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요, 둘이서
떠나요, 둘이서
윤정한은 항상 바쁘다. 어느정도로 바쁘냐면, 대학생 시절에는 과대와 학생회를 같이 했었고,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큰 프로젝트를 연달아 맡는 바람에 정한의 동기들이나 친구들은 하나같이 윤정한 얼굴 보기 너무 어렵다고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그만큼 윤정한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던 정한은 돌연 퇴사를 하고 제주도에 짱박혀 살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스무 살 초반부터 항상 바쁘고 정신없이 살던 생활이 되돌아보니 너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제주도로.
“정한이 형, 진짜 제주도야? 에이 형 지금 뻥치는 거지.”
“아닌데? 나 진짜 제주도인데? 나 방금 산 그 뭐지...이거 보여줄게 영통 걸어봐.”
제주도 살이 일주일째, 정한은 제주도가 고향인 같은 팀이었던 친한 후배인 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주도에 왔는데 아는 사람 하나없고 유명한 곳은 이미 다 갔었기 때문이었다. 정한은 승관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서 걷고 있는 제주도 풍경을 보여주었다. 화면 속 승관은 피곤한 얼굴을 화면 가까이 들이대며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헐, 형 진짜 제주도네? 정한은 손에 들린 제주도 한정 스타벅스 음료를 흔들어 보였다. 봐, 나 진짜 제주도라니까. 승관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퇴사하고 어디 갔나 했더니 결국 제주도로 갔구나. 이 형은 진짜 한다면 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형... 잔소리 잔소리. 정한은 승관이 말하는 걱정(이라고 하고 잔소리라 읽는다)을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주었다. 한 달전의 정한의 모습이라면 퀭한 표정으로 대충 어어,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을텐데. 정한이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걱정을 들어준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승관은 정한에게 카톡으로 제주도에 갔다면 필수 맛집과 안 가면 후회하는 장소 리스트를 엄선해서 보내준다고 했다. 그리고, 외로울테니 자기 아는 사람도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형, 제주도에서 혼자 있지? 형 근처에 사는 곳에 내가 아는 형도 사는데, 소개시켜줄게!”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
“에이, 혹시 몰라? 그런 인연이 연인이 될지~”
어어, 승관아 고맙다. 사랑해. 그래 일 파이팅 하고. 승관과의 정신없는 전화를 끊은 후, 정한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띠링. 하고 카톡이 하나 왔다. 항상 일 처리 빠른 승관이 그세 리스트를 뽑아서 보내준 것이었다. 맛집 여러개랑 꼭 가야할 장소들, 마지막엔 연락처도 하나 있었다. ‘이름은 이석민이고 나이는 형보다 한 살 어려~ 형이 산다고 한 곳 근처에 산다고 하니까 둘이 노는데 덜 외롭겠다. 석민이 형한테 미리 말 해둘게 연락은 형 니가 해라.’ 꼼꼼한 승관의 걱정이 보이는 카톡이었다. 반복되고 인간관계에서 지친 정한은 굳이 쉬러 온 제주도에서도 사람을 만나봐야 하나 하면서 승관의 카톡에 고맙다고 답장을 남겼다. 고맙다고는 했지만 만나보진 않을 거다. 왜냐면 정한은 누굴 만나기엔 너무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정한은 휴대폰을 구석에 던져두고 한가롭게 낮잠을 자기로 했다. 멀리 있는 베개를 끌어당겨와 머리에 배고, 등 뒤에 있는 이불을 끄집어 내 덮고선 눈을 감았다. 천국은 역시 가까운 곳에 있단 말이지.
똑똑똑똑...
몇 시간 쯤 잤을까, 정한은 누군가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낮잠을 잤을 시간이 2시쯤 되었으니까, 나 몇시간을 잔 거야.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침대를 휘적여서 휴대폰을 찾으니 부재중 두 통이랑 승관의 카톡이 몇 개, 그리고 모르는 번호에게서 온 문자가 와 있었다.
부승관 15:33
형 지금 뭐 하고 있어? 석민이 형한테 연락해봤는데, 형이 완전 좋다고
오늘 집에 놀러가도 괜찮냐고 했거든? 카톡 보면 답장 좀~
부승관 16:00
니 혹시 자냐? 석민이 형이 먼저 연락하기로 했어 그건 꼭 봐라?
010-2180-1222 17:00
안녕하세요, 승관이가 소개해준 정한씨 맞죠?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집이 제가 사는 곳 근처라고 들었는데 옆집이더라고요, 이따가 퇴근하고 찾아뵐게요!!
지금 시간은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현관에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곤, 계세요? 라는 소리가 집안에 울려퍼졌다. 망할, 부승관 그건 좀 일찍 말해주란 말이야. 하지만 그건 정한이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하고 잔 탓도 있다. 정한은 갑작스럽게 찾아 온 손님 덕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출근할 때도 이런 적은 지각할 때나 있었던 일이다. 모르는 사람이니까 이상한 몰골로 나갈 수 없었다.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석민이라는 사람한테 전화가 와 있었다. 휴대폰이 멀리 있어 발로 겨우 잡으려고 하는데 몸이 기울어 바닥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아아악!
머리를 세게 박은 탓에 머리를 감싸쥐고 전화를 받은 정한이 힘겨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여보세요?”
“어...괜찮으세요? 방금 집 안에서 비명 소리가...”
“아, 네, 네...괜찮아요.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한 5분 정도만, 제가 지금 꼴이 말이 아니라서요”
“네 괜찮아요!”
정한은 부딫힌 머리를 비비적 대며 옷을 다시 갈아입었다. 대충 침대 정리도 하고 집안 정리까지 하고 나서야 현관을 열어주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낮잠을 자다가 지금 일어나서...고개를 들어 석민을 마주한 정한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회사에서 방금 퇴근하고 와서 그런지 조금 품이 큰 정장차림에, 왁스를 잔뜩 칠해 떡지고 힘줘서 올린 머리, 자신의 집에 방문하려고 사 온듯한 비타오백 음료수까지. 정한이 싫어하는 것들을 전부 석민이 하고 정한의 집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정한은 싫더라도 처음 본 사람이니 싫은 내색 안 하고 친절하게 대하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싫은 내색을 티내서 굴다간 소식을 들은 승관이 당장이라도 제주도에 찾아올 기세라. 정한은 헛기침을 하며 석민을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안녕하세요, 윤정한이라고 해요. 죄송해요, 제가 피곤해서 잠을 자느라 연락을 좀 늦게 봤네요. 집이 근처라고 하셨는데...석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네 맞아요. 알고보니까 옆집이더라고요! 우리 이것도 연인데, 친하게 지내요. 석민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싫어하는 차림새지만, 그래도 사람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제주도 살이 한 달째. 정한은 그세 석민과 친해져 있었다. 걱정이 많은 승관은 정한과 석민의 사이가 걱정이 돼서 혹시라도 의견차이 때문에 싸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일주일에 한번씩 영통을 걸어왔는데, 정한이가 너 무슨, 나 좋아하냐? 말 한마디로 개정색하며 영통을 걸지 않게 되었다. 방해 받을 사람도 없으니 정한과 석민은 더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 처음 모습은 정한이 싫어하는 차림새였지만, 사람은 나쁘지 않는다는 정한의 생각대로 석민은 정말 착하고, 또 착했다. 항상 정한을 먼저 생각해주고 다정하게 굴었다. 승관의 과도한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정한과 석민은 시간만 나면 추천받은 제주도 맛집을 부시러 가거나 분위기 좋은 카페도 가고, 가끔은 한라산도 가고 재밌는 카트도 탔다. 단둘이서 술도 마시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엄청 친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처음 만난 날에는 정한의 집에서 어색하게 치킨 시켜서 먹고 어색하게 헤어졌었지만, 지금은 정한의 집이 석민이네 집이고 석민이네 집이 정한의 집일 정도로 서로가 서로의 집을 편하게 드나들곤 했다. 그리고 첫날에 봤던 이상하고 구린 차림새와는 다르게 석민은 정말 스타일이 좋았다. 이 사람 옷이 정말 구리다는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석민은 옷 입는 센스가 좋았고, 색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신입사원인 석민은 정한의 집에 찾아온 날, 높은 사람들이 회사에 방문을 하는 날이라 평소에는 자율복장인 평소와는 다르게 정장을 차려 입고 가야 하는 날이었다고 했었다. 석민은 사둔 정장이 작아서 집 근처에서 대충 산 정장이었는데 자기에게 너무 컸었고, 이상하게 떡지고 대충 넘겼던 머리는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유튜브를 보고 따라했지만 그렇게 됐었고, 정한의 집을 찾아가기 위해 편의점에서 아무 음료수나 사서 왔는게 그게 하필 정한이 싫어하는 음료수였었다. 석민에게서 그런 사정을 듣고나니 서툴게 노력하는 모습들에서 자신의 사회 초년생 모습이 비춰보였다.
“석민아, 우리 지금 바닷가 갈래? 형이 폭죽놀이도 사놨는데”
“아, 형! 지금 몇 시인줄 알아요? 지금 나가면 모기의 밥이 되는 거나 마찬가진데...”
“어차피 너 잠도 안 오잖아. 나가서 맥주 사줄게, 받고 내일 점심까지.”
“오케이 콜. 오 분만 기다려.”
대충 모자랑 돗자리, 폭죽놀이 세트를 챙겨서 집에서 나온 둘은 집 근처 바닷가를 향해서 터덜터덜 걸었다. 석민이 조잘조잘 이야기 하면, 정한이 리액션을 해주고 석민은 더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근처 바닷가에 도착한 둘은 챙겨온 돗자리를 펼치곤 냅다 드러누웠다. 여름 밤의 선선하고 시원한 바닷바람은 항상 기분좋게 만들었다. 정한은 오늘은 지금까지 숨겨온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면서 사온 맥주를 까서 단번에 반을 들이킨 정한이 맥주캔을 내려놓으면서 입을 땠다.
“석민아, 나 할 말이 있는데. 들어줄래?”
“그럼요, 편하게 해요. 난 다 들어줄게.”
취한 김에 하는 이야기니까 그냥 흘려도 괜찮아. 나는...연애를 하면 항상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차였다? 와 진짜요? 형 얼굴이 그렇게 잘났는데 찼다고요? 그 사람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네요. 이렇게 멋진 형을? 석민이 맥주를 홀짝이다 터무니 없는 이유로 헤어졌다며 화난듯한 행동을 취해보였다. 그래서요? 항상 바쁜건 맞았지, 정말 쉴 틈도 없이 매일 매일 바빴어. 대학생 시절엔 과대랑 학생회를 같이 하느라 바빴고, 졸업하고 나서 입사하자마자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연달아서 했었거든. 제주도로 온 이유는 작년에 너무 크게 아팠었어, 지금은 괜찮은데 그때 피로도 너무 많이 쌓이고 그덕에 입맛도 없어서 커피만 주구장창 먹다보니 쓰러졌었어. 그때 알게 되었어. 아, 나 진짜 힘들구나. 그래서 무작정 짐싸서 내려왔지. 그땐 도망칠 생각도 안 들었어 힘들다고 도망치면 안될까봐.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나보다 일이 더 우선시 했는지 그런 생각들은 아직도 조금은 후회가 돼. 지금 이렇게 무작정 내려온건 후회는 안 들어. 그래서 형이 나를 만날 수 있었구나. 형이 어떤 선택을 했든, 저는 지금의 형이 만족한다면 다 좋은 거 같아요.
석민이 다 먹은 맥주캔을 찌그러트리고 봉투 안에 넣으며 말을 했다. 정한은 들고온 불꽃놀이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래서 오늘 후회할짓 하나 더 하려고.”
“네?”
“나 너 좋아해. 좀 무드없긴 한데, 그러면 뭐 어때. 내가 너 좋다는데, 싫으면 내가 내일 당장 서울로 갈게”
정한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 꺼진 불꽃놀이 스틱을 손에 쥐고 있었다. 석민은 못말린다는 듯이 덜덜 떨리는 정한의 손에서 스틱을 빼앗아 쓰레기 봉투에 넣고선 정한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쥐었다. 석민이 정한과 눈을 마주하며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형 내 눈 봐봐. 서울은 왜 가려고, 나 아직 답도 안 했는데. 내눈 똑바로 봐봐. 나 이제 대답할 거야.
조금 갑작스럽긴한데, 나도 형한테 마음 없지는 않아. 나도 형 좋아하는데...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당황스러워.
난 사람 감정 이야기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아직 좋다 사귀자는 이야기는 아직 아니야. 정한이 형 나 너무 머릿속이 소용돌이 치는 거 같아 그러니까 내말은, 조금만 기다려 줬음 좋겠다는 소리야. 알겠지? 정한은 석민의 진지한 이야기에 살짝 멍해졌다. 자신만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줄 알았는데 석민도 같은 생각을 가진다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씰룩씰룩 튀어나왔다. 그렇다가도 너무 무드없게 섣불리 고백을 한 것 같아 뒤늦게 쪽팔리다는 생각이 들어 석민이 꼬옥 쥐고 있는 손을 풀어 얼굴을 가렸다.
“석민아 나 지금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가도 돼냐?”
“이 형이 미쳤나, 안 돼. 절대 안 돼!”
석민아 너는 소용돌이 쳤던 하루속에서 도망칠수 있는 안식처였어.
따뜻하고 다정한 네가 좋아. -석민에게 전하는 편지 중,
윤정한은 항상 바쁘다. 어느정도로 바쁘냐면, 대학생 시절에는 과대와 학생회를 같이 했었고,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큰 프로젝트를 연달아 맡는 바람에 정한의 동기들이나 친구들은 하나같이 윤정한 얼굴 보기 너무 어렵다고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그만큼 윤정한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던 정한은 돌연 퇴사를 하고 제주도에 짱박혀 살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스무 살 초반부터 항상 바쁘고 정신없이 살던 생활이 되돌아보니 너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제주도로.
“정한이 형, 진짜 제주도야? 에이 형 지금 뻥치는 거지.”
“아닌데? 나 진짜 제주도인데? 나 방금 산 그 뭐지...이거 보여줄게 영통 걸어봐.”
제주도 살이 일주일째, 정한은 제주도가 고향인 같은 팀이었던 친한 후배인 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주도에 왔는데 아는 사람 하나없고 유명한 곳은 이미 다 갔었기 때문이었다. 정한은 승관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서 걷고 있는 제주도 풍경을 보여주었다. 화면 속 승관은 피곤한 얼굴을 화면 가까이 들이대며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헐, 형 진짜 제주도네? 정한은 손에 들린 제주도 한정 스타벅스 음료를 흔들어 보였다. 봐, 나 진짜 제주도라니까. 승관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퇴사하고 어디 갔나 했더니 결국 제주도로 갔구나. 이 형은 진짜 한다면 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형... 잔소리 잔소리. 정한은 승관이 말하는 걱정(이라고 하고 잔소리라 읽는다)을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주었다. 한 달전의 정한의 모습이라면 퀭한 표정으로 대충 어어,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을텐데. 정한이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걱정을 들어준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승관은 정한에게 카톡으로 제주도에 갔다면 필수 맛집과 안 가면 후회하는 장소 리스트를 엄선해서 보내준다고 했다. 그리고, 외로울테니 자기 아는 사람도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형, 제주도에서 혼자 있지? 형 근처에 사는 곳에 내가 아는 형도 사는데, 소개시켜줄게!”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
“에이, 혹시 몰라? 그런 인연이 연인이 될지~”
어어, 승관아 고맙다. 사랑해. 그래 일 파이팅 하고. 승관과의 정신없는 전화를 끊은 후, 정한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띠링. 하고 카톡이 하나 왔다. 항상 일 처리 빠른 승관이 그세 리스트를 뽑아서 보내준 것이었다. 맛집 여러개랑 꼭 가야할 장소들, 마지막엔 연락처도 하나 있었다. ‘이름은 이석민이고 나이는 형보다 한 살 어려~ 형이 산다고 한 곳 근처에 산다고 하니까 둘이 노는데 덜 외롭겠다. 석민이 형한테 미리 말 해둘게 연락은 형 니가 해라.’ 꼼꼼한 승관의 걱정이 보이는 카톡이었다. 반복되고 인간관계에서 지친 정한은 굳이 쉬러 온 제주도에서도 사람을 만나봐야 하나 하면서 승관의 카톡에 고맙다고 답장을 남겼다. 고맙다고는 했지만 만나보진 않을 거다. 왜냐면 정한은 누굴 만나기엔 너무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정한은 휴대폰을 구석에 던져두고 한가롭게 낮잠을 자기로 했다. 멀리 있는 베개를 끌어당겨와 머리에 배고, 등 뒤에 있는 이불을 끄집어 내 덮고선 눈을 감았다. 천국은 역시 가까운 곳에 있단 말이지.
똑똑똑똑...
몇 시간 쯤 잤을까, 정한은 누군가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낮잠을 잤을 시간이 2시쯤 되었으니까, 나 몇시간을 잔 거야.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침대를 휘적여서 휴대폰을 찾으니 부재중 두 통이랑 승관의 카톡이 몇 개, 그리고 모르는 번호에게서 온 문자가 와 있었다.
부승관 15:33
형 지금 뭐 하고 있어? 석민이 형한테 연락해봤는데, 형이 완전 좋다고
오늘 집에 놀러가도 괜찮냐고 했거든? 카톡 보면 답장 좀~
부승관 16:00
니 혹시 자냐? 석민이 형이 먼저 연락하기로 했어 그건 꼭 봐라?
010-2180-1222 17:00
안녕하세요, 승관이가 소개해준 정한씨 맞죠?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집이 제가 사는 곳 근처라고 들었는데 옆집이더라고요, 이따가 퇴근하고 찾아뵐게요!!
지금 시간은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현관에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곤, 계세요? 라는 소리가 집안에 울려퍼졌다. 망할, 부승관 그건 좀 일찍 말해주란 말이야. 하지만 그건 정한이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하고 잔 탓도 있다. 정한은 갑작스럽게 찾아 온 손님 덕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출근할 때도 이런 적은 지각할 때나 있었던 일이다. 모르는 사람이니까 이상한 몰골로 나갈 수 없었다.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석민이라는 사람한테 전화가 와 있었다. 휴대폰이 멀리 있어 발로 겨우 잡으려고 하는데 몸이 기울어 바닥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아아악!
머리를 세게 박은 탓에 머리를 감싸쥐고 전화를 받은 정한이 힘겨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여보세요?”
“어...괜찮으세요? 방금 집 안에서 비명 소리가...”
“아, 네, 네...괜찮아요.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한 5분 정도만, 제가 지금 꼴이 말이 아니라서요”
“네 괜찮아요!”
정한은 부딫힌 머리를 비비적 대며 옷을 다시 갈아입었다. 대충 침대 정리도 하고 집안 정리까지 하고 나서야 현관을 열어주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낮잠을 자다가 지금 일어나서...고개를 들어 석민을 마주한 정한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회사에서 방금 퇴근하고 와서 그런지 조금 품이 큰 정장차림에, 왁스를 잔뜩 칠해 떡지고 힘줘서 올린 머리, 자신의 집에 방문하려고 사 온듯한 비타오백 음료수까지. 정한이 싫어하는 것들을 전부 석민이 하고 정한의 집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정한은 싫더라도 처음 본 사람이니 싫은 내색 안 하고 친절하게 대하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싫은 내색을 티내서 굴다간 소식을 들은 승관이 당장이라도 제주도에 찾아올 기세라. 정한은 헛기침을 하며 석민을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안녕하세요, 윤정한이라고 해요. 죄송해요, 제가 피곤해서 잠을 자느라 연락을 좀 늦게 봤네요. 집이 근처라고 하셨는데...석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네 맞아요. 알고보니까 옆집이더라고요! 우리 이것도 연인데, 친하게 지내요. 석민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싫어하는 차림새지만, 그래도 사람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제주도 살이 한 달째. 정한은 그세 석민과 친해져 있었다. 걱정이 많은 승관은 정한과 석민의 사이가 걱정이 돼서 혹시라도 의견차이 때문에 싸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일주일에 한번씩 영통을 걸어왔는데, 정한이가 너 무슨, 나 좋아하냐? 말 한마디로 개정색하며 영통을 걸지 않게 되었다. 방해 받을 사람도 없으니 정한과 석민은 더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 처음 모습은 정한이 싫어하는 차림새였지만, 사람은 나쁘지 않는다는 정한의 생각대로 석민은 정말 착하고, 또 착했다. 항상 정한을 먼저 생각해주고 다정하게 굴었다. 승관의 과도한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정한과 석민은 시간만 나면 추천받은 제주도 맛집을 부시러 가거나 분위기 좋은 카페도 가고, 가끔은 한라산도 가고 재밌는 카트도 탔다. 단둘이서 술도 마시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엄청 친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처음 만난 날에는 정한의 집에서 어색하게 치킨 시켜서 먹고 어색하게 헤어졌었지만, 지금은 정한의 집이 석민이네 집이고 석민이네 집이 정한의 집일 정도로 서로가 서로의 집을 편하게 드나들곤 했다. 그리고 첫날에 봤던 이상하고 구린 차림새와는 다르게 석민은 정말 스타일이 좋았다. 이 사람 옷이 정말 구리다는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석민은 옷 입는 센스가 좋았고, 색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신입사원인 석민은 정한의 집에 찾아온 날, 높은 사람들이 회사에 방문을 하는 날이라 평소에는 자율복장인 평소와는 다르게 정장을 차려 입고 가야 하는 날이었다고 했었다. 석민은 사둔 정장이 작아서 집 근처에서 대충 산 정장이었는데 자기에게 너무 컸었고, 이상하게 떡지고 대충 넘겼던 머리는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유튜브를 보고 따라했지만 그렇게 됐었고, 정한의 집을 찾아가기 위해 편의점에서 아무 음료수나 사서 왔는게 그게 하필 정한이 싫어하는 음료수였었다. 석민에게서 그런 사정을 듣고나니 서툴게 노력하는 모습들에서 자신의 사회 초년생 모습이 비춰보였다.
“석민아, 우리 지금 바닷가 갈래? 형이 폭죽놀이도 사놨는데”
“아, 형! 지금 몇 시인줄 알아요? 지금 나가면 모기의 밥이 되는 거나 마찬가진데...”
“어차피 너 잠도 안 오잖아. 나가서 맥주 사줄게, 받고 내일 점심까지.”
“오케이 콜. 오 분만 기다려.”
대충 모자랑 돗자리, 폭죽놀이 세트를 챙겨서 집에서 나온 둘은 집 근처 바닷가를 향해서 터덜터덜 걸었다. 석민이 조잘조잘 이야기 하면, 정한이 리액션을 해주고 석민은 더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근처 바닷가에 도착한 둘은 챙겨온 돗자리를 펼치곤 냅다 드러누웠다. 여름 밤의 선선하고 시원한 바닷바람은 항상 기분좋게 만들었다. 정한은 오늘은 지금까지 숨겨온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면서 사온 맥주를 까서 단번에 반을 들이킨 정한이 맥주캔을 내려놓으면서 입을 땠다.
“석민아, 나 할 말이 있는데. 들어줄래?”
“그럼요, 편하게 해요. 난 다 들어줄게.”
취한 김에 하는 이야기니까 그냥 흘려도 괜찮아. 나는...연애를 하면 항상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차였다? 와 진짜요? 형 얼굴이 그렇게 잘났는데 찼다고요? 그 사람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네요. 이렇게 멋진 형을? 석민이 맥주를 홀짝이다 터무니 없는 이유로 헤어졌다며 화난듯한 행동을 취해보였다. 그래서요? 항상 바쁜건 맞았지, 정말 쉴 틈도 없이 매일 매일 바빴어. 대학생 시절엔 과대랑 학생회를 같이 하느라 바빴고, 졸업하고 나서 입사하자마자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연달아서 했었거든. 제주도로 온 이유는 작년에 너무 크게 아팠었어, 지금은 괜찮은데 그때 피로도 너무 많이 쌓이고 그덕에 입맛도 없어서 커피만 주구장창 먹다보니 쓰러졌었어. 그때 알게 되었어. 아, 나 진짜 힘들구나. 그래서 무작정 짐싸서 내려왔지. 그땐 도망칠 생각도 안 들었어 힘들다고 도망치면 안될까봐.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나보다 일이 더 우선시 했는지 그런 생각들은 아직도 조금은 후회가 돼. 지금 이렇게 무작정 내려온건 후회는 안 들어. 그래서 형이 나를 만날 수 있었구나. 형이 어떤 선택을 했든, 저는 지금의 형이 만족한다면 다 좋은 거 같아요.
석민이 다 먹은 맥주캔을 찌그러트리고 봉투 안에 넣으며 말을 했다. 정한은 들고온 불꽃놀이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래서 오늘 후회할짓 하나 더 하려고.”
“네?”
“나 너 좋아해. 좀 무드없긴 한데, 그러면 뭐 어때. 내가 너 좋다는데, 싫으면 내가 내일 당장 서울로 갈게”
정한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 꺼진 불꽃놀이 스틱을 손에 쥐고 있었다. 석민은 못말린다는 듯이 덜덜 떨리는 정한의 손에서 스틱을 빼앗아 쓰레기 봉투에 넣고선 정한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쥐었다. 석민이 정한과 눈을 마주하며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형 내 눈 봐봐. 서울은 왜 가려고, 나 아직 답도 안 했는데. 내눈 똑바로 봐봐. 나 이제 대답할 거야.
조금 갑작스럽긴한데, 나도 형한테 마음 없지는 않아. 나도 형 좋아하는데...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당황스러워.
난 사람 감정 이야기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아직 좋다 사귀자는 이야기는 아직 아니야. 정한이 형 나 너무 머릿속이 소용돌이 치는 거 같아 그러니까 내말은, 조금만 기다려 줬음 좋겠다는 소리야. 알겠지? 정한은 석민의 진지한 이야기에 살짝 멍해졌다. 자신만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줄 알았는데 석민도 같은 생각을 가진다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씰룩씰룩 튀어나왔다. 그렇다가도 너무 무드없게 섣불리 고백을 한 것 같아 뒤늦게 쪽팔리다는 생각이 들어 석민이 꼬옥 쥐고 있는 손을 풀어 얼굴을 가렸다.
“석민아 나 지금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가도 돼냐?”
“이 형이 미쳤나, 안 돼. 절대 안 돼!”
석민아 너는 소용돌이 쳤던 하루속에서 도망칠수 있는 안식처였어.
따뜻하고 다정한 네가 좋아. -석민에게 전하는 편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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