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을 때 이런 말은 하지 맙시다
“형, 있잖아.”
얇게 썰린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자글자글 구워지는 소리, 금요일 밤에 집에 가지 못하고 초과근무를 하게 된 회사원들이 소주잔을 부딪치는 소리, 식기들이 달그락거리고, 종업원들이 식탁 사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모든 소음이 윤정한의 귓구멍에 차올라 곧장 먹먹해지는 가운데, 이석민의 목소리가 소음의 물살을 갈라 물가에 와 닿는다. 그는 막, 아, 그냥 집에서 시켜먹자고 할 걸 그랬나, 후회하던 참이었다. 굳이 시끄러울 시간대에 시끄러운 장소에 찾아올 만한 성격도 아니고, 석민은 정한의 성정을 몹시도 이해하는 터라 제가 식당 대신 집에서 먹자고 말했다면 기꺼이 그랬을 테다. 하지만 정한은 고기 먹으러 가잔 말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솔직히, 남들이 그리 했다면 싫다고 딱 잘랐겠지만, 웬일로 이석민이 먹고 싶다는데. 정한은 거의 바닥을 보이는 맥주병을 가리킨다. 한 병 더 시킬까? 석민이 오, 입술을 동그랗게 만든다, 의외라는 듯. 그럴까? 최 모 씨에게 질릴 대로 질린 그들은 술을 원체 즐기지 않았으나 맥주 두 병은 기별도 안 간다. 석민이 맥주병을, 종업원이 보게끔 번쩍 들었다. 네 성량이면 그냥 한 병 달라고 말해도 들을 수 있겠다, 석민아. 그런가? 어느 소음이 닥쳐도, 석민은 저를 드러낼 수 있으므로.
이석민은 냉장고에서 갓 나와 차가운 맥주의 뚜껑을 따고 정한의 잔에 액체를 따른다. 형들에게 술을 아주 제대로 배워, 술이 비면 따르고, 자작하려는 형의 잔에 손가락을 대는 게 버릇이다. 윤정한을 비롯한 형들은 자작에 그다지 별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그리고 윤정한은, 제가 연애를 못하든, 제 앞의 이석민이 연애를 못하든, 상관없었다. 다른 테이블처럼 잔을 부딪친 정한은 입술 사이로 아주 소량의 액체만 들이곤 입을 연다. 그래서,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반 잔을 삼킨 석민이 크게 웃었다. 얼굴 근육을 전부 쓰며, 호탕하게.
“어, 그게, 할 말이 있긴 해, 형한테.”
“궁금하다. 말해봐.”
정한이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무감하게 씹으며 유심히 석민을 살핀다. 웃음이 자아낸 주름은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다. 석민은 잘 숨길 줄 모르고, 정한은 이 애가 숨긴 것쯤이야 기민하게 발견할 수 있다. 아, 이거 진짜 부끄럽다. 고개를 숙여 뒷머리를 긁는 석민에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시선이 행동을 따라 움직인다. 왜애, 이마 위로 흘러내린 노란색 머리카락을 치운다.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 하얀 점이 맺혔다. 형, 지금 눈 커졌다. 석민이 다시 웃고선 어색함을 감추려 정한의 상태를 언급한다. 그래? 아주 잘게 씹힌 고기를 목 뒤로 넘기고 맥주를 마신다. 탄산이 천천히 죽어간다. 날이 더워, 게다가 가게 안에 사람이 하도 많아 에어컨 바람이 힘을 내지 못해, 맥주도 금세 미지근해졌다. 석민이 손부채질을 했다. 볼이 불그스름하다.
“석민이 너가 뜸들이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알아, 알아, 기다려줘. 이석민의 눈가엔 웃음이 자아낸 주름이 가득하다. 윤정한은 제 눅눅한 감정을 말리는 웃음을 좋아한다. 형, 저 웃는 거 좀 시끄럽지 않아요? 아니, 난 좋아. 그날 석민이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시간의 조각 하나하나를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 이석민은 윤정한이 좋아하는 짓만 골라 한다.
“아니, 이게,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응.”
윤정한은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짐작했다. 그가 생각한 말의 내용은 그리 다양하지 않았는데, 나 애인 생겼어, 혹은 썸 타는 상대가 있어 따위의, 흔히 있을 법한 것들. 정한은 석민이 사실을 드러내기 전, 먼저 눈치 채고 최선을 다해 직접, 말로 듣기까지 기다리겠지만. 이렇게 예상하며 미리 마음을 스스로 뒤엎고, 지저분한 불순물을 솎아내어 나머지를 덮길 반복해, 언젠가 석민이 그답게 상냥히, 정한의 내면을 뒤흔들 때, 흔들리지 않게끔 대비하는 것이다. 그야, 석민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건 불가항력의. 당연한, 슬프지 않을 만큼 당연한 사건이므로.
“할 타이밍도 못 잡고 해서…”
석민이 맥주로 목을 축였다. 와, 맥주 다 식었다. 안쪽의 좌식 테이블에서 와아, 소주에 취한 회사원들의 흥분이 몰려온다. 그 소음과 소리의 간격에서, 정한은 그동안 마음이 견딜 수 있을 만치 굳어졌는지 확인한다. 괜찮겠지. 그는 노력했다.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보통 그는 그런 식으로 버텼다.
“어, 그러니까, 형.”
석민의 속눈썹이 술기운에 젖었다. 반짝인다. 내가 말이야. 정한은 불현듯, 맥박이 지나치게 뛰어, 손목의 살갗을 뚫고 나올 것 같다는 감상에 사로잡힌다.
“내가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아…”
여기요. 빈 병 치워드릴게요. 종업원이 맥주를 테이블 위에 두고 빈 병은 가져간다. 물방울이 천천히 병의 몸체를 타고 흘러 내려간다.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말이 세상을 뒤덮었다.
뭐라고?
*
윤정한은 영리하다. 영리함은 여러 형태로 주변 사람들에게 발견되는데, 윤정한의 영리함은 그가 소년 시절부터 제 감정을 능숙하게 갈무리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눈치가 빠르고, 말로써 사람을 설득하고,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들을 보내어 뒷모습을 응시하는 것. 그는 그걸 잘했다. 외양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고. 그러니 타인은 윤정한에게 호감을 품든 증오를 품든, 그조차도 정한이 바라는 대로 가는 것이다. 타인은 섣불리 환상을 품고 정한은 그들의 뒤에서, 눈썹을 치켜세우고, 감정을 갈무리한다. 한숨을 쉬고, 남을 대하느라 탈진된 체력을 보충하고, 조금 먼 곳을 바라보며 아무도 모를 휴식을 취한다. 그는 종종 제 감정이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지쳤다. 그 소용돌이를 들키지 않으려, 영리한 머리를 사용해야 했다.
실은, 이 또한 지치는 행위임에도.
그러니까, 정한은 예민한 성정을 섣불리 드러내기 싫어 체력을 써댔고 그 때문에 더욱 예민해졌다. 악순환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쉬이 이해하는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어야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본디 없을 이를 있을 거라 무작정 믿다간, 없는 것을 잃었다는 모순적인 상실감이 지나치게 커다래진다. 어린 나이에 깨우친 진실이라고 가볍진 않지만, 소년은 그다지 잔인하다 느끼지 않았다. 남들도 다 그럴 거라 믿는 편이 편하다. 눈동자가 시들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사람을 피하거나 신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었을 뿐이다. 사람과 살을 맞대는 걸 꺼려하는 소년은 생활반경을 공유하는 게 힘들었다. 누군가와 친해지면, 자신의 일부분을 공유하는 게 당연해진다. 정한은 그 당연함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잔잔하게 웃고, 발을 들인 척하는 것이 차라리 쉬웠다.
뭐, 그의 감정 상태가 어찌 되었든 간에, 남들은 모르니까, 그리고 서운해 하기 전에는, 결코 서운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감정은 한 번 배워, 불쏘시개를 놓아야 끝도 없이 타오르는 법이다. 정한은 딱히 불쏘시개를 가진 사람을 기다리지 않았고. 소용돌이에 불을 놓으면 큰일이 나지, 저나 상대에게 이득이 될 만한 부분은 조금도 없다. 그저 가끔, 마음의 소용돌이가 내부의 살점을 떼려 할 적마다 피곤한 눈을 감고서, 출혈이 멎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최승철은 정한의 상태를 알아챈 최초의 ‘누군가’이다. 고등학교는 중학교보다 비교적 넓은 세계이기에, 그런 류의 인간이 하나쯤은 더 있기 마련이고, 아예 다른 상황에 처해 있으니 오히려 표면에 드러나는 무수한 감정의 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승철은, 정한의 곤란해 하는 낯을 곧바로 발견하여, 정한이 알게 모르게 그어둔 선 바로 바깥에 발을 딛고 섰을 뿐이다. 나도 그래. 별 거 아닌 것처럼. 별 게 아니지 않는데도.
윤정한이 최승철과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에 갈 때까지 커다란 이변은 없었다. 이변이 없었다는 말은 평탄하게 들린다. 소용돌이가 멎지 않았다는 말이요, 다시 말해 현상유지다. 나름 감지덕지하게 여겼지만. 그것은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고 그대로, 내면 한 켠을 꿋꿋하게 차지한다. 정한은 그 새 감정의 크기보다 조금 더 자라서, 참아내는 일이 덜 힘들어졌다. 승철의 술친구를 해주느라 큰 소리는 좀 바락바락 지르게 되었어도. 그가 보기에, 제 친구는 술로 내면의 문제를 대충 커버하는 듯했다. 그걸 말릴 자격은 제 손에도 없으므로, 정한은 적당히 대작을 해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승철이 들으면 또 삐질까 굳이 판단하지 않는다-그는 술을 잘했다. 취하는 기분이 썩 좋지 못해 승철이 두 병을 비울 동안 정한은 반 병을 마실 뿐이었지.
몹시 드물게, 정한은 승철만큼 마셨고 승철은 정한만큼 마셨다. 승철아. 엉. 좀 힘들다. 그런 것 같더라. 그 날은 소주가 잘 먹혔다. 친구의 넓은 어깨에 들려 걷는 거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승철의 귀에만 들리게끔 욕을 짓씹었다. 그를 아는 승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군 제대 후 2학기에 복학한 윤정한은 짧은 머리가 여전히 어색했다. 머리 짧으니 훨씬 보기 좋다는 여러 무례를 능숙하게 넘기고 금요일 3교시 인문관 2층 대강의실 문을 연 정한의 귓바퀴에 커다란 웃음소리가 앉았다. 흘긋 보니 같은 과 동기로 보이는 서너 명이 세 번째 줄 책상에 모여 떠들고 있었다. 이 강의는 필수 교양이라 거의 모든 학과에서 수강신청을 하는데, 운이 좋았나 보다. 정한은 아는 이가 없었다. 주로 저학년들이 듣는 강의라, 최승철도 진작 들었다. 딱히 감흥은 없고 그는 늘 그렇듯 심드렁하다. 오늘 있을 개강 총회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최대한 덜 시끄럽기를 바랐으나 애초에 불가능하다. 웃음소리는 과잠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다. 오티니까 일찍 끝나겠지, 끝나고 뭐할 거야? 난 개총 가야 돼…, 같은 대화가 오고 가는 자리를 지나 맨 뒤 창가자리에 앉는다. 정한은 최승철이 이 년 전에 학식을 먹으며 한 말을 기억한다. 오티인데 일찍은 무슨, 발표 팀까지 다 짰어. 뭐야, 수강 정정 기간인데? 어, 정정하면 팀원들은 걍 좆되는 거지… 안 할 것 같긴 하지만. 그치, 아무래도 필교니까. 교수는 팀원을 미리 짠 출석부를 들고 들어올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교양 강의실에서 팀원을 찾는 건, 성정과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이석민이라고 합니다…”
강의가 끝나고 두리번거리다 정한을 찾은 석민은 어색한지 한가득 웃는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웃던 그 소리가, 말끝에 간당간당 달려있다. 아, 안녕하세요. 몇 학번이세요? 전 16이에요. 스물하나입니다. 전 14예요. 아, 말 편하게 하세요. 한 학기 동안 볼 텐데. 헉, 넵. 놓으라니까. 정한이 웃었다. 헤헤, 천천히… 근데 오늘은 저희밖에 안 왔나 봐요. 그러게. 오티는 원래 잘 안 오니까. 그럼 일단, 번호 줄래, 석민아?
갑작스럽게, 누군가는 찾아온다.
*
이석민은 잘 웃는다. 정한이 최초로 석민에 대해 알게 된 성질이다. 웃을 때 얼굴 근육을 가득 써 아주 환하게 웃는데, 정한은 그걸 보고 같이 웃었다. 웃음을 보고 그냥 넘어가는 것보다 마주 웃는 게 더 편했다.
석민은 같은 과였다. 왜 몰랐지? 이유는 간단하다. 석민은 정한이 군대에서 구르는 동안 입학했고, 윤정한은 과 생활을 진짜 안 했다. 강의 끝나면 체력이 달려 자취방으로 가는 게 보통이었다. 번호를 교환하고 개총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자연스레 정한의 옆에 앉은 승철이 둘을 번갈아 보고 매끈한 턱을 문질렀다. 뭐냐? 선배와 후배들이 친해져야 한다는 명목 하에 테이블이 바뀌고 석민이 반대편 테이블로 갔을 때에야 승철이 정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가 뭐야. 술기운이 거의 담기지 않은 목소리는 나른했다. 저녁 일곱 시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고작 아홉 시가 넘었다고 지치지 않는다. 아, 힘든데. 정한이 멍한 기색을 내비치자 승철이 마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야, 정한아. 뭐냐구.”
“뭐가?”
“석민이. 왜케 둘이 친해?”
질문의 의도는 아주 뻔하다. 정한이 피로가 늘어뜨렸던 입꼬리를 당겼다. 그 교양 있잖아, 현대 문화의 이해. 어, 그거, 오늘도 바로 팀 짰냐? 엉… 네 명이 한 조인데 두 명 안 왔더라. 아, 불안한데. 그니까. 암튼, 같은 팀이야. 아, 그래? 커다란 눈이 잔뜩 커져 흰자위가 유난해졌다. 정한은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복학생 둘은 자작에 별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승철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술자리의 소음에 쉽게 떠나갈 몇 마디를 중얼거리곤 나도 따라줘, 한다. 너가 따라 마셔. 아, 치사해. 멀리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선명하게.
아슬아슬한 짐작은 환상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으니 불안해지는 거다. 오티에 오지 않았던 팀원 두 명은 두 번째 강의부터 들어오긴 했는데, 정한은 둘의 심드렁한 표정이 영 거슬렸다. 이석민은 아무것도 모르고 팀플이긴 한데 기말 전에 발표 한 번만 하면 된대요, 시간 많아요, 사람 좋은 웃음을 섞어가며 설명을 했다. 저번 주엔 저희가 둘이었어서, 팀장을 못 골랐거든요. 누가 팀장할래, 라는 대학 고유의 문제거리가 테이블 위에 던져진다. 정한은 귀찮은 게 정말 질색이다. 아, 그럼 제가. 그러나 이석민의 낯이 당혹으로 물드는 꼴을 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석민이 선뜻 나서려던 차, 정한이 테이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손을 낮게 들었다. 내가 할게. 다들 괜찮죠? 여기서 안 괜찮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석민만 혼자 안절부절 못한다. 강의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다 형, 팀장 괜찮아? 물어보는 모습이 강아지 같았다. 귀엽네, 석민이. 그래도…… 괜찮다니까. 밥이나 먹자.
정한의 예상대로 그 둘은 중간고사까지 설렁설렁 나오더니 잠수를 탔다. 그럴 줄 알았다. 차라리 강의에 처음부터 나오지 않았으면 교수에게 팀원을 바꿔달라고 했을 텐데, 쓸데없이 중간고사까지 본 바람에 애매해졌다. 없다고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건 아니지만 귀찮아지는 건 사실이다. 갑자기 할 일이 두 배는 더 늘어난다. 하…… 정한은 습관처럼, 속에서부터 농축된 한숨을 쉰다. 석민이 그 사람을 때문에 그래? 물었다. 몇 주를 봤다고, 고작 그 새에 정한에게 익숙해진 그도 눈치 챘다. 와, 이게 그 유명한 팀플 괴담이구나. 순수한 감탄이 조금 웃기다.
“교수님한테 말씀드려볼까?”
“아니, 별 도움 안 될 거야. 우리끼리 해야 돼.”
술 땡긴다. 최승철이 들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생각이었다. 교양이라 그리 부담되는 건 아니어도 눈 뜨고 있다 코 베인 격이라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예민한 성정이 작은 머리통을 두드려, 쑤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형, 나직이 발음된 제 이름은 낯설지 않다. 응, 석민아.
“밥 먹을래?”
“어? 입맛 없는데.”
“아냐, 먹어야 될 것 같아.”
그 사람들 없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잘하면 아무 문제없는 거잖아. 석민은 벌떡 일어나 정한의 옆에 서서, 셔츠 아래 날개뼈 부근을 살살 토닥인다. 형은 똑똑하고, 내가 열심히 할게! 사실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튀어버린 둘이 괘씸한 건데, 석민은 그런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지. 정한은 성마른 웃음을 마저 털고 고개들 들었다. 반짝반짝한 눈동자는 확실히, 부정적인 감정에 연연하기엔 아까울 만치 빛난다.
“석민이가 사줄 거야?”
“물론이지! 형 뭐 먹고 싶어?”
“나 살치살.”
그, 그건… 긴 팔다리가 허우적거린다. 아하하, 농담이지. 형이 사줄게, 석민이는 뭐 먹고 싶어?
얼음이 녹아 색이 부쩍 연해진 커피를 버리고 걸음을 옮긴다. 새로운 불안 하나가 신발 밑창에 들러붙어 걸음걸음마다 발자국을 만든다.
*
윤정한이 이석민에게 제 공간을 나누어주는 것은 끔찍하도록 당연한 수순이었다. 언젠가부터 석민은 꼬박꼬박 정한의 뾰족하고 마른 어깨 곁에 붙어 시답잖은 하루를, 나름 잘 보냈다, 싶게 만들었다. 완전한 반대편에 위치한 사람들은 서로를 인식하기도 힘드나, 인식한 순간부터는 서로를 만나기 위해 달려야 한다. 정한은 석민과 한 점에서 만나는 게 좋았다. 달릴 이유가 다리에 힘을 보탰다. 낭만이라곤 바라지 않았던 삶의 틈을 파고든 빛 한 줄기는, 세상 어느 것보다 낭만적이었다.
남과 살을 부대끼고 싶지 않을 뿐더러 잠자리도 가리는 통에 한 번도 엠티에 가지 않았건만, 석민과 한 침대에 눕는 건 쉬웠다. 사람을 좋아하는 석민은 참가하는 모임은 꽤나 많았으니, 정한의 자취방에 이석민의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따뜻할 땐 바닥에서 자겠다는 석민을 굳이 말리진 않았지만, 보일러가 고장이 나 침대 위에 깔린 전기장판에 온기를 의존해야 했던 밤, 석민은 침대에서 잤다. 고르게 밭는 숨에 제 시간이 잠기고, 얌전한 뒤척거림에도 신경은 그리 곤두세워지지 않고, 기울어가는 밤이 불현듯 아쉬워지고.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 고민한다.
석민이 들으면 어느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지만, 정한은 이런 경우를 곧장 받아들일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제게 주어진 이석민을 선선히 받아들이기엔, 그는 의심이 많았다. 이석민은 윤정한이 노력 없이 얻은 운이나 마찬가지다. 윤정한이 어릴 적부터 천성이라 납득한 예민함을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닳도록 하는. 단순히 착하다는 정의는 부족했다. 도주한 팀원 때문에 받는 정한의 스트레스를 앎과 동시에 우리가 그 분들 이름을 빼면 성적에 불이익이 가겠지? 라며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을 하는 사람. 어차피 출석 안 해서 에프인데도 석민은 그런 걸 생각했다. 그런 후배에게 무심코,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일축하는 대신, 석민이는 착하네, 근데 걱정하지 마, 자기들이 포기한 거니까 어디서 이상한 말 하고 다니지 않겠지. 그렇게 위로 비슷한 행위를 하는 게 귀찮지 않았다. 석민의 생각을 통제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유 모르게 잠에 들지 못해 새벽을 낭비하고 학교에 갔던 날이 있다. 석민이 과제와 학생회 일로 바빠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던 시기라 간단한 연락도 미안해지던 때였다. 학생회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석민이 학식을 먹다 이야기했을 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학생회 들어가면 좋은 것도 많고 힘든 것도 많을 거야(힘든 게 더 많을 것 같긴 한데), 네가 잘할 거라고 걔네도 믿으니까 널 데려가고 싶어 하는 거잖아, 나도 석민이를 믿어, 듣는 이석민이 감동 받을 만한 멘트를 날렸으나 바빠지면 많이 못보겠단 감상이 따라 붙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이걸 들으면 석민은 또 고민할 것이다. 정한은 거기까지 이 애에게 관여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나 바쁘면 정한이 형은 어쩌지?”
누구 마음을 읽었나…… 저 여상한 투가 뇌를 흔들었다. 저가 일으킨 거대한 현상까지 들여다보진 못하는 석민이 시원하게 웃었다. 형 나 없으면 안 되잖아. 눈을 가득 접어도 눈동자의 빛이 쏟아졌다. 왠지 큰일이 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방어적으로 미소 짓고 말았다.
에이치피가 삼분의 일도 남지 않은 몸으로 강의 두 개를 연달아 듣자 딱, 죽을 것 같았다. 한 시간 남짓한 공강이 있어, 그는 비척비척 사회대 과방으로 들어간다. 안녕하세요, 정한 선배, 안녕하세요, 형, 안녕, 정한아. 인사를 설렁설렁 지나치고 낡은 소파에 덜렁 누웠다. 잘 만한 장소는 전혀 아니나 피곤은 천성을 쥐어 잡는다. 가릴 때가 아니라는 거다. 소파 등 쪽으로 모로 누운 몸을 향해 동기와 후배들의 말이 오고갔다. 시끄러워서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 시간이면 자취방에 가기엔 애매해서 별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그는 눈을 감는다.
문이 열리는 소리.
“안녕하세요… 어, 정한이 형이야?”
다른 강의를 마치고 온 석민이 정한의 등을 알아본다. 정한은 아는 척을 할까, 잠깐 재다 피곤에 지쳐 눈이나 계속 감고 있는다. 아, 자나 보네. 데시벨이 단번에 낮아졌다. 응, 들어오자마자 눕더라. 많이 피곤한가봐. 윤정한은 이석민이 무얼 할지 더듬더듬 머리를 굴린다. 석민을 제외한 소음이 거슬리던 차.
“우리 커피 마시러 갈래? 내가 살게.”
뭐야, 웬 일이냐? 나 카페 도장 엄청 많거든. 커피 말고 다른 건 안 돼요? 그럼 내려가서 같이 고르자. 의자가 끌리고 이석민 뭐냐, 수상한데, 의미 없는 말이 공중에 부유하다 닫힌 문에 의해 떨어진다. 정한은 행동의 원인이 자신임을 안다. 시끄러우니까, 자리 비워주려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이 갑작스런 고요도 끝나겠지만, 조금의 틈이라도 나는 것이 낫다. 정한은 더 깊은 생각을 막고 눈에 힘을 주었다. 일단 자야했다.
석민이, 너는, 남아있어도 좋았을 텐데.
잠결에 이상한 욕심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
윤정한은 매시 뒤틀려있던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석민은 유년기부터 정한의 일부를 차지한 소용돌이를 잠재운다. 예민하고 커다란 의욕이 없는 상태는 누구에게도 간단히 이해받기 힘들었으며, 이해 받고 싶다는, 자신을 해명하지 않고 싶다는 바람을 갖는 것도 체력을 소모하기에, 정한은 소용돌이를 묵묵히 직면했고, 매번 묵은 한숨을 쉬었다. 형, 왜케 한숨을 쉬어. 그러게, 왜 이리 한숨이 나냐. 석민이 뼈가 도드라진, 살 없는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한숨 많이 쉬면 안 좋대, 형. 그러니까 나한테 말 좀 하자, 어? 윤정한. 자기가 먼저 말하곤 부끄러운지 머쓱하게 웃는다. 정한은 석민의 커다란 손을 그대로 두었다.
어떻게 그러니. 기댐조차 부담이 되는 사람이 있다. 윤정한은 이석민의 존재에 항시 의문을 품었다. 제가 그토록 바라던 존재가 실존하면, 문득 두려움을 가지고 한 걸음 물러서 객관적으로 관계의 실을 한 올 한 올 풀어 나가야 한다. 그런 사람은 이유 없이 찾아오지 않으니까. 베개에 눌린 까만 머리카락 끝에, 손가락의 말단을 살며시 가져다 댄다. 석민아, 공기만 떨리게끔, 소리를 거의 담지 않고 불러본다. 같은 침대에 눕게 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정한은 이게 끝이어야 함을 깨달았다.
누군가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 이석민은 자신만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모두에게 친절하다. 타고난 다정함을 세상에 뿌리고 남들이 기뻐해주면 따라 기뻐하는 사람이다. 정한은 그동안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다정을 받았고, 그가 이 관계를 원하는 쪽으로 꺾어버린다면, 언젠간 마음 속 소용돌이까지 석민에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석민은 착하니까 그것까지 거리낌 없이 감싸줄 테고. 그래선 안 된다. 그는 이 이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 제게 보일 지친 낯을 수없이 상상하느니, 발을 멈추고, 영역의 공유를 여기서 멈추는 편이 낫다. 알고 있다.
*
윤정한은 이석민을 응시한다. 평온함을 가장한 낯 아래, 무언가가 비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그가 예상한 세계에 이런 장면은 없다. 석민이 남자를 좋아할 수 있나? 본질적인 질문이 먼저. 당연히 아닐 거라 여겨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믿었다. 정한은 석민에게 들키지 않게끔, 떨리는 손으로 나머지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입꼬리를 최대한 올리고, 남은 맥주를 입 안에 털어 넣는다. 석민은 초조해한다. 불안이 맑은 눈동자를 잠식해, 잔뜩 흔들렸다. 안 돼, 석민아. 가슴께가 꼬인다. 손으로 누르고 싶었으나, 지금 그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석민은 제 버릇을 안다.
“뭐야아, 그 말하려고 이렇게 분위기 잡은 거야?”
정한은 목소리를 높인다. 그의 독특한 말투를 한계치까지 살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상태를 유지한다. 석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한은 석민이 저를 가늠하도록 내버려둔다. 기름이 끓는다. 고깃집은 여전히 시끄럽고, 주위가 소음을 낼수록 그들을 감싼 공기가 먹힌다. 먹먹해진다. 둘만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마냥. 정한이 더 크게 반응한다. 석민아, 너는 날 잘 알잖아.
“나도 우리 석민이 좋아하지.”
“어? 어, 아니, 그게,”
“지금 뭐 부탁할 거 있어서 밑밥 까는 거야?”
뇌물 같은 건가? 정한이 머리를 넘겼다. 실은, 궁금해. 네가 나를 언제부터 그런 방식으로 바라보게 되었는지, 네 다정의 출처가 언제부터 그런 감정이었는지,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걸 알고 뱉어낸 건지, 그리고 알려주고 싶다. 난 네 다정이 어떤 형태였든 간에, 좋아한다고. 좋아해, 같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좋아하는 것 같다, 라는 불완전한 모양이어도, 나는… 정한은 포기를 씹고, 또 씹었다. 너무 질겼다. 그래도 씹어, 넘긴다.
“아, 너무 분위기 잡았나?”
하하. 정한은 이런 웃음을 들어본 적 없다. 석민은 무언가를 가장하기엔 지나치게 투명했고, 그는 석민의 애가 닳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형, 안 속네. 너는 날 못 속여, 석민아. 눈 아래가 맥주 몇 잔이 물들였다기엔 지나치게 붉어지지만, 축축해지지만. 정한은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손바닥을 적시는 맥주병 뚜껑을 따고, 빈 잔에 따랐다. 잔을 기울이지 않아 거품이 세게 일었다.
“형, 거품이 너무 많은데?”
“그냥 마셔어.”
대화는 본래의 궤도로 돌아간다. 석민은 맥주를 마시고 정한은 고기를 뒤집는다. 소용돌이가 마음을 바닥까지 뒤집어 어지른다. 건배 소리가 먼 데서 들려온다. 차라리 술을 마시러 갈 걸. 술기운에 모든 걸 토하고 잊어버릴 걸. 석민은 분명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윤정한은 새삼스레, 자신의 나약함을 발견한다. 아무리 너를 위한 것이라 포장할지라도, 네가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게 너를 안전한 곳에 두는 것이라 합리화를 할지라도. 너는 너대로 너를 탓하겠지. 정한은 익은 고기를 석민의 그릇에 둔다.
“석민이, 많이 먹어.”
미처 미련을 버리지 못한 표정이 설핏 스쳐지나간다. 형이 오늘 고기 다 구웠네. 다음엔 너가 구워. 정한은 꿋꿋이 다음을 기약했다. 석민은 입술 달싹이다 젓가락을 집었다. 소음이 들이닥친다. 저놈의 회식은 언제 끝나는 거냐.
*
정한은 김민규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한다. 형, 석민이 입대 신청한다는데? 뭔 일 있었냐? 정한은 시원한 물 한 컵을 따라 마신다. 머리가 아팠다. 대답을 피하고 침대에 눕는다. 전기장판은 치운 지 오래다. 얼마 없는 옆자리에 잠시 시선을 주고 나야 모르지, 어차피 너네 가야할 때잖니. 간단한 답을 보낸다. 가슴께가 휘몰아쳤다. 꾹꾹 누르려다, 석민의 부재를 상기하고, 손을 떨군다.
다시 익숙해질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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