고, 길목은 고요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석민은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사내를 마주 봤다. 뭔 이유인지 뚫어져라 쳐다보는 바람에 말랐던 식은땀이 다시 흐르는 기분이었다. 괜히 말 꺼내기가 조심스러워 눈치만 보고 있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덕분에 살았네. 그치?”
“...감사합니다...”
“혹시, 구해준 대가로 잠깐 집에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02.
처음 봤을 땐 진짜 멋있었는데. 석민은 알바를 하던 중에도 제 침대 위에 늘어지게 누워있을 정한을 생각하면 한숨만 쉬었다. 그날 봤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나. 아직도 석민은 왜 순순히 제집으로 그를 들였는지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물론 그 때는 너무 감사해서 정한의 뒤로 후광을 봤었지만 말이다.)
“도겨마, 도겨마!”
제 이름은 석민이라고 몇 번을 말했음에도 고집은 세서 다 새는 발음으로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이름을 부르지 않나,
“에이,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데!”
“언제부터 사셨는데요.”
“아주 내가 아주 오래전! 이런 요상한 물건들은 있을 턱도 없을 시절, 길거리 모든 사람이 다 한복이란 거 입고 다닐 때부터 살았다구!”
“아 그러셨어요...”
“너 안 믿어? 이거 진짜라니까?”
“아 믿죠, 믿고말고. 암요.”
이젠 믿어주기도 힘든 헛소리를 해댔다. 초반에 몇 번 받아준 게 잘못이었는지, 정한은 틈만 나면 곡소리를 내며 넋두리했다. 요즘 것들은 말이야, 배려도 없고 뭐도 없고... 석민은 이제 그런 정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데 도가 텄다. 흔한 레퍼토리라 그럼 뭐 왕이나 이런 사람들이랑 친하냐고 물었더니, 그건 또 아니란다.
“에이, 무조건 그런 사람들이랑만 친했어야 옛날 사람인가? 너 그거 아주 잘못된 생각이야.”
“아 예 뭐...”
“근데 그런 말은 어디서 들어보고 물어보는 거야?”
“정한님 같은 얘기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던데,”
“아니, 나는 그 사람들이랑은 다르다니까! 진짜 답답하네! 잠만, 근데 나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말래도!”
대충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줘야 겨우 그 얘기를 그만두곤 했다.(물론 이야기를 끝내면서도 얼굴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살치살! 도겨마, 살치살 먹자!”
돈 없다는데도 살치살을 먹고 싶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예정에도 없던 돈을 쓰느라 생활비가 살짝 쪼들리게 되었다. 나간 돈을 계산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석민의 뒤에서 정한은 그저 배부르다며 벽에 등을 기대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정한이 웃는 걸 볼 때면 석민은 이상하게 짜증이나 화가 나다가도 가라앉았다. 에휴, 그래 내가 들였는데. 내 팔자지.
“도겨마, 내일은 짜글이 어때?”
“아, 오늘 먹고 싶다는 대로 살치살 사서 구워드렸잖아요!”
“에이, 그거랑은 다르지. 이건 구운 거고, 그거는 뜨끈한 국물 요리!”
소리를 잘 지르지도 못하면서 악을 쓰며 짜글이를 내지르는 정한에 석민은 그만 픽 웃고 말았다. 가뜩이나 큰 눈을 더 부라리며 지금 저를 비웃었냐며 땍땍거리는 정한을 뒤로 하고 석민은 내일 장 볼 목록에 차돌박이를 추가했다.
03.
아, 그렇지. 꿈이지.
석민은 잠에서 깼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저를 괴롭혀오던,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혼자서만 견뎌왔던 악몽. 그날의 기억은 저도 모르게 깊숙이 박혀 시도 때도 없이 괴롭혔다. 갑작스레 달려든 크고 빠르고 강한 빛에 부모님은 어린 석민을 안고 보호하기에 급급했고, 결국 그날 그곳에서 살아남은 것은 석민 하나였다. 달려든 차에 타고 있던 사람도, 석민의 부모도 모두 세상을 떴다. 5살 남짓 되던 석민은 죽음이라는 게 뭔지 몰랐다. 부모님을 보내주는 마지막 날까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사람은 석민이 유일했다.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석민을 키워주던 삼촌은 어느 날 술에 잔뜩 절여진 채 제게로 와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더 이상 보살펴줄 수 없을 것 같다고.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네가 너무 밉다고. 석민을 살리지 않았으면 둘 다 살 수 있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석민은 제 몸 안의 모든 피가 다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아, 그래서 그동안 다들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그저 흐느끼는 삼촌의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곧바로 짐을 싸 들고 나왔다. 그 누구에게도 연락은 없었다.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사실 그 이후로 어떻게 지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그 기억을 잃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고등학교 3년의 시절이 기억이 희미했다. 그때는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악몽을 꿨다. 저를 보며 원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부모의 얼굴이 너무 젊어서, 어렸을 때의 그 모습과 너무 같아서, 그게 너무 괴로웠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식은땀이 흥건한 베개를 대충 몇 번 쓸어내리다, 문득 옆을 바라보니 텅 비어있었다. 혼자서 못 자겠다고 그렇게 조르는 바람에 애써 돈 들여서 큰 매트리스도 샀구먼. 이렇게 혼자가 된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석민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선을 멀리 향했지만, 어디에도 정한은 없었다. 대체 또 어딜 간 건지. 처음 나간 걸 들켜 어디에 간 거냐고 물어봐도 정한은 입만 꾹 다물었다. 절대 안 알려줄 것 같아 괜찮으니까 다음부턴 꼭 말하고 나가라고 얘길 해도 말을 안 들었다. 그럼 그렇지.
석민은 정한의 온기조차 남지 않은 매트리스의 빈 곳을 괜히 손을 뻗어 만져보다 멈췄다. 언젠가는 내 옆에 없을 수도 있는 사람인데, 아니 없을 텐데, 어쩌자고 이렇게 마음을 많이 줘버렸지.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이제는 정한이 있던 게 익숙해져 현실을 잊고 있었다. 나는 원래, 혼자인데. 혼자였는데. 젖은 앞머리가 제 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석민은 마치 제가 물먹은 솜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고 곧 가쁜 숨을 내쉬는 정한이 눈에 들어왔다.
“석민아.”
평소완 다르게 낮은 목소리에 단단한 말투가 낯설었다. 그마저도 너무 반가웠다. 석민이 공허한 눈으로 고개를 들자 정한은 답지 않게 서둘러 방에 들어왔다. 힘없이 앉아있는 석민의 곁으로 정한이 스르륵 다가와 앉았다.
“악몽 꿨어?”
“...”
“미안, 진짜 미안해. 또 혼자 뒀네. 안 그러려고 했는데.”
정한은 석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식은땀에 젖어 곱슬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볼에 흐른 선명한 두 줄기의 눈물 자국도 문질렀다. 그러곤 그대로 제 품에 석민의 얼굴을 안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몸 안에 무언가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정한의 옷이 뜨겁게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용히, 아무 소리 없이, 석민은 울었다. 잇새로 단 한 마디도 새지 않고 어깨도 들썩거리지 않으면서, 정한의 품 안에서 제 안에 응어리진 것들을 풀어냈다. 정한은 그런 석민을 미동도 없이 안아 주었다. 따뜻한 손으로 등을 쓸어주었다.
04.
“알바 가지 마.”
“예?”
“가지 말라구. 그 편의점 가서 하는 거, 그거 하지 말라고.”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대체?”
“가지 말라면 가지 마.”
“그럼 어떻게 살아요, 돈이 없는데...”
막무가내였다. 석민은 기가 찬다는 듯 허망한 표정으로 정한을 바라봤고, 정한 역시 물러설 생각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석민을 쳐다봤다. 아, 이렇게까지 굳세게 고집부리는 건 또 처음인데. 석민은 난처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알바하러 막 신발을 신고 나가려던 참이었으니까. 요즘 제가 나가는 모습을 문이 닫힐 때까지 바라보는 걸 눈치챘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알바도 일종의 약속인데... 그리고 집 근처에 여기 편의점만큼 가까운 곳에 알바자리 구하기 힘들어요.”
“그럼, 눈을 마주치지 마.”
“예?”
“그러면 오는 사람들이랑은 눈 마주치지 말구,”
“저는 알반데요...?”
“말 끊지 말구. 나도 다 뜻이 있어서 하는 소리거든? 얼릉, 걍 집에 있든가 눈 마주치지 말든가. 둘 중 하나는 해.”
“안 돼요. 대신 오늘 살치살 사 올게요. 예?”
“야!”
쏘아붙이는 정한을 뒤로하고 얼른 현관문을 나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 귀에 들어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석민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어휴, 조금만 더 들어줬으면 늦을 뻔했네.
“예, 안녕,”
뚱한 표정의 정한이 조금은 거칠게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생각보다 더 짜증이 난 것처럼 보여 석민도 당황스러웠다. 아니, 맨날 다니던 건데 왜 갑자기... 일단 추호도 먼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여서 아무거나 하나 집어 계산한 뒤 입에 물려줬다. 정한은 처음 먹어보는 소시지에 감탄하며 원래도 큰 눈을 배는 크게 뜨고는 조금씩 베어 물었다.
“맛있어요?”
“웅.”
“맛있으면 몇 개 더 사 줄게요.”
“너 엉제 끝나?”
“음, 얼마 안 남았어요! 어차피 지금 시간에 사람 많이 없으니까 거기 걍 앉아 있어요. 상관없을 거예요.”
“야, 이거 진짜 맛있다? 왜 이제껏 안 사 준건데!”
석민은 평소보다 조금은 더 생기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정한에게 소시지 몇 개 더 쥐어둔 뒤 계산대에 앉았다. 진짜 조금 남은 알바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평소완 다르게 저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어서 더 그랬을지도. 정한이 어렵다며 징징대는 바람에 소시지 포장을 하나 더 까주고 돌아서는 차에, 땡그랑 소리를 내며 손님이 한 명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편의점에 들어오는 손님 태반은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했기에 석민은 돌아서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냥 가만히 있었다. 투둑- 저 멀리 들리는 통조림 소리에 다가가 보니, 이미 여러 개를 집어 손이 가득 차버린 손님이 커피 땅콩 하나를 집다가 떨어뜨린 듯했다.
“아, 그거 제가 정리할게요. 계산대에 올려놔 두고 기다리세요.”
커피 땅콩 두 캔을 다시 올려두고 계산대에 가는 길에, 손님을 쏘아보는 정한을 봤다. 화들짝 놀란 석민은 여기서도 습관처럼 소리 지를까 봐 손으로 입을 텁 막고는 정한에게 다가갔다.
“아니, 뭐 하시는 거예요. 손님이잖아요.”
“...”
“제 말 안 들리세요...? 눈 좀 풀어요...!”
정한은 아랑곳 않고 사나운 눈빛으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석민이 말려도 들은 체도 안 했다. 석민이 그만하라며 천하장사 하나를 더 까서 입에 쑤셔 넣으려는 찰나, 가만히 서서 기다리던 손님이 참다못해 뒤를 돌았고 결국 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듯 흔들리는 그녀의 동공에 석민은 하하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지금,”
석민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손님은 계산도 안 한 채 계산대에 집었던 모든 것들을 올려두곤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어이없는 상황에 석민은 그대로 가만히 계산대의 물건들을 바라봤고, 정한은 그녀가 다짜고짜 나가버린 유리문의 움직임이 멎을 때까지 사나운 눈빛을 풀지 않은 채 주시했다.
“아니, 뭐 하세요?”
“...뭐”
“...답 느린 거 보니까 잘못한 건 아시나보네?”
“아니, 그니까는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석민은 제 눈치를 보는 정한이 조금은 웃겼다. 사실 그렇게 화나진 않았는데. 물론 손님이 두고 간 것들은 고스란히 제가 치워야 할 것들이 되어버렸지만, 알바 입장에서 상대할 손님이 없어진 게 최고로 좋은 거 아닌가. 그걸 알 턱이 없는 정한만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며 말없이 제자리로 돌려놓는 석민의 뒷모습만 좇을 뿐이었다.
“...도겨마,”
“왜요.”
“그, 내가 막 그러려던 건 아닌데...”
“알겠어요, 이제 나 알바 다 끝났으니까 나와요. 살치살 사러 가야죠.”
“살치살?”
“엥? 사가겠다고 아까 약속했잖아요? 아니면 혼자 집 가게요?”
“아니!”
종알종알 지치지도 않는지 신난 정한의 모습에 석민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피식 웃는 소리에 또 토끼눈이 되어서는 팍 석민을 바라봤지만, 석민은 그마저도 웃음이 나왔다. 아, 혼자 다니다가 둘이 다니니까 좋은 것 같은데. 가끔 나와서 같이 장이나 보자고 할까. 살짝 상상했던 석민은 곧 제가 그리웠던 거냐고 능글맞게 웃을 정한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 지금 내 말 안 듣고 있찌! 아이, 아뇨아뇨 아주 잘 듣고 있죠.
05.
간만에 알바도 안 가고 쭉 집에 있는 날인데, 석민은 편히 있지 못했다. 오늘따라 축 처진 정한 탓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표정이 최근 봤던 정한의 표정 중 가장 어두웠다. 아, 이를 어쩌지. 겨우 날씨가 나쁘다는 이유로 이렇게 축 처질 사람이 아닌데. 며칠 전부터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김치찌개에 특식인 동그랑땡도 야무지게 부치다 슬쩍 뒤를 돌아봤다. 누가 봐도 무슨 일 있어요, 하는 표정임에도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석민은 그게 답답했다. 왜 나한테는 그런 거 하나도 말 안 해주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항상 물어봐도 괜찮다며 회피할 뿐이었다.
“정한님.”
“...”
“정한님!”
“어, 어 왜. 뭔 일 있어?”
“저녁 다 했다고 열 번은 부른 것 같은데. 안 들렸나 봐요?”
“아, 미안.”
“아니, 뭐 미안할 건 아니고. 빨리 와서 밥이나 먹어요.”
바닥에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직직 들렸다. 아니, 이거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걸 텐데. 하지만 석민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맨날 알바한다고 밖에만 나가놓으니 어디서 뭔 일을 겪었는지 석민이 알 턱이 있나. 시원치 않은 젓가락질이 눈에 들어왔다. 아, 어쩌면 좋냐.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필살기를 썼다.
“자, 여기 밥에 김치! 계란말이도 있네? 입 벌리세용 들어간다 아~”
“...뭐야 너?”
“아 빨리, 팔 떨어지겠다!”
“...”
조금이나마 밥을 먹기 시작한 모습에 석민은 괜히 뿌듯했다. 정한의 얼굴도 조금은 풀어진 듯했다. 너 지금 나 애 취급하냐? 내가 너보다 몇 살은 많은데! 툴툴거리면서도 아가 새처럼 받아먹는 정한에 석민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아유, 당연히 많으시죠. 암요, 그렇고말고. 몇 숟갈 받아먹던 정한은 이번엔 저게 먹고 싶다며 손으로 가리키기까지 했다.
“어어? 이 사람 좀 봐, 진짜 애가 된 거 같은데?”
“아, 나 저거 먹구싶어 빨리. 나 아 하고 잇자나.”
정한의 웃는 모습까지 보는 데 성공한 석민은 뿌듯한 마음으로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했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콧노래에 사실은 조금 놀랐다. 제 덕분에 조금씩 올라가던 입꼬리를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았다. 아직 올라오는 흥을 다 감추지 못한 채 설거지를 마치고 손의 물기를 털며 뒤를 돌아보면,
“...정한님.”
언제 웃었냐는 듯 다시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정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나는 아직 이 사람을 알기엔 멀었나. 자기도 괜히 섭섭해지는 마음에 조심히 다가갔다. 그런 석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한은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거들떠도 안 봤다. 초점 없이 아무 데나 흐트려놓은 시선은 석민을 향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뭔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뭔 일이 있으셨길래 이렇게 하루 종일을 시무룩해서 있으실까.”
“...”
“아직 말해주기 껄끄러워요? 아직 어려워?”
“...미안...”
“...미안할 건 없어요. 내가 뭐라고.”
“어, 어? 아니, 도겨마,”
“저 석민이에요.”
저도 모르게 세게 나온 말에 속으로 당황해서 생각보다 빨리 대화를 마쳐버렸다. 오늘 하루 동안 혼자서 속으로 앓으며 힘들었을 정한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석민은 철없는 저를 마구 때리고 싶었다. 끝없는 후회를 하다가 문득 짜증도 밀려왔다. 아니, 나도 온종일 내 집에서 불편하게 눈치 보며 살았는데. 아무 말도 안 해주면 뭘 해주고 싶어도 못 해주는 걸 뻔히 알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해? 아직도 내가 막, 마냥 어리게만 보이고 그러나? 아직도? ...이 사람에게도, 나는 또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가? 결국 나만, 나만 또. 자꾸만 빠져나오려는 잡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마구 흔들고 정한이 씻고 있는 욕실만 노려봤다. 혼자 힘들었을 저 사람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 걸 알면서, 또 애같이. 바보같이. 물밀듯 밀려오는 피곤함에 대충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으...으으...”
“정한님! 일어나 보세요! 얼른!”
눈을 꾹 감은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힘겹게 쉬는 정한을 발견했다. 황급히 깨웠다. 이유 모를 두려움이 몰려와서, 손은 사시나무 떨듯 떨렸고 심장은 터질 듯 뛰어댔다. 그렇게 몇 번을 흔들고 귓가에 소리치자 정한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겨우 제 말에 대답하는 정한에 석민은 온몸에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나 좀 봐,”
“고마워.”
“예?”
얼굴을 살피려던 석민을 그대로 꽉 안아버린 정한이었다. 고맙다니, 대체 뭐가? 내가 뭘 했는데 고맙다고 하는 거지? 영문 모를 석민은 일단 가만히 안겨있었다.(매달려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점점 안정을 찾아가는 숨소리에 석민은 굳어 있던 손을 들어 제게 안겨(매달려)있는 정한의 등을 천천히 쓸어줬다. 이전에 그가 제게 했던 것처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어느새 정한은 석민의 품에서 안정을 되찾고 편한 숨소리로 잠이 들었다. 아휴, 이렇게 꺾여서 자면 목은 안 아픈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정한을 매트리스에 눕힌 석민은 다시 제 자리에 몸을 뉘었다. 그러고서도 한참을 정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시나 다시 악몽을 꾸게 될까 봐. 힘들어하는 데 자신이 옆에 있으면서도 알지 못할까 봐.
06.
“가지 말라니까.”
“아니, 제발요. 고집 좀,”
“아니, 가지 말라구. 이 시간에 어딜 나가!”
“말했잖아요, 알바 대타라니까...”
“근데 왜 지금인데!”
에휴. 석민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한이 분리수거를 하러 나간 사이 몰래 나갈 준비를 하던 게 화근이었다. 토끼 눈을 뜬 채 다가와 꼬치꼬치 묻자 석민은 결국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저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석민은 그저 바닥만 바라볼 뿐이었다.
“돈은 더 준다니?”
“...”
“너, 너 그런 것두 모르면서 이 시간에 나가게?”
할 말은 없었다. 어쨌거나 을인 입장에서는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으니까. 못 들은 척 나갈 준비나 하는 저를 따라다니며 이래저래 잔소리해대는 정한에 어쩐지 석민은 조금씩 억울해졌다.
“왜 말 안 했는데. 나한테는 미리 얘기해줄 수 있었잖아, 그럼 같이 나가든가 하지.”
“에? 왜요...?”
“아니, 위험하니까...!”
“에이, 됐어요. 그냥 집에 있어요, 뭐하러 나오려고.”
“내가 뭐 어때서!”
“또 이래 정말...”
“...너 나 싫어?”
엥, 이게 아닌데. 가라앉은 정한의 표정에 석민은 당황했다. 갑자기 이렇게 진지해질 일인가...? 싫다는 게 아니라 굳이 이 시간에 나오지 말라는 거였는데.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석민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
“그, 귀찮게 굳이 나오지 말라는 거였어요...”
“...넌 내가 귀찮아?”
악, 금방이라도 석민은 제 머리를 치고 싶었다. 가뜩이나 설명도 못하는 편이라 이런 상황에서는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앞뒤 다 자르고 툭 말해버렸다. 더 어두워지는 낯빛에 석민은 울고 싶었다. 이게 아닌데...
“...”
“저기...”
“시간 빠듯하다며...”
축 처진 어깨에 석민의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그 와중에 시간은 왜 이리 빠르게 갔는지, 지금이라도 나가지 않으면 정말 늦을 것 같았다. 결국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 집을 나섰다. 밤이라 그런지 제 몸을 감싸는 서늘한 기운이 오늘따라 더 불쾌했다.
넘쳐나는 취객들에 석민은 울고 싶었다. 어쩐지 점장이 답지 않게 제게 조심스럽게 말하나 했다. 새벽에 얌전히 집에나 들어갈 것이지... 밖에 널부러져 딴 세상 간 사람들을 겨우 처리하고, 누군가 술김에 엎어둔 쓰레기도 정리해도 할 일이 끝이 없었다. 그래도 석민은 틈만 나면 집에 혼자 구겨져 있을 정한을 생각했다. 언제 끝나는지도 말 안 해줬는데, 새벽까지 미련하게 기다릴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 더 그랬다.
이제 끝인데, 아무도 안 왔으면 좋겠다. 하늘도 무심하신지 이 생각을 한 지 1분도 안 돼서 바로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석민의 친절한 말에 대답도 않고 비틀거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잔뜩 취했구만. 석민은 제발 어지르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었다. 한 5분 정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을까, 사내가 발을 질질 끌며 계산대로 걸어왔다.
“총 4300원,”
갑자기 홱 들려지는 고개에 화들짝 놀란 석민은 하마터면 손님의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쿵쾅대는 심장을 겨우 다 잡으며 다시 고개를 든 석민은 그대로 손에 쥐고 있던 초콜릿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눈 깊숙한 곳의 시퍼런 눈을 마주했다. 덜컥 찾아온 두려움은 숨 쉬는 법을 잠시 까먹을 정도로 석민을 옥죄어 왔다. 이미 겁을 잔뜩 먹은 석민의 표정에 사내는 재밌다는 듯 낄낄거렸다.
눈 깜짝할 새에 석민은 편의점에서 떨어진 골목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미치지 않는 구석진 곳이었다. 순식간에 사내는 굽었던 등을 피고 삐걱대며 굳은 목을 풀었다. 어느새 석민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곧 인간의 형체와는 한참은 멀어진 그는 석민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뒷걸음질 치다 벽을 맞닥뜨린 석민은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정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마지막이 그랬으면 안 됐는데. 석민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한참을 있어도 아무 일도 없어 슬며시 눈을 뜨자 너무도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급하게 나왔는지 신발도 양말도 짝짝이였다. 몇 배는 큰 괴물을 앞에 두고 꿋꿋이 서 있는 모습이 반가웠다. 정한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아, 이 사람은 항상 나를 구해주는 구나. 이석민이라는 사람은 윤정한이라는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 걸까. 궁금해졌다. 석민에게 정한은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답답하게 애같이 굴어서 가끔은 나이를 어디로 먹었나 싶을 땐 언제고, 왜 이럴 땐 또 그 사람만 생각이 난 건지.
갑자기 터지듯 제 눈을 찔러오는 푸른 섬광에 석민은 눈을 꽉 감았다. 눈을 비비며 슬며시 뜨니 무릎을 꿇은 채 떨고 있는 정한이 보였다. 다른 건 생각할 틈이 없었다. 오직 정한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힘이 풀려 바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고 정한에게로 향했다. 긴장감에 떨리는 손을 겨우 들어 정한을 안았다.
“무슨 일이에요. 나 봐요, 얼른. 나 봐봐.”
정한은 석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떨리는 등에서 온전히 느껴지는 열기는 정한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하게 했다. 예전부터 알고 싶었다. 대체 뭐가 이 사람을 그렇게도 힘들게 하는 건지. 꽉 문 잇새로 앓는 소리를 내자 석민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심장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한 번 더 등을 두드리자 이제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석민은 손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부드러운 손길로 정한의 얼굴을 잡았다. 이미 울었는지 볼을 잡은 손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나 봐요 얼른.”
약간의 실랑이 끝에 겨우 눈을 마주했다.
어,
석민은 믿을 수 없었다.
어라,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눈이,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정한의 모습에 석민은 말을 잃었다.
눈이 왜 그래요?
어스름한 새벽, 지나가는 사람의 형체만 겨우 눈에 들어올 시간. 원래라면 늘어지게 넷플릭스나 둘러보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할 심성은 안 됐던 석민은 간곡한 점장의 부탁에 결국 빵꾸난 알바 시간을 메꿔주고 오는 길이었다. 뭔 가로등이 불이 이렇게 약해... 답지 않게 짜증이 올라오던 참이었다.
툭-.
어어라, 이 시간에 여기에 또 누가 있었나. 뒤를 돌아보니 한 사내가 떨어진 비닐봉지를 황급히 주워 담는 중이었다. 이런 걸 가만히 두고만 못 보는 성격이라 석민은 바로 달려가 같이 주워줬다. 아유, 그래도 술은 안 깨져서 다행이네요. 사람 좋게 말을 걸며 다 정리된 봉지를 그에게 건네주던 석민은 그대로 굳었다. 음, 이거 뭔가 이상한데. 저 손가락이, 저렇게 꺾여있으면 안 되는데. 순식간에 식은땀이 제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떨리는 손을 황급히 숨기며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자,
마주쳤다. 아무리 제가 눈치가 없대도 단번에 알아챘다. 어두운 시야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서슬 퍼런 그의 퍼런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사내는 사람이 아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애써 움직여 뒷걸음질 치자 눈이 마주쳤던 그것은 석민을 천천히 따라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석민의 속도에 맞춰서. 마침내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그는 본색을 드러냈다. 우두둑거리며 고개를 푸는 몸짓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차피 이 시간에 아무도 없을 걸 알아 석민은 그저 눈물범벅인 채 눈만 꾹 감을 뿐이었다.
“찾았다.”
인기척도 없이 홀연히 나타난 사내가 태연히 걸어왔다. 그 인외의 존재는 불쾌한 듯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뒤돌아 사내를 마주했다. 크르릉- 낮게 울리는 짐승의 소리에 석민은 벌벌 떨며 있는 대로 몸을 구겼다. 제 귀에 들리는 기분 나쁜 소리에 두 손으로 귀도 막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저기,”
“으압,”
“시끄러워... 지금 새벽인 거 잊었어?”
“아, 아... 아, 저 살려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진짜, 진짜...”
아까의 그 괴물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고, 길목은 고요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석민은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사내를 마주 봤다. 뭔 이유인지 뚫어져라 쳐다보는 바람에 말랐던 식은땀이 다시 흐르는 기분이었다. 괜히 말 꺼내기가 조심스러워 눈치만 보고 있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덕분에 살았네. 그치?”
“...감사합니다...”
“혹시, 구해준 대가로 잠깐 집에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02.
처음 봤을 땐 진짜 멋있었는데. 석민은 알바를 하던 중에도 제 침대 위에 늘어지게 누워있을 정한을 생각하면 한숨만 쉬었다. 그날 봤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나. 아직도 석민은 왜 순순히 제집으로 그를 들였는지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물론 그 때는 너무 감사해서 정한의 뒤로 후광을 봤었지만 말이다.)
“도겨마, 도겨마!”
제 이름은 석민이라고 몇 번을 말했음에도 고집은 세서 다 새는 발음으로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이름을 부르지 않나,
“에이,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데!”
“언제부터 사셨는데요.”
“아주 내가 아주 오래전! 이런 요상한 물건들은 있을 턱도 없을 시절, 길거리 모든 사람이 다 한복이란 거 입고 다닐 때부터 살았다구!”
“아 그러셨어요...”
“너 안 믿어? 이거 진짜라니까?”
“아 믿죠, 믿고말고. 암요.”
이젠 믿어주기도 힘든 헛소리를 해댔다. 초반에 몇 번 받아준 게 잘못이었는지, 정한은 틈만 나면 곡소리를 내며 넋두리했다. 요즘 것들은 말이야, 배려도 없고 뭐도 없고... 석민은 이제 그런 정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데 도가 텄다. 흔한 레퍼토리라 그럼 뭐 왕이나 이런 사람들이랑 친하냐고 물었더니, 그건 또 아니란다.
“에이, 무조건 그런 사람들이랑만 친했어야 옛날 사람인가? 너 그거 아주 잘못된 생각이야.”
“아 예 뭐...”
“근데 그런 말은 어디서 들어보고 물어보는 거야?”
“정한님 같은 얘기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던데,”
“아니, 나는 그 사람들이랑은 다르다니까! 진짜 답답하네! 잠만, 근데 나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말래도!”
대충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줘야 겨우 그 얘기를 그만두곤 했다.(물론 이야기를 끝내면서도 얼굴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살치살! 도겨마, 살치살 먹자!”
돈 없다는데도 살치살을 먹고 싶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예정에도 없던 돈을 쓰느라 생활비가 살짝 쪼들리게 되었다. 나간 돈을 계산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석민의 뒤에서 정한은 그저 배부르다며 벽에 등을 기대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정한이 웃는 걸 볼 때면 석민은 이상하게 짜증이나 화가 나다가도 가라앉았다. 에휴, 그래 내가 들였는데. 내 팔자지.
“도겨마, 내일은 짜글이 어때?”
“아, 오늘 먹고 싶다는 대로 살치살 사서 구워드렸잖아요!”
“에이, 그거랑은 다르지. 이건 구운 거고, 그거는 뜨끈한 국물 요리!”
소리를 잘 지르지도 못하면서 악을 쓰며 짜글이를 내지르는 정한에 석민은 그만 픽 웃고 말았다. 가뜩이나 큰 눈을 더 부라리며 지금 저를 비웃었냐며 땍땍거리는 정한을 뒤로 하고 석민은 내일 장 볼 목록에 차돌박이를 추가했다.
03.
아, 그렇지. 꿈이지.
석민은 잠에서 깼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저를 괴롭혀오던,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혼자서만 견뎌왔던 악몽. 그날의 기억은 저도 모르게 깊숙이 박혀 시도 때도 없이 괴롭혔다. 갑작스레 달려든 크고 빠르고 강한 빛에 부모님은 어린 석민을 안고 보호하기에 급급했고, 결국 그날 그곳에서 살아남은 것은 석민 하나였다. 달려든 차에 타고 있던 사람도, 석민의 부모도 모두 세상을 떴다. 5살 남짓 되던 석민은 죽음이라는 게 뭔지 몰랐다. 부모님을 보내주는 마지막 날까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사람은 석민이 유일했다.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석민을 키워주던 삼촌은 어느 날 술에 잔뜩 절여진 채 제게로 와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더 이상 보살펴줄 수 없을 것 같다고.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네가 너무 밉다고. 석민을 살리지 않았으면 둘 다 살 수 있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석민은 제 몸 안의 모든 피가 다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아, 그래서 그동안 다들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그저 흐느끼는 삼촌의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곧바로 짐을 싸 들고 나왔다. 그 누구에게도 연락은 없었다.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사실 그 이후로 어떻게 지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그 기억을 잃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고등학교 3년의 시절이 기억이 희미했다. 그때는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악몽을 꿨다. 저를 보며 원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부모의 얼굴이 너무 젊어서, 어렸을 때의 그 모습과 너무 같아서, 그게 너무 괴로웠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식은땀이 흥건한 베개를 대충 몇 번 쓸어내리다, 문득 옆을 바라보니 텅 비어있었다. 혼자서 못 자겠다고 그렇게 조르는 바람에 애써 돈 들여서 큰 매트리스도 샀구먼. 이렇게 혼자가 된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석민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선을 멀리 향했지만, 어디에도 정한은 없었다. 대체 또 어딜 간 건지. 처음 나간 걸 들켜 어디에 간 거냐고 물어봐도 정한은 입만 꾹 다물었다. 절대 안 알려줄 것 같아 괜찮으니까 다음부턴 꼭 말하고 나가라고 얘길 해도 말을 안 들었다. 그럼 그렇지.
석민은 정한의 온기조차 남지 않은 매트리스의 빈 곳을 괜히 손을 뻗어 만져보다 멈췄다. 언젠가는 내 옆에 없을 수도 있는 사람인데, 아니 없을 텐데, 어쩌자고 이렇게 마음을 많이 줘버렸지.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이제는 정한이 있던 게 익숙해져 현실을 잊고 있었다. 나는 원래, 혼자인데. 혼자였는데. 젖은 앞머리가 제 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석민은 마치 제가 물먹은 솜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고 곧 가쁜 숨을 내쉬는 정한이 눈에 들어왔다.
“석민아.”
평소완 다르게 낮은 목소리에 단단한 말투가 낯설었다. 그마저도 너무 반가웠다. 석민이 공허한 눈으로 고개를 들자 정한은 답지 않게 서둘러 방에 들어왔다. 힘없이 앉아있는 석민의 곁으로 정한이 스르륵 다가와 앉았다.
“악몽 꿨어?”
“...”
“미안, 진짜 미안해. 또 혼자 뒀네. 안 그러려고 했는데.”
정한은 석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식은땀에 젖어 곱슬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볼에 흐른 선명한 두 줄기의 눈물 자국도 문질렀다. 그러곤 그대로 제 품에 석민의 얼굴을 안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몸 안에 무언가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정한의 옷이 뜨겁게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용히, 아무 소리 없이, 석민은 울었다. 잇새로 단 한 마디도 새지 않고 어깨도 들썩거리지 않으면서, 정한의 품 안에서 제 안에 응어리진 것들을 풀어냈다. 정한은 그런 석민을 미동도 없이 안아 주었다. 따뜻한 손으로 등을 쓸어주었다.
04.
“알바 가지 마.”
“예?”
“가지 말라구. 그 편의점 가서 하는 거, 그거 하지 말라고.”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대체?”
“가지 말라면 가지 마.”
“그럼 어떻게 살아요, 돈이 없는데...”
막무가내였다. 석민은 기가 찬다는 듯 허망한 표정으로 정한을 바라봤고, 정한 역시 물러설 생각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석민을 쳐다봤다. 아, 이렇게까지 굳세게 고집부리는 건 또 처음인데. 석민은 난처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알바하러 막 신발을 신고 나가려던 참이었으니까. 요즘 제가 나가는 모습을 문이 닫힐 때까지 바라보는 걸 눈치챘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알바도 일종의 약속인데... 그리고 집 근처에 여기 편의점만큼 가까운 곳에 알바자리 구하기 힘들어요.”
“그럼, 눈을 마주치지 마.”
“예?”
“그러면 오는 사람들이랑은 눈 마주치지 말구,”
“저는 알반데요...?”
“말 끊지 말구. 나도 다 뜻이 있어서 하는 소리거든? 얼릉, 걍 집에 있든가 눈 마주치지 말든가. 둘 중 하나는 해.”
“안 돼요. 대신 오늘 살치살 사 올게요. 예?”
“야!”
쏘아붙이는 정한을 뒤로하고 얼른 현관문을 나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 귀에 들어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석민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어휴, 조금만 더 들어줬으면 늦을 뻔했네.
“예, 안녕,”
뚱한 표정의 정한이 조금은 거칠게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생각보다 더 짜증이 난 것처럼 보여 석민도 당황스러웠다. 아니, 맨날 다니던 건데 왜 갑자기... 일단 추호도 먼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여서 아무거나 하나 집어 계산한 뒤 입에 물려줬다. 정한은 처음 먹어보는 소시지에 감탄하며 원래도 큰 눈을 배는 크게 뜨고는 조금씩 베어 물었다.
“맛있어요?”
“웅.”
“맛있으면 몇 개 더 사 줄게요.”
“너 엉제 끝나?”
“음, 얼마 안 남았어요! 어차피 지금 시간에 사람 많이 없으니까 거기 걍 앉아 있어요. 상관없을 거예요.”
“야, 이거 진짜 맛있다? 왜 이제껏 안 사 준건데!”
석민은 평소보다 조금은 더 생기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정한에게 소시지 몇 개 더 쥐어둔 뒤 계산대에 앉았다. 진짜 조금 남은 알바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평소완 다르게 저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어서 더 그랬을지도. 정한이 어렵다며 징징대는 바람에 소시지 포장을 하나 더 까주고 돌아서는 차에, 땡그랑 소리를 내며 손님이 한 명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편의점에 들어오는 손님 태반은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했기에 석민은 돌아서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냥 가만히 있었다. 투둑- 저 멀리 들리는 통조림 소리에 다가가 보니, 이미 여러 개를 집어 손이 가득 차버린 손님이 커피 땅콩 하나를 집다가 떨어뜨린 듯했다.
“아, 그거 제가 정리할게요. 계산대에 올려놔 두고 기다리세요.”
커피 땅콩 두 캔을 다시 올려두고 계산대에 가는 길에, 손님을 쏘아보는 정한을 봤다. 화들짝 놀란 석민은 여기서도 습관처럼 소리 지를까 봐 손으로 입을 텁 막고는 정한에게 다가갔다.
“아니, 뭐 하시는 거예요. 손님이잖아요.”
“...”
“제 말 안 들리세요...? 눈 좀 풀어요...!”
정한은 아랑곳 않고 사나운 눈빛으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석민이 말려도 들은 체도 안 했다. 석민이 그만하라며 천하장사 하나를 더 까서 입에 쑤셔 넣으려는 찰나, 가만히 서서 기다리던 손님이 참다못해 뒤를 돌았고 결국 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듯 흔들리는 그녀의 동공에 석민은 하하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지금,”
석민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손님은 계산도 안 한 채 계산대에 집었던 모든 것들을 올려두곤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어이없는 상황에 석민은 그대로 가만히 계산대의 물건들을 바라봤고, 정한은 그녀가 다짜고짜 나가버린 유리문의 움직임이 멎을 때까지 사나운 눈빛을 풀지 않은 채 주시했다.
“아니, 뭐 하세요?”
“...뭐”
“...답 느린 거 보니까 잘못한 건 아시나보네?”
“아니, 그니까는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석민은 제 눈치를 보는 정한이 조금은 웃겼다. 사실 그렇게 화나진 않았는데. 물론 손님이 두고 간 것들은 고스란히 제가 치워야 할 것들이 되어버렸지만, 알바 입장에서 상대할 손님이 없어진 게 최고로 좋은 거 아닌가. 그걸 알 턱이 없는 정한만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며 말없이 제자리로 돌려놓는 석민의 뒷모습만 좇을 뿐이었다.
“...도겨마,”
“왜요.”
“그, 내가 막 그러려던 건 아닌데...”
“알겠어요, 이제 나 알바 다 끝났으니까 나와요. 살치살 사러 가야죠.”
“살치살?”
“엥? 사가겠다고 아까 약속했잖아요? 아니면 혼자 집 가게요?”
“아니!”
종알종알 지치지도 않는지 신난 정한의 모습에 석민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피식 웃는 소리에 또 토끼눈이 되어서는 팍 석민을 바라봤지만, 석민은 그마저도 웃음이 나왔다. 아, 혼자 다니다가 둘이 다니니까 좋은 것 같은데. 가끔 나와서 같이 장이나 보자고 할까. 살짝 상상했던 석민은 곧 제가 그리웠던 거냐고 능글맞게 웃을 정한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 지금 내 말 안 듣고 있찌! 아이, 아뇨아뇨 아주 잘 듣고 있죠.
05.
간만에 알바도 안 가고 쭉 집에 있는 날인데, 석민은 편히 있지 못했다. 오늘따라 축 처진 정한 탓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표정이 최근 봤던 정한의 표정 중 가장 어두웠다. 아, 이를 어쩌지. 겨우 날씨가 나쁘다는 이유로 이렇게 축 처질 사람이 아닌데. 며칠 전부터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김치찌개에 특식인 동그랑땡도 야무지게 부치다 슬쩍 뒤를 돌아봤다. 누가 봐도 무슨 일 있어요, 하는 표정임에도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석민은 그게 답답했다. 왜 나한테는 그런 거 하나도 말 안 해주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항상 물어봐도 괜찮다며 회피할 뿐이었다.
“정한님.”
“...”
“정한님!”
“어, 어 왜. 뭔 일 있어?”
“저녁 다 했다고 열 번은 부른 것 같은데. 안 들렸나 봐요?”
“아, 미안.”
“아니, 뭐 미안할 건 아니고. 빨리 와서 밥이나 먹어요.”
바닥에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직직 들렸다. 아니, 이거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걸 텐데. 하지만 석민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맨날 알바한다고 밖에만 나가놓으니 어디서 뭔 일을 겪었는지 석민이 알 턱이 있나. 시원치 않은 젓가락질이 눈에 들어왔다. 아, 어쩌면 좋냐.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필살기를 썼다.
“자, 여기 밥에 김치! 계란말이도 있네? 입 벌리세용 들어간다 아~”
“...뭐야 너?”
“아 빨리, 팔 떨어지겠다!”
“...”
조금이나마 밥을 먹기 시작한 모습에 석민은 괜히 뿌듯했다. 정한의 얼굴도 조금은 풀어진 듯했다. 너 지금 나 애 취급하냐? 내가 너보다 몇 살은 많은데! 툴툴거리면서도 아가 새처럼 받아먹는 정한에 석민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아유, 당연히 많으시죠. 암요, 그렇고말고. 몇 숟갈 받아먹던 정한은 이번엔 저게 먹고 싶다며 손으로 가리키기까지 했다.
“어어? 이 사람 좀 봐, 진짜 애가 된 거 같은데?”
“아, 나 저거 먹구싶어 빨리. 나 아 하고 잇자나.”
정한의 웃는 모습까지 보는 데 성공한 석민은 뿌듯한 마음으로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했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콧노래에 사실은 조금 놀랐다. 제 덕분에 조금씩 올라가던 입꼬리를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았다. 아직 올라오는 흥을 다 감추지 못한 채 설거지를 마치고 손의 물기를 털며 뒤를 돌아보면,
“...정한님.”
언제 웃었냐는 듯 다시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정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나는 아직 이 사람을 알기엔 멀었나. 자기도 괜히 섭섭해지는 마음에 조심히 다가갔다. 그런 석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한은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거들떠도 안 봤다. 초점 없이 아무 데나 흐트려놓은 시선은 석민을 향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뭔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뭔 일이 있으셨길래 이렇게 하루 종일을 시무룩해서 있으실까.”
“...”
“아직 말해주기 껄끄러워요? 아직 어려워?”
“...미안...”
“...미안할 건 없어요. 내가 뭐라고.”
“어, 어? 아니, 도겨마,”
“저 석민이에요.”
저도 모르게 세게 나온 말에 속으로 당황해서 생각보다 빨리 대화를 마쳐버렸다. 오늘 하루 동안 혼자서 속으로 앓으며 힘들었을 정한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석민은 철없는 저를 마구 때리고 싶었다. 끝없는 후회를 하다가 문득 짜증도 밀려왔다. 아니, 나도 온종일 내 집에서 불편하게 눈치 보며 살았는데. 아무 말도 안 해주면 뭘 해주고 싶어도 못 해주는 걸 뻔히 알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해? 아직도 내가 막, 마냥 어리게만 보이고 그러나? 아직도? ...이 사람에게도, 나는 또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가? 결국 나만, 나만 또. 자꾸만 빠져나오려는 잡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마구 흔들고 정한이 씻고 있는 욕실만 노려봤다. 혼자 힘들었을 저 사람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 걸 알면서, 또 애같이. 바보같이. 물밀듯 밀려오는 피곤함에 대충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으...으으...”
“정한님! 일어나 보세요! 얼른!”
눈을 꾹 감은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힘겹게 쉬는 정한을 발견했다. 황급히 깨웠다. 이유 모를 두려움이 몰려와서, 손은 사시나무 떨듯 떨렸고 심장은 터질 듯 뛰어댔다. 그렇게 몇 번을 흔들고 귓가에 소리치자 정한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겨우 제 말에 대답하는 정한에 석민은 온몸에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나 좀 봐,”
“고마워.”
“예?”
얼굴을 살피려던 석민을 그대로 꽉 안아버린 정한이었다. 고맙다니, 대체 뭐가? 내가 뭘 했는데 고맙다고 하는 거지? 영문 모를 석민은 일단 가만히 안겨있었다.(매달려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점점 안정을 찾아가는 숨소리에 석민은 굳어 있던 손을 들어 제게 안겨(매달려)있는 정한의 등을 천천히 쓸어줬다. 이전에 그가 제게 했던 것처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어느새 정한은 석민의 품에서 안정을 되찾고 편한 숨소리로 잠이 들었다. 아휴, 이렇게 꺾여서 자면 목은 안 아픈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정한을 매트리스에 눕힌 석민은 다시 제 자리에 몸을 뉘었다. 그러고서도 한참을 정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시나 다시 악몽을 꾸게 될까 봐. 힘들어하는 데 자신이 옆에 있으면서도 알지 못할까 봐.
06.
“가지 말라니까.”
“아니, 제발요. 고집 좀,”
“아니, 가지 말라구. 이 시간에 어딜 나가!”
“말했잖아요, 알바 대타라니까...”
“근데 왜 지금인데!”
에휴. 석민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한이 분리수거를 하러 나간 사이 몰래 나갈 준비를 하던 게 화근이었다. 토끼 눈을 뜬 채 다가와 꼬치꼬치 묻자 석민은 결국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저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석민은 그저 바닥만 바라볼 뿐이었다.
“돈은 더 준다니?”
“...”
“너, 너 그런 것두 모르면서 이 시간에 나가게?”
할 말은 없었다. 어쨌거나 을인 입장에서는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으니까. 못 들은 척 나갈 준비나 하는 저를 따라다니며 이래저래 잔소리해대는 정한에 어쩐지 석민은 조금씩 억울해졌다.
“왜 말 안 했는데. 나한테는 미리 얘기해줄 수 있었잖아, 그럼 같이 나가든가 하지.”
“에? 왜요...?”
“아니, 위험하니까...!”
“에이, 됐어요. 그냥 집에 있어요, 뭐하러 나오려고.”
“내가 뭐 어때서!”
“또 이래 정말...”
“...너 나 싫어?”
엥, 이게 아닌데. 가라앉은 정한의 표정에 석민은 당황했다. 갑자기 이렇게 진지해질 일인가...? 싫다는 게 아니라 굳이 이 시간에 나오지 말라는 거였는데.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석민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
“그, 귀찮게 굳이 나오지 말라는 거였어요...”
“...넌 내가 귀찮아?”
악, 금방이라도 석민은 제 머리를 치고 싶었다. 가뜩이나 설명도 못하는 편이라 이런 상황에서는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앞뒤 다 자르고 툭 말해버렸다. 더 어두워지는 낯빛에 석민은 울고 싶었다. 이게 아닌데...
“...”
“저기...”
“시간 빠듯하다며...”
축 처진 어깨에 석민의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그 와중에 시간은 왜 이리 빠르게 갔는지, 지금이라도 나가지 않으면 정말 늦을 것 같았다. 결국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 집을 나섰다. 밤이라 그런지 제 몸을 감싸는 서늘한 기운이 오늘따라 더 불쾌했다.
넘쳐나는 취객들에 석민은 울고 싶었다. 어쩐지 점장이 답지 않게 제게 조심스럽게 말하나 했다. 새벽에 얌전히 집에나 들어갈 것이지... 밖에 널부러져 딴 세상 간 사람들을 겨우 처리하고, 누군가 술김에 엎어둔 쓰레기도 정리해도 할 일이 끝이 없었다. 그래도 석민은 틈만 나면 집에 혼자 구겨져 있을 정한을 생각했다. 언제 끝나는지도 말 안 해줬는데, 새벽까지 미련하게 기다릴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 더 그랬다.
이제 끝인데, 아무도 안 왔으면 좋겠다. 하늘도 무심하신지 이 생각을 한 지 1분도 안 돼서 바로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석민의 친절한 말에 대답도 않고 비틀거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잔뜩 취했구만. 석민은 제발 어지르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었다. 한 5분 정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을까, 사내가 발을 질질 끌며 계산대로 걸어왔다.
“총 4300원,”
갑자기 홱 들려지는 고개에 화들짝 놀란 석민은 하마터면 손님의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쿵쾅대는 심장을 겨우 다 잡으며 다시 고개를 든 석민은 그대로 손에 쥐고 있던 초콜릿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눈 깊숙한 곳의 시퍼런 눈을 마주했다. 덜컥 찾아온 두려움은 숨 쉬는 법을 잠시 까먹을 정도로 석민을 옥죄어 왔다. 이미 겁을 잔뜩 먹은 석민의 표정에 사내는 재밌다는 듯 낄낄거렸다.
눈 깜짝할 새에 석민은 편의점에서 떨어진 골목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미치지 않는 구석진 곳이었다. 순식간에 사내는 굽었던 등을 피고 삐걱대며 굳은 목을 풀었다. 어느새 석민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곧 인간의 형체와는 한참은 멀어진 그는 석민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뒷걸음질 치다 벽을 맞닥뜨린 석민은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정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마지막이 그랬으면 안 됐는데. 석민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한참을 있어도 아무 일도 없어 슬며시 눈을 뜨자 너무도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급하게 나왔는지 신발도 양말도 짝짝이였다. 몇 배는 큰 괴물을 앞에 두고 꿋꿋이 서 있는 모습이 반가웠다. 정한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아, 이 사람은 항상 나를 구해주는 구나. 이석민이라는 사람은 윤정한이라는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 걸까. 궁금해졌다. 석민에게 정한은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답답하게 애같이 굴어서 가끔은 나이를 어디로 먹었나 싶을 땐 언제고, 왜 이럴 땐 또 그 사람만 생각이 난 건지.
갑자기 터지듯 제 눈을 찔러오는 푸른 섬광에 석민은 눈을 꽉 감았다. 눈을 비비며 슬며시 뜨니 무릎을 꿇은 채 떨고 있는 정한이 보였다. 다른 건 생각할 틈이 없었다. 오직 정한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힘이 풀려 바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고 정한에게로 향했다. 긴장감에 떨리는 손을 겨우 들어 정한을 안았다.
“무슨 일이에요. 나 봐요, 얼른. 나 봐봐.”
정한은 석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떨리는 등에서 온전히 느껴지는 열기는 정한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하게 했다. 예전부터 알고 싶었다. 대체 뭐가 이 사람을 그렇게도 힘들게 하는 건지. 꽉 문 잇새로 앓는 소리를 내자 석민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심장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한 번 더 등을 두드리자 이제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석민은 손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부드러운 손길로 정한의 얼굴을 잡았다. 이미 울었는지 볼을 잡은 손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나 봐요 얼른.”
약간의 실랑이 끝에 겨우 눈을 마주했다.
어,
석민은 믿을 수 없었다.
어라,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눈이,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정한의 모습에 석민은 말을 잃었다.
눈이 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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