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elst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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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JH&DK Collaboration

센티넬·가이드 각인 전형
사포
센티넬·가이드 센터 각인 전형
사포


“이석민, 쌤 말 듣고 있냐?”
“아니... 쌤 저 진짜 서울 못 가요.....?”
“못 가지, 그럼. 아까운 4등급이라고 3등급으로 올려주는 학교 봤냐? 쌤도 네 마음은 알겠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온 걸 어떡하겠어. 그러니까 괜히 안되는 거 붙잡고 있지 말고 그 시간에 모의고사나 하나 더 풀어라.”

담임선생님은 실망한 석민을 이해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억지로 손에 들린 가이딩 능력 결과지를 빤히 바라보던 석민은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는 교무실을 나섰다. 아, 진짜 어떻게 이러냐...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석민은 답답한 마음에 복도를 터덜터덜 걸으며 머리를 헝클였다.

석민은 세봉리 세봉고등학교 재학생 중 유일한 가이드 발현자였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 매년 실시하는 센티넬·가이드 적성 시험에서 19살이 되던 해, 가이드 발현자로 통지서가 날아오면서 석민은 < 세봉리에서 30년만에 배출한 가이드 > 로 마을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가족과 주변 친구들뿐만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까지도 석민이 서울갈 일만 남았다며 잔뜩 바람을 넣어주었고 석민 또한 결과지가 나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C등급이 나왔다. 그것도 딱 0.15점 모자라서. 공무원 자동 발탁의 길인 센터 의무 합숙 등급, B등급에서 딱 0.15점이 부족했다.

조그만 학교에 소문은 돌고 돌아 석민이 느릿느릿 교실을 도착할 때쯤 전교생 대부분이 이 안타까운 비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축 처진 어깨로 들어오는 석민에 명호는 그래도 가이드 발현한 게 대단한 거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명호의 다정한 말에도 석민은 대충 고개만 끄덕인 채 책상에 늘어졌다. 나 진짜 열심히 했는데...

상심하는 석민을 뒤로 하고 민규는 다 구겨져 너덜너덜한 가이딩 능력 결과지를 가져갔다. 어떻게 0.15점 차이로 떨어지냐. 참 뭣같은 점수에 민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깨알 같은 글씨로 뒷면까지 빼곡히 적혀있는 센터 의무 합숙 조건과 유의점을 찬찬히 읽다 뭔가를 깨달은 듯 아! 하고 소리쳤다. 민규는 자신만만하게 책상에 늘어져 있던 석민을 일으켜 가정통신문 맨 밑줄 아주 작은 글씨로 적혀있는 구절을 가리켰다.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하네.

C등급 이하더라도 B등급 이상의 센티넬·가이드와 각인한 경우, 센터 의무 합숙 대상에 포함한다.





이미 채점된 10월 모의고사 시험지 세 개가 민규네 방에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명호는 보온병에 담아온 차를 천천히 마시며 음악을 들었고 민규는 침대에 누워 모바일 농구 게임을 했다. 석민은 의자에 앉아 벽에 걸린 달력을 빤히 바라보았다. 센터 입소를 위한 발악의 시간이 딱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마을에 어디 센티넬 없나?”
“곧 이사 올걸? 저 위에, 파란 집.”
“뭐야, 니가 어떻게 알아?”

시큰둥하게 대답한 민규의 태도와 다르게 의외의 내용에 차를 홀짝홀짝 마시던 명호와 달력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석민이 동시에 민규에게 물었다. 우리 아빠가 이장이고 우리 엄마 부녀회장이잖냐. 우리 동네에 내가 모르는 게 없지. 푸념처럼 물었던 질문에 답을 얻은 석민은 벌떡 일어나 민규에게 물었다.

“누군데? 등급 몇인데?”
“윤정한.”

민규가 슬그머니 일어나 석민에게 속삭이자 석민이 뭐?!! 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윤정한이? 왜? 쏟아지는 질문에 민규도 덩달아 당황해 소리쳤다. 나도 그 이상은 몰라! 민규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말했다. 우리 엄마 성격 알지? 언제 센티넬이 된 거냐, 왜 다시 돌아왔냐고 몇 번을 떠보는데도 끝까지 대답을 안 했다고 하더라니까. 내려놓은 휴대폰을 다시 들고 자세를 트는 민규에 석민은 심란해졌다. 이석민, 너 서울 가는 건 글러 먹었다. 명호가 차를 한 입 마시고는 말했다. 석민은 이미 명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윤정한이 돌아와...?

윤정한은 이석민의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터 그 형을 좋아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정한이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석민은 정한에게 좋아한다며 고백했다. 정한은 석민의 고백에 당황하며 석민아 형 내일 서울 가는데...? 라는 어이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발끝부터 머리까지 후끈해지는 기분이었다. 더 괘씸했던 건 그 이후로 세봉리를 떠난 윤정한의 소식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을에서 가장 친하다고 자부했던 석민조차도 금방 연락이 끊겼다.






민규가 정한의 이야기를 꺼낸 지 며칠도 안 되어 정말로 이삿짐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짐은 속속들이 들어차는데 정작 집에서 살 사람은 들어오질 않아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이런 저런 소문이 파다했다. 석민의 집 옥상에서는 그 파란 집이 아주 잘 보였다. 언제부턴가 옥상에 올라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석민의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말, 처음으로 파란 집에 불이 켜졌다. 석민은 당장 뛰어나가려다 현관 앞에 그득하게 쌓여있는 딸기에 걸음을 멈추었다. 급하게 하얀 비닐봉지에 딸기를 한가득 부어 담고는 그 높은 언덕을 턱턱 뛰어 올라갔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하지? 급하게 싸 온 딸기를 등 뒤로 숨기고는 잔뜩 복잡한 머리로 대문을 두드렸다. 텅텅텅 하는 소리에 나가여~~ 하고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집안 저 구석에서 들려왔다. 잠시 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민트색 상의 하의를 세트로 맞춰 입은 정한이 나왔다. 뭔가 익숙한 얼굴에 정한이 잠시 멈칫하다 석민의 어깨를 쥐고 소리쳤다.

“헐. 석민아!!”

만나면 확 명치를 때려야지. 그리고 왜 급하게 서울에 갔는지 물어봐야지. 그리고 왜 돌아왔는지도. 아, 여자친구는 생겼으려나? 정한을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들로 가득했던 머리가 정한을 보자 하얗게 리셋되었다. 등 뒤로 숨겼던 손을 힘없이 내려놓은 석민이 겨우 입꼬리를 올려 아주 어색한 말투로 물었다.

“형 그동안 잘 지냈어?”






적당히 선선한 날씨에 평상에 누운 석민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벌떡 일어나 정한에게 소리쳤다. 아니, 그래서 명문고 입학한다고 서울 간 거였다고? 응~ 그런데 20살에 센티넬 발현이 됐다고?? 응~ 근데 A등급이었다고? 응~ 정한은 석민의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빨간 소쿠리에 가득 담긴 딸기 하나를 입안에 쏙 넣었다. 태평한 정한과 달리 석민은 예상치 못한 엄청난 이야기들에 머리를 굴렸다. 궁금한 걸 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삿짐 정리 때문인지 제법 지쳐 보이는 정한의 모습에 석민은 이쯤에서 입을 꾹 다물었다.

첫사랑이자 친한 동네 형에서 4년 만에 무려 A급 센티넬로 돌아온 정한이 왠지 낯설게 느껴진 석민은 마루에서 뒹굴거리는 정한을 빤히 바라봤다. 석민의 시선을 알고는 있는 건지 정한은 나 아까 마루 닦았는데 와 같은 실없는 소리를 해댔다. 그땐 머리가 짧았는데... 석민은 조심히 손을 뻗어 정한의 머리칼을 만졌다. 갑작스러운 석민의 행동에 장난기가 가득하던 정한이 딸기를 가져가려던 손을 멈추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석민이 정한의 오른손 검지를 잡았다. 당황하는 정한의 표정에 장난기가 생긴 석민은 슬쩍 웃으며 더욱 힘껏 검지를 쥐었다. 생전 처음 하는 가이딩에 석민은 요령 없이 마냥 힘만 주었다.

“너 뭐해...?”

시뻘게진 석민의 얼굴이 무색하게 정한은 당황하며 물었다. 손가락만으로는 가이딩이 잘 안되나...? 생각처럼 술술 풀리지 않는 가이딩에 석민은 아예 정한쪽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정한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감아쥐고 얼굴 가까이 가져대었다. 석민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정한은 괜히 가슴께가 간지러워져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눈을 꼭 감고 집중하는 석민이 무색하게 슬그머니 손을 뺀 정한은 빈 소쿠리를 탈탈 털며 부산히 일어났다.

별 반응이 없는 정한에 석민은 에이 모르겠다~ 하며 다시 마루에 엎어졌다. 태평한 석민과 달리 정한은 뜨끈해진 손가락을 바지에 문지르며 부엌으로 피신했다. 정한은 괜히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마루에 엎어진 석민은 부엌에 있는 정한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쳤다. 형 나 가이드 됐어! 저번 달에! 석민의 이야기에 정한이 뭐? 하며 놀라 뒤돌아 대답했다. 어림도 없는 가이딩에 시뻘게진 손바닥을 바라보던 석민이 정한에게 물었다.

“형 다른 사람한테 가이딩 받은 적 있어?”
“응.”
“그럼 각인한 사람은 있어?”
“...아니.”
“그럼 우리 각인할래?”

석민의 무덤덤하지만, 파격적인 발언에 깨끗한 소쿠리를 억지로 박박 씻던 정한이 고무장갑을 벗을 새도 없이 달려와 마루에서 뒹굴고 있는 석민에게 소리쳤다.

이자식이벌써부터말이야너는무슨각인이장난인줄알아아무리내가편해도너는아직19살이고나는성인인데어떻게각인을하니석민아너진짜아주머니한테일러버린다어?

아니... 그 동사무소 가서 각인 신청하자고.






“그래서 윤정한이 A등급이었다고?”

의외의 전개에 민규는 눈이 휘둥그레져 먹던 빵을 내려놓았다. 석민은 민규의 되물음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렌지 팩 음료에 빨대를 퍽하고 꼽았다.

“뻥 아냐? 윤정한 우리 초딩 때 자기 천사라고 구라친 거 기억 안 나냐.”
“하긴... 내가 어제 가이딩했는데 아무 반응도 없었거든.”
“아니, 잠시만. 니가 윤정한을 왜 가이딩해?”

민규가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지만, 석민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A급이랑 C급 차이가 이렇게 큰가? 진짜 아무것도 못 느낄 정도로? 괜한 포인트에서 자존심이 상한 석민은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뭐 가이딩이 다 똑같은 가이딩이지. C급 가이딩은 가이딩으로도 안 쳐주는 거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에 석민은 있는 힘껏 빨대를 빨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겨지는 팩을 매점 책상에 쾅 하고 내려놓은 석민이 비장하게 말했다. 민규야. 왜. 우리 마을에 가이드 또 없냐? 있겠냐? 아주 그냥 중매를 해달라고 해라.






세봉리에 돌아온 정한의 소식은 이틀 만에 마을 전체에 퍼졌고 정한이 센티넬이라는 사실은 일주일 만에 모두가 알게 되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정한을 만날 때마다 용돈을 쥐여주고 전기차를 충전하거나 고장 난 두꺼비집의 임시방편 처리를 하는 등의 간단한 소일거리들을 부탁했다. 어쩌다 보니 정한은 세봉리의 든든한 보조배터리가 되었다. 매일 능력을 쓴다는 이유를 명목 삼아 가이딩을 해주겠다고 큰소리친 석민은 세봉리의 보조배터리의 보조배터리가 되었다. 아주 느리고 용량이 작고 무거운 보조배터리지만, 어쨌든.


손을 맞잡은 정한과 석민이 나란히 정자에 누워 선선한 가을바람을 쐬었다. 물론 석민은 여전히 옆에서 용을 쓰는 중이었다. 가이딩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힘만 주는 석민에 정한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석민이 자존심이 상한 듯 정한의 손을 툭 하고 놓아버렸다. 답답한 듯 석민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정한이 석민의 손목을 슬쩍 잡았다.

“무턱대고 힘만 주면 어떡해. 요령이 있어야지.”

아주 약한 정도의 정전기를 만든 정한이 천천히 석민의 어깨부터 팔까지 손을 쓸어내리자 옷의 보풀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따갑진 않지? 정한의 다정한 말투에 석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질간질한 게 능력 때문인건가? 속으로 생각한 석민이 이제 알 것 같다며 대답했다. 석민이 천천히 반대편 손으로 정한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로의 손이 서로의 손목을 잡은 상태로 석민은 눈을 감았다. 아까와 달리 힘을 풀고 정한이 어깨에서 팔까지 정전기를 흘렸던 것처럼 어깨에서 맞잡은 두 손목까지 천천히 무언가를 흘려보냈다. 점점 머릿속은 비워지고 정한에게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쯤 감은 눈을 천천히 뜨자 빨갛게 상기된 정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당황하며 시선을 피하는 정한의 표정에 석민이 웃으며 말했다.

“형 나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날 이후로 석민은 감을 잡았는지 수시로 가이딩을 해주겠다며 나섰다. 오전에는 마을 어르신들을 돕고 석민이 학교를 마친 오후에는 정자에서 가이딩을 해주는 게 일상이 되었다. 석민의 가이딩은 A급인 정한에게 애매모호한 정도였기에 그래서 기분이 더 이상했다. 주책맞게 자꾸 붉어지는 얼굴이 석민의 서툰 가이딩 때문인 건지 아니면 다른 마음 때문인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정한도 4년 전 석민의 고백 아닌 고백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대답 없이 바로 서울로 올라가 미안한 마음에 더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노력한 것에 비해 운이 좋아 제 성적보다 훨씬 높은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 제 성적보다 더 좋은 대학에 입학했고 어쩌다 보니 센티넬로 발현돼 숨만 쉬다 5급 공무원이 되었다. A급 기준에서 딱 0.15점을 넘어서. 정한의 삶은 행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연속된 행운은 동시에 감당해야 할 책임이기도 했다. 고등학교에서는 높은 학구열과 엄한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워했고 대학교에서의 수업은 딱히 흥미가 없었다. 남들은 다 바라던 센터 생활도 제 능력 밖의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병가를 내고 도망치듯 다시 돌아온 세봉리였다. 세봉리에서 정한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은 모두 정한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느지막이 마을 회관으로 향하던 정한을 발견한 석민이 윤정한!! 하고 소리치며 달려왔다. 형 나 일주일 동안은 수능 때문에 못 만날 것 같아. 김민규랑 누가 더 많이 맞추나 내기하기로 했거든. 석민의 말에 정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을 회관으로 발길을 돌리려 하자 석민이 슬쩍 손을 뻗어 정한의 손을 붙잡았다.

“나 수능 치기 전까지 한동안 가이딩 못하니까...!!”

정한의 시선에 석민이 괜히 큰 소리로 말했다. 정한은 석민의 속셈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회관을 뒤로하고 석민의 집까지 걸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를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다. 제법 쌀쌀하게 불어오는 찬 바람에도 손은 뜨끈뜨끈했고 석민의 심장은 콩닥콩닥 뛰었다. 석민은 순간 생각했다. 나 지금 가이딩하고 있었나?






정말 석민은 일주일 동안 정한을 찾아오지 않았다. 심부름이 끝나면 정한은 혼자 정자에 앉아 있곤 했다. 곧 서울 올라갈 때가 다 되었는데 괜히 수능 얼마 안 남은 애한테 이야기했다가 애 마음만 싱숭생숭하게 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수능 며칠 전 아주머니를 통해 핫팩과 초콜릿을 전했고 정한은 수능 전날 괜히 잠을 설쳤다.

정한을 일부러 승철이 운영하는 동네 슈퍼에서 종일 농땡이를 부렸다. 오후 6시를 넘어가는 시계를 보며 정한이 말했다. 수능 끝났다고 신났겠네. 정한의 말에 옆에 누워 만화책을 보던 승철이 애들한테 이번 주는 수험생 할인하니까 많이 오라고 해. 하며 농담을 던졌다. 정한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맥주 두 캔과 과자를 사들고는 집으로 향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금방 어두워지는 하늘에 정한은 느리게 걸으며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저 멀리 대문 앞에 서 있는 형체가 눈에 조금씩 들어오자 정한은 그게 석민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야! 이석민 뭐해!! 이 추운 날씨에 30분은 족히 기다렸을 것 같아 급한 마음에 언덕을 뛰어 올라갔다. 롱패딩 모자를 푹 눌러쓴 석민이 정한의 부름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훌쩍거리며 코 먹는 소리에 정한이 당황해 조급하게 말했다.

“수능 많이 망쳤어? 일단 추우니까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응?”
“...왜 서울 다시 가는 거 말 안 했어?”
“......누구한테 들었어?”
“김민규한테.”

정한이 석민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가려다 석민의 말에 천천히 손을 놓았다. 고개를 들어 정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자 석민이 서러움에 북받쳐 입술을 깨물었다. 석민도 정한도 마치 4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잠깐의 정적 뒤 정한이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해. 말할 용기가 안 났어.”
“...”
“나 사실은 서울도 겨우 갔어. 대학도 겨우 붙었어. A급 센티넬도 겨우 됐어. 거기서 제대로 적응도 못 했어. 그래서 잠깐 내려온 거야. 다 이야기할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이야기 안 했어. 그리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도,”

답지 않게 정한이 횡설수설 말을 겨우 이어 나갔다. 정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석민이 정한을 안았다. 난 그냥 미안하다는 말이면 충분해. 울음기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석민이 말했다. 화한 느낌과 함께 가이딩이 시작되었다. 석민의 말에 멍하게 서 있던 정한도 천천히 손을 들었다. 한 손으로는 석민의 허리를 다른 손으로 석민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석민이 정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나도 미안해. 석민의 다정함은 정한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컸다. 정한은 한참을 석민에게 기대어 그 다정함의 무게를 오롯이 느꼈다.





수능이 끝난 지는 3일이 지났고 정한이 서울을 올라가기까지는 4일이 남았다. 친척 결혼식에 부모님이 집을 비우면서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게 된 석민은 정한을 집으로 불렀다. 정한은 평소처럼 집에 있던 과자 두어 개를 챙겨 어슬렁어슬렁 석민의 집으로 향했다. 종일 게임하고 과자 먹고 드라마 보고 영화 보고. 백수와 방금 막 수능 끝난 고3답게 하루를 보내던 둘은 어둑해진 바깥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형 라면이나 끓여 먹을래? 석민의 말에 정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석민이 부엌에서 라면 봉지를 뜯는 순간 우웅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주변이 온통 어두워졌다. 헐 뭐야? 석민이 갑작스러운 어둠에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누워있던 정한도 일어나 창문 밖을 보았다. 웅성거리는 마을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정전 났나 봐.”

정한의 말에 석민은 이 상황에서 라면을 끓이기는 불가능하겠다 싶어 더듬더듬 손을 내밀며 정한을 불렀다. 정한은 손을 뻗어 석민이 있던 부엌의 형광등을 밝혔다. 그리고는 거실의 스탠드 조명, 석민의 침대 옆 무드등까지 차례로 불을 밝히자 석민이 불을 따라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형 완전 멋있지. 온통 어둠인 상황에서 작은 무드등만이 반짝반짝 빛을 내었다. 조명에 의해 서로의 얼굴이 보였다 말기를 반복했다. 피카츄같아. 석민의 농담에 정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은은한 무드등에 정한이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석민아 너도 누워. 정한의 말에도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던 석민은 맞은편으로 고꾸라졌다. 쾅 하는 소리를 내며 석민이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정한이 놀라 벌떡 일어나 석민을 흔들었다.

“석민아...?”

대답이 없었다. 정한은 당장 석민을 둘러업고 차로 향했다. 세봉리에는 암흑이 내려앉았다. 정한이 운전대를 꽉 쥐자 눈앞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차의 속도에 맞춰 가로등과 주변 집들이 환하게 빛났다. 줄지어 눈이 시릴 정도로 빛을 내는 가로등 사이로 유일한 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정한은 불안감에 곁눈질로 석민을 확인했지만, 석민은 답지않게 조용했다.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고 땀이 삐질삐질 났다. 가로등이 너무 밝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응급실까지 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고민하던 찰나 다행히 근처에 이제 막 문을 닫으려는 동네 의원을 발견한 정한은 석민이 안정제와 영양제를 맞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다. 접수실에 앉자 그제야 땀범벅이 된 자신을 발견했다. 간호사가 물 한잔과 결과지를 내밀며 정한에게 다가왔다. 놀라셨겠어요. 간호사가 정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혹시 두 분 각인한 사이신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사레가 들린 정한은 콜록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간호사가 그런 뜻은 아니었다며 정한과 석민의 간이 상성 결과지를 건넸다.

“환자분은 과도한 가이딩으로 탈진한 상태라고 볼 수 있어요. 안정제 다 맞으시면 바로 가시면 돼요. 각인이나 발현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가이드와 센티넬 분들이 이런 사례가 종종 있거든요.”
“아, 네...”
“가이드 분이 조절만 잘하시면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상성 결과 50점 이상이네요.”

간이 상성 결과 : 50.27

간신히 각인 조건을 넘은 결과에 정한은 결과지를 빤히 쳐다봤다. B등급에 가까운 C등급 가이드, B등급에 가까운 A등급 센티넬인 덕분에 나온 결과였다. 각인하자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사는 석민에 정한은 당연히 석민과의 상성 결과가 낮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안 될 걸 알기에 나중에는 장난처럼 그러자며 대답해오곤 했었는데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정한은 결과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리고 정한은 누워있는 석민에게 다가가 남몰래 속삭였다. 석민아, 넌 내게 온 행운 중 가장 큰 행운이야. 석민은 그로부터 1시간쯤 뒤에 일어났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한은 석민에게 제법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너 가이딩이라고 함부로 막 다 주고 그러면 안 돼. 그러니까 쓰러지잖아.”

나도 쓰러질 만큼일 줄은 몰랐지. 석민은 정한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게 말했다. 근데 다 주고 싶은 걸 어떡해. 뒤이은 파격 발언에 정한은 당황해 뭐?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잠시 입을 벙긋거리다 갓길에 길을 세웠다. 석민은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정한을 쳐다보았다.

“석민아 다 주면 그건 가이딩이 아니야. 희생인 거지.”
“형한테만 그러고 싶은 거면?”

석민이 웃으며 정한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정한이 순간 뒤로 물러서며 멈칫했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런 건 사랑이라고 해.”
“그러면 난...,”

석민이 정한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정한의 휴대폰이 울렸다. 야!!! 너 얌전히 잘 있겠다며!!! 너 어제 뭐 한다고 능력 발산한 거야? 어?! 왁자지껄 들리는 전화선 너머 목소리에 정한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네? 석민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정한의 모습에 큭큭대며 웃었다. 윤정한 센터에서 사고뭉치라더니 진짜였네? 석민의 말에 정한이 눈을 질끈 감았다. 너 서울 당장 올라오든가 아니면 감사반 내려가게 만들던가 둘 중 알아서 해!! 뚝하고 끊긴 전화에 정한이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석민에게 말했다.

“석민아 나랑 같이 서울 갈래?”

응. 석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유독 실내등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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