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증에게
익명
dear my love and hate.
완벽한 헤어짐은 없다. 서로의 새끼 손가락에 묶여 이어져 있던 붉은 실을 나름대로 잘 끊어냈다 생각했는데, 바닥으로 흩날려 떨어진 붉은 실을 굳이 다시 주워다가 끊어진 부분을 곱게 엮어 예쁜 리본 모양으로 묶은 꼴이 되어버렸다.
정한이형 바보. 윤정한이 붙여준 수식어이자 내 어린 시절 내내 불리었던 별명이었다. 그만큼 윤정한이라면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우리의 공간이 아닌 곳에서 마주한 너는 조금 달랐다. 아니, 가감없이 말하자면 공간이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달라진 우리의 관계가 문제겠지. 내가 평소엔 알 수 없던 바깥의 윤정한은 공과 사가 꽤나 확실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상사 대 부하직원으로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걸어들어오는 나를 보고서도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커피를 권했을 정도로. ‘우리 사무실은 라떼가 맛있기로 유명한데, 내려드릴까요?’라며. 그리고 말했지. 오늘이 나랑 커피 마시는 처음이자 마지막 날일 지도 몰라요. 회사에서 나 만날 일 별로 없을 거니까.
그 순간부터 나는 너의 오래 된 연인도, 헤어진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전남친도 아니었다. 애초에 애틋한 재회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앞에서 그 여자 전화를 받으며 자리를 비우는 건 진짜 너답지 않았잖아.
“석민씨 애인 있을 걸?”
“네?”
“아니,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대리님 뭐 보셨는데요?”
“그.. 석민씨 전화오는데, 발신자가 하트 붙어있던데? 보통 그러면 애인 아니야?”
소용돌이♥. 물론 윤정한이었다. 아이씨, 바꾼다는 걸 정신없이 사느라 계속 잊어버렸더니. 사무적으로 연락할 일 있으면 사내 메신저 써달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윤정한은 의외로 급한 일이라면 무작정 전화부터 걸고 보는 아주 성격 급한 상사였다. 그걸 사무실 짝꿍 양 대리님이 어쩌다 본 상황 같은데 그래도 발신자가 윤정한이라는 건 모르시는 모양이었다. 여친 예쁘냐? 몇 살 차이? 어려? 얼마나 만났어? 결혼 할 거야?
“아, 그게, 여친이 아니고..”
지금 내가 하는 말에 네가 버릇처럼 눈썹을 치켜올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상관 없다. 우리는 이제 타인이 되기로 했으니까. ‘타인’이라는 관계가 얼마나 속 편한 관계인가. 서로에게 그 어떤 기대도, 실망도, 더 나아가 원망도 할 필요가 없는 심플한 관계라는 것이. 우리는 그동안 너무 복잡한 연애를 했다.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상처주고 싶지 않아 자의적으로 배려하고, 괜히 한번 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그게 안에서 썩고 곪아 나중에서야 터져버릴 줄도 모르고. 그래서 굳이 네 입장에서 생각하느라 나를 뒤로 미루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가장 편안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타인’. 결말은 좋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믿고 있다. 내 얼굴을 한번 봐. 네 앞에서 우리가 헤어진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도 얼마나 편해보여.
“남친이에요. 남자친구.”
시끌벅적하게 돌아가던 술자리를 멈춘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그렇다쳐도 나이를 좀 먹고 나니 만나는 사람마다 애인은 있냐, 몇 살이냐, 얼마나 만났냐 물어오는 질문들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입을 꾹 다물었으면 다물었지. 본인들이 먼저 물어봐놓고 필터링 없는 내 대답에 매번 당황해하는 모습들이 어이없어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했지만, 나는 이제 더이상 낙인이 두려운 어린 샌님이 아니었다. 어쩌면 가끔씩 이런 상황이 재밌게 느껴지기도 하고.
옆에서 내 빈 잔을 채워주던 부 대리님이 놀고 있는 왼손으로 내 어깨를 찰싹 쳤다. 어머 이 대리님 완전 힙하시다. 멋있어요. 하이톤의 목소리에 잠깐 사이 얼어붙은 분위기가 깨진 느낌이었다. 어떻게 만났어요? 어..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처음 만났었나. 헐,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사귄 거에요?! 아니 그건 아니구, 쭉 친하게 지내다가... 스무살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와 대박, 엄청 오래 사겼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현실판이네. 어떻게 사귀게 됐어요? 물어봐도 돼요? 죄송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죠. 근데 너무 궁금해서.
그냥.. 대책 없이.. 계기도 없구.. 뭔가 그냥.. 불시에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나도 모르게.. 뭐 그런 거죠. 연애가 원래 다 그런 거잖아요. 방금 그 말 되게 멋있다,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이 대리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히 감성적이시다. 혹시 인프피세요?
서른 즈음 넘어가게 되면 내 연애보다 -남녀 상관 없이-남의 연애 얘기를 제일 재밌어한다더니. 유독 안광을 반짝이며 주제가 끊기지 않게 계속 질문을 하는 부 대리님을 보고 있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근데 헤어졌어요.”
“...헐.”
“한, 한달 됐나.”
“아 그럼 진작 헤어졌다 하지, 왜 사람을 재활용도 안되는 쓰레기를 만들어요..”
“저 진짜 괜찮아요. 이제 정말 상관 없는 사람이라 말한 거에요.”
“..아무래도 이유는 진짜 물어보면 안되겠죠? 그럼 진짜 쓰레기겠지?”
“결혼한대요. 여자랑.”
세상에. 그 새끼 미친 놈이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환승을 해? 자고로 헤어지고 나서는 상대방에 대한 애도 기간이라는 게 있는 건데! 안그래요 다들? 상대방 여자는 알고 결혼하는 거야? 그래, 그거 사기결혼 아니야? 게이인 거 숨기고 여자 속여서 결혼하는 거잖아. 그, 그 뭐냐, 클로짓 게이! 아무리 얼마 안 본 사이라도 팔은 어떻게든 안으로 굽는다고,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솔직히 윤정한을 이렇게까지 욕 먹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감당 못할 리액션에 시선을 둘 곳을 딱히 찾지 못해서 눈알을 굴려대다가 어느 한 곳에 멈췄다. 윤정한은 내내 시선을 내리깔고서 손가락으로 소주가 반쯤 담긴 잔을 빙빙 돌리고만 있었다. 그치만, 이제 네 기분이 어떻든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아. 굳은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해도 나는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렇게 마음을 먹었지만, 단 한번도 나와 눈을 맞추지 않는 윤정한을 보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결혼 상대가 속은 게 아니라 제가 속은 거죠.”
*
“다들 까먹지마요. 내일 목요일인 거.”
“출근해야 되니까 적당히 마십시다, 다들.”
‘새로 온 이석민 대리 환영 축하 파티’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잔을 비우는 순간 바로바로 술잔이 영롱한 색깔의 액체로 다시 채워졌다. 아, 이게 오래 함께 일한 사람들의 팀워크라는 건가. 정신을 쏙 빼놓네. 내가 그렇게 지체 없이 잔을 비워낼 동안 내 옆자리는 수많은 동료들이 엉덩이를 붙였다가 떠나가곤 했다. 하도 받아마신 술이 많아서 이제는 정말 정신이 몽롱했다. 열 세명의 사람들에게 한 잔씩만 받아도 열 세잔인데 족히 스무잔은 더 마신 것 같았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양 대리님이 내 술잔 위로 술병 입구를 갖다댔다. 이거까진 넘길 수 있으려나 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술잔을 기울였는데 내 손가락 위로 뼈 마디가 굵은 손가락 다섯개가 겹쳐 올라왔다. 따르지 말라는 듯 술잔 위를 감싸고 있는 손가락을 보니 굳이 고개를 올려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아, 실장님이 한 잔 주시게요?”
“이제 그만하죠. 이 대리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저 이거까진 마실 수 있어요..”
“그래 이 대리. 이거까지만 딱! 마시고!”
“따르지 마요.”
“어차피 이게 마지막 잔이에요..”
그만 마시라고. 술잔을 채우기 전까진 물러날 기미가 없어보이는 술병을 손으로 살짝 쳐낸 윤정한이 분위기가 심각해질 때만 나오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솔직히 윤정한이 아직까지도 나를 생각해주고 있다니 감동이다,라는 생각보다 네가 뭔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게 사실이다. 진짜, 이제 와서 네가 뭔데 나를 챙겨.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때의 그 윤정한을 두려워했다. 평소엔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본인이 정해놓은 기준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차분한 말투와 변함 없는 높낮이의 목소리로 나를 결국엔 제 말에 굴복시키고 마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래서 네가 그 개같은 선 자리들에 불려 나가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될 때에도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기다려야만 했지. 그땐 진짜 눈이 돌았었는지 너 말고는 아무 것도 안 보여서, 도대체 선 자리에서 뭘 하다 왔는지 한밤 중에 잔뜩 취해 돌아온 네가 뭐가 예쁘다고 비 맞은 새끼 강아지처럼 깨갱 하며 안겼었는지.
“그럼 실장님이 한 잔 따라주세요.”
“오 맞네, 실장님 아직 이 대리한테 안 따라주셨죠?”
“실장님이 따라주신 거 마지막으로 마시고 끝낼게요.”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윤정한이 결국 양 대리님 손에 들려있던 맥주병을 받아들었다. 술잔과 술병 입구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윤정한은 나와의 시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술병을 기울었다. 애걔.. 육성으로 짧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마셔요, 마지막 잔. 이걸로 끝. 테이블 위로 소리나게 술병을 내려놓은 윤정한은 다시 원래 제가 있던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맥주잔 아래 밑동을 겨우 채운 맥주를 찰랑 흔들어보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못 간다고. 나 회식 중이라니까?”
무슨 회식을 수요일에 한다고 난리들이야, 내일 출근 시간 한시간씩 늦춰주는 것도 아니면서. 금요일에 회식 또 하자고 그러면 그냥 그만 둔다 해. 미친놈아 뭘 그만 둬. 뭐하러 맨날 윤 그새끼 얼굴 봐가면서 거기서 버티고 있냐? 그만 두고 나랑 같이 일하자니까? 우리 아빠가 너 엄청 기다려. 그리고 내가 너 초고속으로 승진 시켜줌. 웃으라고 하는 소리라는 걸 알지만 김민규라면 진짜로 나를 거의 임원직에 앉혀놓을 애라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지도 아빠 회사에 낙하산으로 내려온 주제에 사람 좋아하는 대형견 같은 성격은 아직도 여전해서. 하나 밖에 없는 오래된 친구가 김민규라는 건 그나마 내 인생에서 조금은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알겠어, 끊어.”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는 시간에 이대로 한명 쯤은 빠진다고 해서 티도 안 날 것 같은 느낌에 서둘러 가방까지 챙겨 몰래 나왔는데, 벗어두었던 겉옷을 챙기지 않아 잠깐 비상구 계단에 앉아있던 참이었다. 김민규는 예전부터 ‘넌 네가 철두철미 한 줄 아는데 항상 한 두개씩 빼먹는 어리버리한 놈’이라며 나를 놀려댔었다. 뭐 그야.. 항상 그 한 두개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다 닫는 건 또 무서워서 살짝만 닫아놓았던 비상구 문이 ‘끼익’하고 활짝 열렸다. 윤정한이었다. 입술에 살짝 물려있는 장초 한 개피에 담배를 피러 나왔나 했는데, 한 손에 들려있는 내 겉옷을 발견했다. 윤정한에게 내가 있는 위치를 감지하는 센서라도 달려있는지, 아니면 내가 아직까지도 윤정한의 예상 답안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건지. 답이 뭐든 간에 둘 다 참 별로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무려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다. 윤정한이랑 나는.
어깨 위로 내 겉옷이 덮어졌고, 비상구 특유의 찬 기운에 조금은 서늘했던 몸이 따뜻해져 긴장이 풀렸다.
“가려면 먼저 가.”
“네?”
“가려고 몰래 나온 거잖아. 너.”
“술 깨려고 잠깐.. 실장님도 아직 안 가셨는데 어떻게 제가,”
“언제부터 그렇게 존칭 썼다고.”
지금은 윤 실장이 아니라 확실히 윤정한이네. 헤어져 있던 사이 어느새 어깨에 닿을랑 말랑하게 자란 탈색 머리를 손으로 헤집은 윤정한이 굳이 좁아터진 내 옆자리에 납작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 뒤 담뱃불을 막 붙이려다가 멈칫하는 게 눈에 보였다. 갑자기 내 눈치를 보는 것 같길래 왜, 라고 물었더니 언제부터 다시 폈냐고 왜 안 물어봐. 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상관 없어.”
“...”
“생판 남이 꼴초든 뭐든.”
나는 그냥 내 순수한 생각을 말한 것 뿐이었는데, 윤정한은 적잖이 기분이 나빴는지 픽 웃으며 담배를 담배갑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피워, 내가 나갈게. 그냥 앉아 있어. 진작 이렇게 말하지. 그 어떤 금연 광고보다 효과가 좋네, 방금 그 말. 내 워딩 중에 윤정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만한 포인트가 있었나 내 말을 곱씹었다. 네가 꼴초든 뭐든 상관 없다는 게, 아니면 우리가 생판 남이라는 게?
담배 좀 끊으라고, 근데 또 내 연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니까 최대한 회유하는 말투로 금연을 권했던 적이 많았다. 나랑 만나던 최근까지도 잘 참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뭐 다시 필 수도 있지. 이제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까. 새삼스럽게 윤정한의 흡연 횟수를 매일 체크하기도 했던 그 때가 옛날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방금 통화한 거 김민규야?”
“응.”
“지금 와서 말하는데,”
“...”
“그 새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들었어.”
“걔는 뭐 형 맘에 들어했어?”
김민규는 우리의 시작과 끝을 가장 먼저 보고,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끔씩 김민규가 진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어보긴 했다. 도대체 저 형이랑 너는 무슨 사이냐고. 글쎄. 처음 시작은 그냥 옆 집 사는 아들래미였다가 이름과 나이를 튼 후에는 자주 붙어다니는 형이었다가, 같은 교복을 입게 된 후부터는. 몰라. 나도 모르겠다. 쟤랑 내가 대체 무슨 사이인지. 답해줄 말이 없어 나는 항상 김민규에게 되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떤 사이 같은데. 너네 둘이 친한 사이인 건 알겠는데, 보고 있으면 신기해. 뭐가 신기한데. 그냥 뭐, 단순히 옆 집 사는 형, 동생으로는 안 보이는다는 거지. 붙어있지 못해 안달이 나보인다고 해야 하나?
김민규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김민규는 눈치가 아주 빠른 애였으니까. 우리가 가끔씩 입을 맞추는 사이라는 것까지는 모를 수 있어도 윤정한과 함께 있으면 항상 생성되는 묘한 기류를 고등학교 내내 거의 나와 붙어다녔던 별책부록 김민규가 모를 리가 없었다. 너 그 형 좋아하지? 어떻게 알았어? 티가 존나 나니까. 그 형도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알까? 음.. 개좆밥 병신이 아닌 이상?
“데리러 온대?”
“걔가 무슨 남친이야? 데리러 오게.”
“그럼 일어나. 데려다줄게.”
“뭔 소리야. 형도 술 마셨잖아.”
“안 마셨는데?”
“소주 마셨잖아. 아까 다 봤어.”
“그거 사이다였어.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는 윤정한 옆에서 나는 차마 무릎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윤정한이 왜 그러고 있냐는 듯 눈으로만 묻다가 결국에는 구두 앞코를 들어 내가 신은 스니커즈를 툭툭 쳐댔다. 오늘은 왜 안 마셨는데? 맨날 꽐라되서 대리 타고 와놓고. 평소에 사이다 같은 거 입에 대지도 않잖아. 듣고 싶은 대답이 있어? 답을 정해놓고 묻는 거야, 지금? 윤정한은 여전히 앉아있는 나를 한껏 내려다보며 물었다. 침대 위에서 난 항상 말했었지. 나를 팔 안에 가둔 채 내려다보는 윤정한은 이렇다 할 섹슈얼 행위 없이도 나를 흥분하게 하는 그 자체라고.
나 데려다주려고 안 마셨어? 어. 왜 데려다주는데. 상사가 술 취한 팀원 데려다주는 게 그렇게 못 할 짓은 아니잖아. 나 지금 이 대리 아니고 이석민인데? 왜 나 꼬셔?
“우리 헤어졌어.”
“...”
“형이 끝냈잖아.”
“알고 있어.”
“...”
“허튼 짓 안해.”
“내가 허튼 짓 할까봐 그래.”
꽤 오랜 정적이 흘렀고 더 이상 그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이 굳어버린 듯 서있는 윤정한을 지나쳐나왔다. 내 말은 진짜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우리는 이미 끝난 사이라고 자꾸만 스스로 상기시키지 않으면 내가 먼저 윤정한에게 달려들어 안길 것만 같았다.
먼저 가버리려는 건 아니었다. 데려다주겠다고 그 좋아하는 음주까지 고사했는데. 비상구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서있는데 뒤에 따라온 윤정한이 옆에 나란히 섰다. 곧바로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우리는 그 좁디 좁은 공간 안으로 함께 올라탔다. 이대로 나가서 당장 호텔 방을 잡는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지만 여기서 스스로 초라해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더 원하고 안달나있는 쪽은 누가 봐도 내 쪽이잖아.
“좀 떨어져서 있어.”
“왜.”
“어지러워, 형 옆에 있으면.”
“막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들어간 것처럼?”
“..뭐래.”
“하여튼 말은 잘 하지, 이석민.”
“칭찬으로 한 말 아니었거든?”
“칭찬이 아닌데, 뒤에 하트는 왜 붙였어.”
저 너스레는 내 휴대폰에 제 번호가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다 아니까 할 수 있는 거였다. 빌어먹을 윤 실장으로 바꿀거야. 윤정한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화 할 자신이 없어 1충까지 내려가느라 계속 바뀌는 엘리베이터 숫자 계기판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짧았다면 짧고, 길었다면 길었을 그 시간 동안 다짐했다.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리라. 쓸 데 없는 감정 노동을 하는 기분이라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다. 고작 하나 있는 목숨이 아프게 조금씩 깎여나가는 느낌.
여기 서있어. 차 빼서 올게. 아직 계절이 완벽한 겨울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늦은 밤이라 그런지 꽤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와서 자꾸만 코를 훌쩍였다. 얼른 집에 들어가서 보일러로 뜨근해진 바닥에 냅다 누워버리고 싶었다. 아, 나 설마 보일러 안 켜고 나왔었나.
양손을 동그랗게 말고서 입김을 호호 불어대고 있는데 아주 익숙한 차 한대가 내 앞으로 멈춰섰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고 차보다 더 익숙한 차 주인이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문을 열고 몸을 구겨넣으려는데 그 짧은 순간에 조수석 바닥에 떨어져있는 무언가가 눈에 거슬렸다.
차가 도로 위를 달리는 와중에도 그게 뭐였을까, 예상가는 게 있긴 한데 정말 그게 맞을까, 정말 그거면 어떡하지, 서로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은 정적 속에서 별 생각을 다 하다가 결국에는 몸을 살짝 숙여 손을 뻗었다.
“이거, 뭐야?”
검지와 중지 사이에 걸려서 딸려나온 것은 여성용 반스타킹 한 짝이었다. 윤정한이랑 한창 뜨거웠을 시절에도, 단순 재미로라도 신어본 적이 없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저 스타킹이 내 것일 확률은 제로라는 거였다. 한손으로 핸들을 잡고서 조용히 운전만 하던 윤정한이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봤다. 운전 중이라 금방 고개를 다시 돌리기는 했지만 아주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별다른 감정 동요 없는 윤정한이 그런 표정이라니.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뭐, 뭘. 너 지금 얼굴에 표정이 한 다섯가지는 스쳐 지나갔거든.’ 예전부터 윤정한이 내게 하던 말이 있었다. ‘석민아, 너는 얼굴에서 다 티가 나.’ 윤정한이 이럴 때마다 나는 내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것이 조금 억울했다. 내 표정이 어땠는데, 대체. 나는 알 수가 없잖아. 근데 이제서야 윤정한이 그렇게 말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정말 모를 수가 없구나.
“벌써 텄어? 그것도 차에서?”
“그런 거 아니야.”
“아닌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아니라고.”
“여자가 남의 차 조수석에서 스타킹 벗을 일이 그거 말고 어딨어.”
“그게 아니라,”
오해, 하아, 아니 지금 내가 너한테 왜 일일이 변명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나 만났을 때 한번 무릎 다친 적 있어서 그때 약 바르려고 벗은 거야. 그게 다야.
“..지랄하네.”
이제는 변명에 성의조차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에 슬쩍 눈물이 나올 뻔 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이석민 적당히 해. 너 취했어. 안 취했어. 술주정도 정도껏 해, 받아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향수 냄새나. 뭐? 여자 향수 냄새. 방향제 냄새야. 야 너는 내가 무슨 병신인 줄 알아!? 방향제야? 그래? 나 한달 전까지만 해도 이 차 탔는데? 이런 냄새 아니었어. 형이 쓰던 방향제 이렇게 역겨운 냄새 아니었다고. 이렇게 소름 끼치는 냄새 아니었다고! 나는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윤정한에게 쌓여있던 불만과 혼자 끙끙 숨겨왔던 속마음이 넘쳐흘러 터져버린 그 날, 그 날 이후로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이 두려웠다. 하루 24시간을 꼬박 윤정한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내가 ‘나’일 수가 없게 만들었다. 우리가 헤어질 수도 있는 관계였다는 걸 인정하는 데에만 꽤 오랜 시간을 허비하고야 말았다.
김민규는 감정의 골을 바닥까지 파내서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나를 보고서 자주 한숨을 쉬었고, 어느 날은 윤정한과 나의 관계를 ‘물고기가 살지 않는 어항’이라고 정의했다. 물만 계속 채워넣으면 뭐해. 안에 물고기가 안 살면 아무 의미 없지. 윤정한이 물고기야? 내가 어항이고? 아니, 둘 다 물고기야. 내가 봤을 때 지금 너네 둘 다 어항 안에 없어. 끊임 없이 채워지는 물처럼 세월은 계속 차는데, 막상 너네는 거기서 떠나고 없다고. 김민규의 말에 나도 어느 정도 동조했기에 결국엔 윤정한과 마침표를 찍어냈다. 어차피 우리 모두 지쳐있었고, 헤어질 타이밍을 재고 있는 거라면 지금이 딱이었으니까.
그런데 매번 맞는 말만 하던 김민규가 이번엔 틀렸다. 나는 윤정한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누가 그러더라. 애정 없는 애증은 없다고. 죽을 만큼 사랑해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할 수도 있는 거라고. 윤정한 너는 나에게 애증이다. 나는 너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너무 사랑해. 내가 그날 너를 괜히 이겨보려 하지 않았다면 얼굴도 본 적 없는,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너를 뺏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뒤 좀 박아보니까 이제 재미없니?”
“뭐?”
“...”
“너 뭐라고 했어, 지금?”
“아니면 이제 슬슬 앞날이 걱정 돼? 그래서 갑자기 정상인 척 구는 거야?”
“야. 이석민.”
“아아. 맞다. 형 효도는 해야 되니까.”
뒤에선 10년이 넘게 남자랑 몸 맞춰놓고, 앞에선 그런 불순한 건 전혀 모르는 척 멀쩡한 가정 꾸리는 거. 그게 불효자식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어하는 네가 별다른 노력 없이 할 수 있는 효도니까. 그치 윤정한.
나를 마주한 까만 눈동자 속에 증오가 담겨있다. 어떻게 겁도 없이 그딴 개소리를 하냐는 듯이. 계속 해봐. 윤정한은 제법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한손으로는 잡은 핸들을 놓지 않았다. 윤정한이 두려웠던 적은 있어도 이렇게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던 적은 없었는데. 시선은 계속해서 달리고 있는 도로에만 두며 내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그동안 곪을 대로 곪아버린 속이 이제야 펑 터져서 폭주해버린 내 속 사정을 들어주려 한다기보단 그래, 어디까지 가자 한번 보기나 하자, 들어는 볼게 같은 차가운 느낌이라 나는 입술을 굳게 닫아버렸다.
“계속 나불거려 보라니까.”
“...”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지.”
“...”
“내가 효도 하겠다는데 왜 네가 난리야.”
그나마 있는 사회적 지위, 있지도 않은 명예, 언제가는 써먹겠지 인맥용으로 억지로 내 옆에 남아있는 주변 사람들 다 버리면서까지 남자 좋아하는 거 오픈했다 쳐.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뭔데. 너? 그래. 이석민 너는 얻을 수 있겠지. 근데 그게 다가 아니야. 석민아.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어. 너도 잘 알잖아. 얼굴에 가면 하나쯤 쓰고 사는 게 그렇게 어려워? 네가 여태껏 맨 얼굴로 거짓 없이 살아오면서 얻은 게 나 말고 있기는 해?
윤정한의 말에는 틀린 문장이 단 한가지도 없었다. 근데 딱 한가지가 틀렸어. 지금 나한텐 너도 남아있지 않잖아. 내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 순간 우려해왔던 우리의 마지막 결말이 오고야 말았다. 이 개같은 일대기의 끝. 나랑은 영원을 약속 할 수 없어서, 그게 서운해서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가며 이 지랄을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마지막 엔딩이 새드일 수 밖에 없다면, 주인공이 서로 사랑하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헤어짐을 선택하는 걸로 끝냈어야지. 그냥 그걸로 끝내는 게 맞잖아.
꽤 오랜 시간동안 우리가 살을 부대끼고 몸을 맞춰오면서 나는 윤정한의 성향이 완전히 바뀐 거라고 믿었다. 윤정한의 성향 변화에 내가 조금이라도 일조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어느정도 버틸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나를 좋아하니까 나랑 입 맞추는 거겠지, 나랑 하는 게 좋으니까 가끔씩 집이 비게 되는 날이면 매번 나를 불러다 끌어안았던 거겠지. 나를 좋아하니까. 그래, 그렇게 조마조마 마음 고생해가며 10년을 넘게 버텼다. 그런데, 그랬던 윤정한이 원래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그 멀쩡한 세상으로.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네가 그 여자랑 ‘결혼’이란 걸 한다는 게 나에게는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나는 너랑 헤어진 게 아니라 윤정한 너한테 버림받은 거야. 그냥 존나 불쌍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나만 덩그러니 남은 거라고.
“효도,”
“...”
“효도 해야지.”
네 말처럼 결혼해서 멀쩡한 가정 꾸리고, 애도 낳을 거야. 아무래도 하나보단 둘이 낫겠지. 아들, 딸로. 외동으로 살아보니까 혼자는 쫌 외로운 거 같아서.
나도 너처럼 전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지 않은 그런 말들을 할 수 있는 잔인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절대 장난으로라도 너한테 그런 말을 못하는 사람이란 걸 알고서 하는 소리겠지. 윤정한 너는 이 순간에도 나를 다루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쪽팔리니까,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을 참아내다가도 갑자기 너무 억울해졌다. 애초에 누가 시작했는데. 좋아한 건 내가 먼저일 지 몰라도 그런 나를 건드린 건 너였잖아.
“..그때 형 받아주지 말 걸.”
“...”
“뺨이라도 후려쳤어야 됐는데.”
“...”
“키스는 씨발 왜 해가지구..”
내가 형의 손을 타기 시작했던 때는 아마도 내가 열일곱이 되던 해의 겨울 즈음이었다. 그 나이 또래들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혈기왕성한 몸뚱이로 식지 않는 뜨거운 밤의 나날들을 보냈겠지만, 나에게는 거의 열병을 앓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얄밉게 내 두 볼을 쥐어잡아 늘릴 줄만 알던 그 손가락이 처음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한참동안 내 볼을 쓰다듬던 엄지손가락이 점점 아래로 타고 내려와 내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살짝 눌렀다. 굳게 닫혀있던 입술은 당연히 틈이 생겼고, 수백번도 넘게 부딪혀 이제는 익숙해진 손등의 촉감이 아닌 다른 사람의 무언가가 입술 끝에 닿았다. 순식간에 뜨거운 숨이 안으로 들어왔고, 삼켰다.
그게 아마 돌이킬 수 없는 소용돌이의 첫 시작이었다. 스스로도 이런 짓을 하면 형과 원래의 관계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귓볼이 만져지는 그 손길에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았었다. 그때의 윤정한이 나에게 얼마나 크고 대단한 사람이었냐면, 그 입맞춤 하나가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내릴 수 있게 만들었다.
“형 만난 걸 평생 후회하면서 살 거야.”
“...”
“형은 내 인생에서 만났으면 안되는 최악의 사람이었고,”
“...”
“그런 형을 사랑한 게 내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
“형 볼 때마다 곱씹을 거야.”
억울하면 그 여자랑 꼭 결혼까지 해. 그럼 내가 아아, 그때 헤어지길 잘했다, 그것만큼은 내 최고의 선택이었어, 형 보면서 말해줄게.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던 윤정한이 갑자기 멀쩡히 달리던 차선을 돌려 낯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차갑게 식은 윤정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속 뒤집어 놓으려고 한 말이라 일부러 더 모진 말만 골라서 하긴 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을 읽어낼 수가 없고, 뒤에 벌어질 일을 전혀 예상할 수가 없어서 두렵기도 했다.
아아 윤정한 설마.. 윤정한의 차가 유난히 어두운 조명을 달고 있는 어느 입구로 향하더니 지하 주차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아, 너 지금 진짜 빡쳤구나.
“뭐해.”
“...”
“내려.”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려 모텔이었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처음 잠자리를 가졌을 때에도, 길거리에서 갑자기 눈이 맞아 급하게 방을 잡아야 했을 때도, 술에 만취한 나를 들쳐메고 아무 방에나 눕혀 재워야 했을 때도, 그러니까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의로나 타의로나 발끝 한번 들여본 적 없는 그 모텔에 내가 와있다. 그것도 헤어지고 나서야.
나는 윤정한 네가, 잠자리에 관해서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싸구려 모텔에서 재우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스위트 룸만 고집하며 나를 배려하고, 그런 방식으로 나를 대접해줬다는 것을. 그런 네가 나를 모텔로 데려왔다는 건 나는 이제 정말 너에게 그저 해소제에 불과하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거부 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고, 도망칠 힘도 없다. 그냥, 그냥 눈 감았다 뜨면 내일 아침이었으면 좋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
묻고 싶다. 이석민 너는 대체 나의 어떤 점이 그렇게도 못미더웠던 건지. 오히려 살짝 불편한 티만 내도 ‘너 왜 나 싫어?’ 라며 습관적으로 묻던 사람은 나였잖아. 혹여나 마음이 상했을까 전전긍긍하며 묻는 나에게 너는 매번 ‘나 형 안 싫어, 좋아해.’라며 절대 무너질 리 없는 단단한 장벽처럼 굴었고, 나를 안심하게 만들었지. 그랬던 사람이 왜 그렇게 약해졌는지, 왜 혼자 만들어낸 망상 속에 스스로 몸을 던졌는지 그 이유를 굳이 찾아내보자면 나는 고민도 없이 김민규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새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들었다고 말한 건 진심이었어. 물론 김민규가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은 것이 먼저였고.
내 기준으로 생각해보자면, 우리 둘 사이에 김민규가 껴도 용서되는 상황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이석민과 내가 어쩌다 다퉜을 때 그 어디에도 풀 수 없는 푸념을 들어주고 -나에 대한-욕 한바가지를 함께 해주는 친구 역할. 아니면 가끔가다 나 대신 술 취한 이석민을 집에 데려다주는 역할 정도. 그 이상은 ‘제 3자’로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에게, 그것도 한 ‘남자’에게 거진 살아온 인생의 반을 꼴아박고 있는 지 친구가 안타까울 만도 했겠지. 그 점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제 3자’인 주제에 이미 마른 장작처럼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이석민에게 불씨를 던져준 건 솔직히 선을 제대로 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석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김민규가 대신 받은 적이 있다. 왜 네가 받냐고 물으니 이석민은 이미 술에 꼴아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죽어있다고 했다. 데리러 가겠다고, 위치 좀 알려달라고 했더니 싸가지 없게 알아서 찾아오랜다. 아 진짜 이 새끼를 죽일까 말까. 김민규는 본인조차 잔뜩 취해있는 말투로 내게 왜 석민이에게 확신을 주지 않았냐고 물었다. 내가 확신을 주지 않았다고?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이석민과 만나는 세월 동안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이석민이면 이석민이고, 아니면 아닌거지. 언제까지 석민이가 형 옆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어야 되는데요.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말 함부로 하지마. 말 함부로 한 김에 쫌만 더 해볼게요. 멀쩡히 여자랑 가정 꾸릴 생각이면 석민이 이제 좀 놔줘요 그냥. 진짜 얘 아끼는 친구로서 말하는 건데요. 이석민 옆에서 보면 너무 불쌍해요, 솔직히.
“대실이세요, 자고 가세요?”
“자고 갈게요.”
이석민은 본인의 감정을 대부분 얼굴 표정으로 드러낸다. 솔직하다고 해야할 지, 영리하지 못하다고 해야할 지. 얼굴에 싫어, 무서워, 다정하게 대해줘 라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싫다는 말도 없이 엉거주춤 차에서 내렸다. 이석민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러브 모텔’. 촌스러운 굴림체 간판에 고칠 생각이 없는 건지 네온 사인이 엇박자로 반짝이고 있었다. 카운터에 방을 달라고 하니 가림막 사이로 카드를 쥔 손이 튀어나왔다. 삐뚤어진 손 글씨로 호수가 적혀있는 싸구려 카드 키를 받아들고 먼저 걷다가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이석민을 불렀다.
“옆에 와서 걸어. 꼭 내가 강제로 하는 거 같잖아.”
“반은 맞잖아.”
“그래서, 안 할거야?”
“...”
“허튼 짓 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
“허튼 짓 하라고 판 깔아주는 건데 왜 이제 와서 선을 그어. 재미 없게.”
여기서 자면, 내일 출근은 어쩌려고. 따로 들어가면 돼. 둘 다 옷이 오늘이랑 똑같잖아. 그게 걱정이야? 그런 게 걱정이면 겁도 없이 커밍아웃은 어떻게 했대. 비꼬지마. 그냥 둘이 같이 잤구나 뒷말이나 나오겠지. 내 말에 이석민은 질렸다는 듯 나를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내 손에 쥐어져있던 카드 키를 조금은 아픈 손길로 낚아채갔다.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코 끝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다가온 이석민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윤 실장님, 저 다시는 실장님이랑 이런 식으로 더럽게 엮이고 싶지 않아요.
“실장님?”
“오늘 하루 실수했다 치고,”
“했다 치고.”
“내일 일어나면 그냥 없던 일로 해요.”
“...”
“우리 둘이 떡쳤다고 회사에 소문 나면,”
“...”
“겁도 없이 커밍아웃 한 제가 실장님 후린 걸로 해드릴게요.”
“...”
“그게 낫겠죠? 아무래도?”
화가 난 듯 자기 할 말만 하고서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는 이석민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화가 나면 마치 뇌가 언어의 필터링 기능을 잃어버린 듯 와다다다 쏘아붙이는 이석민은 언제나 나를 멈칫하게 만드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석민은 그 누구보다 온화하고, 다정했지만 그렇다고 절대 물러터진 사람은 아니었다. 좋은 게 좋은거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게 아니라 아닌 건 아니라고 화도 곧잘 내고는 했다.
그런데 대체 왜, 왜 그땐 나에게 진작 노선을 똑바로 정하라며 화를 내지 못했어. 왜 김민규한테 하듯 네 맘대로 굴지 않았어. 속은 썪어 곪아가면서 왜 나한테 진작에 다 토해내지 않았어. 뭐가 무서워서.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윽박지르면 내가 진짜 너를 버리기라도 했을까봐?
“안 들어오세요?”
“...”
“할 거에요, 말 거에요.”
하는 말은 꼭 나한테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들려도, 사실은 이석민 너의 손에 달려있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오히려 내가 여기서 ‘안 해’라는 머저리 같은 대답으로 혼자 발을 빼지는 않을테니. 거의 99 퍼센트의 확률로 나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이석민은 열려있는 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는 내 손목을 잡고서 모텔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마지못해 끌려온 척 얌전히 안으로 따라들어온 나는 이석민이 문을 잠긴 것을 확인하고 돌아서자마자 사슴 같이 긴 목덜미를 꽉 쥐었다. 그 다음은 너무나 당연하고, 뻔했다.
다짜고짜 입술을 맞대었다. 혀를 섞는다던지, 서로의 숨을 갈구한다던지 하는 끈적한 행위 없이 그렇게 입술만 맞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수십가지 고민을 했다. 이걸 계속 이어가도 될 것인가, 덮어놓고 저지르고 난 뒤에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그러다가 그냥 아무 감정 없이 일만 치르면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까지 도달했다. 헤어진 연인끼리 되도 않는 마지막 이별 여행을 하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몸을 섞고 훌훌 털어내는 것도 나쁜 건 아니라고.
입술에만 머물러있을 것처럼 굴다가 턱부터 점점 얼굴 선을 타고 내려와 목젖에 닿았다. 뒤로 한껏 꺾여진 뒷목을 잡고 목젖에 이어 쇄골까지 잘근 씹어가며 작게 흔적을 남기다가 손을 풀어 가슴팍에 갖다댔다.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려 하는데 이석민이 급하게 내 손을 제지했다. 잠깐만, 실장님, 잠깐만요. 우리 신발.. 생각해보니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문 센서등 하나에 의지해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겠으니까 그 좆같은 실장님 소리 좀 그만해. 마음 같아선 신발 좀 신고 하는 게 뭐 어떠냐 싶었지만, 본능에 잠식되어 앞뒤 분간도 못하는 사람이 되기는 싫어서 신발을 벗어냈다. 숙인 몸을 다시 일으키는데 갑자기 내 어깨 위로 가벼운 무게가 느껴졌다. 내 어깨에 머리통을 기대고 선 이석민 덕분에 퐁실하게 엉킨 까만 초콜릿 색 머리카락이 내 목덜미 부근에 닿아서 자꾸만 간지럽혔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나 마냥 기다려봤더니 귓가에서 작은 한숨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너 하기 싫지.”
“...”
“하기 싫음 말해도 돼. 그냥 나가면 되니까.”
“...”
“강제로 할 생각 없어, 석민아.”
“...”
“나 신발 다시 신어?”
“..하기 싫은데.. 하고 싶어.”
“그럼 하면 되잖아.”
“마음이 불편해.”
왜. 바람 피우는 사람 된 거 같아서 기분 더러워. 그럼 그냥 마음 편하게 네가 나 먹버한다고 생각해. 뭐? 오늘만 먹고 버린다고 생각하라고. 기꺼이 버림 당해줄테니까. 그 말에 이석민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진짜 먹히고 버려지는 사람이 형일까. 내가 아니고?
자조 섞인 말과 함께 내게 기댄 이석민의 몸이 더 축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무작정 눈 앞에 보이는 이석민의 목에다 냅다 바람을 불었다. 흐읍..! 유독 예민한 곳 중에 하나이기도 해서 이석민은 아주 빠르게 반응했다. 하지마아.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리는데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계속해서 숨을 불어댔다. 그만해애. 너 바람부는 거 꼴려하잖아.
“성감대가 눈에 보이는 데에 있는 걸 어떡해.”
“...나 그냥 할래.”
“마음 정했어?”
“하고 싶어졌어.”
그 말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석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그나마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내 스스로 끊어냈다.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기대고 있던 이석민의 얼굴을 잡아 급하게 입술을 부딪혔다. 갑작스럽게 닿아온 내 입술에 본능적으로 입을 꾹 닫아버린 너의 입술을 혀 끝으로 살살 쓸어냈다. 갈라진 입술 틈 사이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딱딱 들어맞아 잘 굴러가는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빈틈 없이 입술을 맞췄다.
어쩌다 한번씩 입술 사이로 숨을 내뱉을 때마다 얇은 실타래 같은 것이 주욱 늘어나기도 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타액을 주고 받으며 그 젤리 같은 입술을 조금 더 물고 빨기 위해 안달이 나있었다. 진작에 내 손에 뒷목이 잡힌 이석민은 점점 숨 쉬기가 버거워지는지 손으로 내 가슴팍을 작게 두드렸다. 입술을 잠깐 떼어내자 왠지 모르게 울 것만 같은 눈망울을 두 눈으로 마주했다.
“...진짜 안 잤어? 그 여자랑?”
“그걸 지금 왜 물어.”
“신경쓰여. 그게 계속 걸려.”
“안 잤어. 거짓말 아니야.”
“...”
“생각해봐.”
“...”
“네가 아는 윤정한이 정말 그럴 사람인지.”
내 대답을 끝으로 이석민은 가슴 쪽에 고이 올려놓았던 두 팔을 올려 내 목을 감싸고 폭 안겨들었다. 다시 시작된 입맞춤에 나는 뒤로 살짝 밀려났지만 곧바로 자세를 고쳐잡고 이석민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교차된 손을 들어 내 뒷머리를 쓰다듬다가도, 점점 거칠어지는 행위에 자꾸 내려와 눈가를 찌르는 내 옆머리를 세심하게 손가락으로 내 귓등에 걸어주기도 했다. 내가 안겨있는 이석민의 셔츠를 바지춤에서 꺼내며 침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갈 동안, 우리는 입술을 부딪히고 떼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내가 아는 이석민은 전희 과정 중에 키스를 가장 좋아했으며, 그만큼 가장 공을 들였다. 숨이 너무 차서 살기 위해 필히 공기를 들이마셔야 하는 순간에도 아랫 입술을 차마 떨어뜨리지 않았다. 우리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이석민은 내 눈이며 코 끝, 광대, 볼에 난 점까지 그 어느 곳 하나 빼놓지 않고 쪽쪽거리며 입술을 부벼댔다. 내 정강이 쯤에 침대 매트리스 끝 부분이 닿았고, 나는 스스륵 침대 위로 앉았다. 덕분에 어정쩡한 자세를 하고 있는 이석민을 안고서 그대로 몸을 돌려 침대에 살며시 눕혔다. 타의적으로 눕혀진 이석민은 팔꿈치로 침대 헤드가 있는 곳까지 천천히 움직였고, 나 역시 무릎을 굽혀 그런 이석민을 따라갔다. 베개를 베고 편하게 자리를 잡은 이석민의 골반 쯤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스탠드 조명을 켜니 촌스러운 주황색 빛이 침대 주변을 밝혔다. 하아.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석민의 얼굴은 꽤 오랜만이어서, 이게 이렇게나 자극적인 그림이었나 싶어 누워있는 이석민의 머리카락을 괜히 살살 쓰다듬었다.
“네가 혹시나 아직도 마음이 불편하면,”
“...”
“두가지 선택지를 줄게. 골라봐.”
“..뭔데.”
“첫번째, 그냥 넣고 빼기만 한다.”
“...”
“두번째, 원래 하던대로 한다.”
내 딴에는 이석민이 너무 굳어있길래 긴장이라도 풀라고 건낸 농담 같은 거였는데, 어째 원래부터 쳐져있는 눈꼬리가 한없이 더 내려가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한동안 대답이 없길래 나는 시선을 이석민에게서 거두고서 아까 풀다 만 셔츠 단추를 지나쳐 바로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 톡톡. 정적 속에서 오로지 버클 푸는 소리만 들려오는데 갑자기 이미 배꼽 아래까지 내려간 내 손가락을 잡아 위로 끌어올려 손깍지를 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교차되는 느낌이 꼭 몸을 끼워맞춘 느낌과 비슷해서 벌써 기분이 야릇해졌다.
원래 하던대로 해줘, 나 사랑했을 때랑 똑같이, 윤정한 답게, 다정하게, 이 세상에 우리 둘 밖에 안 남은 것처럼,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들어온 것처럼 정신 못차리게. 원하는 게 많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못할 게 뭐 있어, 못하겠으면 그만 두고.
몸을 일으키려는 이석민의 어깨를 잡아눌렀다. 나는 자신 있었거든. 조잘대느라 바빴던 입술을 물어 우리 둘 사이에 정적을 만들어냈다. 찹- 하고 야릇한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고, 그 사이 이석민은 제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냈다. 나는 여전히 이석민 위에 걸터앉아 스스로 옷을 벗어내는 꼴을 도와줄 생각 없이 마냥 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자극적인 장면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눈에 담아내기 위해서. 그러다 팔 부분을 빼느라 잠시 상체를 들어올린 이석민의 조그만 머리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긴장한 듯 벌써부터 땀에 살짝 젖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올렸다. 넌 이마 보이는 게 예뻐. 그 예쁜 이마에 입술을 한번 붙였다가 금방 떼어냈다.
가볍게 한 겹을 벗어내고 다시 침대로 풀썩 누운 이석민의 몸을 찬찬히 살폈다. 이석민은 모난 곳이 하나 없는 동그랗고 탄탄한 몸을 가졌다. 뼈라는 뼈는 죄다 튀어나와 있어 가끔 부딪히면 아프기까지 한 나와는 정반대로. 마냥 마르기만 한 몸이 아니라서 그 어느 곳을 쥐어도 손바닥 안에 가득 들어차는 부피감이 좋았다. 그 중에서 내 정성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아무래도 너른 가슴팍이었다. 만지기 좋은 촉감이기도 했고, 이석민 본인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가장 예민한 성감대이기도 했으니까.
“..아..! 아흣 형..”
검지와 중지 손가락 사이로 유별나게 솟아있는 유두를 살살 돌려가며 건드렸다. 으흣, 흡..!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이석민은 벌써부터 숨을 불편하게 쉬며 쌕쌕거렸다. 그럴 만도 한 게, 거의 세달 만에 가지는 관계였다. 한창 뜨거웠을 때에 지치지도 않는지 매일마다 몸을 부대끼며 밤을 새웠던 것에 비하면 적은 횟수였지만 그래도 3일에 한번은 의무적으로라도 꼭 몸을 섞고는 했었는데, 그것마저도 헤어지기 직전엔 아예 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이대로라면 생각보다 허무하게 빨리 끝나버릴까봐 어이가 없기도 하다가, 한편으로는 그래도 나 없는 동안 딴 놈의 손길을 타지는 않았구나 하는 이상한 안도감이 복합적으로 밀려들었다. 아아, 이러다 나 진짜 성격 이상해질 것 같으니까 빨리 끝내는 게 낫겠어.
“흐으.. 하.. 아 형..”
“어때. 기분 좋아?”
“..형.. 혀엉..”
“그럼 여기는 어떤데.”
“좋아.. 너,무.. 너무 좋아..”
“팔 위로 올려봐.”
이럴 때 만큼은 말 잘 듣는 어린 애처럼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 입력을 곧잘 하고는 했다. 양쪽 손목을 X자로 교차해 침대 헤드 쪽으로 들어올렸다. 아래로 내려오기 전 한번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패턴이야 항상 해오던 데 있어서 뻔하게 느껴질 만도 했지만 나는 오히려 입술을 지그시 쳐다보기만 해도 상대방이 너무나 당연하게 입술을 부딪혀주는 침대 위의 티키타카를 사랑했었다.
몸을 아래로 숙여 이석민의 귓바퀴부터 귓볼, 목선, 쇄골까지 입술로 빠알간 흔적을 만들며 내려왔다. 일부러 세게 물지마.. 나 내일 출근, 손가락으로 끊임 없이 희롱했던 터라 이보다 더 딱딱해질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해진 유두를 기어코 입으로 물었고, 이석민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아아.. 하앙.. 형 제발.. 이석민의 신음 소리는 평소 말하는 목소리의 높낮이에 비해 의외로 낮은 편이었다. 내가 입 안에서 혀로 유두를 세게 굴리면 굴릴수록 이석민은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셨다. 손가락으로 살며시 갈비뼈 라인을 쓸어내리자 나에게 여전히 결박되어 있는 제 다리를 들썩거렸다.
“형 나 바지 벗겨줘.. 답답해..”
“조금 이따가.”
“아 왜애..”
성격 급한 건 10년이 넘도록 바뀌지가 않네. 내 말에 이석민은 입꼬리를 잔뜩 내려보이며 울상을 지었다. ..재수 없어 윤정한. 응, 알고 있어. 그 사이에 놀고 있는 제 손들이 민망했는지 이석민은 팔을 내려 내가 입고 있는 셔츠에 손을 가져다댔다. 아, 석민아 형 아퍼. 이석민은 관계 중에 약간 귀엽다 할 버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흥분을 하면 그렇게 내 몸을 꼬집어대곤 했다. 그만큼 이 순간에 몰입을 해서 힘이 조절이 안되는 건지 단추 몇 개 푸는데도 가슴을 대체 몇 번을 꼬집는지. 둘 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서 피스톤질에만 열중하고 있을 때는 그 강도가 더 심해졌다. 내 양쪽 어깨가 손톱 꽉 잡아누르는 이석민의 손톱으로 인해서 성한 날이 없었을 정도로.
“그냥 내가 벗을게.”
“..시러어 내가 벗길 거야아.”
그럼 그러던가. 끝말을 길게 늘리면서 고집을 부리는 이석민을 제 맘대로 하게끔 놔두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마치 배경음악인 것 마냥 들으며 버클만 풀어놓은 바지 속으로 오른손을 쑤욱 집어넣었고, 벌써 어느정도 흥분이 올랐는지 반쯤 서있는 그것을 약하게 쥐었다 풀었다. 뜨겁게 열이 오른 것을 손에 쥐고서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내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갈수록 이석민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일단 손으로 한번 갈 거야? 원래 하던 루틴대로 한번 가기 전에 넣어야 할 지 아니면 별개로 해야할 지 단순한 궁금증으로 물어본 건데, 어디선가 주먹이 갑자기 날아와 맨가슴을 퍽 치고 갔다. 내가 뭐어, 손으로 깔짝대는 거에 갈 거 같애?
“갈 거 같은데..”
“..으흡..흣..하아..”
“알았어, 일단 이건 보류.”
모든 것을 토해내기 직전인 듯 새빨갛고 돌덩이만큼 딱딱해진 그것을 내 손아귀에서 해방시켰다. 무릎을 세워 자세를 고쳐 앉아 이석민의 바지춤을 붙잡았다. 바지춤과 함께 손가락에 걸려오는 드로즈까지 동시에 내려 벗겨냈다. 예고도 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제 나체를 나에게 보이게 된 이석민은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새삼스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석민의 한쪽 발목을 들어 내 어깨에 걸치게 하고는 내 무게를 실어 쭉 밀어올렸다. 이미 젖을대로 젖어버린 이석민의 입구를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실로 오랜만에 타인의 손길이 닿음을 증명하듯 그 곳이 생생하게 움찔거렸다.
으으, 아파 형.. 나 아파. 평소에 하듯 입구에 손가락을 두개를 집어 넣었을 뿐인데, 믿을 수 없게도 내벽이 손가락을 바로 조여왔다. 응, 그래보여. 이미 잔뜩 부어있는 입구는 조금만 더 건드려도 찢어질 듯이 아파보였다. 그동안 자위 한번을 안 했나보네. 이렇게까지 숭고한 정절을 지키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는데. 감히 손가락 하나 더 넣기도 미안해져서 여기서 그만 둘까 싶다가도, 양쪽 볼은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숨은 규칙적으로 쉬지도 못해 정신 못차리는 이석민은 당장이라도 박아버리고 싶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급하게 젤을 찾아 손가락에 잔뜩 묻혀 문질렀다. 열이 오른 온도에 금방 끈적거렸다. 마침내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갔고, 딱 내 것의 둘레 만큼 벌어졌다. 그리고 이석민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마구 두들겼다. 아파! 아프다고!
“넣기 전에 할 말 없어?”
“...없어. 그냥 빨리 해..”
“박아달라고 해봐.”
“..변태 새끼야..”
“침대 위에선 그거 칭찬이야.”
고작 몇 초가 흐른 것이겠지만, 내 체감 상으로는 몇 분과도 같은 고요함이었다. 응? 넣어달라고 애원해봐, 석민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손으로는 내 것을 살살 어루만지며 일으켜세우고 있었다.
원체 네가 그런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당장에도 입도 뻥긋하지 않고 버틸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근데, 그냥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이석민 네 감정을 내가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 말로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감히 애정이 아니라 애증일 지라도. 우리 둘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잖아, 절대 서로가 죽도록 싫어져서 헤어진 게 아니란 사실을.
“..형 결혼은 언제 하는데?”
어? 갑자기? 이런 분위기에, 이런 질문을 한다고? 이게 진정으로 삽입 직전에 나와도 되는 주제가 맞나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방금까지도 터질 것만 같던 텐션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고, 나는 입 안에서만 굴리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 얘기가 나올 타이밍인가? 지금이?”
“그냥.. 궁금해서..”
“그래, 궁금할 수는 있어. 근데 지금? 꼭 지금이어야 했어?”
“..아니 내가 가서 축하해줘야 되니까..”
“오면 뭐 어쩌게.”
“...”
“나랑 헤어지길 잘했다, 내 면전에 대고 말해주게?”
오바를 조금 보탠다면,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도 같았다. 그게 나를 지금 이 싸구려 모텔까지 오게 만든 문장이었다. 형 만난 걸 평생 후회하면서 살 거야. 형은 내 인생에서 만났으면 안되는 최악의 사람이었고, 그런 형을 사랑한 게 내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억울하면 그 여자랑 꼭 결혼까지 해. 그럼 내가 그때 헤어지길 잘했다, 그것만큼은 내 최고의 선택이었어 형 보면서 말해줄게.
이석민은 다 알고 하는 말이었다. 윤정한이라는 사람은, 가면을 뒤집어쓴 채 사랑 없는 결혼을 해서 너에게 ‘그때 헤어지길 잘했다, 그것 만큼은 최고의 선택이었어’ 같은 개소리를 듣고도 그 자리에서 네 손을 잡고 식장 밖으로 뛰쳐나갈 용기가 없다는 것을. 내가 겁쟁이라는 걸 너에게 다시 한번 확인받는 것만 같았다.
형은 진짜 내 전부야, 형 없으면 난 아마 못 살 거야. 너무 쉽게 장담하는 거 아니야? 나 없이 살아본 적도 없잖아.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그럴 일이 없으니까. 형은? 형은 나 없으면 어떨 것 같아? 그래도 어느정도 살아갈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헐.. 대박. 장난이야, 이석민 또 삐진다. ..그냥 이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만약에 나중에라도 헤어지게 된다면 누구 잘못 따질 거 없이 그냥 세월 탓을 하자. 우린 너무 오래 만났으니까 그런 핑계라도 댈 수 있잖아. 세월 탓을 왜 해, 그냥 내 탓 해. 맘 편하게.
그래서 그런 걸까. 그때 받아주지 말 걸 그랬다며 나를 만난 걸 평생 후회하고, 나를 사랑한 것이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진짜 내 탓을 하는 이석민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헤어짐이 온전히 한 사람 탓이 된다는 게 이렇게나 슬픈 일인 지 헤어져보고 나서야 알았다.
“..아니 그게 아니구..”
“석민아.”
“..응.”
“결혼 날짜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니야.”
“나는 잘 모르니까..”
“내 사정도 있는 거고, 그 사람 사정도 있는 거고.”
“...”
“둘 다 한테 최선으로 맞추려고 하다보면 꽤 걸리겠지, 아마.”
“...으응. 알겠어.”
..이제 넣어줘 형. 본인이 분위기를 깬 주범인 건 알았는지 주인 눈치보는 강아지 눈을 장착한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안들려. 크게 말해. 최대한 감정을 바닥에 내려놓고 무겁게 대답했다. 지금 나한테 화난 만큼 세게 박아줘. 빡친 윤정한 보고만 있는 거 진짜 개꼴리니까.
이석민의 허리를 잡고 살짝 들어올렸다. 등 뒤로 베개 여러개를 이리저리 모양을 내서 자세를 편하게 잡을 수 있게 끼워 넣었고, 이석민은 얼른 내가 제 안으로 들어와주기를 바라는 듯 들뜬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누웠다. 박아도 된다는 허락 아닌 허락을 받은 나는 내 손가락을 잔뜩 조여오는 입구를 양쪽으로 살살 벌려 아까부터 서있던 내 것에 콘돔을 끼운 채 갖다댔다.
넣을게. 아픈 건지 아니면 떨려서 그런 건지 눈을 꽉 감은 채 벌써부터 인상을 쓰고 있는 이석민을 바라보며 천천히 내 것을 밀어넣었다. 아.. 아아.. 흐읍..! 아읏! 야 윤정한...! 내 것이 뻐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여오는 내벽에 나 역시 정신이 아득해져 미칠 것만 같았다. 석민아 너 너무 뜨거워 지금. 조금 속도를 내서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는 내 허릿짓에 점점 위로 밀려나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기 시작한 이석민의 정수리에 더 이상 부딪히지 않게 내 손을 가져다댔다. 흐읏, 읍..! 아앙 아! 한동안 이 축축한 모텔 방 안이 오로지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신음 소리로만 가득 채워졌다. 손가락 뼈에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 헤드가 부딪히는 충격이 무뎌져갈 때 쯤, 몸이 녹아내린 듯 꼼짝없이 흔들리기만 하던 이석민이 상체를 들어올려 양쪽 팔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두 몸뚱아리가 그렇게 외설적일 수가 없었다.
이제 네가 움직여봐. 가까이서 보니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는 이석민의 이마부터 목덜미까지 손으로 닦아냈고, 나에게 푹 안겨 기운 없이 흔들리는 이석민을 혼자 내버려두고서 침대에 털썩 누웠다. 내 위에 앉아서 허리를 움직이며 손깍지를 껴오는 것을 피하지 않고 꽉 잡았다. 스스로 피스톤질을 시작한 이석민은 흥분이 오를수록 짧게 자른 제 손톱이 내 손등에 박히도록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 자세로 몇 번을 절정에 오른 이석민이 내 납작한 가슴팍으로 넘어지듯 쓰러졌다. 내 것을 빼고 내 위에 누워있는 이석민을 꽉 안고서 그대로 돌려눕혔다. 별다른 저항 없이 다시 침대 위로 눕혀진 이석민의 엉덩이를 두세번 정도 두드렸다. 엎드려. 내 말에 이석민은 덜덜거리는 무릎을 겨우 꿇고서 내게 등을 보인 채 엎드렸다. 우리의 섹스는 대체 언제 공백이 있었냐는 듯 찐득했고, 자연스러웠으며 날것 그 자체였다. 손바닥으로 매끈하게 잘빠진 허리 라인과 엉덩이를 스윽 쓸어내렸다. 그 손길 한번에도 이석민은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쩌면 그 어떤 순간보다 나를 제일 흥분시키는 순간이 아닐까. 나에게 정복된 채 가장 깊숙이 숨어있는 치부를 그대로 내놓고서 무방비 상태로 정복자의 침입만을 기다리는 뒷모습이라니.
“무릎에 힘 줘.”
“...”
“석민아.”
“...”
“이석민.”
두 팔로 머리를 감싸쥔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이석민은 무슨 일인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고 머리맡 쪽으로 얼굴을 갖다대자 아주 조용한 소리로 훌쩍거리는 게 느껴졌다. 너 지금 울어? 이석민을 돌려 눕히기 위해 머리를 감싸고 있는 한 쪽 팔을 잡아당겼다. 눈물로 가득 젖은 얼굴을 내 두 눈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원래 울고 있는 사람에게 설마 우는 거냐고 묻는 건 하면 안될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물어봐야 했다. 이 상황에 왜 우는 건지 나는 정말 이해 할 수 없었으니까.
“형 봐봐.”
“..아 그냥 해..”
“형 보라고.”
“..엎드리라매..”
“너 형 안 보면 안 넣고 이대로 밤샐 거야.”
하아. 속에서부터 올라온 듯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이석민이 나를 향해 돌아누웠다.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로. 움츠러든 어깨와 얼굴 위로 곱게 포개진 손가락이 계속해서 들썩거렸다. 형 인내심 없는 거 잘 알면서 왜 그래. 일단 말은 그렇게 하긴 했는데, 나는 이유 없이 울기만 하는 이석민에게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얘를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생각하며 목소리를 다듬었다.
왜 우는 건데, 뭐 맘에 안 들은 거라도 있어? 말해줘야 알지. 내가 너무 강압적이었어? 너무 나만 생각했나? 좋지는 않고 아프기만 했어? 그런 거면 여기서 그만 둬도 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조절이 안됐나봐. 살이 더 빠졌는지 예전보다 더 얇아진 손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아, 너무 좋았어. 근데 왜. 너무 좋아서. 진짜 말 그대로 너무 좋아서. ..좋은데 왜 울어. 정한이형.. 응, 석민아.
“...나 그냥 계속 형 옆에 있으면 안돼?”
“...”
“진짜 안 나대고.. 흐읍, 조용히 옆에만 있을게.”
“...”
“귀찮게 안 할게.. 형이 오라면 오구.. 가라면 갈게.”
“...”
“..형이 너무..”
너무 예전 그대로라서 나 진짜 힘들어.. 중간에 감히 끼어들 생각조차 못 했고,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갑자기 누가 내 전원을 꺼버린 듯 모든 사고 회로가 멈췄다.
울고 있는 이석민에게서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백하던 열아홉살 이석민이. 그보다 열살도 더 먹은 서른셋의 이석민에게 다시 이런 고백을 받게 될 줄이야.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던 때 이석민은 교복 위에 떡볶이 코트나 입고 다니는 어린애였는데, 어느날 내가 밥이나 먹자며 부른 햄버거집에서 내가 사준 콜라를 쪼옥 마시다가 냅다 고백을 해왔다.
같이 밥 먹자면서 형은 왜 안 먹어? 별로 안 땡겨. 사실 마음 같아선 술이나 빨러 가고 싶은데 너가 아직 어리니까. 왜 술이 마시고 싶은데? 형 여친이랑 깨졌어. 왜? 내가 자기보다 너를 더 많이 만난대. 그래서 헤어지자길래 생각해보니까 또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서 그러자고 했어. 내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석민은 마시고 있던 콜라를 내려놓더니 코트 소매 부분을 자꾸만 잡아당기며 만지작거렸다. 이석민이 가끔 할 말은 있는데 정리가 잘 안되서 머뭇거릴 때마다 하는 습관 같은 거였다. 마냥 귀여웠고, 그 말이 어떤 말일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차라리 속시원히 말해줬으면 싶었다. 그래도 얘가 나를 좋아하고 있겠거니 예상하는 것보다야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것이 더 기분 좋은 일이니까.
그래서? 여자친구 새로 사귈 거야? 뭐 딱히, 연애가 생각보다 그렇게 재밌지는 않네. 그럼 나랑 만나면 안돼? 나 형 좋아하는데. 응, 알아. 알고 있었어? 일찍도 말한다, 나 졸업하기 전엔 얘기할 줄 알았는데. 어? 그럼 교복 입고 데이트 할 수 있었잖아, 바보야. 형 이제 곧 군대도 가야 되고, 할 일 많아서 너랑 놀 시간도 없어.
뭐야. 이석민 울어? 너 진짜 아직도 애다.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결국에는 훌쩍거리는 이석민에게 학 모양으로 접어놓았던 냅킨을 다시 곱게 펴서 건넸다. 세게 문지르면 아프니까 살살 닦아. 기다릴게. 뭘 기다려. 형 복학할 때까지. 형이 다니는 대학 내가 어떻게든 가서,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때는 잔말 말고 나랑 만나.
이석민은 본인이 말한 약속을 지켰다. 결국엔 나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진학해 전공 강의실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꽤나 차있는 강의실 안에서 이석민을 한눈에 발견했던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따가울 법도 한 여름 햇빛이 그대로 내리쬐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전공 책을 살랑살랑 넘겨대던 그 모습을.
“..미쳤나봐 진짜아...”
“...”
“내 말 무시해도 대애..”
“하던 거 마저 해도 돼?”
“..우웅..”
“엎드려, 그럼.”
*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겨우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이 슬슬 주변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하니 근처에서 휴대폰 알람 소리가 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아 출근해야지. 시끄럽게도 울어대는 알람을 꺼버리고서 속으로 올라온 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젯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윤정한에게 몇 번이나 더 해달라며 매달렸던 게 꿈이었을까. 차라리 꿈이었다면. 나이는 한참이나 더 먹고서 열다섯살 때나 하던 몽정을 다시 하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은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마자 보이는 것이 색의 어울림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촌스러운 장미 문양 벽지라 나는 어제 일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헷갈릴 수조차 없게 되었다. 엎드려서 또 한번 한 이후에 세번 정도를 더 하고나서야 섹스는 끝이 났다. 허리와 아래쪽은 물론이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욱씬거렸다. 태어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찰싹 붙어있던 품에 꽉 안겨 끝장을 본 나는 물기 가득 머금은 젖은 빨래처럼 윤정한의 어깨 위로 축 늘어졌다. 그게 어제의 내 마지막 기억이다.
윤정한도 깼으려나. 나보다 잠귀가 훨씬 밝은 사람인데. 그게 아니라면 괜히 깨워주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힘겹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뭐 얼굴 마주보긴 조금 힘들지는 몰라도 어찌 됐든 우리 둘 다 출근은 해야 되니까. 근데,
“...갔네.”
누워있던 모양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누워있어야 할 사람은 없었다. 언제 가버린 건지 짐작 조차 할 수 없게 그 자리에 온기 하나 남기지 않고서. 뭐가 그렇게 바빠서 도망치듯 갔어. 나도 모르게 슬며시 손을 뻗어 비어있는 옆자리를 자꾸만 쓰다듬었다. 가버렸어.. 나 여기 있는데. 나만 놔두고.. 계속해서 혼잣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건 내 의지로 하는 게 아니었다. 내 의지였다면 진짜 다신 상대 안 할 나쁜 새끼라며 쌍욕부터 나왔겠지.
“..윤정한 너 진짜 최악이다..”
마지막까지 너 하고 싶은대로 하는구나. 윤정한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너와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사랑 받기를 원하는 순간은 전희도 아니고, 오르가즘의 순간도 아닌 관계를 끝내고 난 후라고. 나는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내 옆에 항상 네가 있기를 원했다. 누가 입 맞춰주면서 깨워달랬어? 그건 로맨스물에서나 지겹도록 나오는 얘기지. 잠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잖아. 그냥 그저, 어디 가지말고 내 옆에 있어달라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었던 거야?
“..아냐.. 먼저 가는 게 맞지..”
자꾸만 마음이 갈대마냥 이리저리 흔들렸다. 따지고 보면 윤정한 입장에선 일어나자마자 당장 여기서부터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미련이 가득해서, 섹스 하다가 구질구질하게 질질 짜기나 했던 전남친이 맨정신에 어떻게 감당이 되겠어. 곧 결혼도 앞두고 있는 사람이.
그래. 나는 항상 이랬다. 이미 상해버린 내 감정보다 윤정한이 왜 그랬을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을지 그것에 비중을 더 두었고, 항상 윤정한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했다. 그렇게 쌓아만 두다가 결국엔 이 꼴이 난 게 사실이지만. 어찌 됐든 우리는 일상 속에서 계속 얼굴을 부딪히며 말을 섞어야 하는 관계이고, 지금의 나로서는 윤정한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불편한 일 만들지 말자 석민아.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우이씨.. 왜 우냐 또..”
머리로는 정리가 되었어도, 마음으로는 전혀 안된 모양이었다. 갑자기 밀려오는 창피함에 누구 하나 보는 이 없었지만 이불을 질질 끌어모아 머리 위로 덮었다. 여전히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몸보다 나이 먹고 또 애처럼 울고 말았다는 사실이 나를 더 창피하게 만들었다. 나 스스로도 눈물이 많다는 게 이렇게나 짜증나고, 자괴감이 드는데 그걸 매일 보던 윤정한은 얼마나 피로했을까. 우는 애 앞에서 뭔 말도 못하고.
두터운 이불 속에서 소리내서 펑펑 울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없다. 한 톨 조차도.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사랑이 진정으로 어젯밤이 마지막이었다는 게 오늘로써 현실이 되었고, 나는 윤정한과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이 불편한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야 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의미 없는 인사를 나누며 윤정한의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 반지를 봐야 하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윤정한에게 묻어있는 와이프의 흔적을 지켜봐야만 한다. 가끔은 회사에 간식을 싸들고 직접 찾아온 와이프가 윤정한의 팔에 팔짱을 끼며 우리 남편 회사에선 어떤 사람이냐며 묻는 질문에도 좋은 분이라고, 결혼 잘 하셨다고 치켜세워줘야 할 지도 모르지.
“..흡.. 그냥 김민규네 회사나 갈까..”
덜컥. 내 울음 소리를 멈추게 한 건 의심의 여지 없이 모텔 방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윤정한? 너야? 나는 내가 방금까지도 엉엉 울고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어깨 아래까지 벗어던졌다. 왜 하필 지금이냐는 생각 따위는 할 겨를도 없었다. 오히려 윤정한 너이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깼네.”
“...”
“언제 일어났어.”
윤정한은 신발을 벗다가 침대 위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서 놀랐는지 잠깐 주춤거렸다. 방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윤정한의 손에는 흰색 비닐봉투가 들려있었다. 너 이거 마셔야 될 것 같아서. 봉투 안에서 부시럭거리며 숙취 해소제 한 병을 꺼내더니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나에게 내밀었다. 그 모든 행동을 지켜보면서 나는 숨 한번을 소리내서 쉬지 못했다. 못볼 걸 본 사람 마냥 온 몸이 굳어서 눈물을 닦아낼 수도, 울던 얼굴을 숨길 수도 없었다.
마주친 윤정한의 눈동자가 내 눈부터 콧대, 코 끝, 입술까지 훑어냈다. 일어나자마자 퉁퉁 부은 얼굴에 펑펑 울기까지 해서 지금 내 몰골이 얼마나 최악일 지 굳이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기가 부끄러워 나는 윤정한의 한 쪽 볼에 자리하고 있는 그 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 나가 있을까?”
“...”
“정리되면 불러.”
“그냥 있어.. 다 봐놓고 뭐하러 그래.”
그러고는 다시 정적. 나는 핑곗거리를 찾느라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화장실 가려다가.. 발가락을 찧어가지구.. 그래서.. 아파서.. 어차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걸 알고있지만, 그래도 윤정한이 그나마 마음의 부담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말도 안되는 내 핑계에도 윤정한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일부러 차키 보이는 데에 두고 나갔는데. 고갯짓을 하는 윤정한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니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차키가 이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어디 갔다왔어? 해장 할 데 있나 해서. 검색해도 안 나오더라고. 아아.. 그래서 찾았어? 근처에 24시 있더라. 먹고 가려고? 해장은 하고 출근해야지. 근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여전히 나체 상태로 앉아있는 내 벗은 몸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와는 반대로 아직 각이 살아있는 흰 와이셔츠 위에 넥타이까지 완벽하게 매어져있는 윤정한을 보고 있자니 다시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저 넥타이 재작년에 내가 사준 건데. 마음 속으로 소리 없는 메아리를 치면서 근처 바닥에 떨어져있는 속옷을 주워올렸다.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놓고 걸터앉아 속옷에 발을 한 짝씩 넣으려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윤정한과 딱 눈이 맞았다. 딴 데 봐, 아님 눈을 감던가. 조금은 짜증이 섞인 내 말에 윤정한은 어이없다는 듯 크게 코웃음을 치며 왼손으로 제 두 눈가를 가렸다.
아침 먹고 같이 들어가. 싫어. 나 택시 타고 갈거야. 뭐하러. 몰라서 물어? 뭘 같이 들어가, 제정신이야 지금? 같이 잤다고 광고하냐? 나 돈 벌어야 돼, 여기 오래 다닐거야. 은근슬쩍 손을 내린 윤정한이 답답한지 묶여있는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냈다. 별 탈 없이 지나갈 수도 있어. 왜 사서 걱정을 해. 나는 윤정한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어제와 똑같은 차림새 그대로, 시간의 텀도 두지 않고 두사람이 함께 사무실에 들어간다? 그럼 그게 이미 커밍아웃한 나에게 더 타격이 클까, 아니면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예비 신랑에게 더 클까. 왜 버리고 가도 될 리스크를 굳이 껴안고 가려고 하냐 이 말이야.
“형은 걱정을 사서라도 쫌 해.”
“사람들이 뒷말 하는 거 혹시나 듣게 되면,”
“...”
“남자친구한테 다 이른다고 해.”
“...누가 남자친군데.”
“내가 다 조져놓을게.”
“...”
“나 나름 윗대가리잖아, 여기서.”
알지, 윗대가리니까 그 직책에 그렇게 샛노란 색으로 염색하고 다녀도 아무 소리도 안듣지. 속으로만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새어나왔는데, 지금 내가 웃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남자친구? 당장 방금 들은 말이 지금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싶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누가 내 남자친구인데. 윤정한 본인 지칭이라면 전남친 아닌가?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잖아. 근데 왜 나는 바보처럼 입도 못 떼고 있는 거야. 순간 내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워졌다. 이제야 깨달은 건데, 윤정한에게 무슨 말이냐고 다시 되묻지도 못할 정도로 나는 이미 자존감을 바닥에 모두 내팽겨쳐놓은 상태였다. 혹시라도 틀린 답이면 어떡해. 내가 내 멋대로, 나 듣기 좋은대로 이해해버린 거면 어떡하냐고.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속이 어지러운 나를 읽기라도 한 듯 윤정한이 먼저 입술을 뗐다. 어제, 많이 취했었어? 그니까 내 말은, 어제 나한테 한 말.. 다 술김에 취해서 한 말이야?
“아니.”
“...”
“나 하나도 안 취했었어.”
“...”
“진심이었어. 전부.”
그 질문에 있어선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윤정한 네 옆에 있고 싶었던 건 사실이고, 지금도 그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맨정신에 지금 당장 다시 해보라면 다시 해줄 수도 있었다. 열번도 더 해줄 수 있어. 어제 그 말을 했던 나 역시 전혀 취하지 않았으니까. 얼핏 윤정한이 입꼬리를 올리는 걸 본 것도 같았다. 아니, 확실히 웃고 있었다. 다행이라는 듯,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는 듯이 윤정한은 한껏 가뿐해진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지금 윤정한이 정말 나와 같은 마음일까 확신이 서지 않아서 굳어있는 얼굴 표정을 풀어낼 수 없었다. 계속 형 옆에 있게 해달라는 말이 우러나온 진심이긴 했어도, 소원처럼 이루어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내가 아는 윤정한은 자기가 틀렸음을 쉽게 인정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우리가 불꽃이 생명을 다 하기 전 마지막에 가장 붉게 피어오르듯이 가장 크게 다퉜을 때 윤정한은 우리가 여지껏 정으로 만나고 있는 건지, 의무로 만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거기서 우리의 연애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어. 둘 중에 답이 뭐가 됐든 지금 우리 사이에 사랑은 없다는 사실이 무려 윤정한의 입으로 증명된 거니까.
“그럼 됐어.”
“형은 어떤데?”
“...”
“형은 어제 나한테 진심이었어?”
“석민아.”
“또 나만 진심이지.”
윤정한 너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내연남 노릇까지 하게 생겼잖아.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뱉어냈다. 말하면서도 내 스스로가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 대체 윤정한 쟤가 뭐가 예쁘다고.
하아. 한숨을 쉰 건지, 웃음이 터진 건지 구별할 수 없었다. 윤정한은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더니 관자놀이 쪽을 꾸욱 눌러댔다. 곧이어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듯한 목소리가 방 안에 낮게 깔렸다. 형 결혼 안해. ..왜 안해? 갑자기 훅 들어온 윤정한의 고백에 말문이 막혀서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다가 정말 아무 대답이나 해버리고 말았다. 왜 안하냐고? 진짜 하길 바래? 윤정한은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져서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 남자 좋아하는 거 알아. 그 여자도 만나는 사람 따로 있고. 윤정한 너는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너 어디까지 오기 부리는지 보고 싶어서. 내가 너랑 헤어진 게 단순히 오기 부리는 거야? 그럼 아니야? 네가 나한테 진짜 정 떨어져서 헤어진 거였으면 넌 어제 내 차 타지도 않았을 거야. 재밌었어? 재밌다기보단 너 하는 짓이 귀여웠어. 그래서 그냥 냅뒀어. 나 좋아하면서 미련 없는 척 하는 거. 내가 예전부터 말했지,
“너는 얼굴에서 다 티난다고.”
오늘 저녁에 만나서 끝내려고. 선 보라고 쪼는 거 한동안 안 들어도 되고 편해서, 딱히 헤어질 이유가 없었는데. 오늘 드디어 이유가 생겼네.
“내가 잘못했어.”
“...”
“내 옆에 있어줘. 어디 가지 말고.”
“...”
“너 맘대로 나대도 되니까.”
어제 한참을 자신에게 매달리는 나를 바라보며, 헤어짐을 택한 우리의 선택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다시 되돌려놔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윤정한의 마음은 어땠을까. 당장이라도 너에게 안겨들고 싶어하는 지금의 나처럼 너도 이렇게나 벅차올랐을까. 물어보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와다다 쏟아내고 싶었다. 지금 우리가, 절대 만날 일 없는 평행선을 걷고 있는 게 아니라 운동장 트랙을 빙빙 돌아 다시 출발선 앞에 서있는 거라면, 내가 이대로 다시 너의 손을 잡아도 되는 건지.
“씻고 나와, 밥 먹으러 가게.”
..응!! 혹여라도 마음이 바뀔까봐 엉덩이에 스프링이 달린 장난감처럼 재빠르게 튀어올랐다. 욕실로 걸어가는 내 뒤에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예전에나 듣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석민아. 응.
“미안해.”
“..뭐가.”
“이런 데로 데려와서.”
“...”
“...싫었지.”
눈꼬리를 한껏 내리며 ‘싫었지’라고 묻는 윤정한의 표정이 너무나도 다정하고, 진심으로 미안해보여서. 그 짧은 세글자 단어에 복합적인 감정이 모두 담겨있어서, 어쩌면 나를 사랑했던 그 때 그 모습 그대로라서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냈다. 당장이라도 그 품 속에 안겨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나보다 고작 두살 더 많은 윤정한은 딱 두살 만큼 더 어른 같았다. 항상 동갑내기 친구 같다가도, 가끔씩은 동생처럼 어리게 굴어서 내 속을 뒤집어 놓던 윤정한은 꼭 이럴 때 만큼은 부정할 수 없이 어른이었다.
아니, 좋았어. 신경쓰지마. 평소의 나였다면 이렇게 대답 했겠지. 그게 우리 둘 다 마음 상하지 않고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니까.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어준 윤정한을 빈정 상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만큼은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었다. 괜히 속마음을 숨겨서 쓸데없이 오해만 쌓여가는 그런 바보짓은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아. 우리가 헤어져있음으로 멈춘 그 시간을 다시 제 속도로 움직이게 해야 해.
“..응. 싫었어.”
“...”
“그러니까,”
“...”
“다음부턴 그러지마. 알겠지?”
눈물을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는 말마다 말 끝에 울음기가 묻어나왔다. 그래, 알겠어. 윤정한은 편안한 얼굴을 지어보이며 나를 달랬다. 네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바라볼 때마다 그게 나한테 얼마나 완전한 안정감을 주는지 너는 모르겠지. 아니, 이제 알게 될 거야. 내가 이제부터 너한테 하나도 빠짐 없이 다 말해줄 거니까.
“지금 한번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
“..어떻게 알았어.”
“나도 그래.”
마주보고 있는 시선은 서로에게서 단 한번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윤정한이 셔츠 손목 부분을 살짝 걷어 제 손목에 채워져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너 해장 안해도 되면 가능하고.”
“나 안 취했다니까.”
멀리 앉아있는 윤정한을 향해 오른손을 쭉 뻗었다. 네가 내 쪽으로 오라는 뜻이었다. 내 말을 알아들은 윤정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느긋한 손길로 제 넥타이를 풀어내고 있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윤정한이 엄지 손가락으로 내 아래 턱을 살짝 눌렀다. 고개를 살짝 꺾어 자연스레 벌려진 아랫입술의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 들었다. 손가락 사이 사이로 윤정한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들어와 손가락을 간지럽게 했다. 고른 치열이 혀 끝으로 느껴지고, 혀와 혀가 부딪히는게 생경하게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젤리 같은 아랫입술의 촉감이 좋아 미치겠어서 이로 몇 번 씹자 아프다는 듯이 내 등을 토닥였다. 서로 입술을 탐미하는 미치도록 야한 소리가 우리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윤정한이 몸으로 들이댄다고 밀릴 내가 아니었지만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다가 어느새 등 뒤로 딱딱한 욕실 문이 닿았다. 윤정한이 내 허리 뒤로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아돌렸고, 그리고 우리는 그대로 욕실 안으로 휩쓸리듯 들어섰다.
“같이 씻게.”
물고기가 살지 않아 텅 비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어항 안에 깨끗하고 맑은 물이 새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끼가 잔뜩 끼어있는 돌멩이와 바윗덩어리가 사라졌고, 작고 예쁜 자갈들이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같이 있어도 서로에게 외로움 밖에 줄 수 없어서 어항을 떠나버렸던 똑 닮은 물고기 두마리는 두 손바닥 안에 소중히 담겨있다가 조심스럽게 새로운 어항 안으로 들어와 헤엄쳤다.
너는 소용돌이 같이 위험한 사람이라 괜히 근처에 있던 내가 발을 잘못 헛디뎌 순식간에 빨려들어갔다고 괜히 네 탓을 하고는 하지만, 사실은 내가 스스로 걸어들어갔다고 생각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애초에 그곳에 발도 들여놓지 않았을 테니까. 처음부터 알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비정상이라는 걸 엄마 뱃속에서 알았다면, 나는 망설임도 없이 탯줄로 목을 맸을거야. 생각해보면 내가 나를 부정하지 않고, ‘나’일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은 오로지 너였더라고. 내 모든 처음이 너라서 다행이고, 나를 네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줘서 고마워. 어쩌면 모두에게 우리는 틀린 답처럼 보이겠지만, 서로에게 서로가 정답이면 그걸로 된 거야.
내 다시 없을 첫사랑이자,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이자, 내가 평생토록 안고 가야 할 사랑하는 나의 애증에게.
완벽한 헤어짐은 없다. 서로의 새끼 손가락에 묶여 이어져 있던 붉은 실을 나름대로 잘 끊어냈다 생각했는데, 바닥으로 흩날려 떨어진 붉은 실을 굳이 다시 주워다가 끊어진 부분을 곱게 엮어 예쁜 리본 모양으로 묶은 꼴이 되어버렸다.
정한이형 바보. 윤정한이 붙여준 수식어이자 내 어린 시절 내내 불리었던 별명이었다. 그만큼 윤정한이라면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우리의 공간이 아닌 곳에서 마주한 너는 조금 달랐다. 아니, 가감없이 말하자면 공간이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달라진 우리의 관계가 문제겠지. 내가 평소엔 알 수 없던 바깥의 윤정한은 공과 사가 꽤나 확실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상사 대 부하직원으로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걸어들어오는 나를 보고서도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커피를 권했을 정도로. ‘우리 사무실은 라떼가 맛있기로 유명한데, 내려드릴까요?’라며. 그리고 말했지. 오늘이 나랑 커피 마시는 처음이자 마지막 날일 지도 몰라요. 회사에서 나 만날 일 별로 없을 거니까.
그 순간부터 나는 너의 오래 된 연인도, 헤어진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전남친도 아니었다. 애초에 애틋한 재회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앞에서 그 여자 전화를 받으며 자리를 비우는 건 진짜 너답지 않았잖아.
“석민씨 애인 있을 걸?”
“네?”
“아니,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대리님 뭐 보셨는데요?”
“그.. 석민씨 전화오는데, 발신자가 하트 붙어있던데? 보통 그러면 애인 아니야?”
소용돌이♥. 물론 윤정한이었다. 아이씨, 바꾼다는 걸 정신없이 사느라 계속 잊어버렸더니. 사무적으로 연락할 일 있으면 사내 메신저 써달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윤정한은 의외로 급한 일이라면 무작정 전화부터 걸고 보는 아주 성격 급한 상사였다. 그걸 사무실 짝꿍 양 대리님이 어쩌다 본 상황 같은데 그래도 발신자가 윤정한이라는 건 모르시는 모양이었다. 여친 예쁘냐? 몇 살 차이? 어려? 얼마나 만났어? 결혼 할 거야?
“아, 그게, 여친이 아니고..”
지금 내가 하는 말에 네가 버릇처럼 눈썹을 치켜올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상관 없다. 우리는 이제 타인이 되기로 했으니까. ‘타인’이라는 관계가 얼마나 속 편한 관계인가. 서로에게 그 어떤 기대도, 실망도, 더 나아가 원망도 할 필요가 없는 심플한 관계라는 것이. 우리는 그동안 너무 복잡한 연애를 했다.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상처주고 싶지 않아 자의적으로 배려하고, 괜히 한번 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그게 안에서 썩고 곪아 나중에서야 터져버릴 줄도 모르고. 그래서 굳이 네 입장에서 생각하느라 나를 뒤로 미루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가장 편안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타인’. 결말은 좋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믿고 있다. 내 얼굴을 한번 봐. 네 앞에서 우리가 헤어진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도 얼마나 편해보여.
“남친이에요. 남자친구.”
시끌벅적하게 돌아가던 술자리를 멈춘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그렇다쳐도 나이를 좀 먹고 나니 만나는 사람마다 애인은 있냐, 몇 살이냐, 얼마나 만났냐 물어오는 질문들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입을 꾹 다물었으면 다물었지. 본인들이 먼저 물어봐놓고 필터링 없는 내 대답에 매번 당황해하는 모습들이 어이없어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했지만, 나는 이제 더이상 낙인이 두려운 어린 샌님이 아니었다. 어쩌면 가끔씩 이런 상황이 재밌게 느껴지기도 하고.
옆에서 내 빈 잔을 채워주던 부 대리님이 놀고 있는 왼손으로 내 어깨를 찰싹 쳤다. 어머 이 대리님 완전 힙하시다. 멋있어요. 하이톤의 목소리에 잠깐 사이 얼어붙은 분위기가 깨진 느낌이었다. 어떻게 만났어요? 어..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처음 만났었나. 헐,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사귄 거에요?! 아니 그건 아니구, 쭉 친하게 지내다가... 스무살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와 대박, 엄청 오래 사겼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현실판이네. 어떻게 사귀게 됐어요? 물어봐도 돼요? 죄송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죠. 근데 너무 궁금해서.
그냥.. 대책 없이.. 계기도 없구.. 뭔가 그냥.. 불시에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나도 모르게.. 뭐 그런 거죠. 연애가 원래 다 그런 거잖아요. 방금 그 말 되게 멋있다,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이 대리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히 감성적이시다. 혹시 인프피세요?
서른 즈음 넘어가게 되면 내 연애보다 -남녀 상관 없이-남의 연애 얘기를 제일 재밌어한다더니. 유독 안광을 반짝이며 주제가 끊기지 않게 계속 질문을 하는 부 대리님을 보고 있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근데 헤어졌어요.”
“...헐.”
“한, 한달 됐나.”
“아 그럼 진작 헤어졌다 하지, 왜 사람을 재활용도 안되는 쓰레기를 만들어요..”
“저 진짜 괜찮아요. 이제 정말 상관 없는 사람이라 말한 거에요.”
“..아무래도 이유는 진짜 물어보면 안되겠죠? 그럼 진짜 쓰레기겠지?”
“결혼한대요. 여자랑.”
세상에. 그 새끼 미친 놈이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환승을 해? 자고로 헤어지고 나서는 상대방에 대한 애도 기간이라는 게 있는 건데! 안그래요 다들? 상대방 여자는 알고 결혼하는 거야? 그래, 그거 사기결혼 아니야? 게이인 거 숨기고 여자 속여서 결혼하는 거잖아. 그, 그 뭐냐, 클로짓 게이! 아무리 얼마 안 본 사이라도 팔은 어떻게든 안으로 굽는다고,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솔직히 윤정한을 이렇게까지 욕 먹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감당 못할 리액션에 시선을 둘 곳을 딱히 찾지 못해서 눈알을 굴려대다가 어느 한 곳에 멈췄다. 윤정한은 내내 시선을 내리깔고서 손가락으로 소주가 반쯤 담긴 잔을 빙빙 돌리고만 있었다. 그치만, 이제 네 기분이 어떻든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아. 굳은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해도 나는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렇게 마음을 먹었지만, 단 한번도 나와 눈을 맞추지 않는 윤정한을 보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결혼 상대가 속은 게 아니라 제가 속은 거죠.”
*
“다들 까먹지마요. 내일 목요일인 거.”
“출근해야 되니까 적당히 마십시다, 다들.”
‘새로 온 이석민 대리 환영 축하 파티’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잔을 비우는 순간 바로바로 술잔이 영롱한 색깔의 액체로 다시 채워졌다. 아, 이게 오래 함께 일한 사람들의 팀워크라는 건가. 정신을 쏙 빼놓네. 내가 그렇게 지체 없이 잔을 비워낼 동안 내 옆자리는 수많은 동료들이 엉덩이를 붙였다가 떠나가곤 했다. 하도 받아마신 술이 많아서 이제는 정말 정신이 몽롱했다. 열 세명의 사람들에게 한 잔씩만 받아도 열 세잔인데 족히 스무잔은 더 마신 것 같았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양 대리님이 내 술잔 위로 술병 입구를 갖다댔다. 이거까진 넘길 수 있으려나 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술잔을 기울였는데 내 손가락 위로 뼈 마디가 굵은 손가락 다섯개가 겹쳐 올라왔다. 따르지 말라는 듯 술잔 위를 감싸고 있는 손가락을 보니 굳이 고개를 올려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아, 실장님이 한 잔 주시게요?”
“이제 그만하죠. 이 대리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저 이거까진 마실 수 있어요..”
“그래 이 대리. 이거까지만 딱! 마시고!”
“따르지 마요.”
“어차피 이게 마지막 잔이에요..”
그만 마시라고. 술잔을 채우기 전까진 물러날 기미가 없어보이는 술병을 손으로 살짝 쳐낸 윤정한이 분위기가 심각해질 때만 나오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솔직히 윤정한이 아직까지도 나를 생각해주고 있다니 감동이다,라는 생각보다 네가 뭔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게 사실이다. 진짜, 이제 와서 네가 뭔데 나를 챙겨.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때의 그 윤정한을 두려워했다. 평소엔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본인이 정해놓은 기준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차분한 말투와 변함 없는 높낮이의 목소리로 나를 결국엔 제 말에 굴복시키고 마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래서 네가 그 개같은 선 자리들에 불려 나가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될 때에도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기다려야만 했지. 그땐 진짜 눈이 돌았었는지 너 말고는 아무 것도 안 보여서, 도대체 선 자리에서 뭘 하다 왔는지 한밤 중에 잔뜩 취해 돌아온 네가 뭐가 예쁘다고 비 맞은 새끼 강아지처럼 깨갱 하며 안겼었는지.
“그럼 실장님이 한 잔 따라주세요.”
“오 맞네, 실장님 아직 이 대리한테 안 따라주셨죠?”
“실장님이 따라주신 거 마지막으로 마시고 끝낼게요.”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윤정한이 결국 양 대리님 손에 들려있던 맥주병을 받아들었다. 술잔과 술병 입구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윤정한은 나와의 시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술병을 기울었다. 애걔.. 육성으로 짧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마셔요, 마지막 잔. 이걸로 끝. 테이블 위로 소리나게 술병을 내려놓은 윤정한은 다시 원래 제가 있던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맥주잔 아래 밑동을 겨우 채운 맥주를 찰랑 흔들어보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못 간다고. 나 회식 중이라니까?”
무슨 회식을 수요일에 한다고 난리들이야, 내일 출근 시간 한시간씩 늦춰주는 것도 아니면서. 금요일에 회식 또 하자고 그러면 그냥 그만 둔다 해. 미친놈아 뭘 그만 둬. 뭐하러 맨날 윤 그새끼 얼굴 봐가면서 거기서 버티고 있냐? 그만 두고 나랑 같이 일하자니까? 우리 아빠가 너 엄청 기다려. 그리고 내가 너 초고속으로 승진 시켜줌. 웃으라고 하는 소리라는 걸 알지만 김민규라면 진짜로 나를 거의 임원직에 앉혀놓을 애라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지도 아빠 회사에 낙하산으로 내려온 주제에 사람 좋아하는 대형견 같은 성격은 아직도 여전해서. 하나 밖에 없는 오래된 친구가 김민규라는 건 그나마 내 인생에서 조금은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알겠어, 끊어.”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는 시간에 이대로 한명 쯤은 빠진다고 해서 티도 안 날 것 같은 느낌에 서둘러 가방까지 챙겨 몰래 나왔는데, 벗어두었던 겉옷을 챙기지 않아 잠깐 비상구 계단에 앉아있던 참이었다. 김민규는 예전부터 ‘넌 네가 철두철미 한 줄 아는데 항상 한 두개씩 빼먹는 어리버리한 놈’이라며 나를 놀려댔었다. 뭐 그야.. 항상 그 한 두개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다 닫는 건 또 무서워서 살짝만 닫아놓았던 비상구 문이 ‘끼익’하고 활짝 열렸다. 윤정한이었다. 입술에 살짝 물려있는 장초 한 개피에 담배를 피러 나왔나 했는데, 한 손에 들려있는 내 겉옷을 발견했다. 윤정한에게 내가 있는 위치를 감지하는 센서라도 달려있는지, 아니면 내가 아직까지도 윤정한의 예상 답안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건지. 답이 뭐든 간에 둘 다 참 별로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무려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다. 윤정한이랑 나는.
어깨 위로 내 겉옷이 덮어졌고, 비상구 특유의 찬 기운에 조금은 서늘했던 몸이 따뜻해져 긴장이 풀렸다.
“가려면 먼저 가.”
“네?”
“가려고 몰래 나온 거잖아. 너.”
“술 깨려고 잠깐.. 실장님도 아직 안 가셨는데 어떻게 제가,”
“언제부터 그렇게 존칭 썼다고.”
지금은 윤 실장이 아니라 확실히 윤정한이네. 헤어져 있던 사이 어느새 어깨에 닿을랑 말랑하게 자란 탈색 머리를 손으로 헤집은 윤정한이 굳이 좁아터진 내 옆자리에 납작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 뒤 담뱃불을 막 붙이려다가 멈칫하는 게 눈에 보였다. 갑자기 내 눈치를 보는 것 같길래 왜, 라고 물었더니 언제부터 다시 폈냐고 왜 안 물어봐. 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상관 없어.”
“...”
“생판 남이 꼴초든 뭐든.”
나는 그냥 내 순수한 생각을 말한 것 뿐이었는데, 윤정한은 적잖이 기분이 나빴는지 픽 웃으며 담배를 담배갑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피워, 내가 나갈게. 그냥 앉아 있어. 진작 이렇게 말하지. 그 어떤 금연 광고보다 효과가 좋네, 방금 그 말. 내 워딩 중에 윤정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만한 포인트가 있었나 내 말을 곱씹었다. 네가 꼴초든 뭐든 상관 없다는 게, 아니면 우리가 생판 남이라는 게?
담배 좀 끊으라고, 근데 또 내 연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니까 최대한 회유하는 말투로 금연을 권했던 적이 많았다. 나랑 만나던 최근까지도 잘 참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뭐 다시 필 수도 있지. 이제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까. 새삼스럽게 윤정한의 흡연 횟수를 매일 체크하기도 했던 그 때가 옛날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방금 통화한 거 김민규야?”
“응.”
“지금 와서 말하는데,”
“...”
“그 새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들었어.”
“걔는 뭐 형 맘에 들어했어?”
김민규는 우리의 시작과 끝을 가장 먼저 보고,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끔씩 김민규가 진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어보긴 했다. 도대체 저 형이랑 너는 무슨 사이냐고. 글쎄. 처음 시작은 그냥 옆 집 사는 아들래미였다가 이름과 나이를 튼 후에는 자주 붙어다니는 형이었다가, 같은 교복을 입게 된 후부터는. 몰라. 나도 모르겠다. 쟤랑 내가 대체 무슨 사이인지. 답해줄 말이 없어 나는 항상 김민규에게 되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떤 사이 같은데. 너네 둘이 친한 사이인 건 알겠는데, 보고 있으면 신기해. 뭐가 신기한데. 그냥 뭐, 단순히 옆 집 사는 형, 동생으로는 안 보이는다는 거지. 붙어있지 못해 안달이 나보인다고 해야 하나?
김민규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김민규는 눈치가 아주 빠른 애였으니까. 우리가 가끔씩 입을 맞추는 사이라는 것까지는 모를 수 있어도 윤정한과 함께 있으면 항상 생성되는 묘한 기류를 고등학교 내내 거의 나와 붙어다녔던 별책부록 김민규가 모를 리가 없었다. 너 그 형 좋아하지? 어떻게 알았어? 티가 존나 나니까. 그 형도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알까? 음.. 개좆밥 병신이 아닌 이상?
“데리러 온대?”
“걔가 무슨 남친이야? 데리러 오게.”
“그럼 일어나. 데려다줄게.”
“뭔 소리야. 형도 술 마셨잖아.”
“안 마셨는데?”
“소주 마셨잖아. 아까 다 봤어.”
“그거 사이다였어.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는 윤정한 옆에서 나는 차마 무릎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윤정한이 왜 그러고 있냐는 듯 눈으로만 묻다가 결국에는 구두 앞코를 들어 내가 신은 스니커즈를 툭툭 쳐댔다. 오늘은 왜 안 마셨는데? 맨날 꽐라되서 대리 타고 와놓고. 평소에 사이다 같은 거 입에 대지도 않잖아. 듣고 싶은 대답이 있어? 답을 정해놓고 묻는 거야, 지금? 윤정한은 여전히 앉아있는 나를 한껏 내려다보며 물었다. 침대 위에서 난 항상 말했었지. 나를 팔 안에 가둔 채 내려다보는 윤정한은 이렇다 할 섹슈얼 행위 없이도 나를 흥분하게 하는 그 자체라고.
나 데려다주려고 안 마셨어? 어. 왜 데려다주는데. 상사가 술 취한 팀원 데려다주는 게 그렇게 못 할 짓은 아니잖아. 나 지금 이 대리 아니고 이석민인데? 왜 나 꼬셔?
“우리 헤어졌어.”
“...”
“형이 끝냈잖아.”
“알고 있어.”
“...”
“허튼 짓 안해.”
“내가 허튼 짓 할까봐 그래.”
꽤 오랜 정적이 흘렀고 더 이상 그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이 굳어버린 듯 서있는 윤정한을 지나쳐나왔다. 내 말은 진짜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우리는 이미 끝난 사이라고 자꾸만 스스로 상기시키지 않으면 내가 먼저 윤정한에게 달려들어 안길 것만 같았다.
먼저 가버리려는 건 아니었다. 데려다주겠다고 그 좋아하는 음주까지 고사했는데. 비상구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서있는데 뒤에 따라온 윤정한이 옆에 나란히 섰다. 곧바로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우리는 그 좁디 좁은 공간 안으로 함께 올라탔다. 이대로 나가서 당장 호텔 방을 잡는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지만 여기서 스스로 초라해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더 원하고 안달나있는 쪽은 누가 봐도 내 쪽이잖아.
“좀 떨어져서 있어.”
“왜.”
“어지러워, 형 옆에 있으면.”
“막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들어간 것처럼?”
“..뭐래.”
“하여튼 말은 잘 하지, 이석민.”
“칭찬으로 한 말 아니었거든?”
“칭찬이 아닌데, 뒤에 하트는 왜 붙였어.”
저 너스레는 내 휴대폰에 제 번호가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다 아니까 할 수 있는 거였다. 빌어먹을 윤 실장으로 바꿀거야. 윤정한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화 할 자신이 없어 1충까지 내려가느라 계속 바뀌는 엘리베이터 숫자 계기판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짧았다면 짧고, 길었다면 길었을 그 시간 동안 다짐했다.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리라. 쓸 데 없는 감정 노동을 하는 기분이라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다. 고작 하나 있는 목숨이 아프게 조금씩 깎여나가는 느낌.
여기 서있어. 차 빼서 올게. 아직 계절이 완벽한 겨울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늦은 밤이라 그런지 꽤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와서 자꾸만 코를 훌쩍였다. 얼른 집에 들어가서 보일러로 뜨근해진 바닥에 냅다 누워버리고 싶었다. 아, 나 설마 보일러 안 켜고 나왔었나.
양손을 동그랗게 말고서 입김을 호호 불어대고 있는데 아주 익숙한 차 한대가 내 앞으로 멈춰섰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고 차보다 더 익숙한 차 주인이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문을 열고 몸을 구겨넣으려는데 그 짧은 순간에 조수석 바닥에 떨어져있는 무언가가 눈에 거슬렸다.
차가 도로 위를 달리는 와중에도 그게 뭐였을까, 예상가는 게 있긴 한데 정말 그게 맞을까, 정말 그거면 어떡하지, 서로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은 정적 속에서 별 생각을 다 하다가 결국에는 몸을 살짝 숙여 손을 뻗었다.
“이거, 뭐야?”
검지와 중지 사이에 걸려서 딸려나온 것은 여성용 반스타킹 한 짝이었다. 윤정한이랑 한창 뜨거웠을 시절에도, 단순 재미로라도 신어본 적이 없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저 스타킹이 내 것일 확률은 제로라는 거였다. 한손으로 핸들을 잡고서 조용히 운전만 하던 윤정한이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봤다. 운전 중이라 금방 고개를 다시 돌리기는 했지만 아주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별다른 감정 동요 없는 윤정한이 그런 표정이라니.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뭐, 뭘. 너 지금 얼굴에 표정이 한 다섯가지는 스쳐 지나갔거든.’ 예전부터 윤정한이 내게 하던 말이 있었다. ‘석민아, 너는 얼굴에서 다 티가 나.’ 윤정한이 이럴 때마다 나는 내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것이 조금 억울했다. 내 표정이 어땠는데, 대체. 나는 알 수가 없잖아. 근데 이제서야 윤정한이 그렇게 말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정말 모를 수가 없구나.
“벌써 텄어? 그것도 차에서?”
“그런 거 아니야.”
“아닌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아니라고.”
“여자가 남의 차 조수석에서 스타킹 벗을 일이 그거 말고 어딨어.”
“그게 아니라,”
오해, 하아, 아니 지금 내가 너한테 왜 일일이 변명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나 만났을 때 한번 무릎 다친 적 있어서 그때 약 바르려고 벗은 거야. 그게 다야.
“..지랄하네.”
이제는 변명에 성의조차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에 슬쩍 눈물이 나올 뻔 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이석민 적당히 해. 너 취했어. 안 취했어. 술주정도 정도껏 해, 받아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향수 냄새나. 뭐? 여자 향수 냄새. 방향제 냄새야. 야 너는 내가 무슨 병신인 줄 알아!? 방향제야? 그래? 나 한달 전까지만 해도 이 차 탔는데? 이런 냄새 아니었어. 형이 쓰던 방향제 이렇게 역겨운 냄새 아니었다고. 이렇게 소름 끼치는 냄새 아니었다고! 나는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윤정한에게 쌓여있던 불만과 혼자 끙끙 숨겨왔던 속마음이 넘쳐흘러 터져버린 그 날, 그 날 이후로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이 두려웠다. 하루 24시간을 꼬박 윤정한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내가 ‘나’일 수가 없게 만들었다. 우리가 헤어질 수도 있는 관계였다는 걸 인정하는 데에만 꽤 오랜 시간을 허비하고야 말았다.
김민규는 감정의 골을 바닥까지 파내서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나를 보고서 자주 한숨을 쉬었고, 어느 날은 윤정한과 나의 관계를 ‘물고기가 살지 않는 어항’이라고 정의했다. 물만 계속 채워넣으면 뭐해. 안에 물고기가 안 살면 아무 의미 없지. 윤정한이 물고기야? 내가 어항이고? 아니, 둘 다 물고기야. 내가 봤을 때 지금 너네 둘 다 어항 안에 없어. 끊임 없이 채워지는 물처럼 세월은 계속 차는데, 막상 너네는 거기서 떠나고 없다고. 김민규의 말에 나도 어느 정도 동조했기에 결국엔 윤정한과 마침표를 찍어냈다. 어차피 우리 모두 지쳐있었고, 헤어질 타이밍을 재고 있는 거라면 지금이 딱이었으니까.
그런데 매번 맞는 말만 하던 김민규가 이번엔 틀렸다. 나는 윤정한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누가 그러더라. 애정 없는 애증은 없다고. 죽을 만큼 사랑해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할 수도 있는 거라고. 윤정한 너는 나에게 애증이다. 나는 너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너무 사랑해. 내가 그날 너를 괜히 이겨보려 하지 않았다면 얼굴도 본 적 없는,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너를 뺏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뒤 좀 박아보니까 이제 재미없니?”
“뭐?”
“...”
“너 뭐라고 했어, 지금?”
“아니면 이제 슬슬 앞날이 걱정 돼? 그래서 갑자기 정상인 척 구는 거야?”
“야. 이석민.”
“아아. 맞다. 형 효도는 해야 되니까.”
뒤에선 10년이 넘게 남자랑 몸 맞춰놓고, 앞에선 그런 불순한 건 전혀 모르는 척 멀쩡한 가정 꾸리는 거. 그게 불효자식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어하는 네가 별다른 노력 없이 할 수 있는 효도니까. 그치 윤정한.
나를 마주한 까만 눈동자 속에 증오가 담겨있다. 어떻게 겁도 없이 그딴 개소리를 하냐는 듯이. 계속 해봐. 윤정한은 제법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한손으로는 잡은 핸들을 놓지 않았다. 윤정한이 두려웠던 적은 있어도 이렇게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던 적은 없었는데. 시선은 계속해서 달리고 있는 도로에만 두며 내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그동안 곪을 대로 곪아버린 속이 이제야 펑 터져서 폭주해버린 내 속 사정을 들어주려 한다기보단 그래, 어디까지 가자 한번 보기나 하자, 들어는 볼게 같은 차가운 느낌이라 나는 입술을 굳게 닫아버렸다.
“계속 나불거려 보라니까.”
“...”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지.”
“...”
“내가 효도 하겠다는데 왜 네가 난리야.”
그나마 있는 사회적 지위, 있지도 않은 명예, 언제가는 써먹겠지 인맥용으로 억지로 내 옆에 남아있는 주변 사람들 다 버리면서까지 남자 좋아하는 거 오픈했다 쳐.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뭔데. 너? 그래. 이석민 너는 얻을 수 있겠지. 근데 그게 다가 아니야. 석민아.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어. 너도 잘 알잖아. 얼굴에 가면 하나쯤 쓰고 사는 게 그렇게 어려워? 네가 여태껏 맨 얼굴로 거짓 없이 살아오면서 얻은 게 나 말고 있기는 해?
윤정한의 말에는 틀린 문장이 단 한가지도 없었다. 근데 딱 한가지가 틀렸어. 지금 나한텐 너도 남아있지 않잖아. 내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 순간 우려해왔던 우리의 마지막 결말이 오고야 말았다. 이 개같은 일대기의 끝. 나랑은 영원을 약속 할 수 없어서, 그게 서운해서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가며 이 지랄을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마지막 엔딩이 새드일 수 밖에 없다면, 주인공이 서로 사랑하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헤어짐을 선택하는 걸로 끝냈어야지. 그냥 그걸로 끝내는 게 맞잖아.
꽤 오랜 시간동안 우리가 살을 부대끼고 몸을 맞춰오면서 나는 윤정한의 성향이 완전히 바뀐 거라고 믿었다. 윤정한의 성향 변화에 내가 조금이라도 일조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어느정도 버틸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나를 좋아하니까 나랑 입 맞추는 거겠지, 나랑 하는 게 좋으니까 가끔씩 집이 비게 되는 날이면 매번 나를 불러다 끌어안았던 거겠지. 나를 좋아하니까. 그래, 그렇게 조마조마 마음 고생해가며 10년을 넘게 버텼다. 그런데, 그랬던 윤정한이 원래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그 멀쩡한 세상으로.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네가 그 여자랑 ‘결혼’이란 걸 한다는 게 나에게는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나는 너랑 헤어진 게 아니라 윤정한 너한테 버림받은 거야. 그냥 존나 불쌍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나만 덩그러니 남은 거라고.
“효도,”
“...”
“효도 해야지.”
네 말처럼 결혼해서 멀쩡한 가정 꾸리고, 애도 낳을 거야. 아무래도 하나보단 둘이 낫겠지. 아들, 딸로. 외동으로 살아보니까 혼자는 쫌 외로운 거 같아서.
나도 너처럼 전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지 않은 그런 말들을 할 수 있는 잔인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절대 장난으로라도 너한테 그런 말을 못하는 사람이란 걸 알고서 하는 소리겠지. 윤정한 너는 이 순간에도 나를 다루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쪽팔리니까,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을 참아내다가도 갑자기 너무 억울해졌다. 애초에 누가 시작했는데. 좋아한 건 내가 먼저일 지 몰라도 그런 나를 건드린 건 너였잖아.
“..그때 형 받아주지 말 걸.”
“...”
“뺨이라도 후려쳤어야 됐는데.”
“...”
“키스는 씨발 왜 해가지구..”
내가 형의 손을 타기 시작했던 때는 아마도 내가 열일곱이 되던 해의 겨울 즈음이었다. 그 나이 또래들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혈기왕성한 몸뚱이로 식지 않는 뜨거운 밤의 나날들을 보냈겠지만, 나에게는 거의 열병을 앓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얄밉게 내 두 볼을 쥐어잡아 늘릴 줄만 알던 그 손가락이 처음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한참동안 내 볼을 쓰다듬던 엄지손가락이 점점 아래로 타고 내려와 내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살짝 눌렀다. 굳게 닫혀있던 입술은 당연히 틈이 생겼고, 수백번도 넘게 부딪혀 이제는 익숙해진 손등의 촉감이 아닌 다른 사람의 무언가가 입술 끝에 닿았다. 순식간에 뜨거운 숨이 안으로 들어왔고, 삼켰다.
그게 아마 돌이킬 수 없는 소용돌이의 첫 시작이었다. 스스로도 이런 짓을 하면 형과 원래의 관계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귓볼이 만져지는 그 손길에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았었다. 그때의 윤정한이 나에게 얼마나 크고 대단한 사람이었냐면, 그 입맞춤 하나가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내릴 수 있게 만들었다.
“형 만난 걸 평생 후회하면서 살 거야.”
“...”
“형은 내 인생에서 만났으면 안되는 최악의 사람이었고,”
“...”
“그런 형을 사랑한 게 내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
“형 볼 때마다 곱씹을 거야.”
억울하면 그 여자랑 꼭 결혼까지 해. 그럼 내가 아아, 그때 헤어지길 잘했다, 그것만큼은 내 최고의 선택이었어, 형 보면서 말해줄게.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던 윤정한이 갑자기 멀쩡히 달리던 차선을 돌려 낯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차갑게 식은 윤정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속 뒤집어 놓으려고 한 말이라 일부러 더 모진 말만 골라서 하긴 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을 읽어낼 수가 없고, 뒤에 벌어질 일을 전혀 예상할 수가 없어서 두렵기도 했다.
아아 윤정한 설마.. 윤정한의 차가 유난히 어두운 조명을 달고 있는 어느 입구로 향하더니 지하 주차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아, 너 지금 진짜 빡쳤구나.
“뭐해.”
“...”
“내려.”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려 모텔이었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처음 잠자리를 가졌을 때에도, 길거리에서 갑자기 눈이 맞아 급하게 방을 잡아야 했을 때도, 술에 만취한 나를 들쳐메고 아무 방에나 눕혀 재워야 했을 때도, 그러니까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의로나 타의로나 발끝 한번 들여본 적 없는 그 모텔에 내가 와있다. 그것도 헤어지고 나서야.
나는 윤정한 네가, 잠자리에 관해서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싸구려 모텔에서 재우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스위트 룸만 고집하며 나를 배려하고, 그런 방식으로 나를 대접해줬다는 것을. 그런 네가 나를 모텔로 데려왔다는 건 나는 이제 정말 너에게 그저 해소제에 불과하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거부 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고, 도망칠 힘도 없다. 그냥, 그냥 눈 감았다 뜨면 내일 아침이었으면 좋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
묻고 싶다. 이석민 너는 대체 나의 어떤 점이 그렇게도 못미더웠던 건지. 오히려 살짝 불편한 티만 내도 ‘너 왜 나 싫어?’ 라며 습관적으로 묻던 사람은 나였잖아. 혹여나 마음이 상했을까 전전긍긍하며 묻는 나에게 너는 매번 ‘나 형 안 싫어, 좋아해.’라며 절대 무너질 리 없는 단단한 장벽처럼 굴었고, 나를 안심하게 만들었지. 그랬던 사람이 왜 그렇게 약해졌는지, 왜 혼자 만들어낸 망상 속에 스스로 몸을 던졌는지 그 이유를 굳이 찾아내보자면 나는 고민도 없이 김민규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새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들었다고 말한 건 진심이었어. 물론 김민규가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은 것이 먼저였고.
내 기준으로 생각해보자면, 우리 둘 사이에 김민규가 껴도 용서되는 상황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이석민과 내가 어쩌다 다퉜을 때 그 어디에도 풀 수 없는 푸념을 들어주고 -나에 대한-욕 한바가지를 함께 해주는 친구 역할. 아니면 가끔가다 나 대신 술 취한 이석민을 집에 데려다주는 역할 정도. 그 이상은 ‘제 3자’로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에게, 그것도 한 ‘남자’에게 거진 살아온 인생의 반을 꼴아박고 있는 지 친구가 안타까울 만도 했겠지. 그 점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제 3자’인 주제에 이미 마른 장작처럼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이석민에게 불씨를 던져준 건 솔직히 선을 제대로 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석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김민규가 대신 받은 적이 있다. 왜 네가 받냐고 물으니 이석민은 이미 술에 꼴아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죽어있다고 했다. 데리러 가겠다고, 위치 좀 알려달라고 했더니 싸가지 없게 알아서 찾아오랜다. 아 진짜 이 새끼를 죽일까 말까. 김민규는 본인조차 잔뜩 취해있는 말투로 내게 왜 석민이에게 확신을 주지 않았냐고 물었다. 내가 확신을 주지 않았다고?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이석민과 만나는 세월 동안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이석민이면 이석민이고, 아니면 아닌거지. 언제까지 석민이가 형 옆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어야 되는데요.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말 함부로 하지마. 말 함부로 한 김에 쫌만 더 해볼게요. 멀쩡히 여자랑 가정 꾸릴 생각이면 석민이 이제 좀 놔줘요 그냥. 진짜 얘 아끼는 친구로서 말하는 건데요. 이석민 옆에서 보면 너무 불쌍해요, 솔직히.
“대실이세요, 자고 가세요?”
“자고 갈게요.”
이석민은 본인의 감정을 대부분 얼굴 표정으로 드러낸다. 솔직하다고 해야할 지, 영리하지 못하다고 해야할 지. 얼굴에 싫어, 무서워, 다정하게 대해줘 라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싫다는 말도 없이 엉거주춤 차에서 내렸다. 이석민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러브 모텔’. 촌스러운 굴림체 간판에 고칠 생각이 없는 건지 네온 사인이 엇박자로 반짝이고 있었다. 카운터에 방을 달라고 하니 가림막 사이로 카드를 쥔 손이 튀어나왔다. 삐뚤어진 손 글씨로 호수가 적혀있는 싸구려 카드 키를 받아들고 먼저 걷다가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이석민을 불렀다.
“옆에 와서 걸어. 꼭 내가 강제로 하는 거 같잖아.”
“반은 맞잖아.”
“그래서, 안 할거야?”
“...”
“허튼 짓 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
“허튼 짓 하라고 판 깔아주는 건데 왜 이제 와서 선을 그어. 재미 없게.”
여기서 자면, 내일 출근은 어쩌려고. 따로 들어가면 돼. 둘 다 옷이 오늘이랑 똑같잖아. 그게 걱정이야? 그런 게 걱정이면 겁도 없이 커밍아웃은 어떻게 했대. 비꼬지마. 그냥 둘이 같이 잤구나 뒷말이나 나오겠지. 내 말에 이석민은 질렸다는 듯 나를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내 손에 쥐어져있던 카드 키를 조금은 아픈 손길로 낚아채갔다.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코 끝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다가온 이석민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윤 실장님, 저 다시는 실장님이랑 이런 식으로 더럽게 엮이고 싶지 않아요.
“실장님?”
“오늘 하루 실수했다 치고,”
“했다 치고.”
“내일 일어나면 그냥 없던 일로 해요.”
“...”
“우리 둘이 떡쳤다고 회사에 소문 나면,”
“...”
“겁도 없이 커밍아웃 한 제가 실장님 후린 걸로 해드릴게요.”
“...”
“그게 낫겠죠? 아무래도?”
화가 난 듯 자기 할 말만 하고서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는 이석민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화가 나면 마치 뇌가 언어의 필터링 기능을 잃어버린 듯 와다다다 쏘아붙이는 이석민은 언제나 나를 멈칫하게 만드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석민은 그 누구보다 온화하고, 다정했지만 그렇다고 절대 물러터진 사람은 아니었다. 좋은 게 좋은거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게 아니라 아닌 건 아니라고 화도 곧잘 내고는 했다.
그런데 대체 왜, 왜 그땐 나에게 진작 노선을 똑바로 정하라며 화를 내지 못했어. 왜 김민규한테 하듯 네 맘대로 굴지 않았어. 속은 썪어 곪아가면서 왜 나한테 진작에 다 토해내지 않았어. 뭐가 무서워서.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윽박지르면 내가 진짜 너를 버리기라도 했을까봐?
“안 들어오세요?”
“...”
“할 거에요, 말 거에요.”
하는 말은 꼭 나한테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들려도, 사실은 이석민 너의 손에 달려있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오히려 내가 여기서 ‘안 해’라는 머저리 같은 대답으로 혼자 발을 빼지는 않을테니. 거의 99 퍼센트의 확률로 나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이석민은 열려있는 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는 내 손목을 잡고서 모텔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마지못해 끌려온 척 얌전히 안으로 따라들어온 나는 이석민이 문을 잠긴 것을 확인하고 돌아서자마자 사슴 같이 긴 목덜미를 꽉 쥐었다. 그 다음은 너무나 당연하고, 뻔했다.
다짜고짜 입술을 맞대었다. 혀를 섞는다던지, 서로의 숨을 갈구한다던지 하는 끈적한 행위 없이 그렇게 입술만 맞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수십가지 고민을 했다. 이걸 계속 이어가도 될 것인가, 덮어놓고 저지르고 난 뒤에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그러다가 그냥 아무 감정 없이 일만 치르면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까지 도달했다. 헤어진 연인끼리 되도 않는 마지막 이별 여행을 하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몸을 섞고 훌훌 털어내는 것도 나쁜 건 아니라고.
입술에만 머물러있을 것처럼 굴다가 턱부터 점점 얼굴 선을 타고 내려와 목젖에 닿았다. 뒤로 한껏 꺾여진 뒷목을 잡고 목젖에 이어 쇄골까지 잘근 씹어가며 작게 흔적을 남기다가 손을 풀어 가슴팍에 갖다댔다.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려 하는데 이석민이 급하게 내 손을 제지했다. 잠깐만, 실장님, 잠깐만요. 우리 신발.. 생각해보니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문 센서등 하나에 의지해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겠으니까 그 좆같은 실장님 소리 좀 그만해. 마음 같아선 신발 좀 신고 하는 게 뭐 어떠냐 싶었지만, 본능에 잠식되어 앞뒤 분간도 못하는 사람이 되기는 싫어서 신발을 벗어냈다. 숙인 몸을 다시 일으키는데 갑자기 내 어깨 위로 가벼운 무게가 느껴졌다. 내 어깨에 머리통을 기대고 선 이석민 덕분에 퐁실하게 엉킨 까만 초콜릿 색 머리카락이 내 목덜미 부근에 닿아서 자꾸만 간지럽혔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나 마냥 기다려봤더니 귓가에서 작은 한숨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너 하기 싫지.”
“...”
“하기 싫음 말해도 돼. 그냥 나가면 되니까.”
“...”
“강제로 할 생각 없어, 석민아.”
“...”
“나 신발 다시 신어?”
“..하기 싫은데.. 하고 싶어.”
“그럼 하면 되잖아.”
“마음이 불편해.”
왜. 바람 피우는 사람 된 거 같아서 기분 더러워. 그럼 그냥 마음 편하게 네가 나 먹버한다고 생각해. 뭐? 오늘만 먹고 버린다고 생각하라고. 기꺼이 버림 당해줄테니까. 그 말에 이석민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진짜 먹히고 버려지는 사람이 형일까. 내가 아니고?
자조 섞인 말과 함께 내게 기댄 이석민의 몸이 더 축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무작정 눈 앞에 보이는 이석민의 목에다 냅다 바람을 불었다. 흐읍..! 유독 예민한 곳 중에 하나이기도 해서 이석민은 아주 빠르게 반응했다. 하지마아.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리는데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계속해서 숨을 불어댔다. 그만해애. 너 바람부는 거 꼴려하잖아.
“성감대가 눈에 보이는 데에 있는 걸 어떡해.”
“...나 그냥 할래.”
“마음 정했어?”
“하고 싶어졌어.”
그 말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석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그나마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내 스스로 끊어냈다.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기대고 있던 이석민의 얼굴을 잡아 급하게 입술을 부딪혔다. 갑작스럽게 닿아온 내 입술에 본능적으로 입을 꾹 닫아버린 너의 입술을 혀 끝으로 살살 쓸어냈다. 갈라진 입술 틈 사이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딱딱 들어맞아 잘 굴러가는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빈틈 없이 입술을 맞췄다.
어쩌다 한번씩 입술 사이로 숨을 내뱉을 때마다 얇은 실타래 같은 것이 주욱 늘어나기도 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타액을 주고 받으며 그 젤리 같은 입술을 조금 더 물고 빨기 위해 안달이 나있었다. 진작에 내 손에 뒷목이 잡힌 이석민은 점점 숨 쉬기가 버거워지는지 손으로 내 가슴팍을 작게 두드렸다. 입술을 잠깐 떼어내자 왠지 모르게 울 것만 같은 눈망울을 두 눈으로 마주했다.
“...진짜 안 잤어? 그 여자랑?”
“그걸 지금 왜 물어.”
“신경쓰여. 그게 계속 걸려.”
“안 잤어. 거짓말 아니야.”
“...”
“생각해봐.”
“...”
“네가 아는 윤정한이 정말 그럴 사람인지.”
내 대답을 끝으로 이석민은 가슴 쪽에 고이 올려놓았던 두 팔을 올려 내 목을 감싸고 폭 안겨들었다. 다시 시작된 입맞춤에 나는 뒤로 살짝 밀려났지만 곧바로 자세를 고쳐잡고 이석민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교차된 손을 들어 내 뒷머리를 쓰다듬다가도, 점점 거칠어지는 행위에 자꾸 내려와 눈가를 찌르는 내 옆머리를 세심하게 손가락으로 내 귓등에 걸어주기도 했다. 내가 안겨있는 이석민의 셔츠를 바지춤에서 꺼내며 침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갈 동안, 우리는 입술을 부딪히고 떼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내가 아는 이석민은 전희 과정 중에 키스를 가장 좋아했으며, 그만큼 가장 공을 들였다. 숨이 너무 차서 살기 위해 필히 공기를 들이마셔야 하는 순간에도 아랫 입술을 차마 떨어뜨리지 않았다. 우리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이석민은 내 눈이며 코 끝, 광대, 볼에 난 점까지 그 어느 곳 하나 빼놓지 않고 쪽쪽거리며 입술을 부벼댔다. 내 정강이 쯤에 침대 매트리스 끝 부분이 닿았고, 나는 스스륵 침대 위로 앉았다. 덕분에 어정쩡한 자세를 하고 있는 이석민을 안고서 그대로 몸을 돌려 침대에 살며시 눕혔다. 타의적으로 눕혀진 이석민은 팔꿈치로 침대 헤드가 있는 곳까지 천천히 움직였고, 나 역시 무릎을 굽혀 그런 이석민을 따라갔다. 베개를 베고 편하게 자리를 잡은 이석민의 골반 쯤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스탠드 조명을 켜니 촌스러운 주황색 빛이 침대 주변을 밝혔다. 하아.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석민의 얼굴은 꽤 오랜만이어서, 이게 이렇게나 자극적인 그림이었나 싶어 누워있는 이석민의 머리카락을 괜히 살살 쓰다듬었다.
“네가 혹시나 아직도 마음이 불편하면,”
“...”
“두가지 선택지를 줄게. 골라봐.”
“..뭔데.”
“첫번째, 그냥 넣고 빼기만 한다.”
“...”
“두번째, 원래 하던대로 한다.”
내 딴에는 이석민이 너무 굳어있길래 긴장이라도 풀라고 건낸 농담 같은 거였는데, 어째 원래부터 쳐져있는 눈꼬리가 한없이 더 내려가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한동안 대답이 없길래 나는 시선을 이석민에게서 거두고서 아까 풀다 만 셔츠 단추를 지나쳐 바로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 톡톡. 정적 속에서 오로지 버클 푸는 소리만 들려오는데 갑자기 이미 배꼽 아래까지 내려간 내 손가락을 잡아 위로 끌어올려 손깍지를 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교차되는 느낌이 꼭 몸을 끼워맞춘 느낌과 비슷해서 벌써 기분이 야릇해졌다.
원래 하던대로 해줘, 나 사랑했을 때랑 똑같이, 윤정한 답게, 다정하게, 이 세상에 우리 둘 밖에 안 남은 것처럼,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들어온 것처럼 정신 못차리게. 원하는 게 많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못할 게 뭐 있어, 못하겠으면 그만 두고.
몸을 일으키려는 이석민의 어깨를 잡아눌렀다. 나는 자신 있었거든. 조잘대느라 바빴던 입술을 물어 우리 둘 사이에 정적을 만들어냈다. 찹- 하고 야릇한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고, 그 사이 이석민은 제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냈다. 나는 여전히 이석민 위에 걸터앉아 스스로 옷을 벗어내는 꼴을 도와줄 생각 없이 마냥 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자극적인 장면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눈에 담아내기 위해서. 그러다 팔 부분을 빼느라 잠시 상체를 들어올린 이석민의 조그만 머리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긴장한 듯 벌써부터 땀에 살짝 젖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올렸다. 넌 이마 보이는 게 예뻐. 그 예쁜 이마에 입술을 한번 붙였다가 금방 떼어냈다.
가볍게 한 겹을 벗어내고 다시 침대로 풀썩 누운 이석민의 몸을 찬찬히 살폈다. 이석민은 모난 곳이 하나 없는 동그랗고 탄탄한 몸을 가졌다. 뼈라는 뼈는 죄다 튀어나와 있어 가끔 부딪히면 아프기까지 한 나와는 정반대로. 마냥 마르기만 한 몸이 아니라서 그 어느 곳을 쥐어도 손바닥 안에 가득 들어차는 부피감이 좋았다. 그 중에서 내 정성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아무래도 너른 가슴팍이었다. 만지기 좋은 촉감이기도 했고, 이석민 본인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가장 예민한 성감대이기도 했으니까.
“..아..! 아흣 형..”
검지와 중지 손가락 사이로 유별나게 솟아있는 유두를 살살 돌려가며 건드렸다. 으흣, 흡..!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이석민은 벌써부터 숨을 불편하게 쉬며 쌕쌕거렸다. 그럴 만도 한 게, 거의 세달 만에 가지는 관계였다. 한창 뜨거웠을 때에 지치지도 않는지 매일마다 몸을 부대끼며 밤을 새웠던 것에 비하면 적은 횟수였지만 그래도 3일에 한번은 의무적으로라도 꼭 몸을 섞고는 했었는데, 그것마저도 헤어지기 직전엔 아예 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이대로라면 생각보다 허무하게 빨리 끝나버릴까봐 어이가 없기도 하다가, 한편으로는 그래도 나 없는 동안 딴 놈의 손길을 타지는 않았구나 하는 이상한 안도감이 복합적으로 밀려들었다. 아아, 이러다 나 진짜 성격 이상해질 것 같으니까 빨리 끝내는 게 낫겠어.
“흐으.. 하.. 아 형..”
“어때. 기분 좋아?”
“..형.. 혀엉..”
“그럼 여기는 어떤데.”
“좋아.. 너,무.. 너무 좋아..”
“팔 위로 올려봐.”
이럴 때 만큼은 말 잘 듣는 어린 애처럼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 입력을 곧잘 하고는 했다. 양쪽 손목을 X자로 교차해 침대 헤드 쪽으로 들어올렸다. 아래로 내려오기 전 한번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패턴이야 항상 해오던 데 있어서 뻔하게 느껴질 만도 했지만 나는 오히려 입술을 지그시 쳐다보기만 해도 상대방이 너무나 당연하게 입술을 부딪혀주는 침대 위의 티키타카를 사랑했었다.
몸을 아래로 숙여 이석민의 귓바퀴부터 귓볼, 목선, 쇄골까지 입술로 빠알간 흔적을 만들며 내려왔다. 일부러 세게 물지마.. 나 내일 출근, 손가락으로 끊임 없이 희롱했던 터라 이보다 더 딱딱해질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해진 유두를 기어코 입으로 물었고, 이석민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아아.. 하앙.. 형 제발.. 이석민의 신음 소리는 평소 말하는 목소리의 높낮이에 비해 의외로 낮은 편이었다. 내가 입 안에서 혀로 유두를 세게 굴리면 굴릴수록 이석민은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셨다. 손가락으로 살며시 갈비뼈 라인을 쓸어내리자 나에게 여전히 결박되어 있는 제 다리를 들썩거렸다.
“형 나 바지 벗겨줘.. 답답해..”
“조금 이따가.”
“아 왜애..”
성격 급한 건 10년이 넘도록 바뀌지가 않네. 내 말에 이석민은 입꼬리를 잔뜩 내려보이며 울상을 지었다. ..재수 없어 윤정한. 응, 알고 있어. 그 사이에 놀고 있는 제 손들이 민망했는지 이석민은 팔을 내려 내가 입고 있는 셔츠에 손을 가져다댔다. 아, 석민아 형 아퍼. 이석민은 관계 중에 약간 귀엽다 할 버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흥분을 하면 그렇게 내 몸을 꼬집어대곤 했다. 그만큼 이 순간에 몰입을 해서 힘이 조절이 안되는 건지 단추 몇 개 푸는데도 가슴을 대체 몇 번을 꼬집는지. 둘 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서 피스톤질에만 열중하고 있을 때는 그 강도가 더 심해졌다. 내 양쪽 어깨가 손톱 꽉 잡아누르는 이석민의 손톱으로 인해서 성한 날이 없었을 정도로.
“그냥 내가 벗을게.”
“..시러어 내가 벗길 거야아.”
그럼 그러던가. 끝말을 길게 늘리면서 고집을 부리는 이석민을 제 맘대로 하게끔 놔두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마치 배경음악인 것 마냥 들으며 버클만 풀어놓은 바지 속으로 오른손을 쑤욱 집어넣었고, 벌써 어느정도 흥분이 올랐는지 반쯤 서있는 그것을 약하게 쥐었다 풀었다. 뜨겁게 열이 오른 것을 손에 쥐고서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내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갈수록 이석민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일단 손으로 한번 갈 거야? 원래 하던 루틴대로 한번 가기 전에 넣어야 할 지 아니면 별개로 해야할 지 단순한 궁금증으로 물어본 건데, 어디선가 주먹이 갑자기 날아와 맨가슴을 퍽 치고 갔다. 내가 뭐어, 손으로 깔짝대는 거에 갈 거 같애?
“갈 거 같은데..”
“..으흡..흣..하아..”
“알았어, 일단 이건 보류.”
모든 것을 토해내기 직전인 듯 새빨갛고 돌덩이만큼 딱딱해진 그것을 내 손아귀에서 해방시켰다. 무릎을 세워 자세를 고쳐 앉아 이석민의 바지춤을 붙잡았다. 바지춤과 함께 손가락에 걸려오는 드로즈까지 동시에 내려 벗겨냈다. 예고도 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제 나체를 나에게 보이게 된 이석민은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새삼스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석민의 한쪽 발목을 들어 내 어깨에 걸치게 하고는 내 무게를 실어 쭉 밀어올렸다. 이미 젖을대로 젖어버린 이석민의 입구를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실로 오랜만에 타인의 손길이 닿음을 증명하듯 그 곳이 생생하게 움찔거렸다.
으으, 아파 형.. 나 아파. 평소에 하듯 입구에 손가락을 두개를 집어 넣었을 뿐인데, 믿을 수 없게도 내벽이 손가락을 바로 조여왔다. 응, 그래보여. 이미 잔뜩 부어있는 입구는 조금만 더 건드려도 찢어질 듯이 아파보였다. 그동안 자위 한번을 안 했나보네. 이렇게까지 숭고한 정절을 지키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는데. 감히 손가락 하나 더 넣기도 미안해져서 여기서 그만 둘까 싶다가도, 양쪽 볼은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숨은 규칙적으로 쉬지도 못해 정신 못차리는 이석민은 당장이라도 박아버리고 싶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급하게 젤을 찾아 손가락에 잔뜩 묻혀 문질렀다. 열이 오른 온도에 금방 끈적거렸다. 마침내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갔고, 딱 내 것의 둘레 만큼 벌어졌다. 그리고 이석민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마구 두들겼다. 아파! 아프다고!
“넣기 전에 할 말 없어?”
“...없어. 그냥 빨리 해..”
“박아달라고 해봐.”
“..변태 새끼야..”
“침대 위에선 그거 칭찬이야.”
고작 몇 초가 흐른 것이겠지만, 내 체감 상으로는 몇 분과도 같은 고요함이었다. 응? 넣어달라고 애원해봐, 석민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손으로는 내 것을 살살 어루만지며 일으켜세우고 있었다.
원체 네가 그런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당장에도 입도 뻥긋하지 않고 버틸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근데, 그냥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이석민 네 감정을 내가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 말로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감히 애정이 아니라 애증일 지라도. 우리 둘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잖아, 절대 서로가 죽도록 싫어져서 헤어진 게 아니란 사실을.
“..형 결혼은 언제 하는데?”
어? 갑자기? 이런 분위기에, 이런 질문을 한다고? 이게 진정으로 삽입 직전에 나와도 되는 주제가 맞나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방금까지도 터질 것만 같던 텐션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고, 나는 입 안에서만 굴리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 얘기가 나올 타이밍인가? 지금이?”
“그냥.. 궁금해서..”
“그래, 궁금할 수는 있어. 근데 지금? 꼭 지금이어야 했어?”
“..아니 내가 가서 축하해줘야 되니까..”
“오면 뭐 어쩌게.”
“...”
“나랑 헤어지길 잘했다, 내 면전에 대고 말해주게?”
오바를 조금 보탠다면,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도 같았다. 그게 나를 지금 이 싸구려 모텔까지 오게 만든 문장이었다. 형 만난 걸 평생 후회하면서 살 거야. 형은 내 인생에서 만났으면 안되는 최악의 사람이었고, 그런 형을 사랑한 게 내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억울하면 그 여자랑 꼭 결혼까지 해. 그럼 내가 그때 헤어지길 잘했다, 그것만큼은 내 최고의 선택이었어 형 보면서 말해줄게.
이석민은 다 알고 하는 말이었다. 윤정한이라는 사람은, 가면을 뒤집어쓴 채 사랑 없는 결혼을 해서 너에게 ‘그때 헤어지길 잘했다, 그것 만큼은 최고의 선택이었어’ 같은 개소리를 듣고도 그 자리에서 네 손을 잡고 식장 밖으로 뛰쳐나갈 용기가 없다는 것을. 내가 겁쟁이라는 걸 너에게 다시 한번 확인받는 것만 같았다.
형은 진짜 내 전부야, 형 없으면 난 아마 못 살 거야. 너무 쉽게 장담하는 거 아니야? 나 없이 살아본 적도 없잖아.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그럴 일이 없으니까. 형은? 형은 나 없으면 어떨 것 같아? 그래도 어느정도 살아갈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헐.. 대박. 장난이야, 이석민 또 삐진다. ..그냥 이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만약에 나중에라도 헤어지게 된다면 누구 잘못 따질 거 없이 그냥 세월 탓을 하자. 우린 너무 오래 만났으니까 그런 핑계라도 댈 수 있잖아. 세월 탓을 왜 해, 그냥 내 탓 해. 맘 편하게.
그래서 그런 걸까. 그때 받아주지 말 걸 그랬다며 나를 만난 걸 평생 후회하고, 나를 사랑한 것이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진짜 내 탓을 하는 이석민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헤어짐이 온전히 한 사람 탓이 된다는 게 이렇게나 슬픈 일인 지 헤어져보고 나서야 알았다.
“..아니 그게 아니구..”
“석민아.”
“..응.”
“결혼 날짜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니야.”
“나는 잘 모르니까..”
“내 사정도 있는 거고, 그 사람 사정도 있는 거고.”
“...”
“둘 다 한테 최선으로 맞추려고 하다보면 꽤 걸리겠지, 아마.”
“...으응. 알겠어.”
..이제 넣어줘 형. 본인이 분위기를 깬 주범인 건 알았는지 주인 눈치보는 강아지 눈을 장착한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안들려. 크게 말해. 최대한 감정을 바닥에 내려놓고 무겁게 대답했다. 지금 나한테 화난 만큼 세게 박아줘. 빡친 윤정한 보고만 있는 거 진짜 개꼴리니까.
이석민의 허리를 잡고 살짝 들어올렸다. 등 뒤로 베개 여러개를 이리저리 모양을 내서 자세를 편하게 잡을 수 있게 끼워 넣었고, 이석민은 얼른 내가 제 안으로 들어와주기를 바라는 듯 들뜬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누웠다. 박아도 된다는 허락 아닌 허락을 받은 나는 내 손가락을 잔뜩 조여오는 입구를 양쪽으로 살살 벌려 아까부터 서있던 내 것에 콘돔을 끼운 채 갖다댔다.
넣을게. 아픈 건지 아니면 떨려서 그런 건지 눈을 꽉 감은 채 벌써부터 인상을 쓰고 있는 이석민을 바라보며 천천히 내 것을 밀어넣었다. 아.. 아아.. 흐읍..! 아읏! 야 윤정한...! 내 것이 뻐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여오는 내벽에 나 역시 정신이 아득해져 미칠 것만 같았다. 석민아 너 너무 뜨거워 지금. 조금 속도를 내서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는 내 허릿짓에 점점 위로 밀려나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기 시작한 이석민의 정수리에 더 이상 부딪히지 않게 내 손을 가져다댔다. 흐읏, 읍..! 아앙 아! 한동안 이 축축한 모텔 방 안이 오로지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신음 소리로만 가득 채워졌다. 손가락 뼈에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 헤드가 부딪히는 충격이 무뎌져갈 때 쯤, 몸이 녹아내린 듯 꼼짝없이 흔들리기만 하던 이석민이 상체를 들어올려 양쪽 팔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두 몸뚱아리가 그렇게 외설적일 수가 없었다.
이제 네가 움직여봐. 가까이서 보니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는 이석민의 이마부터 목덜미까지 손으로 닦아냈고, 나에게 푹 안겨 기운 없이 흔들리는 이석민을 혼자 내버려두고서 침대에 털썩 누웠다. 내 위에 앉아서 허리를 움직이며 손깍지를 껴오는 것을 피하지 않고 꽉 잡았다. 스스로 피스톤질을 시작한 이석민은 흥분이 오를수록 짧게 자른 제 손톱이 내 손등에 박히도록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 자세로 몇 번을 절정에 오른 이석민이 내 납작한 가슴팍으로 넘어지듯 쓰러졌다. 내 것을 빼고 내 위에 누워있는 이석민을 꽉 안고서 그대로 돌려눕혔다. 별다른 저항 없이 다시 침대 위로 눕혀진 이석민의 엉덩이를 두세번 정도 두드렸다. 엎드려. 내 말에 이석민은 덜덜거리는 무릎을 겨우 꿇고서 내게 등을 보인 채 엎드렸다. 우리의 섹스는 대체 언제 공백이 있었냐는 듯 찐득했고, 자연스러웠으며 날것 그 자체였다. 손바닥으로 매끈하게 잘빠진 허리 라인과 엉덩이를 스윽 쓸어내렸다. 그 손길 한번에도 이석민은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쩌면 그 어떤 순간보다 나를 제일 흥분시키는 순간이 아닐까. 나에게 정복된 채 가장 깊숙이 숨어있는 치부를 그대로 내놓고서 무방비 상태로 정복자의 침입만을 기다리는 뒷모습이라니.
“무릎에 힘 줘.”
“...”
“석민아.”
“...”
“이석민.”
두 팔로 머리를 감싸쥔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이석민은 무슨 일인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고 머리맡 쪽으로 얼굴을 갖다대자 아주 조용한 소리로 훌쩍거리는 게 느껴졌다. 너 지금 울어? 이석민을 돌려 눕히기 위해 머리를 감싸고 있는 한 쪽 팔을 잡아당겼다. 눈물로 가득 젖은 얼굴을 내 두 눈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원래 울고 있는 사람에게 설마 우는 거냐고 묻는 건 하면 안될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물어봐야 했다. 이 상황에 왜 우는 건지 나는 정말 이해 할 수 없었으니까.
“형 봐봐.”
“..아 그냥 해..”
“형 보라고.”
“..엎드리라매..”
“너 형 안 보면 안 넣고 이대로 밤샐 거야.”
하아. 속에서부터 올라온 듯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이석민이 나를 향해 돌아누웠다.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로. 움츠러든 어깨와 얼굴 위로 곱게 포개진 손가락이 계속해서 들썩거렸다. 형 인내심 없는 거 잘 알면서 왜 그래. 일단 말은 그렇게 하긴 했는데, 나는 이유 없이 울기만 하는 이석민에게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얘를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생각하며 목소리를 다듬었다.
왜 우는 건데, 뭐 맘에 안 들은 거라도 있어? 말해줘야 알지. 내가 너무 강압적이었어? 너무 나만 생각했나? 좋지는 않고 아프기만 했어? 그런 거면 여기서 그만 둬도 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조절이 안됐나봐. 살이 더 빠졌는지 예전보다 더 얇아진 손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아, 너무 좋았어. 근데 왜. 너무 좋아서. 진짜 말 그대로 너무 좋아서. ..좋은데 왜 울어. 정한이형.. 응, 석민아.
“...나 그냥 계속 형 옆에 있으면 안돼?”
“...”
“진짜 안 나대고.. 흐읍, 조용히 옆에만 있을게.”
“...”
“귀찮게 안 할게.. 형이 오라면 오구.. 가라면 갈게.”
“...”
“..형이 너무..”
너무 예전 그대로라서 나 진짜 힘들어.. 중간에 감히 끼어들 생각조차 못 했고,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갑자기 누가 내 전원을 꺼버린 듯 모든 사고 회로가 멈췄다.
울고 있는 이석민에게서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백하던 열아홉살 이석민이. 그보다 열살도 더 먹은 서른셋의 이석민에게 다시 이런 고백을 받게 될 줄이야.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던 때 이석민은 교복 위에 떡볶이 코트나 입고 다니는 어린애였는데, 어느날 내가 밥이나 먹자며 부른 햄버거집에서 내가 사준 콜라를 쪼옥 마시다가 냅다 고백을 해왔다.
같이 밥 먹자면서 형은 왜 안 먹어? 별로 안 땡겨. 사실 마음 같아선 술이나 빨러 가고 싶은데 너가 아직 어리니까. 왜 술이 마시고 싶은데? 형 여친이랑 깨졌어. 왜? 내가 자기보다 너를 더 많이 만난대. 그래서 헤어지자길래 생각해보니까 또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서 그러자고 했어. 내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석민은 마시고 있던 콜라를 내려놓더니 코트 소매 부분을 자꾸만 잡아당기며 만지작거렸다. 이석민이 가끔 할 말은 있는데 정리가 잘 안되서 머뭇거릴 때마다 하는 습관 같은 거였다. 마냥 귀여웠고, 그 말이 어떤 말일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차라리 속시원히 말해줬으면 싶었다. 그래도 얘가 나를 좋아하고 있겠거니 예상하는 것보다야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것이 더 기분 좋은 일이니까.
그래서? 여자친구 새로 사귈 거야? 뭐 딱히, 연애가 생각보다 그렇게 재밌지는 않네. 그럼 나랑 만나면 안돼? 나 형 좋아하는데. 응, 알아. 알고 있었어? 일찍도 말한다, 나 졸업하기 전엔 얘기할 줄 알았는데. 어? 그럼 교복 입고 데이트 할 수 있었잖아, 바보야. 형 이제 곧 군대도 가야 되고, 할 일 많아서 너랑 놀 시간도 없어.
뭐야. 이석민 울어? 너 진짜 아직도 애다.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결국에는 훌쩍거리는 이석민에게 학 모양으로 접어놓았던 냅킨을 다시 곱게 펴서 건넸다. 세게 문지르면 아프니까 살살 닦아. 기다릴게. 뭘 기다려. 형 복학할 때까지. 형이 다니는 대학 내가 어떻게든 가서,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때는 잔말 말고 나랑 만나.
이석민은 본인이 말한 약속을 지켰다. 결국엔 나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진학해 전공 강의실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꽤나 차있는 강의실 안에서 이석민을 한눈에 발견했던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따가울 법도 한 여름 햇빛이 그대로 내리쬐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전공 책을 살랑살랑 넘겨대던 그 모습을.
“..미쳤나봐 진짜아...”
“...”
“내 말 무시해도 대애..”
“하던 거 마저 해도 돼?”
“..우웅..”
“엎드려, 그럼.”
*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겨우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이 슬슬 주변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하니 근처에서 휴대폰 알람 소리가 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아 출근해야지. 시끄럽게도 울어대는 알람을 꺼버리고서 속으로 올라온 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젯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윤정한에게 몇 번이나 더 해달라며 매달렸던 게 꿈이었을까. 차라리 꿈이었다면. 나이는 한참이나 더 먹고서 열다섯살 때나 하던 몽정을 다시 하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은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마자 보이는 것이 색의 어울림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촌스러운 장미 문양 벽지라 나는 어제 일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헷갈릴 수조차 없게 되었다. 엎드려서 또 한번 한 이후에 세번 정도를 더 하고나서야 섹스는 끝이 났다. 허리와 아래쪽은 물론이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욱씬거렸다. 태어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찰싹 붙어있던 품에 꽉 안겨 끝장을 본 나는 물기 가득 머금은 젖은 빨래처럼 윤정한의 어깨 위로 축 늘어졌다. 그게 어제의 내 마지막 기억이다.
윤정한도 깼으려나. 나보다 잠귀가 훨씬 밝은 사람인데. 그게 아니라면 괜히 깨워주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힘겹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뭐 얼굴 마주보긴 조금 힘들지는 몰라도 어찌 됐든 우리 둘 다 출근은 해야 되니까. 근데,
“...갔네.”
누워있던 모양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누워있어야 할 사람은 없었다. 언제 가버린 건지 짐작 조차 할 수 없게 그 자리에 온기 하나 남기지 않고서. 뭐가 그렇게 바빠서 도망치듯 갔어. 나도 모르게 슬며시 손을 뻗어 비어있는 옆자리를 자꾸만 쓰다듬었다. 가버렸어.. 나 여기 있는데. 나만 놔두고.. 계속해서 혼잣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건 내 의지로 하는 게 아니었다. 내 의지였다면 진짜 다신 상대 안 할 나쁜 새끼라며 쌍욕부터 나왔겠지.
“..윤정한 너 진짜 최악이다..”
마지막까지 너 하고 싶은대로 하는구나. 윤정한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너와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사랑 받기를 원하는 순간은 전희도 아니고, 오르가즘의 순간도 아닌 관계를 끝내고 난 후라고. 나는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내 옆에 항상 네가 있기를 원했다. 누가 입 맞춰주면서 깨워달랬어? 그건 로맨스물에서나 지겹도록 나오는 얘기지. 잠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잖아. 그냥 그저, 어디 가지말고 내 옆에 있어달라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었던 거야?
“..아냐.. 먼저 가는 게 맞지..”
자꾸만 마음이 갈대마냥 이리저리 흔들렸다. 따지고 보면 윤정한 입장에선 일어나자마자 당장 여기서부터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미련이 가득해서, 섹스 하다가 구질구질하게 질질 짜기나 했던 전남친이 맨정신에 어떻게 감당이 되겠어. 곧 결혼도 앞두고 있는 사람이.
그래. 나는 항상 이랬다. 이미 상해버린 내 감정보다 윤정한이 왜 그랬을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을지 그것에 비중을 더 두었고, 항상 윤정한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했다. 그렇게 쌓아만 두다가 결국엔 이 꼴이 난 게 사실이지만. 어찌 됐든 우리는 일상 속에서 계속 얼굴을 부딪히며 말을 섞어야 하는 관계이고, 지금의 나로서는 윤정한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불편한 일 만들지 말자 석민아.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우이씨.. 왜 우냐 또..”
머리로는 정리가 되었어도, 마음으로는 전혀 안된 모양이었다. 갑자기 밀려오는 창피함에 누구 하나 보는 이 없었지만 이불을 질질 끌어모아 머리 위로 덮었다. 여전히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몸보다 나이 먹고 또 애처럼 울고 말았다는 사실이 나를 더 창피하게 만들었다. 나 스스로도 눈물이 많다는 게 이렇게나 짜증나고, 자괴감이 드는데 그걸 매일 보던 윤정한은 얼마나 피로했을까. 우는 애 앞에서 뭔 말도 못하고.
두터운 이불 속에서 소리내서 펑펑 울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없다. 한 톨 조차도.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사랑이 진정으로 어젯밤이 마지막이었다는 게 오늘로써 현실이 되었고, 나는 윤정한과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이 불편한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야 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의미 없는 인사를 나누며 윤정한의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 반지를 봐야 하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윤정한에게 묻어있는 와이프의 흔적을 지켜봐야만 한다. 가끔은 회사에 간식을 싸들고 직접 찾아온 와이프가 윤정한의 팔에 팔짱을 끼며 우리 남편 회사에선 어떤 사람이냐며 묻는 질문에도 좋은 분이라고, 결혼 잘 하셨다고 치켜세워줘야 할 지도 모르지.
“..흡.. 그냥 김민규네 회사나 갈까..”
덜컥. 내 울음 소리를 멈추게 한 건 의심의 여지 없이 모텔 방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윤정한? 너야? 나는 내가 방금까지도 엉엉 울고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어깨 아래까지 벗어던졌다. 왜 하필 지금이냐는 생각 따위는 할 겨를도 없었다. 오히려 윤정한 너이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깼네.”
“...”
“언제 일어났어.”
윤정한은 신발을 벗다가 침대 위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서 놀랐는지 잠깐 주춤거렸다. 방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윤정한의 손에는 흰색 비닐봉투가 들려있었다. 너 이거 마셔야 될 것 같아서. 봉투 안에서 부시럭거리며 숙취 해소제 한 병을 꺼내더니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나에게 내밀었다. 그 모든 행동을 지켜보면서 나는 숨 한번을 소리내서 쉬지 못했다. 못볼 걸 본 사람 마냥 온 몸이 굳어서 눈물을 닦아낼 수도, 울던 얼굴을 숨길 수도 없었다.
마주친 윤정한의 눈동자가 내 눈부터 콧대, 코 끝, 입술까지 훑어냈다. 일어나자마자 퉁퉁 부은 얼굴에 펑펑 울기까지 해서 지금 내 몰골이 얼마나 최악일 지 굳이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기가 부끄러워 나는 윤정한의 한 쪽 볼에 자리하고 있는 그 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 나가 있을까?”
“...”
“정리되면 불러.”
“그냥 있어.. 다 봐놓고 뭐하러 그래.”
그러고는 다시 정적. 나는 핑곗거리를 찾느라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화장실 가려다가.. 발가락을 찧어가지구.. 그래서.. 아파서.. 어차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걸 알고있지만, 그래도 윤정한이 그나마 마음의 부담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말도 안되는 내 핑계에도 윤정한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일부러 차키 보이는 데에 두고 나갔는데. 고갯짓을 하는 윤정한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니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차키가 이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어디 갔다왔어? 해장 할 데 있나 해서. 검색해도 안 나오더라고. 아아.. 그래서 찾았어? 근처에 24시 있더라. 먹고 가려고? 해장은 하고 출근해야지. 근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여전히 나체 상태로 앉아있는 내 벗은 몸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와는 반대로 아직 각이 살아있는 흰 와이셔츠 위에 넥타이까지 완벽하게 매어져있는 윤정한을 보고 있자니 다시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저 넥타이 재작년에 내가 사준 건데. 마음 속으로 소리 없는 메아리를 치면서 근처 바닥에 떨어져있는 속옷을 주워올렸다.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놓고 걸터앉아 속옷에 발을 한 짝씩 넣으려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윤정한과 딱 눈이 맞았다. 딴 데 봐, 아님 눈을 감던가. 조금은 짜증이 섞인 내 말에 윤정한은 어이없다는 듯 크게 코웃음을 치며 왼손으로 제 두 눈가를 가렸다.
아침 먹고 같이 들어가. 싫어. 나 택시 타고 갈거야. 뭐하러. 몰라서 물어? 뭘 같이 들어가, 제정신이야 지금? 같이 잤다고 광고하냐? 나 돈 벌어야 돼, 여기 오래 다닐거야. 은근슬쩍 손을 내린 윤정한이 답답한지 묶여있는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냈다. 별 탈 없이 지나갈 수도 있어. 왜 사서 걱정을 해. 나는 윤정한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어제와 똑같은 차림새 그대로, 시간의 텀도 두지 않고 두사람이 함께 사무실에 들어간다? 그럼 그게 이미 커밍아웃한 나에게 더 타격이 클까, 아니면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예비 신랑에게 더 클까. 왜 버리고 가도 될 리스크를 굳이 껴안고 가려고 하냐 이 말이야.
“형은 걱정을 사서라도 쫌 해.”
“사람들이 뒷말 하는 거 혹시나 듣게 되면,”
“...”
“남자친구한테 다 이른다고 해.”
“...누가 남자친군데.”
“내가 다 조져놓을게.”
“...”
“나 나름 윗대가리잖아, 여기서.”
알지, 윗대가리니까 그 직책에 그렇게 샛노란 색으로 염색하고 다녀도 아무 소리도 안듣지. 속으로만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새어나왔는데, 지금 내가 웃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남자친구? 당장 방금 들은 말이 지금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싶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누가 내 남자친구인데. 윤정한 본인 지칭이라면 전남친 아닌가?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잖아. 근데 왜 나는 바보처럼 입도 못 떼고 있는 거야. 순간 내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워졌다. 이제야 깨달은 건데, 윤정한에게 무슨 말이냐고 다시 되묻지도 못할 정도로 나는 이미 자존감을 바닥에 모두 내팽겨쳐놓은 상태였다. 혹시라도 틀린 답이면 어떡해. 내가 내 멋대로, 나 듣기 좋은대로 이해해버린 거면 어떡하냐고.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속이 어지러운 나를 읽기라도 한 듯 윤정한이 먼저 입술을 뗐다. 어제, 많이 취했었어? 그니까 내 말은, 어제 나한테 한 말.. 다 술김에 취해서 한 말이야?
“아니.”
“...”
“나 하나도 안 취했었어.”
“...”
“진심이었어. 전부.”
그 질문에 있어선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윤정한 네 옆에 있고 싶었던 건 사실이고, 지금도 그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맨정신에 지금 당장 다시 해보라면 다시 해줄 수도 있었다. 열번도 더 해줄 수 있어. 어제 그 말을 했던 나 역시 전혀 취하지 않았으니까. 얼핏 윤정한이 입꼬리를 올리는 걸 본 것도 같았다. 아니, 확실히 웃고 있었다. 다행이라는 듯,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는 듯이 윤정한은 한껏 가뿐해진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지금 윤정한이 정말 나와 같은 마음일까 확신이 서지 않아서 굳어있는 얼굴 표정을 풀어낼 수 없었다. 계속 형 옆에 있게 해달라는 말이 우러나온 진심이긴 했어도, 소원처럼 이루어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내가 아는 윤정한은 자기가 틀렸음을 쉽게 인정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우리가 불꽃이 생명을 다 하기 전 마지막에 가장 붉게 피어오르듯이 가장 크게 다퉜을 때 윤정한은 우리가 여지껏 정으로 만나고 있는 건지, 의무로 만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거기서 우리의 연애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어. 둘 중에 답이 뭐가 됐든 지금 우리 사이에 사랑은 없다는 사실이 무려 윤정한의 입으로 증명된 거니까.
“그럼 됐어.”
“형은 어떤데?”
“...”
“형은 어제 나한테 진심이었어?”
“석민아.”
“또 나만 진심이지.”
윤정한 너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내연남 노릇까지 하게 생겼잖아.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뱉어냈다. 말하면서도 내 스스로가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 대체 윤정한 쟤가 뭐가 예쁘다고.
하아. 한숨을 쉰 건지, 웃음이 터진 건지 구별할 수 없었다. 윤정한은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더니 관자놀이 쪽을 꾸욱 눌러댔다. 곧이어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듯한 목소리가 방 안에 낮게 깔렸다. 형 결혼 안해. ..왜 안해? 갑자기 훅 들어온 윤정한의 고백에 말문이 막혀서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다가 정말 아무 대답이나 해버리고 말았다. 왜 안하냐고? 진짜 하길 바래? 윤정한은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져서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 남자 좋아하는 거 알아. 그 여자도 만나는 사람 따로 있고. 윤정한 너는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너 어디까지 오기 부리는지 보고 싶어서. 내가 너랑 헤어진 게 단순히 오기 부리는 거야? 그럼 아니야? 네가 나한테 진짜 정 떨어져서 헤어진 거였으면 넌 어제 내 차 타지도 않았을 거야. 재밌었어? 재밌다기보단 너 하는 짓이 귀여웠어. 그래서 그냥 냅뒀어. 나 좋아하면서 미련 없는 척 하는 거. 내가 예전부터 말했지,
“너는 얼굴에서 다 티난다고.”
오늘 저녁에 만나서 끝내려고. 선 보라고 쪼는 거 한동안 안 들어도 되고 편해서, 딱히 헤어질 이유가 없었는데. 오늘 드디어 이유가 생겼네.
“내가 잘못했어.”
“...”
“내 옆에 있어줘. 어디 가지 말고.”
“...”
“너 맘대로 나대도 되니까.”
어제 한참을 자신에게 매달리는 나를 바라보며, 헤어짐을 택한 우리의 선택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다시 되돌려놔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윤정한의 마음은 어땠을까. 당장이라도 너에게 안겨들고 싶어하는 지금의 나처럼 너도 이렇게나 벅차올랐을까. 물어보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와다다 쏟아내고 싶었다. 지금 우리가, 절대 만날 일 없는 평행선을 걷고 있는 게 아니라 운동장 트랙을 빙빙 돌아 다시 출발선 앞에 서있는 거라면, 내가 이대로 다시 너의 손을 잡아도 되는 건지.
“씻고 나와, 밥 먹으러 가게.”
..응!! 혹여라도 마음이 바뀔까봐 엉덩이에 스프링이 달린 장난감처럼 재빠르게 튀어올랐다. 욕실로 걸어가는 내 뒤에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예전에나 듣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석민아. 응.
“미안해.”
“..뭐가.”
“이런 데로 데려와서.”
“...”
“...싫었지.”
눈꼬리를 한껏 내리며 ‘싫었지’라고 묻는 윤정한의 표정이 너무나도 다정하고, 진심으로 미안해보여서. 그 짧은 세글자 단어에 복합적인 감정이 모두 담겨있어서, 어쩌면 나를 사랑했던 그 때 그 모습 그대로라서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냈다. 당장이라도 그 품 속에 안겨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나보다 고작 두살 더 많은 윤정한은 딱 두살 만큼 더 어른 같았다. 항상 동갑내기 친구 같다가도, 가끔씩은 동생처럼 어리게 굴어서 내 속을 뒤집어 놓던 윤정한은 꼭 이럴 때 만큼은 부정할 수 없이 어른이었다.
아니, 좋았어. 신경쓰지마. 평소의 나였다면 이렇게 대답 했겠지. 그게 우리 둘 다 마음 상하지 않고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니까.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어준 윤정한을 빈정 상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만큼은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었다. 괜히 속마음을 숨겨서 쓸데없이 오해만 쌓여가는 그런 바보짓은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아. 우리가 헤어져있음으로 멈춘 그 시간을 다시 제 속도로 움직이게 해야 해.
“..응. 싫었어.”
“...”
“그러니까,”
“...”
“다음부턴 그러지마. 알겠지?”
눈물을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는 말마다 말 끝에 울음기가 묻어나왔다. 그래, 알겠어. 윤정한은 편안한 얼굴을 지어보이며 나를 달랬다. 네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바라볼 때마다 그게 나한테 얼마나 완전한 안정감을 주는지 너는 모르겠지. 아니, 이제 알게 될 거야. 내가 이제부터 너한테 하나도 빠짐 없이 다 말해줄 거니까.
“지금 한번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
“..어떻게 알았어.”
“나도 그래.”
마주보고 있는 시선은 서로에게서 단 한번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윤정한이 셔츠 손목 부분을 살짝 걷어 제 손목에 채워져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너 해장 안해도 되면 가능하고.”
“나 안 취했다니까.”
멀리 앉아있는 윤정한을 향해 오른손을 쭉 뻗었다. 네가 내 쪽으로 오라는 뜻이었다. 내 말을 알아들은 윤정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느긋한 손길로 제 넥타이를 풀어내고 있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윤정한이 엄지 손가락으로 내 아래 턱을 살짝 눌렀다. 고개를 살짝 꺾어 자연스레 벌려진 아랫입술의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 들었다. 손가락 사이 사이로 윤정한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들어와 손가락을 간지럽게 했다. 고른 치열이 혀 끝으로 느껴지고, 혀와 혀가 부딪히는게 생경하게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젤리 같은 아랫입술의 촉감이 좋아 미치겠어서 이로 몇 번 씹자 아프다는 듯이 내 등을 토닥였다. 서로 입술을 탐미하는 미치도록 야한 소리가 우리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윤정한이 몸으로 들이댄다고 밀릴 내가 아니었지만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다가 어느새 등 뒤로 딱딱한 욕실 문이 닿았다. 윤정한이 내 허리 뒤로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아돌렸고, 그리고 우리는 그대로 욕실 안으로 휩쓸리듯 들어섰다.
“같이 씻게.”
물고기가 살지 않아 텅 비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어항 안에 깨끗하고 맑은 물이 새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끼가 잔뜩 끼어있는 돌멩이와 바윗덩어리가 사라졌고, 작고 예쁜 자갈들이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같이 있어도 서로에게 외로움 밖에 줄 수 없어서 어항을 떠나버렸던 똑 닮은 물고기 두마리는 두 손바닥 안에 소중히 담겨있다가 조심스럽게 새로운 어항 안으로 들어와 헤엄쳤다.
너는 소용돌이 같이 위험한 사람이라 괜히 근처에 있던 내가 발을 잘못 헛디뎌 순식간에 빨려들어갔다고 괜히 네 탓을 하고는 하지만, 사실은 내가 스스로 걸어들어갔다고 생각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애초에 그곳에 발도 들여놓지 않았을 테니까. 처음부터 알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비정상이라는 걸 엄마 뱃속에서 알았다면, 나는 망설임도 없이 탯줄로 목을 맸을거야. 생각해보면 내가 나를 부정하지 않고, ‘나’일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은 오로지 너였더라고. 내 모든 처음이 너라서 다행이고, 나를 네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줘서 고마워. 어쩌면 모두에게 우리는 틀린 답처럼 보이겠지만, 서로에게 서로가 정답이면 그걸로 된 거야.
내 다시 없을 첫사랑이자,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이자, 내가 평생토록 안고 가야 할 사랑하는 나의 애증에게.
작가님께 감상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