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elst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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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JH&DK Collaboration

우리 절대 죽지 말자
고장남
<우리 절대 죽지 말자


트리거워닝: 가출청소년/노란장판
*


w. 고장남






나는 불행한가?

윤정한은 이 여섯글자를 배달 책자에 끄적인 후 한참을 쳐다보았다. 불행이라는 것도 행복할줄 아는 사람들이 하는 것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정한은 자신은 불행한 사람은 아니란 생각을 했다. 윤정한의 상원이 무엇인가 물으면, 그는 그저 이번 여름이 선선하기를 바라고, 집 주인이 돈벼락을 맞아 월세 독촉 포기를 바란다. 에어컨은 몇년도에 구입했을지 모를 처치곤란한 기계 덩어리 하나 뿐이었고, 덜덜거리는 선풍기 하나에 의지하며 여름을 보내는 것이 가장 큰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구석진 동네에 그렇게 좋지도 않은 반지하방을 무료로 제공해도 모자랄 판에 월세를 굳이 받아가겠다는 집주인이 아니꼬왔을 뿐. 그래도 옆동네 집세 생각하면 양반이다 하고 말았다. 아, 이런 게 불행한 건가. 사람들은 이걸 통상적으로 불행하다 여기는 건가? 이 망할 질문을 던지고 오랜만에 일거리가 생겼다고 떠난 동거인을 떠올렸다.

그러는 너는 왜 불행한데

윤정한의 동거인, 이석민이다. 가출청소년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시작한 둘의 만남은 소박했다. 어찌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던 쪽에 가까웠다. 열댓명이 모여 이루어진 큰 공동체에서 그들이 친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이석민은 잘 녹아드는 것처럼 보였다면 윤정한은 그렇게 녹아드는 편은 아니었다. 우리 평생 가자는 달콤한 말들이 결국은 다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윤정한은 마음을 안 주기로 결심했다. 가장 주축이 돼서 무리를 형성하던 아이부터 여럿이 '진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몇 안 남아 떠돌기 시작했을 때는 한 남자가 찾아와 의식주를 제공하겠다고 아이들을 데려갔다. 며칠동안 밥도 잘 챙겨먹고 가족의 느낌이 난다고 생각할 때쯤 "너네가 다시 다 갚아야 하는 거야" 라고 말하던 남자는 속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윤정한의 나이가 갓 스물이 되던 때였다.

정한아 너는 어떡할래

혼자 불러내어 한다는 말이 건달이 될래 빚쟁이가 될래라니. 좆까세요. 너같은 새끼는 안될래요.(물론 이렇게 말하진 않았다.) 단순하게 그렇게 살기 싫었다. 윤정한이 선택한 삶은 안전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매번 어딘가 맛이 가선 여기저기 피를 묻히고 오는 삶에 그닥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생각보다 남자는 쿨했다. 편하게 사는 걸 택해도 될텐데 굳이 안 그러는 이유가 그저 납득이 안 되는 것처럼, 그정도로만 굴었다.
윤정한은 그렇게 그 집을 나왔다. 그에게 이석민의 존재가 크게 기억에 남냐 물으면 아니요. 였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었을 뿐더러 누군가에게 의지하기엔 환경이 불안정했다. 흔히 평생을 간다는 피로 이어진 가족들마저도 오래 못 갈 관계였고, 낯선 이에게 마음을 주는 것? 윤정한에게는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에게 그곳에서의 좋은 기억을 꼽으라면 그게 이석민이었다라고 말할 수는 있었다.

"제가 돼줄게요."

어렴풋하게 그 아이의 음성이 생각이 났다. 나를 얼마나 봤다고, 아니 까놓고 말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줄 알고? 본인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를 외부인에게 그런 말을 잘도 한다. 라고, 그저 치기 어린 아이의 말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아주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그때 그 대화를 나누던 좁고 습한 방이 처음으로 찝찝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물이라는 나이는 많은 걸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술집 알바 같은 소소한 일부터, 조폭 조무래기도 아니고 그냥 그 지망생쯤 보이는 애들 수발 좀 들어주면서 조금씩 돈을 모았다. 아주 열심히도 게으르지도 않게 빚을 갚고 월세방이라 하기엔 애매한 곳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살아갈 수 있었다. 아마 그 미친 놈의 마지막 배려일지도. 윤정한은 그때 지내던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닥 궁금하진 않았지만 가끔 이석민은 나이가 찼을 때 어떤 선택을 했을까 궁금해했다. 역시나 다른 아이들처럼 그들이 말하는 편한 길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어쩌면 진짜 좆까세요.라고 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재밌었다. 만약 후자라면 엉덩이라도 걷어차주길, 하면서.

그렇다면 이 둘은 어쩌다 동거를 하게 되었는가? 놀랍게도 그 선택의 길에서 20살의 이석민 혼자만이 '좆까세요'를 했다고 한다. 실제로 좆까라는 말을 했는지를 모르겠다만, 윤정한을 찾아온 게 이석민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윤정한은 끊어낸 줄 알았던 그 남자가 본인이 어디 사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음침하기 짝이 없다 생각하면서 이석민을 집으로 들였다. 무작정 같이 살자는 걸 오케이한 건 아니었다. 같은 선택을 했고, 같은 출신이고, 월세는 나눠 내면 되고... 사실 같이 산 세월이 있었으니까 별 문제 없다 생각했다.

"이제 빚쟁이 인생 시작?"
"아니"

이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왜? 그 사람 죽었어. 아. 윤정한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언젠간 뒤져서 세상에 이바지하는 날이 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네가 죽인 건 아니지? 이석민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윤정한도 별 말 없이 여분의 칫솔을 뜯어서 건넸다. 윤정한에게는 그 여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일단 씻어. 그렇게 물 흐르듯 둘의 동거가 시작됐다.

둘의 동거는 무난했다. 이석민은 일을 나가기 시작했고 윤정한도 늘 하던대로 살아갔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이 끝나고 가끔 공원에 앉아서 맥주 한 캔씩 하는 정도. 윤정한과 이석민 이 둘이 같이 산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때 그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사람들이 왜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 얘기를 나누고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 있어?"
"아니... 아는 사람 형밖에 없다니까."

한 번은 왜 자신을 찾아왔냐 물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큰 접점이 없는 것도 맞고, 그 당시에 이석민 주위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때 이석민의 대답은 '형이 보고 싶어서'였다. 내가? 윤정한은 되물었지만 이석민은 그냥 웃고 넘어갈 뿐이었다. 또 저런다.

윤정한이 이석민과 살기 시작하면서 알게된 점이 몇가지 있었다.
첫 번째 이석민은 생각이 많다.
두 번째 생각이 많을 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세 번째 그럴 때 늘 짓는 미소가 바로 그 미소다. 이석민은 그런 사람이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고 잘 웃는 어쩌면 흔하게 행복한 아이. 윤정한 또한 이석민을 그런 사람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석민과 동거를 시작하고 그가 풍기는 선한 분위기는 신이 이석민을 만들때 들이부은 게 아니구나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생각이 많은 사람, 그렇게 그 결론을 내렸다. 그가 윤정한을 편하게 만드는 속성들은 이석민의 고민의 흔적이고 노력이라는 걸.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지 늘 고민하는 사람,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이라고.

사실 그리 친하지도 않았을 둘이 빠르게 가까워진 계기가 육체적인 관계가 아니라고는 할 수는 없다. 혈기왕성한 20대라는 말을 핑계로 가벼운 손장난부터 시작해서 흔히 말하는 섹스도 동거를 하면서 자연스러워졌다. 방음이 잘 안 돼서 매일 밤 잠에서 깨던 윤정한은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잠자리가 예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닥이는 이석민의 손길과 그가 불러주는 따뜻한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기 시작한 이후로 이석민과 같은 매트리스에 누워 더운 날에도 껴안고 자는 것이 더욱 좋았다. 밤에 허겁지겁 옷을 벗어던지고 꽤 투박하고 끈적하게 서로를 갈구하다, 아침에 부비적 거리면서 품에 파고 들면 간지럽다고 밀어내는 것도 좋았다. 물론 방음이 안 되는 건 그대로라 소리가 새지 않게 입술 부딪히는 걸 쉬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이게 어떤 관계지? 라는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도 너와 나, 둘만의 세상이 익숙해져서 관계라는 정의가 필요없다는 것이 더 소중하게만 느껴져서. 아 이런 게 사람들이 말하던 행복인 건가. 그렇다면 나는 너로 인해 만들어진 행복이니, 네가 사라지면 불행할까.

불행에 대한 고찰을 하다가 느즈막히 일어나 밥을 챙겨먹고 현관문을 쳐다보고 있어도 이석민은 퇴근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돌아오질 않았다. 오랜만에 난제를 던져두고 가놓고 속 편하게 밖에서 무얼 하고 있나. '야' '언제 와' '빨리와아ㅏㅏㅏㅇ아' 카톡을 남겨두고 폰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뭘 하고 있길래 연락이 없어. 새로 들어온 일이라고 신나서 고기 쏘겠다는 말까지 하고 나간 거 보면 큰 건이긴 한 것 같던데. 이석민은 가끔 질 안 좋은 형님들 애인 생일이나 기념일(가끔 투투 챙기는 미친 놈들도 있다.)에 노래 부르는 일을 하러 가기는 했다. 좁고 낡은 동네에서도 노래 좀 한다고 소문이 나서 가끔 그렇게 찾는 놈들이 많아졌다. 노래하고 있는 앞에서도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는 경우가 있어서 눈 감고 노래할 때도 있다는 얘기를 재미로 하곤 했다.

"형"

비밀번호를 한 두 번 실패하는 소리가 들리고 윤정한이 잠도 안 자가며 애타게 기다린 이석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을 붉어져서는 숨은 가쁘고 차려입는답시고 입고 나간 셔츠 단추도 나가 떨어진 상태로 술 냄새가 진동했다. 비틀거리는 이석민을 붙잡고 안으로 들여보내려 밀착하니 풍겨오는 낯선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술 냄새가 역하게 나는데도 진한 향수냄새가 올라왔다. 다른 사람 냄새를 묻히고, 돈 아끼겠다고 흡연은 죽어도 안 하면서 담배냄새마저도 올라왔다. 윤정한은 이석민을 매트리스에 눕혀두고는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커다랗게 뜬 채 어버버거릴 수 밖에 없었다. 정적이 흐르다 이석민 입에서 작게 미안해, 라는 소리를 한다.

"뭐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거... 너무 많이 권하셔서."

윤정한은 자신이 자는 시간에 들어와서 깨운 게 아닐까 미안해하는 모습에 기가 찼다. 본인도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확실히 인지하지 못했지만 확실한 건 늦게 들어와서 술을 마셔서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흔적을 끌고 온 것,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왜?

"냄새나서 그래?"
"형 나한테 다른 사람 냄새 나는 거 싫어하잖아."

이석민은 어쩌면 윤정한보다 윤정한을 잘 안다. 지금 네 셔츠에 다른 여자 립스틱이 묻어있는 것은 아냐고. 우리가 무슨 관계라고 이런 작은 질투심을 안기는지. 다른 사람들처럼 손잡고 데이트 다니며 솜사탕 부는 연애장난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윤정한이 조금은 거칠게 이석민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렸다. 남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 싫어서. 반자동적으로 몸을 맡기고 윤정한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는 이석민이 원망스러웠다. 뒤틀리는 마음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서. 이 불안함의 원인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인정하기가 꽤 어려워서. 과격해진 마음에 평소보다 서두르게 되지만 서로에게 맞춰진대로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는 손을 마주잡았다. 좁은 방에 거친 숨소리만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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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는 다른 날과 비슷했다. 윤정한은 더듬더듬 손을 내밀어 이석민을 찾고 쇄골 언저리를 파고들었다. 간지러워어, 그런 말을 하면서도 피하진 않는다.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다른 날보다 얼룩덜룩해진 이석민 몸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아주 물고 빨았네."
"냄새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안 했어"
"..."
"진짜야"

날씨가 30도를 넘어간다는데도 그들은 껴안은 상태로 한참을 정적인 상태로 있었다. 윤정한은 확신했다. 이게 그 질투심과 소유욕이 맞다고. 불행이고 뭐고 이미 이석민이 없으면 안되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석민이 없으면 이제는 행복도 무엇인줄 아는 사람이 돼서 불행함도 인지할 수 있게 될텐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석민이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혹여나 불행하고 다른 목표를 찾아 떠나지는 않을지. 석민아, 너는 왜 불행한데? 내가 왜 불행한데? 너가 나보고 불행하냐고 물어봤잖아. 처음으로 돌아가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형 불행해? 라는 질문이 윤정한을 괴롭혔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이석민은 당연히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더니 윤정한 손을 만지작 거리다 침을 삼키고 무언가를 말할 결심을 했다.

"형은 살아가는 이유가 뭐야?"

결심을 한 이후에 힘들게 뱉은 말이 물음표라니. 살아가는 데에 이유가 있나. 살아있으니 살아있는 거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형밖에 없다?"

이것도 물음표긴 하네. 긴장을 한 상태로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비해 이석민은 휘몰아치는 생각들의 정리를 마치면 담백한 말들로 전달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불행함'이라는 난제를 던지고 간 이석민의 결론의 끝에는 윤정한이 있었다. 어깨를 으쓱이면서 뱉은 말이 윤정한에게는 생경하게 느껴졌다.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죽는 이유에 대한 생각은 해본 적이 많았다. 왜 사람들은 죽을까. 윤정한은 삶이 막막할 때 쯤이면 한강을 나서서 걷곤 했다. 현 상황에서 어느정도 안정을 찾은 이후에도 목적성을 잃고 다른 하루와 같은 하루를 보내는 게 지루해졌다. 어쩌면 혼자 사는 세상의 끝을 보더라도 딱히 미련은 없을 것 같았지만 그저 아직은 높은 곳이 무서워서, 아직은 날카로운 게 무서워서, 아직은 어떨지 모를 마지막이 두려워서.

"형 나는"
"형이 사라지면 나도 걱정없이 사라질래."

그게 내 목표야. 형이랑 이 세상을 살기. 이석민은 그 남자가 죽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봤다고 한다. 죽음이라는 것이 어쩌면 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윤정한이 어디 있는지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윤정한을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생각나서. 더러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미적지근하게라도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소거법으로 찾다보니 그 결론에 윤정한이 있었다. 이석민에게 따뜻한 곳이 필요했다. 집 같은 존재. (물론 진짜 윤정한의 집에서 살긴 한다.) 윤정한은 매번 본인을 별 생각 없이 단순하다 얘기하지만 이석민에게 윤정한의 다정함은 큰 이끌림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웃어야 했던 상황들 속에서 '너 솔직히 싫지'라고 말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뭔 소리야 아니야' 하면서 처음엔 밀어내다가도 어느순간 그 형 앞에서만큼은 솔직하게 뭐든 얘기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윤정한은 몰랐겠지만, 가장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짧은 순간에이라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 윤정한을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윤정한이 꾸준하게 왜 찾아왔냐 물으면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너무도 사랑고백 같아서, 또 아직은 진행형이라 이 감정의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석민은의 정리된 마음은 그렇게 말했다. 살아가는 이유라고.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하더라도 잠식되지 않기 위한 가역적인 힘이 돼주는 것이 윤정한이라고.

이석민은 불행하지 않은 이유가 윤정한이고 살아가는 이유도 윤정한이라고 한다. 윤정한은 궁금했다. 왜 불행하냐 묻고, 행복하냐 묻지 않는지. 왜 살아가는 이유를 묻고, 죽지 않는 이유를 묻지 않는지. 이석민이 있는 윤정한은 행복했다. 더 이상 한강에 혼자 나가서 확 죽어나볼까 같은 가벼운 생각이 아닌 이석민과 맥주 한 잔 하는 걸 떠올리게 됐고,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으로 이석민과 1+1으로 산 하드 하나씩 들고 내일은 팁을 받으면 신제품으로 도전해볼까 같은 생각을 의미있게 여기기 시작했다. 윤정한은 누군가에게 살아갈 이유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죽지 않을 이유로 충분했다. 누군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에 욕심을 부리고 싶어지면서 죽지 않을 이유가 아닌 죽기 싫은 이유가 생겼다면 그건 이석민이 확실했다.

석민아.
약속 하나만 하자.
우리 절대 죽지 말자.

손을 마주 잡고 내뱉은 낯뜨거운 사랑고백이었다. 좁은 방 안에서는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둘은 얼굴이 붉어져 웃고있었다. 행복한 보통의 사람들처럼.

소용돌이는 중앙과 거리가 멀 때나 힘으로 나갈 수 있다. 그 때 도망치지 않으면 온전하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흐르는대로 빨려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가역적인 에너지를 내야한다. 나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어떻게든 헤엄치는 것. 그들의 새로운 목표였다. 언젠가는 잔잔한 바다를 함께 손 잡고 바라볼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안고 살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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