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효율 인간의 사랑법
윤정한은 꾀부리는 사람이 싫었다. 매사 다 의도가 있는 사람들. 철저하게 계산하고 계략적으로 행동하는 부류들. 남이 그런 헛짓거리를 하든 말든 몰랐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눈에 다 보였으니까. 보기에도 피곤하고 유쾌하지가 않았다. 말 빙빙 돌려서 하는 것도 싫고 어쭙잖은 수작 부리는 것도 다 싫었다. 모른 척 해주는 것도 한 두 번이어서 처음엔 어엉 그래 하고 넘어가다가도 선 넘는다 싶으면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를 않았다. 혹자는 그런 정한을 두고 싸가지 없다고 욕했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그런 점이 멋있는 거 같다고 환호했다. 하지만 정한을 욕하는 부류도 엄밀히 따져봤을 때 정한을 싫어한다고 보기에는 분명한 어폐가 있었다. 그냥 자기가 그 바운더리 안에 영영 발 못 들이밀 것 같으니 괜히 신경질 부리는 거였다. 그렇듯, 윤정한은 이상한 매력을 가진 남자였다. 짜증 나는데 괜히 찔러보고 싶은. 막상 찌르기엔 또 겁나는데 그래도 슬쩍 건드려 보고 싶은.
모두가 선망하는 <윤정한 존>
정한의 다정은 안쪽으로 고일 수록 농도가 짙어졌다. 어떠한 반경 이내에서는 지독하다 싶을 때도 있었다.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처럼 굴었지만 그건 엄밀히 따지자면 정한이 주변인들에게 베푸는 최소한의 상냥함이었다. 겉보기엔 애교 넘쳐도 한없이 애정을 마구 퍼다 나르는 류의 사람은 아니었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다들 은근히 윤정한 바운더리를 넘봤다. 저기에만 들어가면 특별 대우 받는다. 얇게 펴바른 상냥함보다 조금 더 가슴 뛸 법한 다정. 정한에게 숨겨져 있는 오아시스에 모두 목이 탔다. 하지만 윤정한이 누구냐. 그는 쉽게 자길 내어주는 남자가 아니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좌절하고 내심 슬퍼하기를 반복했다. 사람 가려 사귄다기엔 함부로 쌩까질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쭙잖게 친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그런 사람. 대체 윤정한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몇 명은 매일 물 떠놓고 빌었다.
“다 됐고. 난 그냥 착한 애가 좋아.”
정한이 그렇게 말하자 와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맞네맞네. 얘 끼고 다니는 라인업 봐. 쉽사리 긍정하는 사람들부터. 요즘 시대에 착한 게 어딨어? 호구 같은 게 좋단 건가.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고. 결국엔 다 따지고 들 거면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바락바락 성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정한은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홀짝였다.
“내가 그렇다는데 다들 왜 이래?”
소주잔 들고 지을 표정이라기엔 지나치게 천진한 얼굴이라고 그의 동행들은 생각한다. 히읗히읗. 아니 키읔키읔? 아무튼 그런 자막 옆에 띄워야 할 것처럼 귀엽게 웃고 윤정한은 팔짱을 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암튼 걔는 안 만나. 거절할게에.”
그런 식으로 들어오는 소개 자리를 죄다 걷어찼다. 꼭 연애를 떠나서도 그냥 인위적으로 누군가 이어주는 대부분의 행위들에. 맘은 고마워. 그래 놓고 한 마디 덧붙여서 상대가 무안하게는 안 했다. 그의 지인들은 그런 프로세스를 알면서도 괜히 한 번씩 찔러봤고 정한은 장난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매번 거절하길 반복했다. 꼭 하나의 놀이 같았다. 그 울타리 안에 한 발 들어와도 윤정한을 다 아는 것 같진 않았으니까. 더 깊이 애정을 쏟아낼 안쪽 구역이 있다는 게 너무 티가 났다. 하지만 최소한의 반경 내에 든 사람들은 거기에 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윤정한을 건들지 않고 제 위치에 만족했으니까. 애초에 윤정한에게 부담을 안 주는 사람들이니 울타리 하나 정도는 넘어와서 친구를 할 수 있는 거였다.
“야, 정한아. 너 전화 온다.”
“누구야? 내 바보?”
“아, 얘 걔잖아. 걔 누구야. 밴드부 보컬. 갑자기 이름이 기억 안 나.”
말 없이 일어나 전화를 받은 정한은 거기다 대고 별말 없이 대답만 몇 번 하더니 이내 말했다. 얘들아, 나 아무래도 가봐야 할 듯. 곧장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미안해. 술값 나오면 엔빵해서 보내줘.”
윤정한은 잘생긴 얼굴로 미안하다는 표정 지으면서 한 손으로 짐을 쌌다. 반대 손으로는 전화를 끊지 않고 그래서 거기가 어디라고? 물으면서. 정한이 급히 제 옷 주워 입고 자리를 뜨자 언뜻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아유, 그래도 윤정한 친구 하려면 이 정도는 감당 해야지.”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금세 분위기를 환기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쟤가 저러는 거 한 두 번이냐.
“하여간 그 바보… 걔 때문에.”
“누가 누구 바보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젠.”
그 말에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보 누구? 뭐야, 윤정한 어디 갔어. 화장실 다녀오느라 대화를 놓친 한 명만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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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옆의 걔. 전화번호부에 낯간지럽게 <내 바보>로 저장되어 있는. 착한 애 좋다는 윤정한 말에 모두가 제일 먼저 떠올린. 윤정한 아는 사람 중에 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겠냐, 이석민이지.”
“아 석민이~”
“내가 윤정한 여자친구면 석민이한테 해주는 것처럼 안 해줘서 서운해가지고 헤어진다.”
이석민. 농담으로 그런 이야기가 오갈 정도로 윤정한이 극진히 아끼는 동생. 제 발로 찾아가도 불러내기 힘들다는 윤정한을 전화 한 통으로 오라 가라 가능한 유일한 사람. 야 징그럽다 징그러워. 둘이 붙어 다니는 걸 볼 때마다 다들 절로 그런 소리를 했다.
“분명히 처음엔 내가 석민이랑 더 친했거든? 아니 그렇잖아. 그때까지만 해도 윤정한이랑은 따로 놀았고.”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두가 처음을 기억했다. 맞아, 첨엔 둘이 서먹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정한과 석민은 찰떡같이 붙어 다녔다. 어디냐고 연락 돌리면 매번 같이 있다고 했다. 뭐 좀 보러 가자고 하면 이미 보러 갔다고 했다. 뭐야. 누구랑? 물어보면 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매번 같았다. 응? 너희 친해? 어, 뭐 그렇게 됐어. 싱겁고 별거 없는 대답들. 뭐 대단한 계기가 있나 했더니 그런 것도 아니란다. 뭐야, 그럴 수가 있나.
“정한이가 석민이 진짜 좋아하지. 그 까탈스러운 애가 누구 그렇게 오래 끼고 다니는 거 봤냐.”
“야, 그래도 석민이도 정한이한테 엄청 맞춰 줘. 걔가 좀 착하냐.”
“아, 당연하지. 윤정한 바로 옆에서 그러고 다니는 게 쉬워? 그것도 석민이나 하는 거지.”
윤정한 장난도 석민이가 다 받아주고. 그거 자꾸 당하면 빡칠 법도 한데 그냥 매번 감내하더라 걔는. 예민한 거 아니까 신경도 엄청 써주고. 어그로 끌리면 커버도 쳐주고…
“이쯤 되면 둘이 결혼하라 그래라… 걍 둘이서 천생연분이네…”
테이블 위에 술병이 빠르게 늘어났다. 그들은 윤정한과 이석민을 안주 삼아 계속해서 분위기를 이어갔다.
“석민이 군대 가던 날 윤정한 울었을 걸.”
“코미디가 따로 없네… 둘이 사귀냐? 지 갈 때도 안 울어놓고 뭔…”
“꼴랑 두 살 차인데 되게 애로 보이나 봐. 맨날 뭐 어디 가서 사기 당할까 걱정하고.”
“걔 성격이면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긴 한데…”
쟤 저러다 분명 5년 안에 사기 당한다. 그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사람이 없긴 했으니까.
정한이 대체로 상냥한 편이었다면 석민은 모두에게 친절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밝게 인사했고, 넉살 좋게 다가와서는 군말 없이 제 할 일 했다. 정한의 다정이 좁고 깊었다면 석민의 다정은 마냥 넓었다. 다정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든 사람은 남 대하는 눈빛이나 태도 같은 데서 다 티가 나는 법.
“야, 걔 싫어하면 싸이코지 그게…”
사람들은 쉽게 이석민을 좋아했다. 우리 석민이 하느님 다음으로 착한 애예요. 어느 날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 한때 석민의 별명으로 자리 잡은 적도 있었다. 다같이 있을 때 분위기 잘 띄웠고 단 둘이 있을 때도 사람 맘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사람이 종 허당끼가 있긴 했는데 종종 허술할 때도 그게 밉지가 않았다.
“걔 진짜 좋은 애야. 가끔은 사람이 이렇게나 좋을 수 있을까 싶어.”
어느 날 정한이 휴대전화 들여다보면서 한 이야기 인용하자면 그랬다.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이랬나. 눈 한 번 안 마주치고 한 얘긴데도 그 말 하는 목소리가 담백하고 정갈해서 완전 진심 같았다. 오글거린다고 뭐라 할 법도 한데 다 맞는 소리라 다들 가만있었다. 글치… 석민이 참 착해… 누가 뭐래도 그건 진실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다들 윤정한이 이석민 좋아하는 거 이해했다. 지 입으로 착한 애가 좋다잖아. 완전 이석민 아님? 머리 쓰는 애도 싫다 그러고… 걍 석민이네. 잔꾀 없고. 걔는 남한테 하는 거 다 계산할 정도의 위인이 못 돼. 윤정한은 착한 애 좋아한다. 이석민은 착하다. 고로 윤정한은 이석미 좋아한다. 그야말로 삼단논법의 완성이었다. 정작 그 이야기 들은 당사자의 반응은 모두의 예상과 달랐지만. 이후 윤정한 발언에 대해 전해 들은 이석민은 웃으면서 말했다.
“형이 착한 애가 좋다 그랬다고?”
이석민은 언행에 부러 의도를 담을 사람이 못 된다. 맨날 웃고 다니지만 억지로 웃는 일도 거의 없었다. 참 보기 좋게 투명한 사람. 대놓고 안 보여준 거면 모를까 굳이 숨기고 거짓말 못할 사람이었다. 석민이 중얼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것 같긴 했는데. 착한 애… 착한 애라…
“그럼 난 아니겠네.”
그 말과 함께 짓는 웃음은 평소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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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저녁에는 날씨가 쌀쌀했다. 정한은 입고 있는 점퍼를 바짝 당기며 땅에 발을 내딛었다. 이 근처 어디 쯤이었는데. 골목 앞을 몇 번 서성거리다가 겨우 찾은 포장마차에 석민이 있었다.
“와, 형 죄송해요. 석민이가 초반에 막 달리더니 금방 뻗어버려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자기들도 이미 취했는지 죄다 얼굴이 벌겠다. 플라스틱 테이블에 코 박고 자고 있는 석민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정한이 대답했다. 어엉 그래. 전화로만 들어도 취한 것 같드라.
“…형? 형이야?”
“오냐. 너 일어나.”
가까스로 고개를 든 석민이 웅얼대자 정한은 석민의 한쪽 팔을 잡고 일으켰다. 제 술자리를 파하고 남의 술자리에 찾아와서 픽업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정한은 그런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석민을 챙겼다. 너 주머니에서 지갑 빠졌어. 저거 줏어 빨리. 팔 여기 넣고. 그러면서 옷 끝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석민에게 겉옷을 입혔다. 고분고분 따르는 석민을 두고 석민의 친구들이 소리를 쳤다.
“야! 넌 형한테 진짜 잘해 인마. 매번 뭐냐 이게.”
“응, 너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알아서 할게.”
석민이 실실 웃으며 받아치고는 나설 채비를 했다. 너희도 너무 늦게까지 마시지 말고 집 들어가. 정한이 하는 말에 다들 예에 들어가십시오 형님, 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온 뒤로 석민만 쳐다보고 있었으면서 가기 전에는 한 번 챙겨주는 상냥함이 지극히 윤정한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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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은 바보가 아니었다. 천재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 맘 하나 가늠 못할 정도의 멍청이는 못 됐다. 정한은 귀찮은 일을 굳이 하는 걸 싫어했고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효율을 늘 고심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의 계산이 매번 한 사람 앞에서만 완전히 방향을 잃고 헤매기를 반복했다.
피곤해 죽겠다가도 석민이 어딜 가자고 하면 느적느적 몸을 일으켰다. 뭐 어딜 또 가자고. 막상 가서 나빴던 적은 없으니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들 다 지나가는 포토존에 굳이 서서 같이 사진 찍는 짓 하고 웃기다고 키득댔다. 이상하게 석민과 하면 그게 뭐든 좀 재밌는 것 같았다.
“되게 안 맞는데 되게 잘 맞아.”
그래서 그런 식의 얼렁뚱땅한 표현으로 그들의 관계를 정의했다. 사고방식이 비슷한 것도 아니었고 행동양식이 닮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 다른 것만 줄줄이 욀 수 있을 정도였다.
정한은 민초에 별 다른 생각이 없었고 석민은 치약 맛 나는 민초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 정한은 그날 이후로 민트 초코를 시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정한은 영상 매체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지만 석민은 각종 드라마와 영화를 즐겨봤다. 그 주 정한은 장편의 해리포터 시리즈를 정주행했다. 정한은 제 손으로 피자를 사 먹어 본 적 없었고 석민은 피자 귀신이었다. 그래서 정한은 석민을 따라 삼 일 내내 피자만 먹어보는 일에도 도전했다. 그야말로 기행이었다. 정한의 행적을 듣고 혹자는 기함을 했다. 야 너 미쳤냐?
“음…. 미친 걸까?”
그날 정한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미쳤나 보다. 윤정한이 남들 의견 수용 안 하는 독불장군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단 다 좋다고 하고 보는 예스맨도 절대 못 된단 사실은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참고 견디는 거. 어릴 때부터 그런 게 좀 싫었고. 뭐래 너 지금 존나 견디는 사람 같은데… 그 말에 정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나 혹시 참고 있는 걸까?
근데 석민과 있을 때는 자기가 인내하고 있단 생각이 안 들었다. 내가 걔를 참아준다고? 그렇다기엔 반대 같은데.
“난 걔가 나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
그래서 그런 소리를 했다. 날 받아주잖아. 잘 챙겨주고. 석민이가 내 생각 많이 해줘. 나도 사실 알아 나 예민한 구석 있는 거. 그리고 내 장난에 다들 못 말린다 소리 하는 것도 다 알아. 다 아는데…
“우리 여행 몇 번 같이 갔었잖아. 나랑 걔랑 방 썼었거든?”
내가 빛 밝은 거 신경 쓰는 거 아니까 암막 커튼 쳐놓고 밥을 먹었대 걔가. 커튼 치면 그게 보이니? 그냥 말하고 키고 먹으면 되지. 내가 어거지로 문 잠그고 귀요미송 하면 들여보내 주겠다 했더니 얼굴 시뻘게져서는 그걸 또 진짜 복도에서 하더라. 솔직히 거기서 화내도 할 말 없지. 근데 그걸 아 형 진짜 못 말린다 소리 한 번 하고 넘겨버려. 나만 입맛 바뀐 거 아니야. 걔도 내가 먹던 대로 고기 먹더라 이제는. 첨엔 핏물 싫다고 그러더니만.
“근데 걔는 원래 여기저기 전부 다정한 애야.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도 비슷한 정도로 할 걸. 그게 사실 말처럼 쉽니. 난 절대 그렇게 못해.”
체력이 좋다고 봐야지… 맘 쓰는 것도 체력인데.
“암튼 그래서 언제 한 번 괜히 서운해 가지고 장난삼아 뭐라 한 적 있거든? 너 왜 나 싫냐고.”
이 타이밍에서 정한은 너 진짜 악취미란 소릴 한 번 듣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 알어… 아는데 그냥 걔 한정 내가 애정결핍 되는 것 같애.
“근데 사실 석민이가 날 싫어하겠냐? 난 걔가 나 진심으로 싫어할까 봐 불안했던 적 없어. 석민이는 나 좋아해. 걔는 이 앞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모르는 사람도 좋아할 텐데 날 왜 안 좋아해.”
아 형은 왜 그러냐고 안 싫어한다고. 그런 식으로 또 일일이 손사래 칠 애일 거 아니까 물어봤지. 뭐라는 거냐고 무시 안 하고 또 하나하나 아니라고 성화일 거거든 걔는.
“걔는 진짜 나라면 절대 안 할 말들을 해.”
우리 왜 예전에 강화로 엠티 갔을 때. 애들 다 뻗고 우리 둘만 남아서 얘기한 적 있었거든? 그때만 해도 별로 안 친해서 살짝 서먹했는데, 나도 좀 취한 건지 뭔지 감성을 좀 탔단 말이야. 친구는 많긴 한데… 마음 놓고 고민을 터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다고. 주변에 사람은 많은데 가끔씩 되게 외로울 때가 있다고. 밤에 막 풀벌레 우는 그런 길목에서 산책하면서 그런 소리를 했는데 나도 내가 뭔 말하는지 모르겠더라. 걔도 딱히 알아들은 표정은 아니었고. 근데 그냥 가만히 들어주더라고. 안 뻘쭘해서 그게 일단 고마웠지. 그래서 그렇게 말없이 한참 걷다가… 이제 할 말도 별로 없고 걍 있는데 걔가 뜬금없이 그러는 거야.
“제가 돼줄게요.”
그러고는 어둑한 가로등 밑에서 씩 웃는데 기분 진짜 이상한 거 있지. 뭔 헛소리냐는 말도 차마 안 나오고. 보통 같으면 거기다 대고 장난처럼 면박이라도 한 번 줬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아무 말도 못 하겠는 거야. 뭘 돼 줘, 돼주긴. 몇 번 보지도 않았거든 그때는. 근데도 그게 그냥 싫지가 않더라고. 진짜 돼줄 것 같아서 그런 거라기보단 그냥… 그냥 이상했어. 지금에야 괜찮지만 그때는 선배들 몇이 나 얼마나 미워했냐. 선배들이 그렇게 분위기 잡으니까 다들 대외적으론 나한테 좀… 그게 이제 와서 서운하단 게 아니라. 암튼 그랬잖아. 그래서 나도 센티멘탈해진 건지 뭔지… 그래서 내가 말했지.
“주말에 대학로에서 연극 볼래?”
진짜 뜬금없는 소리 하길래 나도 홧김에 뜬금없는 소리 해봤어. 그랬더니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좋아요.”
걘 진짜 싫은 것도 없나? 아 맞다. 석민이 벌레 싫어한다. 오이도 안 좋아해서 빼고 먹어 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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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도 잘 채지만 모른 척도 잘하는 윤정한은 스스로의 마음에 대해 선제적으로 후자의 태도를 취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제 마음을 눈치챈 뒤 착착 이렇다 저렇다 정리하기엔 삶이 너무 피곤했다. 무언갈 정의 내리고 체계를 갖추는 건 윤정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이 흐름에 몸 맡기고 살고 싶었다. 그게 뭐든. 구태여 복잡하게 살고 싶은 맘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아 시발…”
그런 윤정한은 8월의 어느 날, 사람들이 환호하는 홍대 지하 클럽에 서서 별안간 눈물을 훔쳤다. 그냥 한없이 아득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나왔다. 말이 되나?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이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눈물이 나올 리가 없으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비죽비죽 나오고, 안 울려고 몸을 웅크리는 사이 어깨가 떨려왔다.
“아 짜증나.”
눈물 흐르는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데 형편없이 두 뺨이 젖어 들었다. 모른 척 하려고 했던 답을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서. 어이가 없었고, 답답했고, 짜증이 났다. 눈앞에는 소극장 크기의 무대에 선 석민은 벅차다는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석민이 속한 밴드부가 처음 공연을 하는 날이었다. 몰래 찾아간 정한은 반주가 시작되고 석민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그 순간부터 울기 시작했다.
“너무 잘하네… 진짜 너무…”
왜 눈물이 났을까? 곧장 언어로 치환해 답할 순 없어도 그 이유는 그 어떤 문장보다도 확실하게 정한에게 날아와 꽂혔다. 걔가 멋졌고, 대견했고, 자랑스러웠고……….
좋았다.
짜증이 솟구쳤다. 그래, 정한은 석민이 좋았다. 항상 좋았고. 사실은 계속 좋았고. 단 한 번도 안 좋아한 적 없었다. 그걸 몰랐던 적 없으면서도 정한은 그 당연한 사실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함께 공연을 보러 갔던 마로니에 공원. 꺼진 불빛 아래의 걔. 밝은 데서 보이던 걔의 눈가. 자기보다 1, 2cm 정도 크다는데 가끔씩은 훌쩍 커 보이는 키. 웃을 때 휘어지는 눈꼬리. 걔의 컨버스 하이. 웃음 한 조각까지. 그 모든 것이 석민의 노래와 함께 정한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날 함께 엉터리 연극을 보고 석민이 사랑에 대해 늘어놓았을 때 정한은 시선 끝에 걸린 석민을 보면서 애매하게 답을 얼버무렸다. 그는 사랑에 대해 그렇게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그렇지만 당시에는 그냥 넘겼던 문장들이 이후 정한에게 자꾸 찾아왔다. 그러니까 석민아, 너는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면 안 됐어. 언젠가부턴 형체를 알 수 없는 마음이 목 끝까지 넘실댔다.
“같이 있으면 기쁜 것도 사랑 같고 서운해하는 마음도 사랑 같아요.”
그 말은 하지 말지. 정한은 어느 순간부터 그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 한가운데 석민을 두게 되었다. 별것도 없는데 함께 있는 게 너무 재밌을 때. 그 사람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스레 서운할 때. 정한의 그런 순간에는 매번 석민이 있어서.
“석민이가 좋아.”
그 문장은 이미 당사자 앞에서도 남 앞에서도 골백번은 더 뱉은 말이다. 그런데도 언제부턴가는 그 말이 입술 밖으로 발음 되지 않고 목구멍 어딘가에 고였다. 씨앗이 된 말이 그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자라났다. 삼킬 수 있을까. 정한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삼켜내야 한다. 제 마음이 둘의 관계에 독이 될 마음이라면. 지금처럼 마주 보고 웃는 시간마저 사라지게 할 그런 마음인 거라면.
번쩍이는 조명과 달아오른 열기 한 가운데서 정한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거기에 있다. 난 어떻게 해야 돼. 아닐 거라고 아닌 거라고 끝도 없이 생각했는데 이제 더는 모른 척도 못 하게 돼서 어떻게 해. 알 수 없는 서운함과 형체 모를 불안에 사랑이란 이름표가 붙는 순간 정한은 절망했다. 무서워서. 가장 안정을 추구하는 자기가 이 마음으로 인해 가장 어렵고 험한 길을 선택하게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정한은 비틀비틀 제 몸을 이끌고 출구로 향했다.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석민을 뒤로 하고 발을 내딛었다. 석민의 목소리가 끝도 없이 홀 안을 울렸다. 다 알면서 모른 척 해왔던 시간들에 대해 벌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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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민아, 너는 나로 하여금 모든 걸 쉽게 하고 모든 걸 어렵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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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지금. 술에 취한 석민을 이끌고 길을 걷던 정한은 저녁의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 추위를 많이 타서 그런지 딱히 추워할 법한 날씨도 아닌데 괜히 몸이 시렸다.
“형 추워?”
“어? 아니.”
하지만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석민은 제게 걸쳐져 있던 겉옷을 벗어냈다. 야 뭐해. 그러거나 말거나 벗은 제 옷을 떨고 있는 정한에게 입힌다. 야 안 춥다고. 정한이 다시 옷을 벗으려고 하자 석민은 옷 양쪽을 붙들곤 말했다.
“나 지금 취해서 너무 더워. 형이 좀만 대신 입어주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떡하니. 정한은 차마 옷을 벗지도 못하고 멍하니 웃고 있는 석민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따가 집 도착하면 그때쯤 주라, 알았지?”
“그래…”
다정이 미웠다. 습관처럼 배어있는 그 다정이 가끔씩은 너무 잔인하게 느껴져서. 그렇게 다정한 네가 난 가끔씩 무심하게 느껴져.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정한은 매번 슬퍼졌다. 그게 진짜 너무한 마음 같지 않니. 너 같은 애가 그렇게 보인다는 게… 정한은 석민의 다정함 속 무심함에 자꾸만 아팠다. 그런데도 그 무심함 속 다정함 때문에 손쉽게 기뻐지기도 했다.
“모순…”
“어?”
“아무것도 아니야.”
정한은 애매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석민은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세심함이 있었다. 시야가 얼마나 넓어야 그게 가능하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슬쩍 챙기는 일에 능했다. 정한의 예민함은 그 앞에서 자꾸만 뭉툭해졌다. 제가 날카로워지기도 전에 석민이 조치를 취했으니까. 그래서 제 어깨를 감아오는 손이 좋았다. 정한이 아프거나 다치는 일이 생기면 석민은 계속 정한을 보고 있었다. 안 아프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쳐다봐서 뭐해. 그러자 언젠가 석민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원래 좀 비논리적이야.”
“뭐?”
“몰라, 나도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누가 그러더라. 근데 그 말 듣고 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해가지고.”
나는 착착 알아서 꼼꼼하게 잘 해내고 그런 편은 못 돼. 형도 알잖아. 남들은 곧장 아는 거 몇 발 늦게 알게 될 때도 많고. 효율 있게 쉽게 쉽게… 그렇게도 잘 못하는 것 같고. 사소한 거에 긴장도 많이 하고.
“근데 나는 실질적인 도움 못 주더라도 그냥 형 얘기 들어주고 싶어.”
형 상태 안 좋으면 좀 챙겨주고 싶고. 옆에 있어 주고 싶고. 형이 불편하면 안 그럴게. 근데 그 정도는 해줘도 되는 거잖아. 그냥 가끔은 그런 쓸모 없어 보이는 지지도 있으면 좋잖아.
“좋지 않나? 또 너무 내 기준인가?”
그렇게 말하고 석민은 환히 웃었다. 그래서 그런가. 석민이랑 있으면 편하고 좋았다. 난 솔직히 이해가 안돼. 서로를 이해 못해서 투닥거리다가도 금세 화해를 했다. 기분이 상해서 입 꾹 다물고 있다가도 오래 그러고 있긴 싫어서. 화해하고 좀 서먹해지면 그 어색함이 웃겨서 또 웃음이 샜다. 아마 우린 평생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 않을까. 그치만 그런 것쯤이야. 자꾸만 그렇게 생각하게 됐으니까. 그럼 비논리적인 것도 옮나 보다. 내가 너를… 자꾸만 닮아가나 보다. 정한은 자꾸 가슴이 답답해지고 목이 멨다.
+
“들어가라.”
“그냥 자고 가지. 뭘 여기까지 와놓고 그냥 가려고 그래. 그럼 형 부른 제가 뭐가 됩니까.”
“아이… 됐어. 너 침대 딱딱해.”
“뻥치지 마. 우리 집에서 젤 비싼 게 그 매트리스인데 뭔소리야 지금.”
그리고 되게 자연스레 침대에서 자기가 잘 거라고 생각하네. 침대가 하난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리자 정한도 따라 웃었다. 그니까 내 집 가서 자겠다고.
“아냐 침대 줄게. 같이 가주라 형.”
석민이 매달려도 정한은 엷게 웃으며 거절하길 반복했다. 한참 실랑이를 해도 정한이 쉬이 져주지 않자 석민은 정한의 팔을 붙잡고 꿍얼댔다.
“아 진짜… 나 이럼 원래 성질 나온다.”
“원래 성질 어떤 거. 엄청 착한 거?”
그 말에 석민이 멈칫했다.
“아니? 그럴 리가.”
형은 매번 나 되게 착한 애라고 생각하더라. 그 말을 하는 석민을 보고 이번엔 정한이 벙쪘다. 그럼 너가 안 착하면 대체 누가 착하니…
“형, 나 안 착해.”
지금도 형 곤란한 거 알면서 내 욕심에 붙잡고 있잖아. 여기까지 와준 것도 고마운데 끝까지 내 맘대로 해달라고 하잖아. 애초에 형 바쁠 텐데 나 취했단 핑계로 불러낸 거잖아.
“내가 부르면 형이 올 줄 알고.”
“뭐래, 너 진짜 취했구나…”
정한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혀가 꼬이거나 몸을 못 가누는 거랑은 좀 결이 달랐다. 석민은 분위기를 이런 식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봇물 터진 것처럼 자기 생각을 와라락 쏟아내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정한이 불편해 하거나 싫어할 걸 알면서도. 차마 그것까지 신경 못 쓰고 있는 걸 보면 어디 한 군데 나사가 풀린 사람 같았다.
“형은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거야.”
“뭐?”
“착각하고 있다고.”
“석민아, 너 아까부터 핀트가 하나도 안 맞아.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러자 언뜻 웃던 석민이 고개를 수그리고 웅얼대기 시작했다.
“형, 사실 내가 오늘… 밴드 합주를 했는데…”
“들어가자.”
정한은 거기까지 듣고 석민을 잡아끌었다. 대신 침대 내가 쓸 거야. 넌 소파에서 자. 말은 그렇게 해도 목소리에 온기가 녹아들어 있었다.
+
석민에게 노래는 뭘까. 정한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노래만큼 석민을 빛나게 하는 건 없단 거였다. 노래만큼 석민을 어둡게 만드는 것도. 음이탈 한 번 나면 석민은 사흘 내내 정신을 못 차렸다. 그렇게 잘하면서도 남들 앞에 설 때마다 긴장을 했다. 밴드부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게 석민에게 즐거우면서도 괴롭게 작용하는 이유였다.
“나는 이걸 진짜 잘하고 싶은 것 같아.”
그렇게 말하던 눈동자를 정한은 기억한다. 이게 재밌어. 이걸 더 잘하고 싶어. 그냥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그래서인지 밴드 합주를 하다가 일이 어그러지는 날이면, 석민은 벌게진 눈을 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정한은 매번 마음을 많이 쓰는 석민이 안쓰러우면서도 차마 그만하라고는 못했다. 노래 이야기를 하는 걔 눈빛이 너무 빛나서. 무대 위에 서야만 하는 사람인 것 같아서. 그게 좋다니까… 정한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자기 실수로 우울해 하는 석민을 위로해주는 것 뿐이었다.
“일단 너 얼른 씻어.”
정한은 석민의 등을 떠밀어 욕실로 들여보냈다. 허허실실 웃는 석민을 두고 한숨이 절로 샜다. 어쩐지 오늘도 잔뜩 취했더라. 꼭 속이 상할 때면 그런 식으로 군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 놈의 밴드가 뭐라고… 이미 그렇게 잘하면서 뭐 얼마나 대단히 잘하고 싶어서… 답답한 마음이 들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순 없어서 제 입술을 씹었다. 하지만 잘 해내고 싶은 걸 잘 못하고 있을 때의 기분은 그 누구보다도 정한이 잘 알았다.
“하이고…”
와중에 발끝에 걸리는 택배 상자들의 향연에 정한이 한숨을 흘린다. 쓸데없는 것 좀 그만 사라니깐… 꼭 필요한 것만 사. 이런 류의 마케팅은 다 사기야. 그 선배가 사달라는 거 다 사주지 마.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 언젠가는 정한이 줄줄 쏟아내는 걱정들을 듣다 석민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었다.
“형 지금 진짜 엄마 같다…”
그 말에 정한은 벙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엄마는 무슨… 듣기 싫은 잔소리란 뜻일까 싶어서 짜증스러운 투로 일괄했다.
“아니 그럼 걱정을 시키지 말던가.”
정한이 보기에 석민은 너무 순진했다. 그래서 옆에 없으면 나중에 큰일 날 것 같단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지만 정한의 걱정을 눈치챌 때마다 석민은 말했다.
“형, 나 애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어서 불만스러운 표정만 지었다. 그래 너 애 아니지… 내가 제일 잘 아는데 그건… 정한은 모순적인 제 마음에 다시 한번 혼란스러워져서 습관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
자기가 침대에서 자겠다고 한 말과 다르게 정한은 소파에서 잘 준비를 했다. 뭐야, 침대에서 자. 됐어. 집주인 놔두고 그러기 싫어. 그 말에 석민은 군말 없이 물러섰다.
“나 갈아입을 옷 좀.”
“옷장 보면 형 옷 몇 개 있을걸? 아, 아닌가. 그거 빨았던가. ”
“맞다. 왜 내 티 입고 가서 안 줘 바보야.”
“네네 미안합니다. 근데 그거 아직 덜 말랐으니까 그냥 이번엔 제 꺼 입으세용.”
석민이 넉살 좋게 웃으며 제 옷을 정한의 품에 떠밀었다. 정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씻고 옷을 갈아입고 욕실을 나왔다. 소파에 놓아둔 침구가 사라져서 봤더니 석민이 이불과 베개 같은 것들을 이미 침대에 옮겨둔 뒤였다. 어쩐지 암말도 안 하더라…
“자, 같이 자면 완전 공평하지?”
“아이고 솔로몬 납셨네. 이 좁은 침대에서.”
“그렇게 안 좁거든. 우리 둘은 충분히 들어가거든.”
석민이 그렇게 말하면서 벽 쪽으로 바짝 붙었다. 실랑이 하기에 지친 정한은 한숨을 내쉬며 느적느적 침대에 몸을 누였다.
“형, 그러다 바닥에 떨어지면 팔 부러진다.”
“얼굴 마주 보고 자는 게 더 이상한 거 알지.”
“아니? 모르겠는데?”
심란한 정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석민은 짓궂게 웃으며 정한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끔뻑끔뻑. 어두워진 방 안에서 시야가 아직 완전히 적응하기 전이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 때문에 서로의 실루엣이 언뜻 보였다.
“나는 보통 그냥 자는데 형한텐 너무 밝은가? 커튼 칠까?”
“석민아.”
“응.”
“오늘도 합주 때 뭐 속상한 일 있었어?”
그 말에 석민이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냥… 요즘이 한참 세션 애들 단체로 예민할 때잖아. 뭐 딱히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야. 걔네 원래 말 툭툭 하는 거야 나도 다 알고… 그래도 같이 하는 거 좋으니까 내가 잘 맞춰가야지… 이어지는 말들에 정한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나 너 처음 무대하는 거 본 날 울었다고 했었잖아.”
“아니 근데 그거 진짜야? 진짜 울었어? 나 아직도 좀 안 믿겨.”
“그럼 가짜로 울었겠냐.”
정한이 투덜거리면서 제 몸 쪽으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나는 그때 너 하는 거 보니까 너무 대견하더라… 너가 맨날 자신 없어 하고 걱정하고 잘하고 싶어 했던 거 생각하면… 너무 멋지게 해내고 있어서. 거기 있는 사람들 다 너 노래 하는 거 보면서 환호하고… 그런 게 진짜 멋져 보였어. 나직하게 이어지는 정한의 말들에 석민은 뜻 모를 얼굴을 했다. 커튼까지 치자 너무 어두워서 차마 서로의 표정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걔네가 하는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이겠지만… 필요한 말만 받아들이고 너무 다 들으려고 안 해도 돼.”
넌 좀 그래도 돼. 그 말에 석민은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뭐야, 윤정한 쫌 감동이네. 키득대느라 덮고 있는 이불이 바스락댔다. 그 순간 석민은 정한이 전하는 온기가 새삼 사람 마음을 물렁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고마워… 형 말대로 해볼게.”
“그래… 이제 얼른 자라. 나도 피곤하다.”
“엉, 잘자.”
그 말을 끝으로 석민은 눈을 감았다. 끔뻑끔뻑. 그럼 잠들지 못한 이 눈꺼풀은 누구의 것인가. 석민이 색색거리며 잠에 든 사이 정한은 잠들지 못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서 점차 눈앞에서 자고 있는 석민이 점차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고 잘 수 있을 리가…”
넌 진짜 바보다 석민아. 정한이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아마 오래 잠들지 못할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
그날 새벽 네 시. 윤정한은 차마 더 자지 못하고 이석민의 집에서 뛰쳐나왔다. 정신없이 급하게 나오느라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만 겨우 입은 채였다. 대충 구겨 신은 신발이 발밑에서 덜그럭거렸다. 언덕을 내려가는 내내 심장이 너무 아프게 뛰었다.
“야, 윤정한!”
뒤에서 들리는 석민의 목소리에 정한이 뒤를 돌아본다. 미쳤어. 시간이 몇 신데 동네에서 소리를 질러. 하지만 차마 그런 잔소리도 못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왜 그랬을까. 진짜 왜 그랬지. 여태 잘 참았으면 진짜 미친 걸까. 술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차라리 만취하고 실수한 거면 몰라도 정한은 너무나도 제정신에 가까웠다.
“형, 가지 말고 일단 내 얘기 좀”
“놔.”
겨우 뛰어온 석민이 붙잡아 오는 손목을 정한이 뿌리쳤다. 둘 다 밤길을 뛰느라 숨이 가빴다. 정한은 더 가지도 못하고 멈춰서서 제 두 눈을 가렸다.
“아… 진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날 윤정한은 잠들지 못했다. 그냥 멍하니 계속해서 석민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중간중간 잠에 든 것 같다가도 금세 정신이 들어서 당최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꿈에도 석민이 있었고 현실에도 석민이 있어서. 비몽사몽 하는 와중에 다시 눈을 떴을 땐 눈앞에 석민이 눈을 뜨고 있었다. 이건 꿈이군. 석민이 한 번 잠들면 잘 안 깨어나는 걸 아는 정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의 석민을 바라봤다. 꿈이니까 한 번쯤은 이래도 되지 않나. 평소라면 이런 충동에 쉽게 동요할 리가 없는데도 어쩐지 마음이 울렁였다. 너무 오래 막아온 마음은 쉽게 허물어지기 마련. 정한은 눈앞에 있는 석민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맞붙였다. 맞닿아 있는 입술이 열리고 혀가 얽혀들었을 때 정한은 이것이 꿈임을 확신했다. 진짜 하다하다 이런 꿈까지 꾸는구나 정한아. 스스로가 한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꿈이라면. 한 번 쯤은 이래도 되는 거잖아. 꿈인데. 어차피 영영 이럴 일 없는 거니까 한 번만. 어설픈 입맞춤을 마치고 입술을 뗐을 때 정한은 깨달았다. 이게 꿈일 리가. 그 생각이 들자 눈이 번쩍 뜨였다. 당연히 현실이었다. 그 상황을 꿈이라고 믿고 싶었던 자신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정한은 저를 붙잡는 석민을 놔두고 무작정 현관문을 향해 뛰었다. 자길 쳐다보고 있던 석민의 눈동자가 생각나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씨발. 신이 있다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정한은 그 어떤 신도 믿어본 적 없는 주제에 그 순간 신을 원망한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혼란스러운 마음에 앞이 흐렸다. 하지만 그런 원망은 금세 방향을 바꾸었다. 난 왜 또 여기까지 왔나. 잘못이 있다면 그게 누구의 것인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왔다. 아무것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자길 따라 나온 석민이 그게 꿈이 아니었단 사실의 완벽한 방증 같아서. 길바닥에 멈춰 선 정한은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
석민은 일단 벌벌 떠는 정한을 안심시키려고 나섰다. 형 괜찮아. 형 일단 정신 좀 차려 봐. 이럴 일 아니야. 그래봤자 정한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럴 일이 아니면? 아니 애초에 이게 무슨 일인데? 너는 이게 이해가 되니? 난 그렇다 쳐도 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엇 하나 똑바로 알겠는 게 없어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괜찮아? 내가 너한테 입술 부비고 도망갔는데도 넌 지금 괜찮단 소리가 나와?”
“정한이 형.”
“너라면 없던 일 해주겠지 석민아. 그야 너는 착하니까. 내가 이러면 신경 쓰이고 괜히 나랑 멀어지는 거 싫으니깐. 근데 그럴 거면 날 쫓아오지 말았어야지.”
끝까지 모른 척 했어야지. 그 말을 하는데 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정한은 이 상황에서까지 석민의 탓을 하고 있는 자길 발견하자 그 자리에서 죽고 싶어졌다. 어떻게 사람이 바닥 밑에도 나락이 있나요. 석민을 좋아하느라 깎아온 마음이 사정없이 둘을 할퀴어댔다. 난 그냥 너한테 좀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는데. 왜 자꾸 나는 이렇게…
“너 취한 거지? 그래서 이런 거지?”
하지만 정한은 제가 뱉은 말에 연이어 절망했다. 도저히 실수라고 할 수 없었다. 그게 어떻게 실수야. 입술만 얼핏 닿았다면 우길 수도 있었겠지만 상황이 달랐다. 눈이라도 안 마주쳤으면 모르겠지만.
“형 나 안 취했어. 술 깬 지가 언젠데.”
“그럼 왜 그랬냐고…”
정한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정신이 빙빙 돌았다. 모른 척 하기 위해 애써온 날들. 하지만 끝내 깨닫고 아닌 척 했던 날들이 있었다. 나는 그냥 네 옆에서 언제까지나 안정적으로 같이 있고 싶었어. 어떤 위험도 없는 마음이길 바랐어. 그런데도 가끔은 그냥 석민이 자길 택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분한 애정을 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끝도 없이 서운해하고 욕심을 부렸다.
“착하니까 이런 거라고…”
와중에 어이없다는 듯이 그 말을 중얼거리는 석민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냉랭했다. 석민은 눈앞에 주저앉아 있는 정한을 두고 답답하다는 듯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목소리에 날이 섰다.
“형은 내가 그 정도로 바보로 보여?”
내가 얘기했지. 나 애 아니라고. 형 눈엔 내가 순진해 빠져서 옆에 없으면 불안한 애 같겠지만 아니야. 나도 욕심 부릴 거 다 부리고 살아. 그러니까 우리가 이 상황까지 온 거잖아. 근데 내가 어떻게 여기서 더 모른 척을 해. 그 말을 하는 석민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화가 난 것 같아서 정한은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겨우 마주한 얼굴은 가로등 밑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아, 진짜네. 진짜 화난 얼굴이네. 석민이 제게 저런 얼굴을 내보인 적이 있던가. 서운하다든지, 속이 상했다든지 하는 류의 것을 한참 넘어선 표정이었다.
“바보는 형이야.”
형은 티 하나도 안 날 줄 알았겠지. 그래, 나 형이랑 멀어지기 싫었어. 그래서 알게 되고도 섣불리 어쩐다 저쩐다 형한테 말 안 했어. 난 그냥 형이 말해줄 때까지 기다렸어. 원래 내가 모르면 형이 매번 말해줬으니까. 그러니까 가만 있었어.
“형이 모른 척 하길 바랐잖아.”
손익을 따져봤을 때 가망이 없는 상황이다. 최선의 방법은 모른 척이었는데도 장렬히 두 번씩이나 이어진 실패. 그런데 그렇게 어거지로 숨긴 마음이 줄줄 다 티가 나고 있었단 걸 깨닫는 순간 정한은 다시 한번 절망했다. 말이 없는 정한을 두고 석민만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또 모른 척 해? 그럼 형 마음이 좀 편하겠어?”
정한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그러는 게 맞았다. 우리 그냥 다 모르는 척 하자. 그래야 우리가 앞으로도 얼굴을 볼 거 아니야. 그래야 내가 다음 해에도 네 생일을 챙겨주지. 그래야 너 노래 하는 것도 계속 볼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도 그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서 타고 자란 씨앗이 너무 자란 걸까.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하게 목구멍을 막아버린 걸까.
“형, 나도 무서워…”
그 말을 하는 석민의 목소리도 옅게 떨려왔다. 석민이 정한 앞에 쭈그려 앉아 그 말을 뱉을 때, 정한은 달라진 석민의 표정을 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 그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그걸 알고도 기다렸다면… 너라고 안 무서웠을까. 우리가 어떻게 될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애가 탄 게 나 뿐만이 아니라면… 그럼 우린 대체 왜 이렇게 오래 이렇게 힘들어한 거지.
“형 매번 내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잖아. 그니까 내가 한 번만 더 철없이 굴게. 지금 이거 형이 지는 싸움 아니야. 상황 똑바로 봐.”
석민이 정한의 손을 맞잡았다. 피가 안 통할 때까지 꽉 쥐었던 주먹을 펴서 겨우 손가락을 얽었다. 밤공기가 차가워서 마주 잡은 손끝이 시렸다.
“형, 나는 언제나 형한테 갈 거야. 왜냐하면 나한텐 형이 매번 맞는 길이니까. 내가 그걸 아니까. 그것도 싫으면 그냥 내가 바보 할게. 내가 그냥 형 바보라서 형 말이라면 다 믿을게.”
그러니까 그만 도망 가. 그거 해서 형 마음 편할 거면 그래도 되는데, 그런 거 아니라면 그만 하자. 나는 형한테 마음 놓고 고민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내가 형 맘을 제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되고 있었잖아. 그럼 난 어떡해 형…
+
한참을 침묵으로 일괄하던 정한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웅얼댔다.
“내가 틀린 길이면 어떡해.”
그렇게 돼서 우리가 언젠가 끝나버리면 어떡해. 난 고작 이 마음 하나 때문에 이미 나를 이렇게 깎아 먹었는데, 내가 너한테까지 안 좋은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떡하려고 이래. 벌게진 눈가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만약 석민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편했을 텐데. 이렇게 새벽에 춥게 길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을 일 없었을 텐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게 만들진 않았을 거야. 정한은 제 마음이 두려워서 울었다. 가 본 적 없는 길을 가는 게 무서웠고, 이 마음이 결국 석민까지 해칠까 봐 걱정이 됐다. 그런데 겨우 잘 해내 왔다고 생각한 길조차도 잘못됐던 것 같아서. 그럼 애초에 어떻게 해야 했는지 도저히 감이 안 섰다. 석민은 무너져 내리는 정한을 붙잡으며 말했다.
“형 나는... 나는 형이 있으면 좋아. 힘들 때 형 생각부터 나. 내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형이야. 형이 있어서 내가 버틸 수 있었어.”
나도 제발 좀 그러자. 나한테 그 역할 좀 줘. 나 좋아하느라 힘들지 마… 그 말을 끝으로 석민의 눈에서도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형은 맨날 장난처럼 자기 왜 싫어하냐고 묻지만… 내가 어떻게 형을 싫어해. 내가 어떻게 그래. 왜 맨날 형만 맘이 기우는 사람처럼 굴어.”
“울지 마, 석민아.”
“형이나 그만 울어. 아 진짜 짜증나 죽겠어. 왜 이러고 있어야 돼 우리가. 이게 다 뭐야.”
하여간 눈물 많은 건 내가 아니라 형 너야. 석민은 그 말을 하면서 눈물로 젖어든 제 뺨을 문질렀다. 이 세상에 윤정한을 울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그의 주변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정한이 눈물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은근 눈물 많아. 몰래 울어. 정한이 그렇게 말하면 죄다 농담인 줄 알았으니까. 자타공인 울보인 석민만이 정한이 많이 운다고 말했다. 그건 눈치 없는 이석민이 윤정한의 마음을 가장 오래 살핀 사람이어서 그랬다. 제 딴에 느려도 자꾸 들여다보니까 많이 알게 된 탓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뭘 어쩔 거야. 난 이젠 모른 척 못해.”
그러니까 그냥 말해. 석민이 그렇게 말하자 정한은 붙잡고 있는 손을 들여다봤다. 끝도 없이 심장이 울렁였다.
“석민아.”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멈춰섰다. 수백 번도 더 부른 그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는 게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오랜 고백 같아서, 붙잡고 있는 손을 자꾸만 달싹이게 됐다.
“내가, 너를…”
정한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석민은 정한을 가까이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깜짝 놀라서 눈을 깜빡이는 사이 고여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다 정한도 이내 눈을 감았다.
새벽 4시 23분. 가로등도 다 꺼져갈 즈음의 시간. 아직까지는 시린 공기. 여전히 맞잡은 손. 가장 깊은 곳에 고여있던 마음이 넓게 퍼져 나간다. 사랑. 그 이해할 수 없고 어지러운 마음이 더 이상 슬프거나 절망스럽지 않기를. 혼란스럽게 휘몰아치는 하루 중에도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오직 서로 뿐이었다. 당장 무엇이 맞는 길인지 몰라도, 서로가 정답이라고 믿고 싶으니까. 그렇게 이어질 다정의 다정이, 영원하길 남몰래 바라왔으니까. 이해할 수 없어도 별수 없다. 비효율적이고 비논리적인 사랑의 방식이란 게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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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너무 춥다. 이제 들어가자.
작가님께 감상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