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마주치지 말 것 下
七.
도련님 주무시는 것 같지?
응,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달빛만이 밝게 빛나는 야심한 시각, 여종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를 도겸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서울 제일가는 부잣집, 4대째 내려오는 좌의정 대감의 차남, 문과 무 뭐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성균관 모범생. 이 모든 말은 도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또래 나이의 딸이 있는 양반들 사이에선 서로 그를 사위로 맞이하고 싶어 눈독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 지어 보이던 도겸은, 그들의 눈엔 완벽했으니까.
“게 누구 있느냐.”
속삭이듯 불러도 아무런 답이 없자, 도겸은 이불 소리 하나 안 내려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곧 옷을 갖춰 입은 그는 몰래 담을 넘어 길거리로 나왔다. 평소와는 다른 단출한 차림이었다. 온종일을 아버지가 정해 둔 일정에 따라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녹초가 되던 도겸이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숨 쉴 구멍은 새벽에 몰래 나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어 가끔은 쓸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집에 혼자 있는 동안 몰래 들었던 정겨운 사람 소리를 기억해내며 걷는 것만으로도 도겸은 즐거웠으니까. 겨우 집 밖 담장에 서 있을 뿐인데도 한결 편해진 마음에 숨을 들이켰다. 상쾌했다. 발걸음도 가벼웠다.
“누구냐.”
“...”
“다 보았다. 어서 나오지 못할까. 이 야밤에 험한 꼴 보고 싶지 않구나.”
품에 지녔던 은장도를 오른손에 꾹 쥐고 조용히 말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산책하던 도겸은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 풀숲에서 희미한 빛을 보았다. 이 시간에 여기를 누군가가 다닐 리가 없는데. 비교적 화려한 칼 손잡이를 문지르듯 매만지며 천천히 풀숲에 다가갔다. 그러다 갑자기 튀어나와 저를 덮쳐오는 형체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넘어졌다.
“누, 누구냐.”
“당신은 뭐요? 누구신데 이 야심한 새벽에, 못 보던 인간인데...”
벌겋고 큰 눈동자로 저를 빤히 쳐다보자 도겸은 바닥에 깔려 있으면서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닌 밤중에 요상한 금수를 만날 건 또 뭐란 말인가. 떨려오는 손을 옷깃에 숨긴 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그 요괴는 도겸의 얼굴을 다시 천천히 훑었다. 입을 열고 활짝 웃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눈에 들어왔다. 또 한 번 침을 삼키자, 자그맣게 킬킬거리며 요괴는 울었다.
“놀라셨소? 미안하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이상한 놈은 아니니 용서해 주시게. 풍채를 보아하니 높으신 분 같은데, 어찌 이 시간에 돌아다니시는 게요? 그러다 누가 콱,”
“이, 일단, 그, 우리 좀 일어나서 얘기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아, 미안하게 됐네. 일어나세요, 우리 편히 앉아서 얘기해봅시다.”
이(李)가 도겸이라 하오. 금수는 조곤조곤 제 소개를 하는 도겸을 빤히 쳐다봤다. 제게 시선을 맞추지 않고 자꾸 바닥으로 눈을 깔길래 기분이 묘해 얼굴을 들이댔다.
“그랫, 어어, 뭐 하는 짓이요...!”
“아니, 앞에 사람이 있는데 자꾸 바닥만 보길래 그랬소.”
“...사람이시오?”
...구미호여요. 눈알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린 채 저를 바라보자 민망한 듯 눈을 살짝 피했다. 아니, 겉으로 봤을 때 어여쁘긴 한데, 덮칠 때를 보니 여자는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곁눈질로 구석구석 살피는 도겸에 금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남자는 구미호 없는 줄 아시오? 참나, 짜증나. 나도 구미호로 태어난 거 서러워 죽겠는데, 댁까지 그러는 거 정말 화딱지가 납니다. 나 구미호라구!”
“아, 알겠소. 쉿, 진정. 여기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이 시간에 여기는 아무도 안 다닙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좌의정 댁인데 누가 이 앞을 다니겠소? 쥐새끼도 무서워서 이리저리 돌아가겠구먼.”
“...그렇지...”
“음.”
“...”
“그, 나도 이름이 있기는 한데.”
정한이라 불러주시오. 내 어여쁜 이름이오! 해맑게 웃으며 속삭이는 정한의 얼굴에 도겸은 그대로 시선을 멈췄다. 제게 눈을 마주치며 웃어 보이는 사람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조금은 어색했다. 말하다 말고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짓는 도겸에 정한은 웃음을 거두고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 아니오. 그럼 뭐, 정한 도령이라 부르지요.”
“도령? 우왕, 멋있다. 그거 좋소!! 근데, 도겸 양반. 혹시 매일 여기 나오시는 것이오?”
“...그렇다만, 뭐 문제라도,”
“와, 왜 그동안 못 봤지? 훤칠하니 잘 생긴 게, 내 눈에 안 띄었을 리가 없는데.”
“무슨 소릴...!”
“도겸 양반, 부탁이 있소!”
八.
도겸은 매일 밤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덮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구미호에게 홀린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구나. 매일 밤을 그 구미호와 같이 시간을 보내서 그런 건지, 그 빨간 눈의 금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은 하나도 집중을 못 해서 꾸중까지 들었다. 그 때문에 매일같이 오늘도 나가야 하는지 고민을 수도 없이 했지만, 말없이 나오지 않으면 자신을 새벽 내내 기다릴 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결국 서둘러 나서곤 했다.
“어찌, 내가 어제 알려준 건 공부 하셨소?”
“아이, 너무 어려운데. 일부러 어려운 것만 가져온 게 아니오?”
“열댓 살 어린아이들도 쉽게 쓸 수 있는 글자부터 차근차근 알려주고 있는데, 이것도 어렵단 말이오?”
“좀 쉽게 설명을 해보던가!”
“아니, 어떻게 이보다 더 쉽게,”
“어렵다니까!”
“이게 어려운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소. 하나는 내가 알려준 걸 열심히 복습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머리가 나쁘다는, 풉,”
“뭐야, 지금 놀리시오?”
짜증을 내며 새초롬하게 흘겨보는 정한에 도겸은 입을 막고 끅끅대며 웃었다. 어찌나 웃었던지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바닥에 글자를 써주느라 묻은 흙을 살살 털고 검지 손가락으로 눈물을 슬쩍 훔친 도겸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정한을 마주 봤다.
“왜 그러시는가, 어디 뭐 묻었소? 아님, 내가 너무 비웃었나? 아니, 그, 비웃은 게 아닌데, 혹여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하게,”
쪽- 정한의 입술이 거침없이 도겸의 볼로 향했다. 헙! 뭐 하는 짓이오...! 도겸이 화들짝 놀라 입을 막더니 정한을 향해 속삭였다. 삽시간에 붉어지는 도겸의 얼굴에 정한은 다시 킥킥대며 웃었다. 어느새 목까지 시뻘개진 도겸은 아직도 시선을 정한에게 두지 못했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열을 식히는 도겸에게 정한이 같은 자리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하...! 크게 소리를 내지도 못해서 옷깃을 꾹 쥐며 속으로 놀라는 도겸에 정한은 얼굴을 다시 들이대 눈을 마주했다.
“처음이시오?” “...예...”
“엥? 처음? 내가 처음?”
“...그렇다니까...”
“어머나,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수줍음이 많으시오? 이렇게 부끄러워하시면 나중에 초야는 어찌 치루,”
“아잇,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어때, 솔직히 좋았잖아. 안 그렇소?”
“...”
“솔직히 말해보시오. 나쁘진 않지 않았소?”
“...좋았소.”
수줍게 말을 꺼낸 도겸은 눈을 꾹 감은 채 정한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고 정한의 볼에 입을 맞췄다. 곧 황급히 떨어지는 도겸에 정한은 자지러지듯 킬킬거리며 웃었다. 자꾸만 마주보려 시선을 따라오는 정한에 결국 도겸이 등을 홱 돌렸다. 나 좀 봐주시오- 조르듯 말하는 정한에 도겸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의 정한이 보였다.
“도령, 안아주시오!”
도겸은 못 이기는 척 다시 뒤돌아 정한을 안았다. 오랜만에 제 품에 들어온 온기가 기분이 좋았다.
九.
“요즘 궁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조만간 뭔 일이 날 것 같으니 각별히 주의하거라.”
“예, 아버지.”
“...요즘 밤마다 어딜 그리 나가는 것이냐?”
“...”
“여지껏 봐오던 너로 봐서 어떤 짓을 할 것 같진 않아 지금까진 봐 줬다만, 이제는 안 될 것 같구나.”
“...예”
“이 아비가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내키지 않아도 귀담아들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제 방으로 돌아온 도겸은 안절부절못하며 방을 서성였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당분간 못 나갈거란 말을 못 해줬는데. 가을 초입에 들어서며 비교적 쌀쌀해진 날씨에도 바보같이 기다릴까 봐, 도겸은 제발 내일 새벽엔 바람이 차지 않기를 빌었다. 애써 자리에 앉았지만, 집중이 안 돼서 멍만 때리고 있었다. 자꾸 머릿속을 채워가는 정한의 모습에 도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 하나에 이렇게까지 빠진 적은 처음이라.
“...이게 좋아한다는 감정인건가...”
종이에 먹이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존재는 처음이라 혼란스러웠다. 곧 목을 타고 얼굴까지 붉어지는 게 너무도 잘 느껴져서 눈만 도르륵 굴렸다. 방을 가득 메운 서책으로만 세상을 바라봤던 도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온 정한이라는 존재는, 그로 비롯된 이 감정은 너무도 낯설었다. 저녁 먹기 전까지 아무도 그의 방에 오지 않았기에, 그렇게 몇 시간을 가만히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十.
며칠째 나가지 못했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몰래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창을 슬쩍 보면, 제 방 앞을 지키고 있는 자들의 그림자가 너무도 선명했다. 예전에 비해 방 밖에서 교육받는 일도 현저히 줄어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동안 잠드는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누군가가 옆에 꼭 붙어있었던 도겸은 이 상황이 너무도 어색했다. 조금은 쓸쓸하기도 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생기니까 괜히 조바심도 들었다. 이러다 영영 못 볼까 봐서. 정한이 오해할까 봐 걱정도 됐다. 안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절대 아닌데.
애써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 이불에 폭 싸여 눈을 감았다. 여전히 밖에는 순찰을 하는 건지 감시를 하는 건지 여럿이 교대로 돌아다녀 발소리가 선명했다. 말 걸어도 답도 안 해줄 거면서 왜 자꾸 서성이는지, 도겸은 한숨만 폭 내쉬었다.
“게 누구냐.”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살짝 굳은 채 말을 꺼냈다 대답이 없어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젠 뭔 헛것도 느끼는 건가. 이불을 부스럭거리며 자세를 바꾸다 갑자기 제 눈앞에 나타난 두 개의 붉은 빛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무, 뭐요...?”
“너무 안 오시길래 내 직접 여기 좀 와봤수다. 나 없이 잘 있으셨소?”
가만히 누워 이불을 쥐고 눈만 끔뻑대는 도겸에게 정한은 바로 얼굴을 들이댔다. 아무 반응도 없자 심통이 난 듯싶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도겸이 그대로 정한을 안았다. 아잇, 우리 차분하신 양반님이 왜 이러실까?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정한이 너스레를 떨었다.
“도령, 보고 싶었소. 정말 보고 싶었소.”
“...”
“내 원해서 안 나간 게 아니라, 정말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그래서 그랬던 것이오. 하루 온종일 그대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랬소?”
“그래요, 그러니까 날 좀 봐주세요.”
정한 도령, 그대의 이, 특별하고 예쁜 눈이 자꾸 떠올랐어요. 너무 그리웠습니다.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아련한 눈빛으로 절절하게 말하는 도겸을 정한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겸은 못 본 새 혹여 생채기가 생기진 않았을까 유리 조각을 만지듯 살살 정한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정한은 얼굴에 웃음기를 띄운 채 가만히 손길을 받고 있었다. 곧 정한은 도겸의 볼에 빠르게 입을 맞추고 다시 히히 웃었다.
“허어...!”
“아직도 쑥스럽소? 우리 양반님 안 되겠네, 이렇게 부끄러워하셔야 원!”
“아, 아니, 너무 오랜만이라!”
“쉿, 들키겠다. 밖에 누구 있는 거 까먹으신 건 아니신지요?”
정한의 장난스러운 말에 도겸은 다시 웃음을 실실 흘렸다.
十一.
도겸은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아직까지 쿵쾅거리는 심장에 먼 거리를 걸어온 것도 아닌데 숨이 다 찼다. 지금 금방 듣게 된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생시인가 싶어 팔을 꼬집어봐도 찌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이 꿈이 아님을 알려줬다. 이게, 이게 무슨. 거울에 비치는 창백한 제 얼굴을 확인한 도겸은 힘없이 자리에 풀썩 앉았다.
‘곧 피바람이 불 것이오. 마음의 준비를 하시게나.’
‘예, 대감.’
‘...도현(道炫)은 참여하기로 했다.’
‘예? 그럼,’
‘...그 아이는 이 일에서 뺄 것이네.’
‘허나,’
‘그만하시게’
‘대감.’
‘...자칫하면 우리가 다 죽네. 최소한의 희생이 필요한 법이지. 일이 만약 잘못된다면,’
‘대감.’
‘...지금껏 키워준 것만으로도 난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네. 물론 친아들처럼 키웠기에 마음은 아프지만,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 이런 날 이해해주길 바라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도겸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엄하긴 하셨어도 저에게 한없이 다정하신 분이셨다. 어릴 적 울던 제게 몰래 약과를 쥐어주시던, 졸려서 고개를 꾸벅거릴 때면 얼굴에 드는 햇빛을 가려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또 대대로 이어온 가문의 명성에 자부심을 갖고 계셨으며, 현왕께 충성을 다하길 강조하는 분이셨다. 알지 말아야 할 것과 알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인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무리 외면해도 흐르는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도 바뀌지 않았다. 오늘따라 더 과묵해진 아버지의 모습에 도겸은 직감했다. 아, 오늘이구나.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모르고 싶었고, 자신을 제외한 모두는 제가 모르는 줄 알고 있었을 테니까. 방에 들어와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은 어제처럼 여전히 맑았고, 지저귀는 새들도 다를 게 없는데.
깜빡 잠이 들었고, 그 사이 달이 떴다. 혼비백산이 된 복도의 소음에 도겸이 눈을 떴다. 누군가의 공포에 찬 괴성이 혼자 있던 방까지 가득 메웠다. 손이 덜덜 떨렸다.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불이야-! 곧 거대한 불이 이곳을 저를 삼킬 듯 가득 타올랐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고, 고통에 찬 신음도 들려왔다. 문을 박차고 달렸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를 찾았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와의 연을 허무하게 날리고 싶지 않았다.
아.
눈이 마주쳤다. 너무도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리웠던 붉은 눈동자였다. 그의 입가엔 피가 한가득 묻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며, 항상 입던 흰옷에도 검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었다. 평소보다 배는 날카로워 보이는 그의 손에 들린 건 이미 너덜너덜해진, 제 아버지였다. 몸이 고장 난 듯 삐걱대며 움직였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한과 저 둘뿐인 듯했다. 정한도 당황했던 건지 손에 그를 든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 도겸은 어느새 정한의 바로 앞에 서게 됐다. 제 아버지를 향했던 시선이 정한에게로 옮겨졌다. 정한은 여전히 굳어있는 채였다.
“왔소?”
“...”
“보고 싶었소, 그동안 잘 지냈는가.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내 알 길이 없어서 참으로 답답했는데.”
“...”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오. 나 없는 동안 알려준 건 혼자서라도 잘 공부하고 있었소?”
“...도겸,”
“뭐가 그리 급하셨소, 옷이 다 흐트러지셨네만. 내가 준 신이 다 흙투성이 아니오.”
도겸은 천천히 다가가 무릎을 꿇고 흐트러진 정한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정한은 아직까지도 그대로 굳은 채 제 앞에 무릎을 꿇은 도겸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도겸은 그런 정한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손으로 신에 묻은 흙을 살살 털어냈다. 그때, 제 귀를 가르는 미세한 소리에 정한이 고개를 홱 들었다. 갑작스레 날아온 화살이 정한을 향했다. 멍하니 도겸을 바라보고 있던 정한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순식간에 정한의 눈앞엔 검은 도겸의 뒤통수가 가득찼다. 정한의 심장을 향하던 화살이 그대로 도겸의 심장에 꽂혔다.
“아, 아...”
“정한, 도령...”
힘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도겸의 모습에 정한의 눈동자가 더욱 붉게 빛났고, 정한은 허공을 가르고 날아 자객의 심장을 관통했다. 곧 다시 도겸의 곁으로 돌아온 정한의 눈엔 눈물이 가득 맺혔다. 도겸이 그의 손목을 잡을 때까지 정한은 제 손등으로 핏자국을 지우려 제 손등으로 입가를 박박 문질렀다.
“그러지, 마시오. 아프잖소...”
“도겸 도령, 말 하지 마시오. 잠시, 잠시만,”
“...정신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보게 되어 정말 다행이오.”
“...”
“울지 마시오, 나 때문에 우는 거라면 너무 슬플 것 같은데...”
“아니, 안, 안 울, 안 웁니다. 나는,”
“연모합니다. 내가 그대를 연모하게 됐어요. 이제야 말하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나, 나도, 나도 연모합니다. 좋아해요, 도령, 좋아합니다.”
“...먼저 가게 되어 미안합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제발.”
쿨럭- 도겸이 말하는 중간에 기침할 때마다 피가 울컥 흘러나왔다. 정한은 그런 도겸의 피를 황급히 닦아내면서도 새어 나오는 울음을 겨우 삼켜냈다. 천천히 감겼다 느리게 떠지는 도겸의 눈에는 오로지 정한만이 담겼다. 도겸은 피가 튀어 끝이 붉게 물든 정한의 노란 머리칼을 천천히 매만졌다.
“도령, 웃어주시오. 내 그대의 웃는 모습이, 그렇게 좋더이다.”
“으, 으흐... 도겸, 도겸 도령...”
“잠깐, 고개를 좀만, 숙여 주시겠소.”
정한이 고개를 숙여 도겸을 가까이 바라보자 힘겹게 몸을 살짝 일으킨 도겸이 그대로 정한의 입에 제 입을 맞췄다.
“항상, 볼에만 입 맞췄던 것 같아서, 한 번쯤은 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
“내가 너무, 너무 늦었는가. 그럼 미안하오...”
“아니,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요. 도령, 나 좀 봐봐요.”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나는 원체, 옆에 누가 있어도 혼자 살아온 인생이라. 나한테, 그리 웃어준 건, 정한 도령이 처음이라, 너무, 기뻤, 습니다.”
“도령, 눈을 뜨시오. 도겸 도령!”
“이렇게, 이렇게 잠시만...”
“...나를 미워해도 좋아요, 원망해도 좋습니다. 도령, 정신을 차려 보시오...”
“나, 나는...”
정한의 품에서, 도겸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모든 걸 삼켜버릴 듯 타오르는 불길을 잠재우려던 건지, 슬픈 정한의 심경을 대변해주려던 것이었는지,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 앞을 보기도 힘들 정도로 세게 내렸다. 그 비를 온몸으로 다 맞으며 정한은 이미 온기가 다 식어버린 채 축 늘어져있는 도겸을 있는 힘껏 꽉 안았다.
12.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어요. 혼자서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어...?”
“저는 도령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
“원망하지도 않았어요.”
“...뭐?”
석민이 마주친 정한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정한에 석민은 살짝 웃어주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아프지 않게 살살 쓸어줬다. 그런 석민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혹시, 그걸 걱정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직도?”
“...”
“미련하기도 해라. 그 오랜 시간을 어찌 그리 혼자 앓았어요.”
“나, 나는...”
“괜찮아요. 난 괜찮아요, 정말로.”
가만히 바라보던 정한은 그대로 석민을 꽉 안았다. 소리 내어 엉엉 우는 정한을 석민이 다시 안았다. 어느새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누구 하나 연연하지 않고 그대로 서로를 있는 힘껏 안았다. 정한의 얼굴도, 석민의 얼굴도 눈물 때문인지 빗물 때문인지 흠뻑 젖어 있었다. 한참을 비를 맞으며 울던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
“왜, 왜 그래.”
“눈, 눈이 안 빨개요. 까매졌어.”
“...정말?”
“응, 정말.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아니, 아니 절대. 너가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절대 아니지.”
“큭, 알겠어요. 진정. 근데 정말ㅇ,”
“내 눈이...”
“근데 저기 있던 사람은...”
석민의 말끝이 흐려지면서 정한과 석민은 나란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뒤에서 살벌하게 눈을 부라리며 금방이라도 정한에게 한 대 날릴 것 같았던 덩치 큰 요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석민은 당황스러움에 그대로 그 자리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이구나.”
“에?”
“...내가, 내가,”
사람이 됐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석민이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사람? 그럼 내가 지금까지 봤던 정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석민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한은 빗물로 생긴 웅덩이에 비친 얼굴로 눈을 확인하며 얼굴을 만지작댔다. 석민은 정한의 등에 얼굴을 묻고 안았다.
“아니, 왜 그래...?”
“그럼, 그동안 계속 숨어 다닌 거예요...? 나 때문에...?”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계속 사람도 못 되고 그렇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석민은 갑자기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정한은 그런 석민의 들썩이는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쉬이 석민의 눈물이 멈추지 않자 눈을 나란히 맞추고선 다정한 손길로 얼굴을 살살 쓸어주었다.
“나야말로, 그동안 널 힘들게 해서 얼마나 미안했는데.”
“뭐가요... 나는 괜찮았는데...”
“나 때문에 별 같잖은 것들에 꼬였는데. 겪을 필요도 없는 것들로 괴로워하던 너를 다 아는데. 내가 어찌 너한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어.”
“...살치살...”
“응?”
“살치살, 그거 말하는 거예요...? 돈은 좀 깨졌지만 나도 맛있게 먹었는걸요... 나 진짜 괜찮았는데...”
한참을 울던 중이라 축 처진 입꼬리에 입이 삐죽 나온 상태에서도 제 할 말은 꼬박 다 하는 석민에 정한은 하하 웃어 보였다. 놀리지 말아요! 석민이 흘겨보아도 정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13.
“아, 윤정한!”
“어쭈, 많이 편해졌다? 처음엔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덜덜 떨면서 부르더만?”
“아니, 지금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그건 됐고, 내가 양말 뒤집어 벗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킥킥거리며 알겠다는 정한을 석민이 살짝 째려봤다. 정한은 벽에 가만히 기대어 있다가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슬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창가에 기대 비를 감상하고 있는 정한을 발견한 석민은 천천히 다가갔다.
“뭐해?”
“뭐하긴, 비 오는 거나 좀 보고 있었지. 옛날 생각나고 좋네!”
“참 나, 뭘 또... 아, 형! 나 궁금한 거 있었는데!”
“뭔뎅?”
형은 나 처음 봤을 때 어떻게 알아봤어?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초롱초롱 저를 바라보는 석민을 정한은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아무 말도 없는 정한에 석민은 창가에 올려진 정한의 팔을 살살 만지며 재촉했다.
“네가 얼굴에 다 써놓고 다녔는데 그걸 어떻게 모르냐? 내가 바보도 아니고.”
“엥?”
뭔 소리야... 허무맹랑한 소리에 석민이 얼빠진 표정으로 정한을 바라보았다. 정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게 답이라는 듯 굴었다. 묘하게 반짝이는 정한의 눈에 석민은 계속해서 물어왔다. 하지만 정한이 내놓는 답은 똑같았다.
“에이, 그래두 이렇게 우리 둘이 같이 있으면 된 거 아냐?”
“...그건 맞지.”
“나 안아조.”
“하이고, 나이는 어디로 드셨길래 이렇게 애 같지? 응?”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석민은 정한을 꼭 안았다. 서로 제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도련님 주무시는 것 같지?
응,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달빛만이 밝게 빛나는 야심한 시각, 여종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를 도겸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서울 제일가는 부잣집, 4대째 내려오는 좌의정 대감의 차남, 문과 무 뭐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성균관 모범생. 이 모든 말은 도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또래 나이의 딸이 있는 양반들 사이에선 서로 그를 사위로 맞이하고 싶어 눈독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 지어 보이던 도겸은, 그들의 눈엔 완벽했으니까.
“게 누구 있느냐.”
속삭이듯 불러도 아무런 답이 없자, 도겸은 이불 소리 하나 안 내려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곧 옷을 갖춰 입은 그는 몰래 담을 넘어 길거리로 나왔다. 평소와는 다른 단출한 차림이었다. 온종일을 아버지가 정해 둔 일정에 따라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녹초가 되던 도겸이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숨 쉴 구멍은 새벽에 몰래 나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어 가끔은 쓸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집에 혼자 있는 동안 몰래 들었던 정겨운 사람 소리를 기억해내며 걷는 것만으로도 도겸은 즐거웠으니까. 겨우 집 밖 담장에 서 있을 뿐인데도 한결 편해진 마음에 숨을 들이켰다. 상쾌했다. 발걸음도 가벼웠다.
“누구냐.”
“...”
“다 보았다. 어서 나오지 못할까. 이 야밤에 험한 꼴 보고 싶지 않구나.”
품에 지녔던 은장도를 오른손에 꾹 쥐고 조용히 말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산책하던 도겸은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 풀숲에서 희미한 빛을 보았다. 이 시간에 여기를 누군가가 다닐 리가 없는데. 비교적 화려한 칼 손잡이를 문지르듯 매만지며 천천히 풀숲에 다가갔다. 그러다 갑자기 튀어나와 저를 덮쳐오는 형체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넘어졌다.
“누, 누구냐.”
“당신은 뭐요? 누구신데 이 야심한 새벽에, 못 보던 인간인데...”
벌겋고 큰 눈동자로 저를 빤히 쳐다보자 도겸은 바닥에 깔려 있으면서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닌 밤중에 요상한 금수를 만날 건 또 뭐란 말인가. 떨려오는 손을 옷깃에 숨긴 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그 요괴는 도겸의 얼굴을 다시 천천히 훑었다. 입을 열고 활짝 웃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눈에 들어왔다. 또 한 번 침을 삼키자, 자그맣게 킬킬거리며 요괴는 울었다.
“놀라셨소? 미안하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이상한 놈은 아니니 용서해 주시게. 풍채를 보아하니 높으신 분 같은데, 어찌 이 시간에 돌아다니시는 게요? 그러다 누가 콱,”
“이, 일단, 그, 우리 좀 일어나서 얘기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아, 미안하게 됐네. 일어나세요, 우리 편히 앉아서 얘기해봅시다.”
이(李)가 도겸이라 하오. 금수는 조곤조곤 제 소개를 하는 도겸을 빤히 쳐다봤다. 제게 시선을 맞추지 않고 자꾸 바닥으로 눈을 깔길래 기분이 묘해 얼굴을 들이댔다.
“그랫, 어어, 뭐 하는 짓이요...!”
“아니, 앞에 사람이 있는데 자꾸 바닥만 보길래 그랬소.”
“...사람이시오?”
...구미호여요. 눈알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린 채 저를 바라보자 민망한 듯 눈을 살짝 피했다. 아니, 겉으로 봤을 때 어여쁘긴 한데, 덮칠 때를 보니 여자는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곁눈질로 구석구석 살피는 도겸에 금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남자는 구미호 없는 줄 아시오? 참나, 짜증나. 나도 구미호로 태어난 거 서러워 죽겠는데, 댁까지 그러는 거 정말 화딱지가 납니다. 나 구미호라구!”
“아, 알겠소. 쉿, 진정. 여기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이 시간에 여기는 아무도 안 다닙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좌의정 댁인데 누가 이 앞을 다니겠소? 쥐새끼도 무서워서 이리저리 돌아가겠구먼.”
“...그렇지...”
“음.”
“...”
“그, 나도 이름이 있기는 한데.”
정한이라 불러주시오. 내 어여쁜 이름이오! 해맑게 웃으며 속삭이는 정한의 얼굴에 도겸은 그대로 시선을 멈췄다. 제게 눈을 마주치며 웃어 보이는 사람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조금은 어색했다. 말하다 말고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짓는 도겸에 정한은 웃음을 거두고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 아니오. 그럼 뭐, 정한 도령이라 부르지요.”
“도령? 우왕, 멋있다. 그거 좋소!! 근데, 도겸 양반. 혹시 매일 여기 나오시는 것이오?”
“...그렇다만, 뭐 문제라도,”
“와, 왜 그동안 못 봤지? 훤칠하니 잘 생긴 게, 내 눈에 안 띄었을 리가 없는데.”
“무슨 소릴...!”
“도겸 양반, 부탁이 있소!”
八.
도겸은 매일 밤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덮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구미호에게 홀린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구나. 매일 밤을 그 구미호와 같이 시간을 보내서 그런 건지, 그 빨간 눈의 금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은 하나도 집중을 못 해서 꾸중까지 들었다. 그 때문에 매일같이 오늘도 나가야 하는지 고민을 수도 없이 했지만, 말없이 나오지 않으면 자신을 새벽 내내 기다릴 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결국 서둘러 나서곤 했다.
“어찌, 내가 어제 알려준 건 공부 하셨소?”
“아이, 너무 어려운데. 일부러 어려운 것만 가져온 게 아니오?”
“열댓 살 어린아이들도 쉽게 쓸 수 있는 글자부터 차근차근 알려주고 있는데, 이것도 어렵단 말이오?”
“좀 쉽게 설명을 해보던가!”
“아니, 어떻게 이보다 더 쉽게,”
“어렵다니까!”
“이게 어려운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소. 하나는 내가 알려준 걸 열심히 복습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머리가 나쁘다는, 풉,”
“뭐야, 지금 놀리시오?”
짜증을 내며 새초롬하게 흘겨보는 정한에 도겸은 입을 막고 끅끅대며 웃었다. 어찌나 웃었던지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바닥에 글자를 써주느라 묻은 흙을 살살 털고 검지 손가락으로 눈물을 슬쩍 훔친 도겸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정한을 마주 봤다.
“왜 그러시는가, 어디 뭐 묻었소? 아님, 내가 너무 비웃었나? 아니, 그, 비웃은 게 아닌데, 혹여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하게,”
쪽- 정한의 입술이 거침없이 도겸의 볼로 향했다. 헙! 뭐 하는 짓이오...! 도겸이 화들짝 놀라 입을 막더니 정한을 향해 속삭였다. 삽시간에 붉어지는 도겸의 얼굴에 정한은 다시 킥킥대며 웃었다. 어느새 목까지 시뻘개진 도겸은 아직도 시선을 정한에게 두지 못했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열을 식히는 도겸에게 정한이 같은 자리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하...! 크게 소리를 내지도 못해서 옷깃을 꾹 쥐며 속으로 놀라는 도겸에 정한은 얼굴을 다시 들이대 눈을 마주했다.
“처음이시오?” “...예...”
“엥? 처음? 내가 처음?”
“...그렇다니까...”
“어머나,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수줍음이 많으시오? 이렇게 부끄러워하시면 나중에 초야는 어찌 치루,”
“아잇,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어때, 솔직히 좋았잖아. 안 그렇소?”
“...”
“솔직히 말해보시오. 나쁘진 않지 않았소?”
“...좋았소.”
수줍게 말을 꺼낸 도겸은 눈을 꾹 감은 채 정한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고 정한의 볼에 입을 맞췄다. 곧 황급히 떨어지는 도겸에 정한은 자지러지듯 킬킬거리며 웃었다. 자꾸만 마주보려 시선을 따라오는 정한에 결국 도겸이 등을 홱 돌렸다. 나 좀 봐주시오- 조르듯 말하는 정한에 도겸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의 정한이 보였다.
“도령, 안아주시오!”
도겸은 못 이기는 척 다시 뒤돌아 정한을 안았다. 오랜만에 제 품에 들어온 온기가 기분이 좋았다.
九.
“요즘 궁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조만간 뭔 일이 날 것 같으니 각별히 주의하거라.”
“예, 아버지.”
“...요즘 밤마다 어딜 그리 나가는 것이냐?”
“...”
“여지껏 봐오던 너로 봐서 어떤 짓을 할 것 같진 않아 지금까진 봐 줬다만, 이제는 안 될 것 같구나.”
“...예”
“이 아비가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내키지 않아도 귀담아들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제 방으로 돌아온 도겸은 안절부절못하며 방을 서성였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당분간 못 나갈거란 말을 못 해줬는데. 가을 초입에 들어서며 비교적 쌀쌀해진 날씨에도 바보같이 기다릴까 봐, 도겸은 제발 내일 새벽엔 바람이 차지 않기를 빌었다. 애써 자리에 앉았지만, 집중이 안 돼서 멍만 때리고 있었다. 자꾸 머릿속을 채워가는 정한의 모습에 도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 하나에 이렇게까지 빠진 적은 처음이라.
“...이게 좋아한다는 감정인건가...”
종이에 먹이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존재는 처음이라 혼란스러웠다. 곧 목을 타고 얼굴까지 붉어지는 게 너무도 잘 느껴져서 눈만 도르륵 굴렸다. 방을 가득 메운 서책으로만 세상을 바라봤던 도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온 정한이라는 존재는, 그로 비롯된 이 감정은 너무도 낯설었다. 저녁 먹기 전까지 아무도 그의 방에 오지 않았기에, 그렇게 몇 시간을 가만히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十.
며칠째 나가지 못했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몰래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창을 슬쩍 보면, 제 방 앞을 지키고 있는 자들의 그림자가 너무도 선명했다. 예전에 비해 방 밖에서 교육받는 일도 현저히 줄어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동안 잠드는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누군가가 옆에 꼭 붙어있었던 도겸은 이 상황이 너무도 어색했다. 조금은 쓸쓸하기도 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생기니까 괜히 조바심도 들었다. 이러다 영영 못 볼까 봐서. 정한이 오해할까 봐 걱정도 됐다. 안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절대 아닌데.
애써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 이불에 폭 싸여 눈을 감았다. 여전히 밖에는 순찰을 하는 건지 감시를 하는 건지 여럿이 교대로 돌아다녀 발소리가 선명했다. 말 걸어도 답도 안 해줄 거면서 왜 자꾸 서성이는지, 도겸은 한숨만 폭 내쉬었다.
“게 누구냐.”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살짝 굳은 채 말을 꺼냈다 대답이 없어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젠 뭔 헛것도 느끼는 건가. 이불을 부스럭거리며 자세를 바꾸다 갑자기 제 눈앞에 나타난 두 개의 붉은 빛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무, 뭐요...?”
“너무 안 오시길래 내 직접 여기 좀 와봤수다. 나 없이 잘 있으셨소?”
가만히 누워 이불을 쥐고 눈만 끔뻑대는 도겸에게 정한은 바로 얼굴을 들이댔다. 아무 반응도 없자 심통이 난 듯싶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도겸이 그대로 정한을 안았다. 아잇, 우리 차분하신 양반님이 왜 이러실까?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정한이 너스레를 떨었다.
“도령, 보고 싶었소. 정말 보고 싶었소.”
“...”
“내 원해서 안 나간 게 아니라, 정말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그래서 그랬던 것이오. 하루 온종일 그대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랬소?”
“그래요, 그러니까 날 좀 봐주세요.”
정한 도령, 그대의 이, 특별하고 예쁜 눈이 자꾸 떠올랐어요. 너무 그리웠습니다.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아련한 눈빛으로 절절하게 말하는 도겸을 정한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겸은 못 본 새 혹여 생채기가 생기진 않았을까 유리 조각을 만지듯 살살 정한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정한은 얼굴에 웃음기를 띄운 채 가만히 손길을 받고 있었다. 곧 정한은 도겸의 볼에 빠르게 입을 맞추고 다시 히히 웃었다.
“허어...!”
“아직도 쑥스럽소? 우리 양반님 안 되겠네, 이렇게 부끄러워하셔야 원!”
“아, 아니, 너무 오랜만이라!”
“쉿, 들키겠다. 밖에 누구 있는 거 까먹으신 건 아니신지요?”
정한의 장난스러운 말에 도겸은 다시 웃음을 실실 흘렸다.
十一.
도겸은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아직까지 쿵쾅거리는 심장에 먼 거리를 걸어온 것도 아닌데 숨이 다 찼다. 지금 금방 듣게 된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생시인가 싶어 팔을 꼬집어봐도 찌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이 꿈이 아님을 알려줬다. 이게, 이게 무슨. 거울에 비치는 창백한 제 얼굴을 확인한 도겸은 힘없이 자리에 풀썩 앉았다.
‘곧 피바람이 불 것이오. 마음의 준비를 하시게나.’
‘예, 대감.’
‘...도현(道炫)은 참여하기로 했다.’
‘예? 그럼,’
‘...그 아이는 이 일에서 뺄 것이네.’
‘허나,’
‘그만하시게’
‘대감.’
‘...자칫하면 우리가 다 죽네. 최소한의 희생이 필요한 법이지. 일이 만약 잘못된다면,’
‘대감.’
‘...지금껏 키워준 것만으로도 난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네. 물론 친아들처럼 키웠기에 마음은 아프지만,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 이런 날 이해해주길 바라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도겸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엄하긴 하셨어도 저에게 한없이 다정하신 분이셨다. 어릴 적 울던 제게 몰래 약과를 쥐어주시던, 졸려서 고개를 꾸벅거릴 때면 얼굴에 드는 햇빛을 가려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또 대대로 이어온 가문의 명성에 자부심을 갖고 계셨으며, 현왕께 충성을 다하길 강조하는 분이셨다. 알지 말아야 할 것과 알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인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무리 외면해도 흐르는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도 바뀌지 않았다. 오늘따라 더 과묵해진 아버지의 모습에 도겸은 직감했다. 아, 오늘이구나.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모르고 싶었고, 자신을 제외한 모두는 제가 모르는 줄 알고 있었을 테니까. 방에 들어와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은 어제처럼 여전히 맑았고, 지저귀는 새들도 다를 게 없는데.
깜빡 잠이 들었고, 그 사이 달이 떴다. 혼비백산이 된 복도의 소음에 도겸이 눈을 떴다. 누군가의 공포에 찬 괴성이 혼자 있던 방까지 가득 메웠다. 손이 덜덜 떨렸다.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불이야-! 곧 거대한 불이 이곳을 저를 삼킬 듯 가득 타올랐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고, 고통에 찬 신음도 들려왔다. 문을 박차고 달렸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를 찾았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와의 연을 허무하게 날리고 싶지 않았다.
아.
눈이 마주쳤다. 너무도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리웠던 붉은 눈동자였다. 그의 입가엔 피가 한가득 묻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며, 항상 입던 흰옷에도 검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었다. 평소보다 배는 날카로워 보이는 그의 손에 들린 건 이미 너덜너덜해진, 제 아버지였다. 몸이 고장 난 듯 삐걱대며 움직였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한과 저 둘뿐인 듯했다. 정한도 당황했던 건지 손에 그를 든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 도겸은 어느새 정한의 바로 앞에 서게 됐다. 제 아버지를 향했던 시선이 정한에게로 옮겨졌다. 정한은 여전히 굳어있는 채였다.
“왔소?”
“...”
“보고 싶었소, 그동안 잘 지냈는가.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내 알 길이 없어서 참으로 답답했는데.”
“...”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오. 나 없는 동안 알려준 건 혼자서라도 잘 공부하고 있었소?”
“...도겸,”
“뭐가 그리 급하셨소, 옷이 다 흐트러지셨네만. 내가 준 신이 다 흙투성이 아니오.”
도겸은 천천히 다가가 무릎을 꿇고 흐트러진 정한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정한은 아직까지도 그대로 굳은 채 제 앞에 무릎을 꿇은 도겸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도겸은 그런 정한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손으로 신에 묻은 흙을 살살 털어냈다. 그때, 제 귀를 가르는 미세한 소리에 정한이 고개를 홱 들었다. 갑작스레 날아온 화살이 정한을 향했다. 멍하니 도겸을 바라보고 있던 정한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순식간에 정한의 눈앞엔 검은 도겸의 뒤통수가 가득찼다. 정한의 심장을 향하던 화살이 그대로 도겸의 심장에 꽂혔다.
“아, 아...”
“정한, 도령...”
힘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도겸의 모습에 정한의 눈동자가 더욱 붉게 빛났고, 정한은 허공을 가르고 날아 자객의 심장을 관통했다. 곧 다시 도겸의 곁으로 돌아온 정한의 눈엔 눈물이 가득 맺혔다. 도겸이 그의 손목을 잡을 때까지 정한은 제 손등으로 핏자국을 지우려 제 손등으로 입가를 박박 문질렀다.
“그러지, 마시오. 아프잖소...”
“도겸 도령, 말 하지 마시오. 잠시, 잠시만,”
“...정신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보게 되어 정말 다행이오.”
“...”
“울지 마시오, 나 때문에 우는 거라면 너무 슬플 것 같은데...”
“아니, 안, 안 울, 안 웁니다. 나는,”
“연모합니다. 내가 그대를 연모하게 됐어요. 이제야 말하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나, 나도, 나도 연모합니다. 좋아해요, 도령, 좋아합니다.”
“...먼저 가게 되어 미안합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제발.”
쿨럭- 도겸이 말하는 중간에 기침할 때마다 피가 울컥 흘러나왔다. 정한은 그런 도겸의 피를 황급히 닦아내면서도 새어 나오는 울음을 겨우 삼켜냈다. 천천히 감겼다 느리게 떠지는 도겸의 눈에는 오로지 정한만이 담겼다. 도겸은 피가 튀어 끝이 붉게 물든 정한의 노란 머리칼을 천천히 매만졌다.
“도령, 웃어주시오. 내 그대의 웃는 모습이, 그렇게 좋더이다.”
“으, 으흐... 도겸, 도겸 도령...”
“잠깐, 고개를 좀만, 숙여 주시겠소.”
정한이 고개를 숙여 도겸을 가까이 바라보자 힘겹게 몸을 살짝 일으킨 도겸이 그대로 정한의 입에 제 입을 맞췄다.
“항상, 볼에만 입 맞췄던 것 같아서, 한 번쯤은 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
“내가 너무, 너무 늦었는가. 그럼 미안하오...”
“아니,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요. 도령, 나 좀 봐봐요.”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나는 원체, 옆에 누가 있어도 혼자 살아온 인생이라. 나한테, 그리 웃어준 건, 정한 도령이 처음이라, 너무, 기뻤, 습니다.”
“도령, 눈을 뜨시오. 도겸 도령!”
“이렇게, 이렇게 잠시만...”
“...나를 미워해도 좋아요, 원망해도 좋습니다. 도령, 정신을 차려 보시오...”
“나, 나는...”
정한의 품에서, 도겸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모든 걸 삼켜버릴 듯 타오르는 불길을 잠재우려던 건지, 슬픈 정한의 심경을 대변해주려던 것이었는지,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 앞을 보기도 힘들 정도로 세게 내렸다. 그 비를 온몸으로 다 맞으며 정한은 이미 온기가 다 식어버린 채 축 늘어져있는 도겸을 있는 힘껏 꽉 안았다.
12.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어요. 혼자서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어...?”
“저는 도령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
“원망하지도 않았어요.”
“...뭐?”
석민이 마주친 정한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정한에 석민은 살짝 웃어주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아프지 않게 살살 쓸어줬다. 그런 석민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혹시, 그걸 걱정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직도?”
“...”
“미련하기도 해라. 그 오랜 시간을 어찌 그리 혼자 앓았어요.”
“나, 나는...”
“괜찮아요. 난 괜찮아요, 정말로.”
가만히 바라보던 정한은 그대로 석민을 꽉 안았다. 소리 내어 엉엉 우는 정한을 석민이 다시 안았다. 어느새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누구 하나 연연하지 않고 그대로 서로를 있는 힘껏 안았다. 정한의 얼굴도, 석민의 얼굴도 눈물 때문인지 빗물 때문인지 흠뻑 젖어 있었다. 한참을 비를 맞으며 울던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
“왜, 왜 그래.”
“눈, 눈이 안 빨개요. 까매졌어.”
“...정말?”
“응, 정말.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아니, 아니 절대. 너가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절대 아니지.”
“큭, 알겠어요. 진정. 근데 정말ㅇ,”
“내 눈이...”
“근데 저기 있던 사람은...”
석민의 말끝이 흐려지면서 정한과 석민은 나란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뒤에서 살벌하게 눈을 부라리며 금방이라도 정한에게 한 대 날릴 것 같았던 덩치 큰 요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석민은 당황스러움에 그대로 그 자리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이구나.”
“에?”
“...내가, 내가,”
사람이 됐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석민이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사람? 그럼 내가 지금까지 봤던 정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석민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한은 빗물로 생긴 웅덩이에 비친 얼굴로 눈을 확인하며 얼굴을 만지작댔다. 석민은 정한의 등에 얼굴을 묻고 안았다.
“아니, 왜 그래...?”
“그럼, 그동안 계속 숨어 다닌 거예요...? 나 때문에...?”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계속 사람도 못 되고 그렇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석민은 갑자기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정한은 그런 석민의 들썩이는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쉬이 석민의 눈물이 멈추지 않자 눈을 나란히 맞추고선 다정한 손길로 얼굴을 살살 쓸어주었다.
“나야말로, 그동안 널 힘들게 해서 얼마나 미안했는데.”
“뭐가요... 나는 괜찮았는데...”
“나 때문에 별 같잖은 것들에 꼬였는데. 겪을 필요도 없는 것들로 괴로워하던 너를 다 아는데. 내가 어찌 너한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어.”
“...살치살...”
“응?”
“살치살, 그거 말하는 거예요...? 돈은 좀 깨졌지만 나도 맛있게 먹었는걸요... 나 진짜 괜찮았는데...”
한참을 울던 중이라 축 처진 입꼬리에 입이 삐죽 나온 상태에서도 제 할 말은 꼬박 다 하는 석민에 정한은 하하 웃어 보였다. 놀리지 말아요! 석민이 흘겨보아도 정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13.
“아, 윤정한!”
“어쭈, 많이 편해졌다? 처음엔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덜덜 떨면서 부르더만?”
“아니, 지금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그건 됐고, 내가 양말 뒤집어 벗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킥킥거리며 알겠다는 정한을 석민이 살짝 째려봤다. 정한은 벽에 가만히 기대어 있다가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슬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창가에 기대 비를 감상하고 있는 정한을 발견한 석민은 천천히 다가갔다.
“뭐해?”
“뭐하긴, 비 오는 거나 좀 보고 있었지. 옛날 생각나고 좋네!”
“참 나, 뭘 또... 아, 형! 나 궁금한 거 있었는데!”
“뭔뎅?”
형은 나 처음 봤을 때 어떻게 알아봤어?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초롱초롱 저를 바라보는 석민을 정한은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아무 말도 없는 정한에 석민은 창가에 올려진 정한의 팔을 살살 만지며 재촉했다.
“네가 얼굴에 다 써놓고 다녔는데 그걸 어떻게 모르냐? 내가 바보도 아니고.”
“엥?”
뭔 소리야... 허무맹랑한 소리에 석민이 얼빠진 표정으로 정한을 바라보았다. 정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게 답이라는 듯 굴었다. 묘하게 반짝이는 정한의 눈에 석민은 계속해서 물어왔다. 하지만 정한이 내놓는 답은 똑같았다.
“에이, 그래두 이렇게 우리 둘이 같이 있으면 된 거 아냐?”
“...그건 맞지.”
“나 안아조.”
“하이고, 나이는 어디로 드셨길래 이렇게 애 같지? 응?”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석민은 정한을 꼭 안았다. 서로 제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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