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흐리면 찾아가겠어요
[윤겸] 날씨가 흐리면 찾아가겠어요
윤정한이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이야기다. 인구의 5분의 1, 즉 선택 받은 약 20%의 사람들만이 각자의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센티넬로 발현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능력이 발현됨과 동시에 법적으로 국가 산하 기관에 소속되어야만 했다. 국제센티넬학교, 사실은 학교라는 명칭을 빌려 온 훈련소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정한의 경우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센티넬이었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센티넬 형질의 발현 확률이 높았고, 같은 이유로 능력이 처음 덜컥 발현되었던 고등학교 3학년 때에도 정한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센티넬이 해 주는 인생 얘기를 듣고 자랐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두 달간 사귄 여자친구와 말다툼 끝에 이별을 고하고 오는 길에서 정한은 비를 흠뻑 맞았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채로 귀가한 아들을 본 정한의 엄마는 들고 있던 집게도 채 내려놓지 못하고 거실까지 쫓아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머, 정한아. 왜 이렇게 젖었어?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물놀이라도 했어?"
"뭔 소리야...... 밖에 비 엄청 오는데."
그리고 동시에 발코니로 시선을 돌린 모자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지름 1미터 반경의 작은 원 안에만 죽어라 퍼붓고 있는 폭우였다. 비가 저렇게 올 수도 있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샤워를 하고 나온 정한은 부엌에서부터 풍겨오는 고기 굽는 냄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야, 살치살? 생각보다 단순한 성정의 남고생에게는 소고기만큼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 없었다. 한 입만 찬스를 거머쥔 정한이 고기를 우물대며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고 돌아서는 순간, 아까 보았던 그 작은 원 안의 비가 서서히 멎었다.
정한은 가끔 촉이 유달리 좋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순간적으로 묘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간 탓에 닭살이 오소소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뭐지? 마트에 갔더니 물가가 너무 올랐다는 둥, 오랜만에 과일 트럭 아저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서비스로 사과를 받아왔다는 둥 잡담을 늘어놓는 제 엄마를 뒤로하고 정한은 눈을 감은 채 일부러 슬픈 생각을 했다. 30초 정도 지난 뒤에 눈을 뜬 정한은 다시금 그 자리에 툭툭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다시 살치살 생각. 그러면 보란 듯이 다시 먹구름이 사라졌다. 이상한 낌새에 정한의 엄마가 뒤를 돌았다. 얘, 정한아. 듣고 있니?
...... 엄마, 내가 날씨를 바꿀 수 있는 것 같은데.
남들보다 조금 늦은 열아홉, 윤정한에게 찾아온 능력은 감정에 따른 날씨 조절 능력이었다.
*
물론 정한은 아직 전국의 날씨를 컨트롤할 정도의 위인은 되지 못했고, 그를 중심으로 약 3km 근방의 날씨 정도는 제어할 수 있었다. 능력이 발현된 지 3년이나 지났으면 이제 전국의 날씨 정도는 조절할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급식으로 나온 비엔나만 쇠젓가락 끄트머리로 툭툭 건드리던 정한의 맞은편에 익숙한 인영이 식판을 들고 와 자리를 잡았다.
"형 지금 그 상태로 갑자기 전국 날씨 통제하려고 했다간 폭주할걸."
정한이 말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툭 뱉은 건, 3년 내내 줄곧 붙어다녔던 석민이었다. 석민은 정한보다 두 살이 어렸고 정한과 같은 해인 열일곱에 센티넬로 발현이 되어 국제센티넬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일반인이었으나 돌연변이처럼 갑자기 능력을 가지게 된 케이스였다. 석민이 가진 능력의 이름은 마인드 컨트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의 눈을 3초 이상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생각이 석민에게 읽혔다. 정한은 타인의 정신을 직접 헤아릴 수 있는 석민의 능력이 자신의 능력보다 배로 쓸모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석민은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나는 형 능력이 더 부러운데? 형 기분 따라서 우리 학교 주변 날씨 다 바뀌는 거잖아."
"... 형이 너 때문에 무서워서 무슨 생각을 못 하겠다, 석민아."
"그리고 날씨 조절은 우리 학교에서 형만 할 수 있는 거고......"
"알겠어, 밥이나 먹어. 요구르트 줄까."
"남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욕해, 형. 나니까 욕 안 하는 거다. 어, 형 안 먹어? 안 먹으면 나 줘."
석민의 손에 제 몫으로 받은 요구르트를 쥐여 준 정한은 턱을 괸 채 밥을 먹는 석민을 퍽 신기하다는 얼굴로 구경했다. 말을 저렇게 많이 하면 안 피곤한가? 그러면 쉴 새 없이 종알대던 석민은 귀신같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정한을 타박했다.
"윤정한 내 욕 하는 거 다 들리거든."
"욕이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안 피곤해. 아, 맞다. 형 프롬 파트너 정했어?"
"파트너? 아...... 아니, 아직."
학교에서는 매년 여름학기가 끝나면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대상으로 졸업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어 주었다. 일종의 프롬파티 같은 개념이라서 학생들은 그냥 편의를 위해 프롬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 학교에서 열리는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였으므로 대부분 파트너를 구해 짝을 지어 참가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아직 파티 날짜도 안 나오지 않았나? 정한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먼저 묻는 걸 보아하니 석민은 파트너 제의가 벌써 들어온 모양이었다.
"형 반에는 아직 얘기 안 해 주셨나? 8월 중순에 한다던데."
"우리 반 애들은 아직 모르는 것 같던데...... 그래서 넌 누구랑 갈 건데."
"나? 정해진 건 아니고...... 지연이가 같이 가자던데."
지연이?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정한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정한의 습관이었다. 아, 입학할 때부터 예쁘장한 외모로 소문이 자자했던 애다. 근데... 걔가 석민이한테 파트너 제의를 했다고? 정한은 알 수 없는 기분에 볼 안쪽을 잘근대며 씹다가 석민에게 감정이 읽히기 전에 시선을 피해 일어났다.
"나 먼저 간다."
뭐야? 요구르트 껍질을 까다 말고 벙찐 얼굴로 정한을 올려다보던 석민이 급하게 빈 식판을 들고 따라 일어났다. 석민은 정한이 수틀릴 때마다 저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뒤에서 그거 조금을 못 기다리냐며 투덜대는 석민의 목소리가 따라오는 탓에 정한은 파티에 대한 생각을 관두고 일부러 다른 곳에 집중을 돌렸다. 5교시가 바로 오후 훈련이었다. 점심 먹고 가장 졸릴 시간에 도대체 누가 오후 훈련을 배치해 둔 건지... 그러면 빈 요구르트 병을 교복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석민이 정한의 오른팔에 엉겨 붙었다.
*
정한 역시 파트너 제의를 받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이 받아서 문제라면 문제였다. 한 손 안에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에 정한은 딱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곤란한 얼굴로 웃으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한 명을 고른 것에 별다른 기준도 없었다. 그것도 그냥 가장 먼저 파트너 제의가 들어온 동갑의 여학생과 함께 가기로 한 거였고, 미안한 소리였지만 사실 정한은 그 친구의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윤정한이 파트너 제의를 받아준 것은, 단순히 이석민도 파티에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정한은 요 며칠 속이 거북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내일이 파티라며 떠들썩한 학교를 뒤로하고 정한은 책상에 엎드려 팔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면 성준이 비어 있는 정한의 앞자리에 앉아 흐트러진 머리칼 위로 손을 툭 얹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윤정한, 날씨 좀 어떻게 해 봐."
"뭘."
"내일 프롬인데 이럴 거야? 너 무슨 일 있냐."
성준은 고개를 들어 교실 창문 밖을 한 번, 그러고서는 다시 기운이 없어 보이는 정한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요 며칠 날씨가 우중충한 것과 윤정한의 상태를 보아하니 정황상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물어봤자 쉽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옆에 항상 끼고 다니던 애가 요즘 안 보이던데, 싸웠나. 혼자 탐정처럼 날카롭게 추측을 하던 성준이 턱을 괸 채 정한의 앞에서 종알댔다.
"야, 너 걔랑 싸웠냐? 그 왜, 누구더라... 네가 맨날 끼고 다니던 3반에 강아지 닮은 애. 이름이 뭐더라."
"... 석민이?"
"아, 맞아. 아무튼 걔랑 싸웠어?"
"안 싸웠거든."
칼같이 돌아오는 대답치고는 목소리에 짜증이 어려 있었다. 아니면 아닌 거지. 머쓱함에 괜히 어깨를 으쓱인 성준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정한에게 말을 툭 던졌다. 야, 근데 걔 지금 우리 반 앞에서 또 기웃거리는데. 너 찾는 거 아니야? 그러면 달달 떨리던 정한의 다리가 일순간 뚝 멈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정한은 다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고집스럽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윤정한은 대놓고 이석민을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내버려진 석민은 한동안이나 정한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녀야 했다. 그래도 등하굣길에 항상 함께였고 점심도 같이 먹었는데 언질도 없이 한순간에 이러는 건 너무하잖아...... 석민은 이게 손절이라면 이유라도 알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 정한의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를 꾸준히 남겨 놓기도 했고, 돌아오는 답장이 없어도 집요하게 보내 놓은 문자와 카톡은 이미 세 자릿수가 훌쩍 넘어간 지 오래였다. 연락이 되질 않으니 교실에 직접 찾아가면 정한은 저를 투명인간 대하듯 하며 본인 친구들과 하던 이야기를 이어 나가거나, 엎드려 잠을 청하곤 했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저러나 싶어 마음을 읽어 보려고 하면 눈을 마주치지 못하게 등을 휙 돌려 버리니 도저히 그럴 수도 없었다. 윤정한은 이석민을 피했고, 이석민은 윤정한에게 서운함이 쌓였다.
*
파티 당일 아침의 날씨는 생각 외로 양호했다. 정한이 능력을 하루 동안 일시적으로 무효화시키는 억제제를 복용했기 때문이었다. 빈속에 억제제 먹으려니까 죽겠네...... 쓰린 속을 달래며 미리 준비해 두었던 턱시도를 입은 정한이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기숙사를 나섰다. 파티가 열리는 교내 연회장까지 가는 길에서 정한은 제게 아는 척을 해 오는 낯설고도 예쁘장한 여학생의 얼굴에 잠시 멈춰 섰다. 정한아, 옷 잘 어울린다. 볼이 살짝 붉어져 수줍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주은에게 멋쩍게 웃어 준 정한은 별다른 대답 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옆에서 계속해서 종알대는 것에 간간이 고개를 끄덕여 주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몇 초간의 정적.
"정한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나한테? 아, 어."
"왜 나랑 파트너 하기로 한 거야?"
"...... 파트너?"
정한은 그제야 제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맞추며 계속해서 말을 붙이던 주은이 제 파트너였음을 깨달았다. 주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당황한 얼굴을 순식간에 감춘 정한이 한참 말을 고르며 입을 다문 채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해야 잘 둘러댈 수 있을까.
"그냥, 그중에서는 네가 제일 마음에 들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
주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뿔싸, 희망 고문을 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뭔가 단단히 착각이라도 한 것 같은 주은에 난감해진 정한이 정면을 바라보고 걸었다.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하나도 귓가로 꽂히지 않았다. 옆에 있는 애가 이석민이었으면 이미 생각 다 읽혀서 좆됐겠지? 무의식중에 다다른 생각의 끝에 석민이 있어 본인도 놀란 정한은 짧게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저어냈다. 갑작스러운 정한의 행동에 눈을 깜빡이던 주은이 맞은편에서 오는 두 인영을 발견하곤 반가운 목소리로 아는 척을 했다. 어, 지연아! ...... 지연이?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건.
정한과 석민의 시선이 허공에서 짧게 얽혔다가 떨어졌다. 원래 아는 사이였던 듯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는 주은과 지연을 뒤로하고 둘은 처음 보는 사이보다도 더 어색하게 서로를 대했다. 석민도 정한에게 굳이 먼저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정한은 혹시나 제가 또 석민의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봐 서둘러 고개를 돌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억지로 머릿속에 담았다. 와, 풀 존나 초록색이네. 여기 있던 나무가 원래 이렇게 컸나? 어색하기 그지없는 정한의 생각이 뻔히 보여 석민은 헛웃음을 뱉어내며 시선을 돌렸다. 저 형이 저런 생각을 할 리가 없는데.
둘은 그렇게 싱겁게 헤어졌다. 정한은 심장이 쿵쿵대서 하마터면 기절이라도 할 뻔했다. 설마 석민이 그 짧은 찰나에 제 생각을 읽은 건 아니겠지 싶어 터져 나오는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무슨 일 있냐며 묻는 목소리와 함께 은근하게 맞닿는 손등에 정한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젓고 팔을 뒤로 슬쩍 내뺐다. 아냐, 아무 일도 없어. 가볍게 둘러댄 정한이 주은과 시선을 잠시 마주했다가 연회장 방향으로 가볍게 턱짓했다. 들어가자, 조금 있으면 애들 다 모이겠다.
*
연회장 안의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었다. 일반계 고등학교와 달리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성인인 탓에 파티 내부에서 별다른 제재는 없었다. 준비된 칵테일을 마시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춤을 추고, 구석에서는 이미 진득하게 입술을 부비고 있는 몇 쌍의 커플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정한은 내내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주은이 잠시 친구들을 만나고 오겠다는 틈을 타 답답한 기분을 전환하고자 바깥바람을 쐬러 연회장 문을 열고 나왔다. 얼굴에 닿는 바람이 제법 선선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고개를 들면 달빛에 어슴푸레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멀지 않은 시선 끝에 걸렸다. 연회장 안은 시끄러워서 나온 건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인상을 잠깐 찌푸리던 정한은 누구인지 확인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벽에 기대어 눈을 깜빡였다. 알코올이 몸에 잘 받지 않아 숨을 내쉴 때마다 아까 마셨던 칵테일의 향이 같이 올라오는 듯했다. 습관처럼 앞머리를 쓸어올리려다 기껏 세팅한 머리가 망가질까 싶어 의식적으로 손을 거둔 정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여자로 보이는 인영이 상대방의 팔을 가까이 끌어 과감하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끌려가느라 어렴풋이 비친 얼굴은, 네가 왜......
"...... 이석민?"
인기척을 들은 건지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제 쪽으로 향했다. 앞에 있는 지연의 어깨를 살짝 밀어낸 석민이 난감한 얼굴로 정한과 지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한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벽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켜 연회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새하얀 페인트가 쏟아진 머릿속은 쉽게 닦이지 않았다. 그새 사귀기로 한 건가? 제가 아는 석민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키스를 할 리가 없었다. 윤정한이 이석민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이석민이 그새 저 여자애를 좋아하게 된 건지. 양쪽 다 썩 내키는 답은 아니었다. 정한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모양인지 두리번대던 주은이 가까이 와 팔을 살짝 붙잡았다. 윤정한은 이번에는 그 팔을 내치지 않았다. 이유는 아마 질투심? 왜? 애초에 석민은 제 것이 아니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입술 안쪽을 깨문 정한이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미안한 얼굴로 주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내렸다.
주은아, 미안한데 나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 오늘 재밌었어.
그렇게 연회장으로부터 등을 돌려 나온 윤정한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귀 끝 언저리를 매섭게 스치고 지나갔다. 한껏 차분해진 머릿속으로 다시 생각을 해 보았다. 이석민이 다른 여자랑 키스를 했다. 그런데 기분이 좋지 않다. 왜? 정작 본인은 이석민을 죽어라 피해 다녔으면서. 사실 답이야 간단히 찾을 수 있었지만 정한은 왠지 그 답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작하기도 전에 차인 느낌이잖아. 입 안에 남은 칵테일의 끝맛이 쌉싸름해 괜히 입술을 혀로 쓸어 낸 정한이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헤집으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
파티가 끝나고 남은 일정은 방학식 뿐이었다. 그 사이에 낀 주말 내내 정한은 크게 앓았다. 당연히 그의 기분을 따라 날씨도 엉망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성준이 이따금 정한의 상태를 확인할 때마다 큰 차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숙사 편의점에서 타이레놀을 사 와서 얕게 잠이 든 정한의 머리맡에 놓아주려던 찰나,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뭐라고?
"석민이...... 안 되는데."
뭐가 안 된다는 건지 영문을 몰라 잠시 미간을 구기던 성준이 가만히 정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석민이, 안 돼, 하지 마...... 세 단어가 불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잠꼬대. 성준은 꽤나 촉이 좋은 편이었다. 이 새끼 이거 3반 강아지랑 한바탕 뭔 일 있었구만. 매서운 태풍에 창문이 자꾸만 덜컹거렸다. 성준은 몸을 일으켜 슬리퍼를 아무렇게나 발에 끼워 넣고 맞은편에 있는 826호로 발걸음을 옮겨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석민이 생활하고 있는 호실이었다.
"누구세요?"
"윤정한 친구인데요."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성준은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잠시만요, 하는 목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가까워지더니 곧 문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놓은 석민과 눈이 마주쳤다. 둘은 정한을 매개로 안면이 있는 사이긴 했으나 직접적으로 친하지는 않았으므로, 어색한 공기 속에 눈을 굴리던 석민에게 지금의 상황이 썩 반갑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정한이 형이랑 돌이킬 수도 없이 어색해져서 곤란한데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석민은 가만히 성준을 쳐다보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읽힌 그의 생각에 당황했다.
윤정한은 분명히 얘를 좋아한다.
... 이게 맞아? 석민은 혹시나 제 능력이 어딘가 잘못되어 갑자기 사람의 마음을 잘못 읽는 경우도 생기는 건가 싶었으나 그의 등급으로 따져 보았을 때(석민은 본인의 반에서 유일한 S급 센티넬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성준은 석민이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정한이가 좀 아픈데, 알고 있었어요?"
"아......"
석민이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파티에서 키스를 들키고 헤어진 뒤로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기숙사에만 처박혀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당황한 눈치의 석민에게 성준은 말을 이어 나갔다.
"어제랑 오늘 날씨 좀 봐요. 바람 불고, 비 오고, 태풍 오고."
"..."
"근데 정한이가... 자면서 계속 그쪽 이름을 부르거든요."
네? 반사적으로 석민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석민의 얼굴을 바라본 성준은 직감했다. 얘네 지금 사랑싸움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석민은 남들의 숨겨진 마음을 읽는 것에는 능했으나 정작 본인의 마음은 숨기는 방법은 잘 몰랐다. 성준은 제 호실 방향을 가볍게 턱짓했다.
"가서 한 번 봐요. 아직도 그쪽 이름 부르고 있을 것 같은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적 고민을 하던 석민이 눈을 꾹 감았다 뜬 채 망설이기도 잠시 슬리퍼를 고쳐 신었다. 그러다가 우뚝 멈춰 서서 성준을 돌아 보았다. 같이 갈 거냐는 물음을 담은 눈에 성준이 어깨를 으쓱이다 양손을 살짝 내젓고 중앙에 위치한 공용 휴게실 방향을 가리켰다. 저는 저기서 티비 좀 보다 들어가려고요. 원래 이런 곳에서는 눈치껏 빠져 줘야 하는 법이다.
비가 한껏 와서 안 그래도 습한 날씨에 정한의 더운 숨이 더해져 이쪽 방은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어후, 아프다고 에어컨도 안 켜고 이러고 있는 거야? 발소리를 죽여 안으로 들어온 석민이 기절한 듯 자고 있는 정한의 곁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러지 마, 석민아...... 잠투정 비슷하게 나오는 목소리에는 어렴풋이 물기가 서린 것 같기도 했다.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혼란스러운 속이 다 보였다. 석민이 여자친구 생겼나? 언제부터? 내가 더 먼저 좋아했을 텐데 질투 난다. 키스 안 했으면 좋겠다. 아니, 헤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석민이가 좋다고 하면...... 정한의 속마음을 읽던 석민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석민은 그날 엄연히 말하자면 피해자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 시끄러우니 잠깐 나가서 밖을 걷고 싶다는 지연을 늦은 시간에 혼자 걷도록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 같이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눈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그저 단단한 시멘트 바닥에 시선을 둔 채 걷던 석민은 별안간 지연에게 팔이 붙잡혔고, 놀라서 고개를 들기 무섭게 입술을 빼앗겼다. 상황 파악을 하려 일단은 지연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아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그 자리에 굳어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보려던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로 불리는 제 이름을 듣고 석민은 그대로 얼었다. ...... 설마 형이 봤나? 말릴 틈도 없이 정한은 미련 하나 보이지 않는 뒷모습으로 연회장 안으로 사라졌다. 뒤늦게 차오르는 황당함에 입술만 씹어대던 석민은 고개를 돌려 지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지연의 사심이 들렸다. 한참이나 말을 고르던 석민은 결국 별다른 화도 내지 못하고 지연을 노려보다 홀로 뒤돌아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다음부터는 누구한테든 이런 짓 하지 마. 석민이 오늘 하루 함께했던 파트너로서 베풀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예의였다.
"...... 형."
태풍이 몰아치는 창문을 바라보며 그 기억을 곱씹던 석민은 한숨을 쉬며 다시 정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한은 어느새 잠이 깼는지 졸음이 가득히 묻은 두 눈을 살짝 뜨고 석민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면 석민은 또 다시 정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 이석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쩌지. 귓가에 들리는 문장을 곱씹던 석민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한은 딱히 더는 마음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고, 그럴 만한 컨디션도 전혀 아닌 듯했다. 여전히 흐르는 정적의 시간 속에서 석민은 별안간 제 심장 소리가 정한에게까지 들리면 어떡하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오롯이 석민의 능력에 의한 판단이었으나 석민은 여기서 틀릴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숙였다. 윤정한은 이석민을 좋아한다. 입술을 맞댔다. 이석민도 윤정한을 좋아했다. 버석하게 닿는 입술의 촉감이 싫지 않아 입술을 살짝 떼어내기도 잠시, 혀를 섞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한다. 조금 돌아서 오긴 했으나 어디 하나 흠 잡을 것 없는 퍼펙트 클리어였다.
정한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컨디션이 맛 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헛것까지 보이나 싶었는데 입술에 닿는 말랑한 감촉이 생시라고 말하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휘몰아치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잠깐 떨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뱉어낸 정한이 느리게 손을 들어 석민의 목덜미 언저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부드럽게 당겼다. 다시 질척하게 닿은 입술 사이로 혀가 얽혔다. 야살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올 즈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틀어 더욱 깊게 입을 맞췄다. 동시에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올려 떴다. 정한은 석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둘 중 그 누구도 키스에 익숙지 않아 날것의 입맞춤 그 자체였으나 두 사람은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이라는 긴장감이 묘한 기분을 키웠다. 어느새 창문을 거칠게 몰아붙이던 바람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입술이 떨어지며 길게 늘어지던 타액이 뚝 끊겼다. 손을 뻗어 석민의 입가를 엄지로 문질러 준 정한이 더운 숨을 뱉으면서도 석민의 등을 당겨 안았다.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았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의 진심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한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도 누군가는 사랑의 싹을 틔운다. 윤정한의 소용돌이가 한바탕 쓸고 지나간 뒤였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먹구름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커튼 사이로 빛 하나 들지 않던 공간이 점차 환해졌다. 비좁은 기숙사 침대 매트리스 위에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커지는 심장 박동만이 오롯이 그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윤정한이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이야기다. 인구의 5분의 1, 즉 선택 받은 약 20%의 사람들만이 각자의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센티넬로 발현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능력이 발현됨과 동시에 법적으로 국가 산하 기관에 소속되어야만 했다. 국제센티넬학교, 사실은 학교라는 명칭을 빌려 온 훈련소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정한의 경우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센티넬이었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센티넬 형질의 발현 확률이 높았고, 같은 이유로 능력이 처음 덜컥 발현되었던 고등학교 3학년 때에도 정한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센티넬이 해 주는 인생 얘기를 듣고 자랐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두 달간 사귄 여자친구와 말다툼 끝에 이별을 고하고 오는 길에서 정한은 비를 흠뻑 맞았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채로 귀가한 아들을 본 정한의 엄마는 들고 있던 집게도 채 내려놓지 못하고 거실까지 쫓아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머, 정한아. 왜 이렇게 젖었어?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물놀이라도 했어?"
"뭔 소리야...... 밖에 비 엄청 오는데."
그리고 동시에 발코니로 시선을 돌린 모자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지름 1미터 반경의 작은 원 안에만 죽어라 퍼붓고 있는 폭우였다. 비가 저렇게 올 수도 있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샤워를 하고 나온 정한은 부엌에서부터 풍겨오는 고기 굽는 냄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야, 살치살? 생각보다 단순한 성정의 남고생에게는 소고기만큼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 없었다. 한 입만 찬스를 거머쥔 정한이 고기를 우물대며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고 돌아서는 순간, 아까 보았던 그 작은 원 안의 비가 서서히 멎었다.
정한은 가끔 촉이 유달리 좋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순간적으로 묘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간 탓에 닭살이 오소소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뭐지? 마트에 갔더니 물가가 너무 올랐다는 둥, 오랜만에 과일 트럭 아저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서비스로 사과를 받아왔다는 둥 잡담을 늘어놓는 제 엄마를 뒤로하고 정한은 눈을 감은 채 일부러 슬픈 생각을 했다. 30초 정도 지난 뒤에 눈을 뜬 정한은 다시금 그 자리에 툭툭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다시 살치살 생각. 그러면 보란 듯이 다시 먹구름이 사라졌다. 이상한 낌새에 정한의 엄마가 뒤를 돌았다. 얘, 정한아. 듣고 있니?
...... 엄마, 내가 날씨를 바꿀 수 있는 것 같은데.
남들보다 조금 늦은 열아홉, 윤정한에게 찾아온 능력은 감정에 따른 날씨 조절 능력이었다.
*
물론 정한은 아직 전국의 날씨를 컨트롤할 정도의 위인은 되지 못했고, 그를 중심으로 약 3km 근방의 날씨 정도는 제어할 수 있었다. 능력이 발현된 지 3년이나 지났으면 이제 전국의 날씨 정도는 조절할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급식으로 나온 비엔나만 쇠젓가락 끄트머리로 툭툭 건드리던 정한의 맞은편에 익숙한 인영이 식판을 들고 와 자리를 잡았다.
"형 지금 그 상태로 갑자기 전국 날씨 통제하려고 했다간 폭주할걸."
정한이 말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툭 뱉은 건, 3년 내내 줄곧 붙어다녔던 석민이었다. 석민은 정한보다 두 살이 어렸고 정한과 같은 해인 열일곱에 센티넬로 발현이 되어 국제센티넬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일반인이었으나 돌연변이처럼 갑자기 능력을 가지게 된 케이스였다. 석민이 가진 능력의 이름은 마인드 컨트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의 눈을 3초 이상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생각이 석민에게 읽혔다. 정한은 타인의 정신을 직접 헤아릴 수 있는 석민의 능력이 자신의 능력보다 배로 쓸모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석민은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나는 형 능력이 더 부러운데? 형 기분 따라서 우리 학교 주변 날씨 다 바뀌는 거잖아."
"... 형이 너 때문에 무서워서 무슨 생각을 못 하겠다, 석민아."
"그리고 날씨 조절은 우리 학교에서 형만 할 수 있는 거고......"
"알겠어, 밥이나 먹어. 요구르트 줄까."
"남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욕해, 형. 나니까 욕 안 하는 거다. 어, 형 안 먹어? 안 먹으면 나 줘."
석민의 손에 제 몫으로 받은 요구르트를 쥐여 준 정한은 턱을 괸 채 밥을 먹는 석민을 퍽 신기하다는 얼굴로 구경했다. 말을 저렇게 많이 하면 안 피곤한가? 그러면 쉴 새 없이 종알대던 석민은 귀신같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정한을 타박했다.
"윤정한 내 욕 하는 거 다 들리거든."
"욕이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안 피곤해. 아, 맞다. 형 프롬 파트너 정했어?"
"파트너? 아...... 아니, 아직."
학교에서는 매년 여름학기가 끝나면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대상으로 졸업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어 주었다. 일종의 프롬파티 같은 개념이라서 학생들은 그냥 편의를 위해 프롬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 학교에서 열리는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였으므로 대부분 파트너를 구해 짝을 지어 참가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아직 파티 날짜도 안 나오지 않았나? 정한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먼저 묻는 걸 보아하니 석민은 파트너 제의가 벌써 들어온 모양이었다.
"형 반에는 아직 얘기 안 해 주셨나? 8월 중순에 한다던데."
"우리 반 애들은 아직 모르는 것 같던데...... 그래서 넌 누구랑 갈 건데."
"나? 정해진 건 아니고...... 지연이가 같이 가자던데."
지연이?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정한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정한의 습관이었다. 아, 입학할 때부터 예쁘장한 외모로 소문이 자자했던 애다. 근데... 걔가 석민이한테 파트너 제의를 했다고? 정한은 알 수 없는 기분에 볼 안쪽을 잘근대며 씹다가 석민에게 감정이 읽히기 전에 시선을 피해 일어났다.
"나 먼저 간다."
뭐야? 요구르트 껍질을 까다 말고 벙찐 얼굴로 정한을 올려다보던 석민이 급하게 빈 식판을 들고 따라 일어났다. 석민은 정한이 수틀릴 때마다 저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뒤에서 그거 조금을 못 기다리냐며 투덜대는 석민의 목소리가 따라오는 탓에 정한은 파티에 대한 생각을 관두고 일부러 다른 곳에 집중을 돌렸다. 5교시가 바로 오후 훈련이었다. 점심 먹고 가장 졸릴 시간에 도대체 누가 오후 훈련을 배치해 둔 건지... 그러면 빈 요구르트 병을 교복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석민이 정한의 오른팔에 엉겨 붙었다.
*
정한 역시 파트너 제의를 받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이 받아서 문제라면 문제였다. 한 손 안에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에 정한은 딱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곤란한 얼굴로 웃으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한 명을 고른 것에 별다른 기준도 없었다. 그것도 그냥 가장 먼저 파트너 제의가 들어온 동갑의 여학생과 함께 가기로 한 거였고, 미안한 소리였지만 사실 정한은 그 친구의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윤정한이 파트너 제의를 받아준 것은, 단순히 이석민도 파티에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정한은 요 며칠 속이 거북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내일이 파티라며 떠들썩한 학교를 뒤로하고 정한은 책상에 엎드려 팔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면 성준이 비어 있는 정한의 앞자리에 앉아 흐트러진 머리칼 위로 손을 툭 얹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윤정한, 날씨 좀 어떻게 해 봐."
"뭘."
"내일 프롬인데 이럴 거야? 너 무슨 일 있냐."
성준은 고개를 들어 교실 창문 밖을 한 번, 그러고서는 다시 기운이 없어 보이는 정한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요 며칠 날씨가 우중충한 것과 윤정한의 상태를 보아하니 정황상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물어봤자 쉽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옆에 항상 끼고 다니던 애가 요즘 안 보이던데, 싸웠나. 혼자 탐정처럼 날카롭게 추측을 하던 성준이 턱을 괸 채 정한의 앞에서 종알댔다.
"야, 너 걔랑 싸웠냐? 그 왜, 누구더라... 네가 맨날 끼고 다니던 3반에 강아지 닮은 애. 이름이 뭐더라."
"... 석민이?"
"아, 맞아. 아무튼 걔랑 싸웠어?"
"안 싸웠거든."
칼같이 돌아오는 대답치고는 목소리에 짜증이 어려 있었다. 아니면 아닌 거지. 머쓱함에 괜히 어깨를 으쓱인 성준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정한에게 말을 툭 던졌다. 야, 근데 걔 지금 우리 반 앞에서 또 기웃거리는데. 너 찾는 거 아니야? 그러면 달달 떨리던 정한의 다리가 일순간 뚝 멈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정한은 다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고집스럽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윤정한은 대놓고 이석민을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내버려진 석민은 한동안이나 정한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녀야 했다. 그래도 등하굣길에 항상 함께였고 점심도 같이 먹었는데 언질도 없이 한순간에 이러는 건 너무하잖아...... 석민은 이게 손절이라면 이유라도 알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 정한의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를 꾸준히 남겨 놓기도 했고, 돌아오는 답장이 없어도 집요하게 보내 놓은 문자와 카톡은 이미 세 자릿수가 훌쩍 넘어간 지 오래였다. 연락이 되질 않으니 교실에 직접 찾아가면 정한은 저를 투명인간 대하듯 하며 본인 친구들과 하던 이야기를 이어 나가거나, 엎드려 잠을 청하곤 했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저러나 싶어 마음을 읽어 보려고 하면 눈을 마주치지 못하게 등을 휙 돌려 버리니 도저히 그럴 수도 없었다. 윤정한은 이석민을 피했고, 이석민은 윤정한에게 서운함이 쌓였다.
*
파티 당일 아침의 날씨는 생각 외로 양호했다. 정한이 능력을 하루 동안 일시적으로 무효화시키는 억제제를 복용했기 때문이었다. 빈속에 억제제 먹으려니까 죽겠네...... 쓰린 속을 달래며 미리 준비해 두었던 턱시도를 입은 정한이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기숙사를 나섰다. 파티가 열리는 교내 연회장까지 가는 길에서 정한은 제게 아는 척을 해 오는 낯설고도 예쁘장한 여학생의 얼굴에 잠시 멈춰 섰다. 정한아, 옷 잘 어울린다. 볼이 살짝 붉어져 수줍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주은에게 멋쩍게 웃어 준 정한은 별다른 대답 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옆에서 계속해서 종알대는 것에 간간이 고개를 끄덕여 주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몇 초간의 정적.
"정한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나한테? 아, 어."
"왜 나랑 파트너 하기로 한 거야?"
"...... 파트너?"
정한은 그제야 제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맞추며 계속해서 말을 붙이던 주은이 제 파트너였음을 깨달았다. 주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당황한 얼굴을 순식간에 감춘 정한이 한참 말을 고르며 입을 다문 채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해야 잘 둘러댈 수 있을까.
"그냥, 그중에서는 네가 제일 마음에 들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
주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뿔싸, 희망 고문을 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뭔가 단단히 착각이라도 한 것 같은 주은에 난감해진 정한이 정면을 바라보고 걸었다.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하나도 귓가로 꽂히지 않았다. 옆에 있는 애가 이석민이었으면 이미 생각 다 읽혀서 좆됐겠지? 무의식중에 다다른 생각의 끝에 석민이 있어 본인도 놀란 정한은 짧게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저어냈다. 갑작스러운 정한의 행동에 눈을 깜빡이던 주은이 맞은편에서 오는 두 인영을 발견하곤 반가운 목소리로 아는 척을 했다. 어, 지연아! ...... 지연이?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건.
정한과 석민의 시선이 허공에서 짧게 얽혔다가 떨어졌다. 원래 아는 사이였던 듯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는 주은과 지연을 뒤로하고 둘은 처음 보는 사이보다도 더 어색하게 서로를 대했다. 석민도 정한에게 굳이 먼저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정한은 혹시나 제가 또 석민의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봐 서둘러 고개를 돌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억지로 머릿속에 담았다. 와, 풀 존나 초록색이네. 여기 있던 나무가 원래 이렇게 컸나? 어색하기 그지없는 정한의 생각이 뻔히 보여 석민은 헛웃음을 뱉어내며 시선을 돌렸다. 저 형이 저런 생각을 할 리가 없는데.
둘은 그렇게 싱겁게 헤어졌다. 정한은 심장이 쿵쿵대서 하마터면 기절이라도 할 뻔했다. 설마 석민이 그 짧은 찰나에 제 생각을 읽은 건 아니겠지 싶어 터져 나오는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무슨 일 있냐며 묻는 목소리와 함께 은근하게 맞닿는 손등에 정한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젓고 팔을 뒤로 슬쩍 내뺐다. 아냐, 아무 일도 없어. 가볍게 둘러댄 정한이 주은과 시선을 잠시 마주했다가 연회장 방향으로 가볍게 턱짓했다. 들어가자, 조금 있으면 애들 다 모이겠다.
*
연회장 안의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었다. 일반계 고등학교와 달리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성인인 탓에 파티 내부에서 별다른 제재는 없었다. 준비된 칵테일을 마시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춤을 추고, 구석에서는 이미 진득하게 입술을 부비고 있는 몇 쌍의 커플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정한은 내내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주은이 잠시 친구들을 만나고 오겠다는 틈을 타 답답한 기분을 전환하고자 바깥바람을 쐬러 연회장 문을 열고 나왔다. 얼굴에 닿는 바람이 제법 선선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고개를 들면 달빛에 어슴푸레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멀지 않은 시선 끝에 걸렸다. 연회장 안은 시끄러워서 나온 건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인상을 잠깐 찌푸리던 정한은 누구인지 확인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벽에 기대어 눈을 깜빡였다. 알코올이 몸에 잘 받지 않아 숨을 내쉴 때마다 아까 마셨던 칵테일의 향이 같이 올라오는 듯했다. 습관처럼 앞머리를 쓸어올리려다 기껏 세팅한 머리가 망가질까 싶어 의식적으로 손을 거둔 정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여자로 보이는 인영이 상대방의 팔을 가까이 끌어 과감하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끌려가느라 어렴풋이 비친 얼굴은, 네가 왜......
"...... 이석민?"
인기척을 들은 건지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제 쪽으로 향했다. 앞에 있는 지연의 어깨를 살짝 밀어낸 석민이 난감한 얼굴로 정한과 지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한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벽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켜 연회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새하얀 페인트가 쏟아진 머릿속은 쉽게 닦이지 않았다. 그새 사귀기로 한 건가? 제가 아는 석민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키스를 할 리가 없었다. 윤정한이 이석민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이석민이 그새 저 여자애를 좋아하게 된 건지. 양쪽 다 썩 내키는 답은 아니었다. 정한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모양인지 두리번대던 주은이 가까이 와 팔을 살짝 붙잡았다. 윤정한은 이번에는 그 팔을 내치지 않았다. 이유는 아마 질투심? 왜? 애초에 석민은 제 것이 아니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입술 안쪽을 깨문 정한이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미안한 얼굴로 주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내렸다.
주은아, 미안한데 나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 오늘 재밌었어.
그렇게 연회장으로부터 등을 돌려 나온 윤정한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귀 끝 언저리를 매섭게 스치고 지나갔다. 한껏 차분해진 머릿속으로 다시 생각을 해 보았다. 이석민이 다른 여자랑 키스를 했다. 그런데 기분이 좋지 않다. 왜? 정작 본인은 이석민을 죽어라 피해 다녔으면서. 사실 답이야 간단히 찾을 수 있었지만 정한은 왠지 그 답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작하기도 전에 차인 느낌이잖아. 입 안에 남은 칵테일의 끝맛이 쌉싸름해 괜히 입술을 혀로 쓸어 낸 정한이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헤집으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
파티가 끝나고 남은 일정은 방학식 뿐이었다. 그 사이에 낀 주말 내내 정한은 크게 앓았다. 당연히 그의 기분을 따라 날씨도 엉망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성준이 이따금 정한의 상태를 확인할 때마다 큰 차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숙사 편의점에서 타이레놀을 사 와서 얕게 잠이 든 정한의 머리맡에 놓아주려던 찰나,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뭐라고?
"석민이...... 안 되는데."
뭐가 안 된다는 건지 영문을 몰라 잠시 미간을 구기던 성준이 가만히 정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석민이, 안 돼, 하지 마...... 세 단어가 불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잠꼬대. 성준은 꽤나 촉이 좋은 편이었다. 이 새끼 이거 3반 강아지랑 한바탕 뭔 일 있었구만. 매서운 태풍에 창문이 자꾸만 덜컹거렸다. 성준은 몸을 일으켜 슬리퍼를 아무렇게나 발에 끼워 넣고 맞은편에 있는 826호로 발걸음을 옮겨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석민이 생활하고 있는 호실이었다.
"누구세요?"
"윤정한 친구인데요."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성준은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잠시만요, 하는 목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가까워지더니 곧 문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놓은 석민과 눈이 마주쳤다. 둘은 정한을 매개로 안면이 있는 사이긴 했으나 직접적으로 친하지는 않았으므로, 어색한 공기 속에 눈을 굴리던 석민에게 지금의 상황이 썩 반갑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정한이 형이랑 돌이킬 수도 없이 어색해져서 곤란한데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석민은 가만히 성준을 쳐다보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읽힌 그의 생각에 당황했다.
윤정한은 분명히 얘를 좋아한다.
... 이게 맞아? 석민은 혹시나 제 능력이 어딘가 잘못되어 갑자기 사람의 마음을 잘못 읽는 경우도 생기는 건가 싶었으나 그의 등급으로 따져 보았을 때(석민은 본인의 반에서 유일한 S급 센티넬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성준은 석민이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정한이가 좀 아픈데, 알고 있었어요?"
"아......"
석민이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파티에서 키스를 들키고 헤어진 뒤로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기숙사에만 처박혀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당황한 눈치의 석민에게 성준은 말을 이어 나갔다.
"어제랑 오늘 날씨 좀 봐요. 바람 불고, 비 오고, 태풍 오고."
"..."
"근데 정한이가... 자면서 계속 그쪽 이름을 부르거든요."
네? 반사적으로 석민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석민의 얼굴을 바라본 성준은 직감했다. 얘네 지금 사랑싸움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석민은 남들의 숨겨진 마음을 읽는 것에는 능했으나 정작 본인의 마음은 숨기는 방법은 잘 몰랐다. 성준은 제 호실 방향을 가볍게 턱짓했다.
"가서 한 번 봐요. 아직도 그쪽 이름 부르고 있을 것 같은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적 고민을 하던 석민이 눈을 꾹 감았다 뜬 채 망설이기도 잠시 슬리퍼를 고쳐 신었다. 그러다가 우뚝 멈춰 서서 성준을 돌아 보았다. 같이 갈 거냐는 물음을 담은 눈에 성준이 어깨를 으쓱이다 양손을 살짝 내젓고 중앙에 위치한 공용 휴게실 방향을 가리켰다. 저는 저기서 티비 좀 보다 들어가려고요. 원래 이런 곳에서는 눈치껏 빠져 줘야 하는 법이다.
비가 한껏 와서 안 그래도 습한 날씨에 정한의 더운 숨이 더해져 이쪽 방은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어후, 아프다고 에어컨도 안 켜고 이러고 있는 거야? 발소리를 죽여 안으로 들어온 석민이 기절한 듯 자고 있는 정한의 곁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러지 마, 석민아...... 잠투정 비슷하게 나오는 목소리에는 어렴풋이 물기가 서린 것 같기도 했다.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혼란스러운 속이 다 보였다. 석민이 여자친구 생겼나? 언제부터? 내가 더 먼저 좋아했을 텐데 질투 난다. 키스 안 했으면 좋겠다. 아니, 헤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석민이가 좋다고 하면...... 정한의 속마음을 읽던 석민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석민은 그날 엄연히 말하자면 피해자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 시끄러우니 잠깐 나가서 밖을 걷고 싶다는 지연을 늦은 시간에 혼자 걷도록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 같이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눈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그저 단단한 시멘트 바닥에 시선을 둔 채 걷던 석민은 별안간 지연에게 팔이 붙잡혔고, 놀라서 고개를 들기 무섭게 입술을 빼앗겼다. 상황 파악을 하려 일단은 지연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아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그 자리에 굳어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보려던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로 불리는 제 이름을 듣고 석민은 그대로 얼었다. ...... 설마 형이 봤나? 말릴 틈도 없이 정한은 미련 하나 보이지 않는 뒷모습으로 연회장 안으로 사라졌다. 뒤늦게 차오르는 황당함에 입술만 씹어대던 석민은 고개를 돌려 지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지연의 사심이 들렸다. 한참이나 말을 고르던 석민은 결국 별다른 화도 내지 못하고 지연을 노려보다 홀로 뒤돌아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다음부터는 누구한테든 이런 짓 하지 마. 석민이 오늘 하루 함께했던 파트너로서 베풀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예의였다.
"...... 형."
태풍이 몰아치는 창문을 바라보며 그 기억을 곱씹던 석민은 한숨을 쉬며 다시 정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한은 어느새 잠이 깼는지 졸음이 가득히 묻은 두 눈을 살짝 뜨고 석민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면 석민은 또 다시 정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 이석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쩌지. 귓가에 들리는 문장을 곱씹던 석민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한은 딱히 더는 마음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고, 그럴 만한 컨디션도 전혀 아닌 듯했다. 여전히 흐르는 정적의 시간 속에서 석민은 별안간 제 심장 소리가 정한에게까지 들리면 어떡하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오롯이 석민의 능력에 의한 판단이었으나 석민은 여기서 틀릴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숙였다. 윤정한은 이석민을 좋아한다. 입술을 맞댔다. 이석민도 윤정한을 좋아했다. 버석하게 닿는 입술의 촉감이 싫지 않아 입술을 살짝 떼어내기도 잠시, 혀를 섞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한다. 조금 돌아서 오긴 했으나 어디 하나 흠 잡을 것 없는 퍼펙트 클리어였다.
정한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컨디션이 맛 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헛것까지 보이나 싶었는데 입술에 닿는 말랑한 감촉이 생시라고 말하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휘몰아치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잠깐 떨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뱉어낸 정한이 느리게 손을 들어 석민의 목덜미 언저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부드럽게 당겼다. 다시 질척하게 닿은 입술 사이로 혀가 얽혔다. 야살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올 즈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틀어 더욱 깊게 입을 맞췄다. 동시에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올려 떴다. 정한은 석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둘 중 그 누구도 키스에 익숙지 않아 날것의 입맞춤 그 자체였으나 두 사람은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이라는 긴장감이 묘한 기분을 키웠다. 어느새 창문을 거칠게 몰아붙이던 바람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입술이 떨어지며 길게 늘어지던 타액이 뚝 끊겼다. 손을 뻗어 석민의 입가를 엄지로 문질러 준 정한이 더운 숨을 뱉으면서도 석민의 등을 당겨 안았다.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았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의 진심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한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도 누군가는 사랑의 싹을 틔운다. 윤정한의 소용돌이가 한바탕 쓸고 지나간 뒤였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먹구름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커튼 사이로 빛 하나 들지 않던 공간이 점차 환해졌다. 비좁은 기숙사 침대 매트리스 위에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커지는 심장 박동만이 오롯이 그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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