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elst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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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JH&DK Collaboration

사건의 지평선
김젤리

폭력, 신체 개조 등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있습니다.






저기 밖에 행성이 있대.



진짜로 우리가 정착할 수 있을 만한 행성이.










사건의 지평선


김젤리









“소식은 없어?”

“아직 뭐 쓸 만한 게 안 보이네.”


근무 시간이 끝나 17호실로 들어온 정한이 인사말 대신 물었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지훈이 데이터패드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정한은 짐을 내려놓고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부품과 팔다리를 피해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 가며 침대 위로 엎어졌다. 출렁, 하며 흔들리는 매트리스에 반대쪽 구석에 앉아 있던 민규가 몸이 흔들려 놀랐는지 아이 진짜, 하면서 짜증스러운 소리를 냈다. 정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으어억, 하며 제 앞으로 손을 뻗어 베개를 끌어안은 채 얼굴을 파묻었다.


“냅둬, 저 형 오늘 고생했어.”


진상 하나 만나서 완전 욕 봤잖아. 쉬게 내버려 둬. 따라 들어온 승관이 민규를 타일렀다. 의무실에서 정한의 보조로 일하는 탓에 정한이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지 잘 아는 승관은 정한의 예민함에 비교적 유하게 구는 편이었다. 승관의 핀잔에 할 말을 잃은 민규는 흥,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일어나 방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승관도 정한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 나서 승관이 형! 하며 자신을 부르는 찬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정한은 제게 주어진 작은 침묵을 만끽했다. 아무리 한시적일지라도.



좁은 방 안은 시끌벅적했다.



성인 남성 일고여덟 명이 함께 쓰는 방이니 사실 조용할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시끄럽고 산만한 건 딱 질색인 정한인데도 이곳의 사람들은 도저히 밉지가 않았다.  우주선의 구성원이라면 모두 거쳐 가야 하는 교육생 시절부터 함께 봐 온 얼굴들. 원래는 교육생 시절을 졸업하고 우주선 내에서 담당할 업무가 배정되면서 해당 직무의 사람들과 같은 방이 배정되는 것이 규칙이지만, 17호실은 달랐다. 정한과 승철을 필두로 한 17호실 구성원들은 서로 간에 이미 우정이 돈독해졌다며 예외적으로 같은 방을 쓸 수 없겠냐고 요청했고, 아홉 소년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대신 페널티인지 도미토리 구역에서 가장 열악하고 구석진 자리에 있는 17호실로 배정받았지만. 


덕분에 17호실은 우주선 내의 다른 선실들과는 다르게 여러 직무의 사람들이 섞여 있어, 생활 패턴이며 근무 교대 스케줄도 고루고루 섞여 있었다. 좋게 말하자면 방이 꽉 차 있는 일은 잘 없다는 거였고, 나쁘게 말하면 항상 누군가 드나들고 있다는 거다. 





그걸 생각하면, 오늘은 제법 드물게 방이 가득 찬 날이었다. 정한은 고개를 슬쩍 돌려 방의 구성원들을 둘러봤다. 한쪽 구석에서는 승관이 찬, 한솔과 시답잖은 수다를 떨며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고, 반대 쪽 침대에서 늘어져 있는 승철의 옆에서 순영과 민규는 일을 하느라 뭉친 근육을 두드리고 있었다. 정한의 발치 아래 현관 쪽 바닥에는 모니터와 데이터패드 여러 대를 늘어놓고 정한은 이해할 수 없는 문자열을 쳐 가며 작업 중이었다. 진짜 퇴근하고도 작업을 할 수 있다니 어떻게 저런 체력이 나오나, 늘 신기하다. 물론 그 작업이라는 게 누가 시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원우와 지훈이 진행하고 있는 작업은 우주선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인류의 새 정착지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 우주유영선 D-337호. 그 안의 도미토리 17호실은






일종의 반역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 






17호실은 비록 환경이며 동선 등 모든 게 열악했지만, 우주선 수뇌부나 경비대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툭하면 전등이 깜빡거리고 물 끊기는 일도 부지기수인데다 퇴근길은 그 누구보다도 길었지만 방 안에서 비밀스러운 일을 벌이기에는 딱이었기 때문에 17호실의 구성원들은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기계실에서 일하는 원우와 지훈, 그리고 수리공 일을 하는 찬 덕분에 퍽하면 고장나는 방 기물도 나름대로 자급자족이 가능했고, 의무실 담당인 정한과 승관, 식당에서 가끔 밥을 빼돌려오는 민규, 경비의 시선을 돌리는 역할을 해 주는 승철과 순영의 힘을 합하면, 뭔가 일을 벌이지 않는 게 이상할 조합이었다. 어떻게 보면, 함께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인력이 모여 있으니까.


뭐든지 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가지고 그들이 벌인 일은 우주선 수뇌부에 대해 정보를 캐내는 일이었다. 정착할 수 있는 행성을 찾을 때까지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명목 아래 여러 부조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정보는 제한되어 있었고, 전달되어 내려오는 말들을 모두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의심할 구석이 너무 많았다. 분명 내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은 일들이 없는 양 취급받기도 했고, 함께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그래봐야 한정적인 공간인 이 우주선 안에서 어디 갈 데가 있다고. 그래서 그들은 위에서 알려주지 않는 정보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예를 들자면,


얼마 전부터 우주선 안에서는 행성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닫힌 사회 속이라 근거 없는 소문이 도는 일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유독 끈질기고 꾸준하게 들렸다. 조종실 청소 인부들이 창문 밖을 내다보던 중 발견했다는 말에서 시작한 소문이었다. 조종실 외에는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희망이란 그런 것이었다. 소문은 빠르게 우주선 전체로 퍼졌고, 오랜 우주 생활에 지쳐 정착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던 모두가 조종실의 공지만을 기다렸다. 행성을 발견했다고. 몇 대를 이어 온 이 길디 긴 우주 속의 방황도 끝이 보인다고. 곧 생존 가능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탐사선을 내려보낼 거라고. 교육생 시절 내내 배워 온, 모두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는 행성을 발견 시 진행해야 하는 프로토콜이었다. 



그러나 그런 공지가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우주선 곳곳에서는 불만에 가득 찬 반응들이 튀어나왔지만 경비대에 의해 빠르게 진압당했다. 조종실 청소를 맡았던 사람들은 근무지가 바뀌었다. 특히 불만을 시끄럽게 표현했던 128호실에서는 폭력 사태까지 발생했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그 전의 소문보다는 더 조심스럽게 돌았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우주선 안에서 도는 뜬소문이라고 믿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그 일이 벌어진 직후에 의무실 교대를 서고 있었던 정한은 그 소문을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128호실 구성원들을 질질 끌고 온 경비대원의 무심한 ‘오늘 본 건 다 못 본 셈 쳐라'는 말과 함께.


원래 정한은 17호실에서 자행되어 오는 일상적인 불법 행위들에 그다지 동의하는 편이 아니었다. 천성이 걱정이 많은 탓도 있었다. 혹시라도 걸리면 어떡해. 5년이 넘도록 걸리기는커녕 수뇌부는 잡다한 말단 인력으로만 가득 차 있는 방에 관심조차 안 보여 왔지만, 혹시라도 이 애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의도적으로 끼어드는 걸 피해 왔다.


그렇지만, 그 날 피 냄새가 진동하는 의무실에서 곳곳이 터지고 부러진 상처들을 봉합하다가 퇴근한 정한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주저앉아 놀란 동료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털어놓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그리고 나서는 가뜩이나 정신 없었던 방이 더 분주해졌다. 승철과 순영이 경비대의 눈을 돌리는 사이, 원우와 지훈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우주선의 항로 기록을 되짚어가며 행성 발견 여부를 찾았고, 나머지는 의심받지 않을 선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면서 귀를 쫑긋 열어 놓고 다녔다.





정한은 이 모든 게 자신이 털어놓은 말로부터 시작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약간 심란해지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서도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제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 뭐랄까, 경이롭달까. 이들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기대하게 됐다. 참 대단하다. 지금도. 정한은 그런 생각을 하며 빠르게 움직이는 원우의 손가락을 주시했다.


그 순간, 어떻게 저렇게 빨리 움직이지, 따위의 감탄을 자아내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원우가 정한을 등지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원우의 등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건 보였다. 어라, 뭔 일이 있나 본데. 정한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뭔가 이상해.”


과연, 한참을 말 없이 작업하고 있었을 전원우가 입을 열었을 때는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고개를 돌릴 때 살짝 보이는 얼굴은 눈썹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뭐가 문제지. 정한은 고민했다. 원우가 머리를 헤집는 사이 그 옆에서 데이터패드에 고개를 묻고 있던 지훈이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뭐가?”

“찾았어. 찾기는 했는데.”

“찾았다고??? 항로 스캔 자료를?”

“어. 그런데 어딘가 구멍이 많이 나 있는데.”

“...어디에?”


그런데 이런 이야기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정한은 자세를 고쳐 앉아 원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방 반대편에서 눈을 감은 채 늘어져 있던 승철도 현관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눈에 띄었다. 저들끼리 이야기하고 있던 찬과 승관도 언제 들었는지 관심을 이쪽으로 향한다.




“원래 우주선에서는 주변 천체 스캔 정보를 다 저장하잖아. 차라리 발견한 적이 없다. 뭐 이런 기록이 남아 있으면 이해를 할 텐데. 지금까지도 그랬고. 과거 자료에는 문제가 없어. 계속 뭐가 나오고. 근데 최근에는... 중간중간 자료가 지워져 있어. 마치...”

“의도적으로 은폐하기라도 한 것처럼.”


원우의 옆에서 데이터패드를 노려보던 지훈이 문장을 대신 끝맺었다. 여기저기서 소란하던 방이 한 순간에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은 불완전한 자료를 가득 띄우고 깜빡거리는 원우의 데이터패드 모니터에 고정됐다. 힘없이 깜빡, 깜빡, 하던 스크린은 곧 암전되었다.




***




아무리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아도, 누가 그 마음을 찍어누른다면 희망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은 부질없어지잖아. 누군가 정한에게 해 줬던 말이다. 누구였지.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정한은 문득 17호실이, 아니, 이 우주선의 구성원들이 마주한 현실이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항로 스캔 자료에는 구멍이 날 일이 없다. 그 전에 몇 세대를 거쳐오는 동안 오작동한 적도 없었고, 주기적으로 점검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왜냐면 그 점검 작업을 찬이 도맡아 해왔으니까. 그러니까 비어 있는 항로 스캔 자료에는 숨기고 싶은 게 있다는 조종실을 비롯한 우주선 수뇌부의 내면이 드러나 있는 거다.


이걸 몰랐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이미 알게 된 이상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정한은 속으로 이 모든 게 제법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원우가 캐낸 정보는 정황상 우주선 수뇌부가 행성을 발견했는데도 그걸 은폐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걸 밝히고 있다. 이 현실을 알게 되는 게 과연 평생을 언젠가는 정착할 수 있을 거라는 거짓된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과연 나았을까.


“우리 그럼... 정착은 못 하는 거네.”


조용해진 방 안을 승관의 말이 채운다. 질문인지, 선언일지 모르겠는 문장. 뾰족한 수가 없다는 듯 절망적인 표정을 짓던 17호실 구성원들은 서로의 눈치만을 봤다. 보다 못한 원우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방법이 있을 수는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날카롭게 원우의 말을 끊는 건 순영이다. 마치 무슨 얘기를 할 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이미 몇 번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 계획이라는 것처럼. 정한은 순간, 자신이 바쁘다는 핑계로 뒤로 물러나 있느라고 얼마나 많은 정보를 놓치고 있었던 건지 고민했다. 정한이 그런 회고에 빠지건 말건, 원우는 순영의 분노에도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아니, 근데 들어봐. 조종실 계기판도 결국에는 컴퓨터 신호일 거 아니야. 우리가 한 번 해킹해 보면 다시 돌아가볼 수도 있는데.”


그 말에는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나온다. 원우의 옆에 여전히 앉아 있는 지훈도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고, 승철 또한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건 너무 위험하다며 원우를 타일렀다.


“그러다가 걸리면?”

“지금까지 안 걸렸잖아. 그걸 보면 우리를 주시하고 있지는 않다는 게 뻔하고-”

“그거랑 이거랑 같아? 그래봐야 보관용으로 넘긴 데이터 서버 해킹하는 거랑 조종실 해킹하는 게 같겠냐고.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 줄 알고 조종실을 캐고 들어가. 어차피 없는 자료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잖아.”

“일단 조종실에서 건드린 자료면 거기서 다시 추적이 가능할 거고-”

“장담할 수도 없는 걸 그러니까 우리가 왜 하냐고!!”

“너무 멀어지기 전에 시도라도 해 봐야 할 거 아니야.”


원우와 순영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조용했던 방 안은 다시 소란해졌다. 머리 뒷편에서 슬슬 올라오는 지끈거리는 통증에 정한은 눈을 감았다. 감쪽같이 사라진 데이터. 그러게, 그냥 숨겨 놓기만 해도 충분히 찾기 어려운 자료인데 지워지기까지 했다는 건 누군가 해킹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는 거다. 그렇다고 자료를 날리지는 않았을 텐데. 어디엔가는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정한은 의무실 특수 교육을 받을 때 동료 교육생에게 들은 말을 문득 떠올렸다. 정한이 형. 진짜 헷갈리거나 까먹으면 안 되고 중요한 게 있으면 손으로 써 놔. 컴퓨터는 실수로 잘못 쓸 수 있는데 손으로 쓰는 건 덜 그러잖아. 그리고 내 글씨는 내가 아니까 누가 슬쩍 바꿀 수도 없고! 어쩌다가 그런 얘기가 나왔지? 벌써 가물가물해진 시절의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런데 그 얘길 떠올리니까 다른 가능성이 생각이 났다. 목을 가다듬은 정한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서버에 안 올라와 있을 가능성은?”



정한의 말에 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질 정도로 흥분해서 원우와 언쟁을 벌이고 있던 순영은 온몸에 힘이 다 빠진 듯 털썩 주저앉았다. 순영 입장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가설이었겠지만, 그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사실… 정한이 생각해도 설득력이 있었다. 조종실에서 일을 허투루 할 것도 아니고.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곳에 있는 자료. 자료만 있으면 어떻게든 대책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자료가 없으면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해커라도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니,

할 수 있는 게 있을 수는 있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 침묵을 깬 건 의외로 한솔이었다. 한솔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내려가 봐야겠는데.”


주어는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한솔이 말하는 곳이 어딘지 알았다.






우주선 지하, 출입 금지 구역에 있는 서버실.





말이 서버실이지, 실질적으로는 온갖 자료가 저장되어 있는 곳이다. 원우와 지훈이 공략하고 있는 데이터들도 결국 그곳에서 뽑아 오는 거였고. 둘이 아주 출중한 해커이기는 했지만, 우주선 내 네트워크를 통해서 걸리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혹시라도 의심스러울까봐 건드리지 못하는 경로들도 있었고. 지금 한솔의 말은 지금 그 곳을 직접 들어가 보자는 것이었다.


“생각해 봐. 어쨌든 모든 자료가 다 그쪽에 있을 거 아니야. 서버에서 지웠다고 한들 누군가는 가서 정보를 옮겨놨을 거고.”

“높은 확률로 드라이브가 있겠지.”

“그래, 그런 식으로. 그런데 그것도 결국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면 서버실에서 했을 테니까.”


지훈의 맞장구에 힘입어 승철이 주장을 펼쳤다. 정한은 멍하니 쟤는 또 언제 저런 걸 다 알게 됐대, 라는 생각을 했다. 타고난 체구 덕에 경비대 말단으로 영입되지 않았으면 기계실에 가고 싶어했던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 지식의 정도가 깊어서 놀라웠다. 


“그럼 그 드라이브를 가져오면,”

“...우리도 볼 수 있는 거고.”

"만약 진짜 행성이 있는 거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훈이 끝맺은 문장과 함께 다시 한 번 조용해졌다. 내려가 봐야 한다. 지금 이 정보를 어떻게든 활용하려면 결국 서버실에서 데이터를 가져와야 한다. 그렇지만 누가 가지? 아무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최대한 빠르게 다녀와 봐야 확인이라도 할 텐데. 하루하루 망설이면서 시간이 지날 때마다 행성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원래 당위를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은 어려운 법이다. 망설이는 사람들이 특별히 겁쟁이이거나 비겁해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거다. 지금까지 조용히 경비의 시야를 빗겨가면서 살아 온 보람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고, 사실상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일이었으니. 지금껏 많은 걸 감당해 온 이들에게도 부담스러운 게 당연했다. 


그 생각 때문이었을까.  이 애들을 위해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 그렇지만 정한은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아무도 못 하는 이 일을 자신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 왜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정한의 입에서 그 다음 말이 튀어나온 건 충동이었다.




“내가 갈게.”



정한의 말에 여덟 명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 






지금까지 알고 있는 우주선 구조에 대한 정보와 서버실의 위치를 바탕으로 계획이 순식간에 짜였다. 마침 정한은 최근에 근무를 열심히 한 덕에 며칠 후면 휴식일이었고, 이렇게 된 거 계획도 바로 진행시키기로 했다. 바로 가는 게 급하지 않나? 라는 생각은 했지만 조치를 취하지 않고 넘기는 하루하루가 정착할 수도 있는 행성에서 멀어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다급해질 수 밖에 없었다. 출동 계획 전날에는 계획이 제법 잘 정리되어 정한도 달달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급한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정한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준비를 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잠도 쉽게 오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잠꼬대나, 이미 깊게 잠든 사람들의 색색거리는 숨소리, 잠결에 움직이느라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 가 한데 섞여 들려올 때 정한은 시끄러운 고요함이란 이런 건가, 같은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 윗 침대에서 자는 승관을 깨우지 않으려 정한은 조심스럽게 몸을 뒤척였다. 아, 잘 자야 하는데. 이렇게 된 거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내일의 계획을 복기라고 할 겸 기억을 뒤적였다.


여기를 나가서 복도 끝 쪽 방향으로 쭉 가. 기계실 어느 쪽인지 알지. 그쪽 메인 복도에 관리인 전용이라고 붙어 있는 문이 있는데, 아무도 안 가는 데야. 지도상에도 없고. 근데 데이터신호는 그 쪽에서 오니까 그쪽이 서버실은 맞을 거야. 


아무도 안 가본 데를 가고 싶어.


이건 계획의 일부가 아닌데. 요즘 들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흐린 기억이었다. 누구인지,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쩐지 낯선 목소리로 들리는 기억.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베개에 얼굴을 꾹 눌러 기억을 집어넣으려고 했지만 새어나온 기억은 멈추질 않았다.


행성을 찾으면, 착륙하면, 그런 데를 가볼 수 있겠지?

- 지금만 해도 몇 년째 못 했는데 착륙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형은 왜 그렇게 사람이 비관적이야.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생각나는 건 없지만 덕분에 오려던 잠도 다시 달아나 버렸다. 한숨을 쉰 정한은 다시 몸을 뒤집어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를 마주하고 있는 빈 침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정한의 건너편 침대는 언제나 비어 있었다. 여덟 명이 이 선실에 배정되었던 날부터 쭉. 잠자리가 유난히 예민한 정한인 탓에 다들 잠이라도 편하게 자라며 제공해 준 배려였다. 그래도 자다가 깨서 애먼 사람 얼굴하고 눈 마주치면 좀 그러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고 복작복작한 공간인데도 제 앞에 펼쳐진 텅 빈 침구를 보고 있자면 약간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일 수가 있나, 싶기도 하고. 웃기는 일이지.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잠에 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구조신호 날려. 사람 만나면 절대 상대하지 말고 일단 피해. 조종실 쪽 사람이거나, 만에 하나 경비대라도 마주치면 어떡해.”

“알겠다니깐.”

“혼자 감당할 생각 하면 죽을 줄 알고.”

“그럼 어쨌든 죽은 거 아니야?”

“아, 진짜, 그런 걸로 장난치지 좀 말라고!”


역정을 내는 승관 덕에 정한은 장난이라며 실실 웃으며 얼버무렸다. 장난을 더 치려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승관의 얼굴을 보고 그 다짐도 관뒀다. 다들 여간 심란한 게 아닐 텐데,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걱정할 애들이고. 다같이 동의해서 정한을 보내기로 한 건데도 그랬다. 그 중에서도 승관이 제일 요란스러웠고. 그렇지만 자길 아끼는 마음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면 또 싫지도 않았다. 제게 기대 잉잉거리는 승관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렸다. 그걸 보고 있던 원우는 옆에서 다시 한 번 계획을 확인했다.


“외장 드라이브 같은 게 있을 거야. 들고 올 수 있는 사이즈면 일단 최대한 들고 오는 걸로 생각하고. 그게 안 되면…”

“그때는 너네가 알아서 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젓는 정한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됐어. 뭘 어디 아주 보내는 것처럼 그러냐. 괜찮을 거야.”


사실 아닌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안 갈 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매달리지 않는 게 좋음을 일찍이 배운 정한이었다. 다녀온다. 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겉으로는 근무 교대를 위해 출근하러 나가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그 속내는 그만큼 편하지 못했지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 밖으로 나섰다.







17호실부터 메인 홀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어서 발걸음에 속도를 가했다. 홀로 통하는 입구 가까이로 가면 유동인구가 많아 사람들 틈에 섞이기가 쉬워진다. 지금처럼 교대 시간이 겹칠 때라면 더더욱. 우주선 중앙 구역으로 가까워질수록 시끄러워지는 웅성웅성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럽게 복도를 드나드는 인파에 섞여들었다. 다들 비슷한 작업복을 입고 정해진 일정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한 번 그 사이에 섞여들면 정한을 찾기는 어려울 거다. 각자 자신의 목적지에 집중하고 있는 이상 구석으로 빠져나가는 의무실 당번 따위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을 걸 알았다. 십여 분을 걸어 기계실로 통하는 코너를 빠져나온 정한은 ‘관리 인력 전용'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문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말로만 관리 인력 전용 출입구이고 전산상으로는 아무도 배정되지 않는 곳. 원우가 짚어낸 서버실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그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찬에게 공구함을 빌려 들고 있는 탓에 관리 인력 전용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정한의 모습에도 위화감은 없을 것이다. 


여전히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정한은 문 앞까지 다다랐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고 있었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멈췄다가 누구 눈에라도 띄면 안 되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들어 문을 밀었다. 다급하게 뛰는 심장의 쿵쿵거리는 소리가 시시할 정도로 문은 저항 없이 열렸다. 제법 무거운 문인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쉰 정한은 잽싸게 열린 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침묵이 찾아들었다.




문을 닫자마자 거짓말같이 고요해지는 제 주변에 정한은 저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숨이라도 잘못 쉬면 바로 들킬 것 같아서 마음 편히 숨도 내쉬지 못한 채 버텨 왔는데 이렇게 조용한 공간에서는 참았던 숨을 내뱉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심호흡을 두 번, 세 번… 가만히 기다려 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금지 구역에 들어왔다고 단박에 경비대에게 잡혀 가는 일도, 들어오면 안 될 사람이 들어왔다고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리는 일도 없었다. 우주선 안은 거짓말같이 평온했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사실은 이렇게 별 거 없는 일이었다니. 눈을 두어 번 깜빡여서 어둠에 적응시킨 정한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갈 길이 멀다.


그 구역은 오히려 다 자동화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거의 없을 거야. 그래도 서버라는 게 진짜로 자동화시킬 수는 없거든. 일급비밀이더라도 관리 인력이 있기는 있을 거야. 그럼 길이 있겠지. 혹시 계단 같은 게 있으면 그걸 타고 일단 내려가. 원우가 제게 일러 주었던 서버실 구조를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면서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걸어가자 과연 계단이 나왔다. 와, 제법인데. 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끝없이 내려가는 계단의 모습에 한숨부터 나왔다. 내려가기도 전에 올라올 생각을 하면 심란해지는데. 그렇지만 이제 와서 계단 올라오기 싫어서 서버실 못 가봤어, 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사실 계단 얘기가 나올 때부터 때려치고 싶었다는 얘기는 혼자만 알기로 했다.) 어쨌든 가야 하는 길이니 발을 딛었다. 무게가 실리자 철제 계단은 어울리지 않게 제법 경쾌한 카랑- 소리를 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족히 15분은 걸은 것 같은데 혹시 몰라서 시계며 데이터패드 같은 건 다 두고 온 바람에 시간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우주선 안에서만 살아 온 탓에 우주선의 크기를 체감할 일은 잘 없었는데 여기까지 내려오니 실감이 조금 났다. 그럼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게 숨겨져 있는 거지. 괜히 소름이 돋았다.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바닥에 도달했다. 정신을 놓고 내려가다 계단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해 휘청, 하며 넘어질 뻔 했다. 난간을 붙잡고 간신히 중심을 되찾은 정한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진짜 뭐가 있긴 하다. 어둠에 적응했는데도 흐릿한 시야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그나마 초점이 맞는다. 계단 맨 아래층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는 문 하나가 자리해 있었다.


정황상 이게 서버실이겠지. 목적지까지 무사히 온 것에 안도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 안은 밝았다. 사실 코너 너머에 켜져 있는 전등 빛이 새어나오는 것이었지만 한참을 칠흑같은 어둠에 익숙해져 온 덕에 시야를 가득 채우는 빛에 적응하는데도 시간이 조금 걸렸다. 기계들이 잔뜩 늘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 비해 공간이 넉넉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기계들의 우웅- 하는 소리에 낯선 소리가 섞여들었다. 뭐지. 정한은 조심스럽게 다다가며 귀를 기울였다.






…숨소리.



….사람?







머릿속에서 경고 사이렌이 울리는 듯 했다. 저 코너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모른다. 관리인, 아니면 조종실 사람인가? 최악의 경우에는 경비대일 거고. 아니, 그게 최악인가. 아무튼 누구인지 모를 사람인데. 여기까지 온 이상 뒤를 돌아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이라도 벌어보고자 정한은 몸을 웅크리고 귀를 기울였다. 자기도 모르게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일정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는 나는데, 움직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미동도 없을 리는 없고, 누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안 하면 소리를 죽인 채 움직일 일도 없을 텐데. 왜지. 움직이는데도 소리가 안 나는 거라고 생각하기엔 숨소리는 너무 일정했고 거리도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가만히 있는 거다. 잠을 자는 거든, 뭐든.




머리로는 위험하다는 걸,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심호흡을 한 번 깊게 하고 몸을 일으켜 코너 반대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 





컴퓨터가 대단하다고 말들 하지만, 사실 인간이 가장 대단한 저장 장치 아닐까? 진짜 신기해. 염기서열 네 개만 가지고 몇 억 개의 경우의 수를 만들어 내잖아. 그리고 그 경우의 수는 다 다르고. 근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람이 성장도 하고, 생각도 하고, 기억이나 발전이나 이런 것도 하고… 진짜 다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이렇게 보면 인간이 제일 효율적인 기계일지도 몰라. 너무 재미있지 않아?






왜 이게 지금 생각난 거지. 그렇지만 정한은 그 말이 지금 떠오르는 건 제법 적절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숨소리의 정체를 마주하고 있자니 인간이 가장 복잡한 기계라는 말이 어쩐지 이해가 되는 것만 같아서.







정한의 눈 앞에는 제 또래의 남성 한 명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제 눈을 의심하며 양손을 들어 눈을 거세게 비볐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눈만 아프고 눈 앞의 광경은 그대로였다. 사람이다. 분명 사람인데… 정한의 눈이 남자의 뒤쪽으로 향했다. 등과 머리 곳곳에 연결되어 있는 온갖 파이프와 전선, 케이블 따위에. 이 사람은 지금 우주선에 고정되어 있다. 아니, 연결되어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사실 당연한 거지, 우주선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 같은 걸 볼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눈 앞에 있는 장면은 현실이었다.


낯설고, 신기하면서도 또 끔찍했다. 깊은 잠에 든 듯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신성해보이기까지 했다.






이 사람은 어쩌다가. 문득 찾아드는 연민에 정한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남자의 손을 건드렸다. 남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의식이 없는 상태는 아닌가 보다. 내밀 때보다 조심스럽게 손을 물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서버실에 있는 걸 보아하니 어쨌든 그냥 평범한 우주선 구성원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사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 사람이 자신에게 호의적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괜히 마음을 주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지금 정한이 해야 할 일은 웬 사람한테 한 눈이 팔리는 게 아니라 드라이브를 찾아 나가는 거였다. 그런데도 계속 눈에 밟혔다. 이 사람은 어쩌다가 이런 곳에 있게 된 걸까. 그것도 이런 모습으로. 어쩌다가 이런 지경이 된 건가 싶어서 마음이 쓰였다. 이 사람이 뭐라고 이렇게 신경이 쓰이나, 싶기도 했다.


한참 고민하던 정한은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한 쪽 팔이 약간 앞으로 뻗어져 나와 있었다. 마치 잡아달라는 것처럼. 손을 맞잡자, 의외로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죽은 듯 가만히 있어서 그런가, 차가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정한의 체온보다도 높은 기분이었다. 제 손아귀에 맞춘 듯 꼭 들어맞는 손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남자의 눈꺼풀이 다시 한 번 떨렸다. 도망갈 거면 지금이라도 놓고 도망가야 할 텐데,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깨어나도 괜찮을 것만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나를 해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 왜일까. 



남자는 천천히 정신이 들어오는 듯 했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은 급기야 깜빡, 깜빡 하더니 천천히 떠졌다. 초점 없이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눈은 고개를 흔들면서 선명해졌다. 정한이 그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건 자각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정한은 남자가 제게 시선을 돌리자 자기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이상하게도,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정한을 보고도 그냥 흥미롭게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친 정한은 어쩐지 온몸이 굳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선에 사로잡혀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녕.”



말을 한다. 살아 있구나. 어쩐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 다행이지.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제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강해졌다. 제게 말을 거는데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속으로만 웅얼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정한을 바라보던 남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선을 옮겨 주변을 둘러본 남자는 그 공간 안에 사람은 두 명 뿐임을 깨닫고 다시 정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 말이 안 들려?”

“...들려.”



애써 찾은 대답이었지만 그것으로도 만족하는지 남자는 방긋 웃어 보였다. 처음 보는 미소인데도 마음을 온기로 가득 채울 것만 같은 미소. 전염되는 것만 같은 행복이 보였다.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방긋 웃음을 되돌려 준 정한은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보는 미소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도 아니었고.











가만 남자를 바라보던 정한은 기억 한 켠에서 누군가 지워낸 듯 사라졌던 이름을 찾아내 불렀다.



“...석민이?”





낯선 호칭인데도 입술에 감기는 느낌만큼은 지독하게 익숙했다.  남자, 아니, 석민, 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마치 자기도 들어본 적이 있다는 듯이. 



“정한이 형?”

정한이 형!



석민의 눈이 반짝였다. 방의 불빛이 잠시 전원이 나간 듯 깜빡였다.






***






서버실을 빠져나오는 길은 들어가는 길보다 배는 복잡하고 길게 느껴졌다. 계단을 한참 걸어오르던 정한은 층계참에서 멈춰서 잠시 숨을 골랐다. 체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방금 깨달은 사실을 복기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석민. 석민이. 어떻게 잊었을 수가 있지. 얼굴을 보는 순간,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바로 기억이 났다. 정한의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를 듯 말듯 하던 목소리. 그게 다 석민이었다. 



석민은 교육생 시절 정한과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이었다. 지금의 17호실 구성원들과 정한이 어울리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혼자 다니던 정한을 데리고 와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했던 석민. 겉도는 정한을 따로 챙겨 가면서 친절하게 대했던. 매사에 관심이 없는 정한과 다르게 생명과 관련한 일들에 눈빛을 늘 반짝거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정한이 의무실에 함께 지원하게 한 이유. 호실 하나에 아홉 명이니까 우리 아홉이서 같이 쓰면 되겠다, 했던 날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없었다. 


거기까지 떠오르자 정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어쩌다가 갑자기 없어져서. 석민이는 여기에 있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폐인이 된 것처럼 살았던 시절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흐릿하게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그걸 피하고자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그걸로라도 생각의 흐름을 멈출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에 몸을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기억들이 막아지지는 않았다.



석민과 더 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눈에 띄지 않고 복귀하려면 다시 인파 안에 섞여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다잡고 석민한테 인사를 하면서도 문이 닫힐 때 보였던 아쉬운 듯 텅 빈 눈빛이 계속 생각나 머리가 어지러웠다.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다는 듯 자신을 보내던 시선이. 어쩌다가 그렇게 됐을까, 그렇게나 사람을 좋아하던 애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석민의 표정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잊었지. 왜 기억이 안 났지. 이렇게 소중한 사람인데. 그나마 떠올리는 데 성공한 기억들도 조각나 있었다. 누군가 억지로 들어낸 것처럼 여기저기가 비어 있는 느낌. 뭔가 이상했다.





무슨 정신으로 다시 돌아왔는지 기억도 안 났다. 분명 조심조심 눈에 띄지 않게 사람들 사이에 잘 끼어들어서, 라는 당부를 들었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 이미 석식 배식을 위해 움직이는 인파 한가운데에 끼어 있었다. 분명 몇 시간 전만 해도 숨을 틈이 있어 안정적인 기분을 줬던 인파였는데 갑자기 정한은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 닥치는 대로 앞에 있는 사람들을 밀치고 틈을 만들어가며 방향을 역행해야 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다들 석식은 포기한 건지, 걱정이 가득 서린 얼굴들로 옹기종기 앉아 있는 제 친구들이 보였다. 정한아, 하며 승철이 제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는 걸 어렴풋이 들었다. 긴장이 훅 풀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는 바람에 문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정한은 휘청였다. 여러 개의 손이 단박에 그를 부축하려 달려들었다. 정한은 그 중 하나에 축 늘어져서 제 무게를 기댔다.


“정한이 형, 괜찮아? 잘 다녀온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승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몇 년을 지겹게 들어온 목소리인데 지금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이 소리가 울린다. 갑자기  깨질 듯 아파오는 머리에 머리를 감쌌다. 이를 악물고 그 다음 말을 꺼냈다.



“너희, 기억해?”

“뭘?”

“이석민.”



헉,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면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몇 가지 있었다.






17호실은 왜 우주선의 모든 도미토리 호실과는 다르게 서로 다른 직군의 사람들도 모여 있을 수 있을까? 부탁해서 얻어낸 특권이라고 하지만, 조종실도, 경비대도 그런 특권을 봐 주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정한의 침대 건너편은 왜 비어 있을까? 그리고 교육생 시절이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는데 왜 정한만 유독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잘 안 나는 걸까?


17호실 사람들은 왜 수뇌부의 배려로 같은 방을 쓰게 될 수 있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한이 128호실의 이야기를 해 주기 전부터 조종실과 우주선 수뇌부를 믿지 않았던 걸까?








어쩌면 사실은.








“형이 그걸 어떻게 기억해.”



정한에게 되묻는 순영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 말을 들은 정한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얘들은 다 알고 있었구나. 나만 모르고. 아, 그러고 보니 얘들이 유독 내가 예민하게 구는 것도 다 받아주고 그랬던 게. 이 공동체의 무임승차자나 다름없는 나를 그냥 두고 봤던 게. 어쩌면 다 연결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밀려오는 의문들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석민이가 있어. 서버실에.”

“뭐?”

“석민이가 거기 있다고.”

“아니. 뭐? 어떻게?”


결코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 반응을 보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구나. 내가 이석민을 잊는 걸 묵인했을지언정 그래서 석민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몰랐구나. 그래. 알았으면 가만 두지는 않았겠지. 애가 그 지경이 되도록. 다시 한 번 눈앞에 어른거리는 석민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원우야. 너가 그랬지. 서버에 저장 안 돼 있는 건 외장 드라이브에 있을 거라고.”


갑자기 바뀐 주제에 원우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랬…지. 고개를 끄덕인다. 정한은 숨을 한 번 다시 내뱉고 말을 이었다.


“그게… 석민이인 것 같아.”
















“괜찮아?”


승철이 방 구석에 웅크려 앉아 있던 정한에게 다가왔다. 양 손에는 어디서 구해 온 건지 주스 두 캔을 든 채. 어제 석민을 만나고 온 후로 하루 종일 벽만 보고 앉아 있던 정한이었어서 그런지 승철도 눈치를 보는 듯 했다. 정신을 차린 정한은 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인 공간이란 없는 곳이지만 그래도 정한의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기 위한 듯 구석구석으로 포진해 있는 몸뚱아리들. 정한은 피식 웃고는 승철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정한의 눈치를 보던 승철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안 부서져.”

“아니, 힘들어 보이길래.”

“힘들긴 한데.”


한숨을 푹 쉬었다. 평소라면 바닥 꺼진다고 별 잔소리를 했을 승철도 복잡한 정한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어 구태여 트집을 잡지 않았다.


“...하필 네가 그걸 봤냐.”

“근데 또 나였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은 해.”


정한은 음료수 캔을 뜯었다. 치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탄산이 튀었다.


“진짜로.. 기억이 안 났거든. 얼굴을 봤는데도. 근데도 알았어. 얘는 나를 안 해칠 것 같았어. 어쩐지 끌리더라고. 그렇게 갔는데. 애가 웃어 줬거든. 석민이 웃는 얼굴 알잖아.”

“알지.”

“근데 그걸 보자마자 그냥 갑자기… 다 생각이 나더라고. ”


손에 쥔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감각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 들었다. 승철은 그 옆에서 캔을 열지도 못한 채 만지작거리면서 다음에 할 말을 조심스럽게 골랐다. 


“어땠어?“

“뭐가?”

“석민이.”


정한은 그 질문을 곱씹었다. 어땠냐, 라. 눈앞에서 다시 석민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감으니 그 모습이 다시 선명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정한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들어갔는데. 하. 전선에 온통 휘감겨가지고는… 공중에 둥둥 떠 있었어. 뒷목에 막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고. 진짜 무슨, 부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이 아닌 것처럼.”


무슨 귀신, 아니, 시체, 아니, 조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던 석민의 모습. 그걸 다시 떠올리자니 소름이 돋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조금… 건강해 보이기는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얘가 살아 있어서.”

“...”

“근데 그렇게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이기적인가? 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석민이는 그렇게 혼자… 몇 년을 있었던 건데.”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말에는 결국 눈물이 터져나왔다. 양 볼 위에 뜨끈하게 흐르는 눈물이 길을 냈다. 승철도 구태여 더 묻지는 않았지만 정한은 그래도 말을 이었다.


“나는 왜 기억이 안 나?”

“...기억났다며.”

“아직도 뭔가 이상하긴 해. 기억이 났다, 말았다.. 생각나는 것도 있고, 안 나는 것도 있어.”

“그래, 그렇다면 말이 되기는 한다.”


승철은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석민이 없어졌을 때, 음, 네가 가만히 있지를 못했거든.”

“...”

“다들 비슷한 마음이기는 했지. 여기서 사람이 어떻게 실종될 수가 있다고. 그래 봐야 우주선 안인데. 근데 너는 유독 그걸 받아들이지를 못해서. 몇 번은 경비대한테 가서 대들려고 하기까지 하고.”


그거는 한솔이랑 순영이가 뜯어말리긴 했는데. 승철은 옅게 웃었다. 정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비대한테 달려드는 자기 자신이라.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을 모습인데 석민을 보고 오니 또 저 애를 위해서라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몇 번 경고는 받았거든. 그런데 한 번은…”


승철의 문장 끝이 흐려졌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정한은 얼추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뭔가 무모한 짓을 했었구나. 이석민 때문에. 아, 변한 게 없네. 아니, 있는 건가. 


“우리가 사정사정을 했어. 그냥 일시적으로 정신적 충격이 커서 그런 것 같다. 그랬더니, 알겠다고 풀어주겠다고 했거든. 우리가 알아서 너 관리하라고. 근데 너는 의무실에 있었고. 너가 며칠 동안 정신을 잃었거든. 깨어나니까 석민이를 기억을 못했어.”

“...”

“처음에는 그냥 뭐 후유증인가 했는데, 다른 건 다 잘 기억하길래. 심지어는 교육 때 배운 것도 다 기억하고.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나중에 가서 알았지. 아. 이 사람들이 얘 기억을 지웠구나. 윤정한한테 이석민이라는 사람은 이제 없구나. 그러고 나서 우리한테도 와서 이석민 아냐고 물어보는데. 그냥 눈치껏 모른다고 했지. 없는 듯이 살라는 뜻이니까.”

“...왜 얘기 안 했어?”

“우리는 그때 너를 봤으니까.”

“...”

“석민이 처음 없어졌을 때, 너가 무너지는 걸 봤잖아. 그걸 다시 볼 자신이 없었어. 벌써 한 명을 잃었는데 두 명을 잃을 수도 없고. 그래서 말을 안 했어. 기억하면 또 그렇게 될까봐.”


석민이 살아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말했을텐데. 씁슬한 웃음에는 돌릴 수 없는 과거의 결정에 대한 후회가 잔뜩 묻어났다. 정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철을, 그리고 나머지를 탓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했겠지.


그렇지만 그 다음의 일은 그것과는 별개였다.


“구할 거야.”

“...”

“석민이 어떻게 해서든 데리고 나올 거야. 거기서 갇혀 있게 둘 수는 없어.미쳤다고 해도 좋아. 너네가 끼어들 수가 없겠다면 그것도 이해할게.”


자신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는 말을 듣고서 하기에는 제법 매정한 얘기일까.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한에게는 이미 다짐이 서 있었다. 혼자서 해야 한다면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네가 그럴 줄 알았어.”

“...”

“애들 다 도와줄 거야. 걱정 너무 하지 말고. 네가 다 지려고 하지 말고.”

“...나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아도,”

“너 때문 아니고, 석민이 때문이야.”


그러고서는 승철이 씨익 웃어 보였다.


“너만 석민이 아끼는 줄 아냐? 하여튼 윤정한 유난인 건 알아줘야 돼.”





***






그렇게 석민을 구하기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다. 단순히 서버실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어서 준비할 게 훨씬 많고 복잡했지만, 그 사이에도 정한은 틈틈히 석민을 만나러 왔다. 그러다가 걸리면 계획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경고를 숱하게 들어 가면서도 그랬다.


첫날 떠나면서 봤던 석민의 공허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찾아오지 않으면 석민은 그 어두운 곳에서 혼자 있는 거라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위험한 줄을 알면서도 계속 드나들었다. 17호실 사람들은 그런 정한을 말리려다가도 미친 사람처럼 이석민을 보러 가야 한다고 중얼거리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놔 뒀다. 이석민 구출 계획의 가장 핵심 인력이었던 정한은 그래서 이석민 구출 계획을 세우는 데서는 열외되었다.


그렇게 해서 내려온다고 한들 뭘 특별히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자리에 앉아 시덥잖은 얘기들을 했다. 어떨 때는 한 시간, 어떨 때는 서너 시간 정도를 보낼 수도 있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순간이 소중했다. 석민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들을, 그리고 석민과 함께했음에도 뺏겨 버린 기억들을 다 보상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틈만 나면 서버실을 찾았다. 석민은 그런 정한을 한 번도 쫓아내지 않았다. 그 대신 정한이 모르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에 대해서 채워주곤 했다.


“특별 보직을 시켜준다고 했어. 근데 그게 사실 선택권이 있는 건 아니잖아. 그냥 운이 나빴던 거지. 일급 기밀이라서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하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근데 안 된다고 했거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따라갔는데… 그러고 나서는 기억이 잘 안 나. 정신 차려 보니까 여기에 있었어.”

“...아팠어?”


조곤조곤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석민에게 정한이 물었다. 이제 와선 아팠던 걸 막아줄 수는 없다곤 해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억이 잘 안 나. 그런데 아마… 아프지 않았을까?”


그렇게 말한 석민은 손을 들어 제 뒷머리에 연결된 케이블들을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석민도 바닥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내려와 있어서, 정한도 슬쩍 다가가 연결된 부위를 건드려 봤다. 무슨 짓을 한 건지, 기계 부품이 연결되어 있는 목덜미는 차가웠다. 그때 맞잡았던 손의 온도와는 딴판이었다.


“...기억이 안 나면 그게 다행인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석민은 웃어 보였다. 그 미소가 눈까지 가지는 못했다.


두 번째로 석민을 보러 온 날, 정한은 자신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승철이 일러 준 이야기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 뿐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아는 선에서 최대한, 석민이 없어진 후의 정한의 이야기를 했다. 석민은 그걸 굉장히 슬프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정한의 일상이 무너졌다는 것이. 기억을 억지로 들어낼 만큼 고통스러워했다는 점이. 정한은 막상 기억이 없어서 괜찮다는 이야길 해도 석민의 반응은 그대로였다. 오늘도 의도치 않게 아픈 주제를 꺼낸 셈이 된 정한은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튼. 그건 됐고. 내가 저번에 권순영 승진 라인에서 짤린 얘기 해 줬니?”

“어어, 안 한 거 같은데. 해 줘 봐.”


자연스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불편한 대화 주제를 벗어나기 위해 얼버무렸다. 석민도 대충 정한의 유인책에 넘어가주었다. 시덥잖은 이야기로 시간을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석민은 17호실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했다. 정한은 그러면 나한테는 관심도 없고, 라며 투덜대면서도 (석민이 사실 정한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는 걸 정한은 몰랐다) 착실하게 재미있었던 이야기들을 쌓아 왔다. 글쎄 권순영이 저번에 뭘 했냐면. 승관이가. 원우가. 한솔이가. 몇 년을 아껴 온 이야기 보따리는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뭐, 어쩔 수 없지. 경비대에 밉보였지, 권순영은. 앞으로도 승진하기는 글렀고. 최승철이 걔 사수로 남아 있어서 다행이지.”

“그 형은 아직도 그 성격을 못 고쳤냐, 몇 년이 지났는데.”

“그래도 많이 나아진 거라면 믿겠니?”

“허어.”


석민은 쿡쿡 웃었다. 정한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웃는 석민의 모습이 너무 낯익은데 이런 모습으로는 낯설어서. 그래도 이런 작은 즐거움이나마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말로 옮기려고 입을 여는 순간, 정한의 데이터패드가 삐빅- 소리를 내며 울렸다.


“...시간 다 된 건가?”

“그런가 봐.”


에휴, 돌아가야지. 타이머에 맞춰 나갈 채비를 하는 정한을 바라보며 석민도 조심스럽게 몸을 다시 뒤로 물렸다. 케이블들이 삐걱거리면서 석민을 처음에 매달려 있던 공중으로까지 올려 준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정한은 시간이 매번 너무 짧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모를 위협을 대비해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서 더 그랬다. 조심스럽지 않아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발각되거나, 석민이 위험에 처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견딜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정한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석민아.”

“으응?”


다음 말을 꺼내기를 망설였다. 지금껏 계속 미뤄온 질문이었다. 석민의 답을 듣기가 두려워서 그랬다. 혹시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석민이가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욕심이면. 사실 석민은 정한보고 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정한이 멋대로 찾아 내려온 거 아니었나. 사실 싫은데도 견뎌주고 있는 거 아니야? 석민이 본인의 입으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걸 알아서 더 불안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여기서… 나갈 수 있으면 어떨 것 같아?”


백 번은 더 준비했을 말인데도 형편없이 떨렸다. 웃고 있던 석민의 표정이 정한이 한 말을 이해하자마자 미소가 싹 가셨다. 정한은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어?”

“아니, 그니까.”


말을 더듬었다. 원래 이렇게 말을 못하지 않는데 석민의 앞에서는 그랬다. 아직도 군데군데 비어 있는 기억에서도 석민이 원하는 걸 때려맞추기는 어려웠다는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눈치가 좋은 정한인데도 그랬다. 석민만큼은 읽기가 어려웠다. 지금도. 미간을 좁힌 석민의 눈치를 보며 설명을 계속했다.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 있잖아. 우리 애들. 우리가 다같이 그런 생각을 좀 해 봤어. 너를 여기서 빼낼 수 있으면 어떨까 해서.”


석민은 답이 없었다. 조급해진 정한은 말을 이었다.


“계획을 한 번 세워 봤어. 원우랑 지훈이가 이런 거 잘 해. 애들 모아 보면 경비대 눈도 조금 피할 수 있고”


“...그런데 그럼 다들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 구하겠다고 그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형.”

“다들 그것도 감수하겠다는 거지. 그렇다고 너를 이대로 그냥 둘까 봐? 매번 내려오는 게 더 위험하잖아, 사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예상이 빗나갔다. 입술을 댓발 내밀려던 찰나 석민의 말에 정한은 또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혼자 있어도 돼. 그런 지 오래 됐어. 괜히 나 때문에 위험해지는 건 싫은데…”


바보. 진짜, 저 바보. 정한은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혼자 있어도 되긴. 내가 올 때마다 얼마나 네 표정이 밝아지는지를 내가 봤는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서 괜히 석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대꾸하는 목소리도 약간 먹먹했다.


“싫은 거 말고.”

“어?”

“싫은 거 말고, 너가 원하는 건 뭐냐고.”

“...”

“나가기 싫은 거야?”

“아니, 형, 그게 아니라,”

“그건 아닐 거 아니야.”


만약 진짜 그런 거면 어떡하지, 생각하면서 정한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흥분한 탓에 힘 조절이 안 되었는지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너가 정말로 싫다면 막지 않을 건데. 그런데 우리라고 너가 여기 있는 게 좋지 않거든. 네 딴에는 우리가 위험해지는 게 싫어서 그럴 수 있겠지만, 우리는 네가 여기 혼자 있는 게 그 만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싫어. 그러니까 그런 이유라면 그만둬.”


내가 싫어. 라는 말은 꾹 삼켰다. 이럴 때도 비겁해지다니, 윤정한. 그렇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심을 다 이야기한 게 아니었을 뿐이지.


“됐어. 아무튼 다음에 올 때는 너 구하러 올 거야. 여기 있고 싶은 거면 알아서 그때 얘기하던가. 그럼 억지로 데리고 나오진 않을게. ”


씩씩거리며 방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이제는 이 루틴에도 제법 익숙해져서 처음 왔던 날만큼 힘들지도 않았다. 아니면 허구헌 날 계단을 몇 백 개씩 오르내려서 체력이 조금이라도 길러진 걸까. 아, 구출 계획도 무사히 하려면 체력 길러야 할 것 같다고 그랬는데. 요즘 잡생각이 많아진 탓에 시끄러운 머릿속도 조용해질 날이 없다. 물론 그게 다 석민과 관련한 생각들이기도 했지만. 이석민 걔는 진짜 미련하게, 위험해지는 게 싫다니 그게 할 말이야? 그 생각에 다시 화가 차오르려고 할 때, 정한의 데이터패드가 진동했다.


누구지.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이 없는데. 애들 늦나? 의문을 가지며 패드를 꺼냈다. 메시지 알림이 화면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정한은 조용히 메시지를 열었다.



고마워.



‘발신인 없음' 에서 온 메시지가 화면에서 반짝였다.


정한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석민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그때부터는 정말 본격적으로 구출 작전을 준비해야 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있으면 좋을 거라는 미명 하에 최선을 다해 오프 스케줄을 맞췄다. 온갖 곳에서 나눠져 근무하는 사람들의 시간표를  맞추기란 정말 너무 힘든 일이었다. 결국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기계를 건드릴 원우와 지훈, 그리고 보충 인력으로 민규가 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어쩔 수 없이 남았다. 정한도 그 대열에 꼈다. 출동하기로 한 날이 정한의 쉬는 날은 아니었지만, 함께 가지 못하게 된 승관에게 대신 그날 근무를 맡겼다. 자주 있었던 일이라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다. 땡땡이를 쳐 버릇 한 게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조금 웃기기는 했다.


여럿이면 필히 더 시선을 끌 수 밖에 없는 걸 생각해서 몇 명씩 나눠서 들어오기로 했다. 정한은 선발대로 지훈과 찬을 데리고 먼저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 시야가 적응할 즈음이 되자 문이 다시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사람이 많아지자 곧 소란해졌다.

 

“와, 장난 없다. 진짜 깜깜해. 무서워.”

“윤정한 이걸 매번 다닌 거야? 진짜 지독하다, 지독해.”

“시끄러. 이쪽이야.”


민규의 투정이나, 승철이 놀리는 말에도 정한은 아무 말 없이 길을 안내했다. 그래도 이제 몇 번 와 본 길이라고 제법 익숙하게. 뒤에서 처음 들어와 본 사람들이 호들갑떠는 소리를 내는 걸 무시하고 일단 앞으로만 갔다. 정한이 답이 없으니 뒤따라오는 일행도 곧 조용해져서 곧 복도에는 금속제 계단에 신발이 부딫히는 소리만 남았다. 그렇게 석민이 있는 곳까지 왔다.


문 앞에 선 정한은 심호흡을 했다. 몇 번은 와 본 곳인데도 매번 이 문을 열 때마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시라도 석민이가 이 안에 없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도 들고. 오늘은 더더욱 그랬다. 혹시라도 나오기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꼴도 보기 싫으니까 가라고 하면. 그렇지만 여기까지 왔다. 그 답이 두려워서 뒤돌아 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정한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석민을 불렀다.


“...석민아?”

“정한이 형?”


석민의 목소리를 들은 정한의 일행들은 순간 굳었다. 진짜 이석민이다. 윤정한이 그렇게 말로 했지만 믿기 힘들었던, 제 친구의 살아 있는 모습. 정한은 그런 동료들을 보면서 옅게 웃었다. 내가 진짜라고 했잖아. 다들 굳어 있는 사이 정한은 다시 석민의 이름을 부르며 코너를 돌았다. 이석민, 나 왔어.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석민은 벌써부터 웃고 있었다. 나를 기다렸을까. 정한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구하러 온다고 했잖아.”


지원군도 데리고 왔어. 제 뒤에 따라오는 일행을 향해 손짓했다. 한 명씩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석민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인사는 이따가 제대로 하고. 일단은 좀 실례할게, 석민아.”

“윤정한이 하도 난리쳐서 무슨 초주검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네.”

“형이 난리를 쳤어?”

“너 진짜, 내가 나중에 얘기해 줄게. 윤정한이 어땠는지.”

“아, 김민규!”

“네, 네, 알겠습니다.”


괜히 민망해진 정한은 석민에게 제 이야기를 하려는 민규의 등을 손바닥으로 팍팍 때렸다. 아이고, 이 형이 사람 잡네! 하며 엄살을 부리는 민규에게 장비를 내려놓고 있던 원우와 지훈이 타박을 줬다. 너는 여기까지 와서도 그 난리냐. 그 광경을 보며 석민이 쿡쿡 웃다가 정한과 눈을 마주쳤다. 둘은 말없이 짧은 시선을 교환하고는 씨익 웃었다. 거 봐. 애들 다 그대로라니까. 라는 시선과 그래도 얘들이 형 잘 챙겨줬네. 라는 시선이 맞닿았다.

와글와글한 방 안에 있자니 교육생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이랬던 것 같다. 다같이 함께 웃고 떠들던 시절. 정한은 사실 그 중간에 끼어든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 주변에서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는 걸 좋아했었다. 그리고 가끔씩 석민과 눈이 마주치면서 말 한 마디 없는 대화를 하던 것까지. 마침내 안정을 찾은 세상이었다. 정한의 눈에는, 석민이 마치 그동안 잃어버린 퍼즐 조각 같았다. 마치 원래부터 제 자리였다는 마냥 자연스럽게 섞여드는 게.


그렇지만 본론은 따로 있었다. 마냥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기에, 장비를 모두 늘어놓고선 본격적인 해체 작업이 시작됐다.


“영양 공급 케이블이랑, 네트워크 포트 같은 것들도 연결되어 있고. 아마 전원 공급도 되고 있을 거야.

“하나씩 끊을게. 혹시라도 상태 이상하면 꼭 말해 줘.”

“전원 공급은 아무래도 마지막일 거고. 영양 공급부터 가자.”


금속이 마찰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여기서부터는 정한이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었다. 혹시 몰라 응급 키트도 챙겨왔지만, 그저 상황을 살피면서 기다릴 뿐이었다. 제 주변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일 동안 석민과 눈을 마주치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딜 가지 않는다는 마음 속 뜻을 전달하듯.


“자, 이제 시작한다. 조금 아플 수도 있어.”


그 말에 석민의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시선도 여기저기 멈추지 못하고 덜덜 떨렸다. 조금 아이러니했다. 평생 여기에 묶여서 있는 건 괜찮다고 했던 주제에 따끔합니다~ 같은 말에 이렇게 반응하는 석민이. 그렇지만 그 마음 자체는 이해가 갔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뒤쪽을 돌아보는 석민을 향해 정한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어어. 정한이 형. 애 한 번 안아 줘. 이쪽에 신경 못 쓰게.”

“석민아.”


여기 봐. 정한은 석민과 눈을 마주쳤다.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미간으로 흐른 땀을 치워내 줬다. 떨리는 동공이 정한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다시 한 번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지금껏 덤덤하게 견뎌왔던 게 무색하게 석민은 소리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뒤로 가는 석민을 눈치챈 정한은 양 손을 들어 석민의 얼굴을 그 사이에 담았다. 돌아가는 시선을 잡아당겨 제게 다시 고정시켰다.


“나 봐, 석민아. 괜찮을 거야.”

“정한이 형, 무서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으응...”

“애들이 잘 해줄 거야. 그리고 너도, 너는 버틸 수 있으니까…”

“....”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가만 입술을 달싹이던 정한은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으니.







“사랑해.”







늦어도 너무 늦은 마음이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했던 말. 그 기회를 뺏겨서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라도 전하는 마음.




“...나도 사랑해.”




석민의 대답과 함께, 그의 뒤에서 툭, 하고 케이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매달려 있던 케이블이 떨어져나가고 석민은 제 온 몸을 정한에게 기댔다. 끝이었다. 방 여기저기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한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지금 중요한 건 제 품에 안긴 석민이었다.

무게가 제게 실리는 감각이 어쩐지 감격스러워 정한은 자기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렸다. 어깨를 덜덜 떨면서 석민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석민은 그런 정한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대로 순순히 따라왔다.


“형, 정한이 형, 이제 괜찮아.”

“안 괜찮아. 내가, 내가 너를…”


너를 잊어버렸잖아. 라는 말을 목 뒤로 삼켰다.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석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안다는 듯이 정한을 토닥였다. 석민을 구하러 온 건 자신인데도 석민에게 위로받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게 뭐야. 민망한데도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에이씨.


“그래도 다시 왔잖아.”

“그치만, 내가, 내가… 혹시라도 몰랐으면, 혹시라도 내가 안 왔거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형이 나를 구하러 와 줬잖아, 지금.”


그러니까 괜찮아. 그렇게 속삭인 석민은 정한을 꽉 끌어안았다. 음, 몇 년을 움직일 수도 없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던 사람의 근육량이 허락하는 한 꽉 끌어안은 거니까, 사실 정한에게는 그게 아주 미약한 압력처럼 느껴졌다. 근데 그게 오히려 더 눈물이 났다. 힘도 없으면서 자기에게 매달리는 그 마음이 어쩐지 짠해서.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형이 나를 찾으러 올 거란 걸.

형은 나랑 언제까지나 같이 있어 줄 거지?



뒤늦게 떠오른 기억에 정한은 팔에 힘을 주어 부서질 듯 석민을 꽉 껴안았다. 이제는 절대 놓지 않을게. 회답하는 듯 석민 또한 정한을 마주 안았다.





웅웅거리는 기계들, 그리고 앞으로도 이 모험을 함께할 사람들 사이에서, 둘은 말없이 그렇게 서로에게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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