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존재
그날은 어쩌면 운명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신기한 날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평소와 같았으면 이렇게 마음을 쓸 일도 없었을 거라는 말이 되는
거고. 사랑을 시작하면 바보가 된다고 하던데, 짝사랑도 포함이던가. 그날 학교
뒤뜰로 가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우는 너와 부딪히지 않았더라면. 인생에서 제일
후회되는 순간과 잘했다고 생각이 되는 순간을 떠올리라고 하면 그날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았다. 너무 행복해서 후회되는 모순적인 그날이.
[ 여름의 존재 ]
학교에서 자습만 주는 고3의 일상은 상당히 무료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료라니 안 어울리긴 하지만.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싶어서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밖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지잉- 울리는 핸드폰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방금 나온 것 같은데, 얘도 참 칼 같네. 자는 거 확인하고 나왔는데 언제 깬 건지. 어디냐는 물음에 답장하면서도 뒤뜰로 향하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 +999 승철
——————————————————————————
야 윤정한
곧 수업 시작인데
너 어디야?
나 뒤뜰~
이번 시간만 넘기고 들어갈게
쌤한테 말 좀 잘 해 줘 알겠지?
뭐래
빨리 와라 너?
어어 너만 믿을 게 승철아 ㅎㅎ
야 안 된다니까?
윤정한
야!!! 1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고 화면을 꺼 주머니에 넣었다. 말을 저렇게 했어도 알아서 잘 얘기해 줬을 거다, 그렇게 안 생겼으면서 의외로 정이 많은 타입이니까. 들어갈 때 매점에서 과자나 사서 가야겠다고 생각한 뒤 뒤뜰로 향하는 코너를 돌다 쿵 소리가 나며 넘어졌다. 물론… 내가. 무슨 일인가 상황 파악이 안 돼서 그대로 앉아 있으니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 그냥 말한다고 하기에는 물기가 서려 있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헉, 아니, 그..."
"넘어진 건 난데, 왜 네가 울려고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죄송해요… 제가 앞을 못 봐서."
우는 애한테 사과받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뭐야, 내가 괴롭힌 것 같잖아. 괜찮다고 하려는 순간 뿌엥 울음소리가 더 커지더라. 사람이 이렇게까지 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윤정한 19년 인생 중 가장 난감한 상황, 고백을 거절했다가 쌍욕을 들었을 때보다 황당했다. 이걸 어쩌나… 수업 째는 벌을 이렇게 받는 건가 싶었다. 근데 이거 조금 익숙한 상황 아닌가. 왜, 인터넷 소설 같은 거 보면 나오는 남주와 여주가 부딪혀 서로를 알게 되어 인연이 시작되는 거. 승철이가 매번 클래식 네버 다이를 외치며 인터넷 소설을 보던 게 생각났다. 진부해도 이렇게 수요가 있으니까 끊임없이 소재로 나오는 거겠지. 그래도 일단… 우는 애를 달래는 게 먼저겠지 싶어 급히 생각을 떨쳐냈다.
"저기… 이석민?"
"그만 울자, 내가 너 울린 것 같잖아."
"왜 우는데? 누가 괴롭혔니."
"아니요, 그냥… 오래 좋아했던 애한테 고백했는데 차여서."
"저도 안 울고 싶었는데…"
"이걸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도 쪽팔리고…"
얼씨구, 차인 거 하나로 이렇게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운단다.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 이렇게 순진해서 어떡하나 싶었다. 어째 훌쩍거리는 게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참았다.라고 하기에는 어떻게 놀려 먹지 하는 생각이 가득 찼지만.
"근데… 제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긴, 나 초능력 있어."
"헐, 진짜요?"
"진짜겠니, 당연히 명찰 봤지."
"아, 근데 왜 반말…"
"명찰 색 다르길래, 2학년이지?"
"3학년이었어요?"
"하긴, 처음 보는 얼굴이니까."
"이렇게 잘생긴 사람 없었거든요."
"ㅋㅋㅋㅋㅋ 너 진짜 골때린다."
"그런 기념으로 수업 가기는 그른 것 같으니까 좀 앉아 있다 가자."
어색한 건지, 거절하기 조금 그래서 억지로 있는 건지, 운 게 창피해서 그런 건지. 눈만 굴리고 있는 게 꽤 귀여워 웃으니 왜 웃냐는 듯 눈을 흘기는 것도 밉지 않았다. 아, 사람이 귀여워 보이면 답이 없는 거라고 하던데. 이런 생각을 해 봤자 이미 번호 교환까지 끝내고 석민이를 교실로 보낸 뒤였다.
1학년 7반 이석민… 이름을 읊으니 떠오르는 눈물이 맺힌 얼굴에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 이런 취향이었나) 그렇게 가랑비가 서서히 옷을 적시는 것도 모른 채, 다가올 날을 알지 못한 채. 실실 웃는 모습을 보고 최승철이랑 홍지수가 미쳤냐고 물었지만 남이사 무슨 상관.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미쳤었나 보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을 맞으니 나른해져 감기는 눈에 저항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 이후로 윤정한과 이석민의 거리가 좁혀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석민은 워낙 붙임성이 좋았고, 둘이 의외로 대화 코드가 잘 맞아서 연락을 자주 했으니까. 오죽하면 석민이 형… 형은 고삼 아니야? 왜 맨날 나랑 놀러다녀? 이럴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질 윤정한이냐… 절대 아니다. 석민이 그렇게 물으면 늘 너 왜 나 싫어? 이제 형이랑 놀기 싫다 이거지… 이러며 석민을 놀리기 바빴다. 그때까지만 해도 윤정한은 둘의 우정이 그 누구보다 특별하고 돈독한 우정인 줄 알았다. 애석하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조금씩 자리잡고 있었다는 걸 알기에는 고작 열아홉,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내리기에는 여전히 서툰 아이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윤정한이 본인이 이석민을 좋아한다는 걸 자각한 게 언제냐 하면…
같이 공포 영화를 보러 가서 화면의 절반도 못 보고 내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가리고 있을 때? 아니면 세심하고 다정한 성격 때문에 늘 내가 동생인 것마냥 하나하나 챙겨 주려고 할 때?(이러고 다 내가 해 줬지만) 사실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수도 없이 많을 거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며 저 멀리서 달려올 때 짓는 표정들조차 나에게는 사랑이었으니까. 흔히들 말하는 썸.(ex. 자기 전까지 전화하기, 집 갈 때 데려다 주기, 좋아하는 거 기억해뒀다 사 주기 등) 전부 우리의 이야기에 포함이 되어 있지만 그저 형동생 사이라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그 이후로 의도적으로 이석민을 피해 다녔다. 수능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3학년 분위기 때문에 석민이 교실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급식실이나 동네에서 마주쳐 이름을 부를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승철이와 지수의 등을 밀며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승철의 둘이 싸웠냐는 물음에 지수가 에이, 석민이랑? 얘가 잘못했겠지~ 이러는데 어찌나 억울하고 얄미운지. 잘못은 나한테 마음도 없으면서 마음 있는 것처럼 구는 석민이한테 있는 거 아니야? 입밖으로 내지도 못할 억울함을 토해냈다. 그나저나 상처 많이 받았으려나, 하니 당연하다는 듯 지수가 그렇게 대놓고 피하는데 모르는 사람이어도 상처 받지, 더군다나 석민이는 남들보다 더 여리잖아.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괜히 헛웃음이 나오더라. 이래서 헤테로는 마음에 담으면 안 되는데, 이제 정말 끝이다. 계속 피해 다닐 수는 없으니 하루 빨리 마음을 접고 다시 석민을 마주해야 한다. 석민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동생으로, 다시 이석민의 둘도 없는 짱친 윤정한으로. 분명 이렇게 다짐을 한 지 일주일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저 멀리서 화난 얼굴로 네가 달려오는 건지. 환각이라도 보는 건가 싶어 눈을 비비니 이제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정한이 형!"
아, 착각이 아니었다. 저기서 달려오는 인영은 분명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이석민이었다. 그런 다짐을 한 게 무색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네 얼굴을 보니,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더라. 나는 여전히 너에게 약하다는 사실이 허무하기도 하고, 피해 다닌 걸 알고 원망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도망가려던 찰나 너에게 잡힌 손목에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뿌리치고 갈 수 있었겠지만, 숨을 고르던 이석민이 한 말 때문에 가지 못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형, 너 이번에도 나 피하면 진짜 다시는 안 본다!"
어쩌면 겁쟁이는 이석민이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평생 안 볼 자신도 없었으면서. 한참을 가만히 있자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손목을 잡느라 힘을 줬던 손이 스르륵 풀렸다. 그러고는 꽤 오랜 시간을 서로 바라보다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이석민 눈에 눈물이 고인 걸 계속 보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그나저나 잘 피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얘는 대체 나를 어떻게 찾아낸 건지. 설마 이제 같은 마음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금세 생각을 떨쳐냈다. 왜? 이석민은 천성이 다정한 사람이라 윤정한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잠적을 하여도 이렇게 지금과 같이 눈에 눈물을 달고 찾을 사람이니까. 괜히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사랑을 하면 행복하다고 하더니. 순 구라였지, 전부. 행복은 무슨… 차라리 도려내고 싶었다. 이렇게 쓰릴 바에는 텅 비어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야, 승철아. 사랑이 이렇게 아프기만 한 거였냐? 나 심장 부근이 콕콕 쑤시는 게 아무래도 심장병인가 봐… 수신인에게 닿지도 않을 말만 곱씹었다. 물론 그대로 전했으면 미친 건 알았지만 드디어 미쳤냐며 징그럽다고 헛소리하지 말라고 욕을 먹었을 테지만. (나도 진짜 물어볼 생각은 없다 정말로) 그나저나 시간이 아까보다 더 지났는데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정말 나를 왜 찾아온 건지. 마음에도 없는 원망만 하다 한숨을 쉬었다.
잠깐 내리던 소나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과 거칠게 부는 바람이 만나 태풍을 일으킬 줄 누가 알았을까. 가벼운 감정이라 치부했던 지난 시간이 우스워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아, 젠장. 비상이다. 잘못하면 입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다 삼켜버린 흑심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삼킨 감정들이 얽히고 뭉쳐져 더 큰 소용돌이를 만들어 날 벼랑 끝에 내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본인을 더 갉아먹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모습을 홍지수가 봤다면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겠지. 괜한 생각에 갑자기 서러워졌다. 정말이지… 눈물겹도록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띠링, ⚠[중앙마음재난안전대책본부]⚠
마음 깊숙이 묻어둔 순정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마음을 헤집고 있습니다. 마음 내부에 많은 피해가 있는 가운데, 비가 얼마나 내리는지 마음이 침수당해 순애로 변한 지 오래예요. 이 이상은 저희 본부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윤정한은 부디… 알아서 잘 살아남길!
마음 재난 안전 대책 본부라는 게 있었다면 이런 메시지가 왔을지도 모르겠다. 들리지도 않고 올 일도 없는 메시지 알림음이 들리는 기분이랄까. (마음 주인을 닮은 건지 상당히 무책임한 메시지인 것 같지만) 너에게 닿을 수 없는 마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나도 알 수가 없어서 생긴 두려움이, 남들이 보면 유난일지도 모르는 약도 없다는 지독한 사랑 병이, 망가지지 않고 더욱 견고해지는 애정을 너에게 보일 날이 올까. 견고해진 마음에 비해 한바탕 휘몰아친 소용돌이가 지나간 머릿속은 모든 게 뒤엉키고 부스러졌다. 그냥 좋아한다고 해버릴까… 괜히 하지도 못할 말을 곱씹으며 우산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석민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쪼그려 앉아서 고개만 든 채,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형, 오늘이면 장마도 끝난대."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으면 얘기해 주면 안 돼?"
"…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그럼 그동안 나 왜 피했는데."
"..."
"무슨 일인지 안 알려 줄 거야?"
"안 피했어."
"피했잖아, 나 형 한 달 만에 보는 것 같아."
"하여튼 윤정한... 진짜 치사해."
"뒤에 형은 어디 갔어."
"내가 먹었다, 왜!"
"형, 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죽어도 모를걸."
"그거에 비하면 형 안 붙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 석민이 뒤끝 긴 건 여전하네."
"다 울었니."
"그러게 누가 말도 없이 피해 다니라고 했나."
"그리고 나 안 울었어."
"울었으면서."
"안 울었다니까?"
"헐, 비 그쳤다."
"이번만 봐주는 거야, 알았어?"
"다음에는 이유 말해 줄 때까지 쫓아다닐 거니까."
네 말대로 유난히 길었던 장마 끝에 그친 비가, 점차 걷어지는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에 비친 네가 웃는 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운 날, 나는 역시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나는 오늘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석민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야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달까.
"저기요, 윤정한 씨~ 내 말 듣고 있지?"
"형, 듣고 있냐고오."
진부한 사랑 이야기, B급 로맨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독백. 내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지만 어느새 붉게 물든 마음이, 천천히 색이 채워지는 스케치 위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피어나 번져갔다. 여름의 존재는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마음에 스며들어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 그렇게 내가 너에게.
윤정한이 이석민에게 또 한 번 사랑에 빠진 날이었다.
[ 여름의 존재 ]
학교에서 자습만 주는 고3의 일상은 상당히 무료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료라니 안 어울리긴 하지만.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싶어서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밖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지잉- 울리는 핸드폰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방금 나온 것 같은데, 얘도 참 칼 같네. 자는 거 확인하고 나왔는데 언제 깬 건지. 어디냐는 물음에 답장하면서도 뒤뜰로 향하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 +999 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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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윤정한
곧 수업 시작인데
너 어디야?
나 뒤뜰~
이번 시간만 넘기고 들어갈게
쌤한테 말 좀 잘 해 줘 알겠지?
뭐래
빨리 와라 너?
어어 너만 믿을 게 승철아 ㅎㅎ
야 안 된다니까?
윤정한
야!!! 1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고 화면을 꺼 주머니에 넣었다. 말을 저렇게 했어도 알아서 잘 얘기해 줬을 거다, 그렇게 안 생겼으면서 의외로 정이 많은 타입이니까. 들어갈 때 매점에서 과자나 사서 가야겠다고 생각한 뒤 뒤뜰로 향하는 코너를 돌다 쿵 소리가 나며 넘어졌다. 물론… 내가. 무슨 일인가 상황 파악이 안 돼서 그대로 앉아 있으니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 그냥 말한다고 하기에는 물기가 서려 있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헉, 아니, 그..."
"넘어진 건 난데, 왜 네가 울려고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죄송해요… 제가 앞을 못 봐서."
우는 애한테 사과받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뭐야, 내가 괴롭힌 것 같잖아. 괜찮다고 하려는 순간 뿌엥 울음소리가 더 커지더라. 사람이 이렇게까지 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윤정한 19년 인생 중 가장 난감한 상황, 고백을 거절했다가 쌍욕을 들었을 때보다 황당했다. 이걸 어쩌나… 수업 째는 벌을 이렇게 받는 건가 싶었다. 근데 이거 조금 익숙한 상황 아닌가. 왜, 인터넷 소설 같은 거 보면 나오는 남주와 여주가 부딪혀 서로를 알게 되어 인연이 시작되는 거. 승철이가 매번 클래식 네버 다이를 외치며 인터넷 소설을 보던 게 생각났다. 진부해도 이렇게 수요가 있으니까 끊임없이 소재로 나오는 거겠지. 그래도 일단… 우는 애를 달래는 게 먼저겠지 싶어 급히 생각을 떨쳐냈다.
"저기… 이석민?"
"그만 울자, 내가 너 울린 것 같잖아."
"왜 우는데? 누가 괴롭혔니."
"아니요, 그냥… 오래 좋아했던 애한테 고백했는데 차여서."
"저도 안 울고 싶었는데…"
"이걸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도 쪽팔리고…"
얼씨구, 차인 거 하나로 이렇게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운단다.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 이렇게 순진해서 어떡하나 싶었다. 어째 훌쩍거리는 게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참았다.라고 하기에는 어떻게 놀려 먹지 하는 생각이 가득 찼지만.
"근데… 제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긴, 나 초능력 있어."
"헐, 진짜요?"
"진짜겠니, 당연히 명찰 봤지."
"아, 근데 왜 반말…"
"명찰 색 다르길래, 2학년이지?"
"3학년이었어요?"
"하긴, 처음 보는 얼굴이니까."
"이렇게 잘생긴 사람 없었거든요."
"ㅋㅋㅋㅋㅋ 너 진짜 골때린다."
"그런 기념으로 수업 가기는 그른 것 같으니까 좀 앉아 있다 가자."
어색한 건지, 거절하기 조금 그래서 억지로 있는 건지, 운 게 창피해서 그런 건지. 눈만 굴리고 있는 게 꽤 귀여워 웃으니 왜 웃냐는 듯 눈을 흘기는 것도 밉지 않았다. 아, 사람이 귀여워 보이면 답이 없는 거라고 하던데. 이런 생각을 해 봤자 이미 번호 교환까지 끝내고 석민이를 교실로 보낸 뒤였다.
1학년 7반 이석민… 이름을 읊으니 떠오르는 눈물이 맺힌 얼굴에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 이런 취향이었나) 그렇게 가랑비가 서서히 옷을 적시는 것도 모른 채, 다가올 날을 알지 못한 채. 실실 웃는 모습을 보고 최승철이랑 홍지수가 미쳤냐고 물었지만 남이사 무슨 상관.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미쳤었나 보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을 맞으니 나른해져 감기는 눈에 저항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 이후로 윤정한과 이석민의 거리가 좁혀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석민은 워낙 붙임성이 좋았고, 둘이 의외로 대화 코드가 잘 맞아서 연락을 자주 했으니까. 오죽하면 석민이 형… 형은 고삼 아니야? 왜 맨날 나랑 놀러다녀? 이럴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질 윤정한이냐… 절대 아니다. 석민이 그렇게 물으면 늘 너 왜 나 싫어? 이제 형이랑 놀기 싫다 이거지… 이러며 석민을 놀리기 바빴다. 그때까지만 해도 윤정한은 둘의 우정이 그 누구보다 특별하고 돈독한 우정인 줄 알았다. 애석하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조금씩 자리잡고 있었다는 걸 알기에는 고작 열아홉,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내리기에는 여전히 서툰 아이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윤정한이 본인이 이석민을 좋아한다는 걸 자각한 게 언제냐 하면…
같이 공포 영화를 보러 가서 화면의 절반도 못 보고 내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가리고 있을 때? 아니면 세심하고 다정한 성격 때문에 늘 내가 동생인 것마냥 하나하나 챙겨 주려고 할 때?(이러고 다 내가 해 줬지만) 사실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수도 없이 많을 거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며 저 멀리서 달려올 때 짓는 표정들조차 나에게는 사랑이었으니까. 흔히들 말하는 썸.(ex. 자기 전까지 전화하기, 집 갈 때 데려다 주기, 좋아하는 거 기억해뒀다 사 주기 등) 전부 우리의 이야기에 포함이 되어 있지만 그저 형동생 사이라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그 이후로 의도적으로 이석민을 피해 다녔다. 수능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3학년 분위기 때문에 석민이 교실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급식실이나 동네에서 마주쳐 이름을 부를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승철이와 지수의 등을 밀며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승철의 둘이 싸웠냐는 물음에 지수가 에이, 석민이랑? 얘가 잘못했겠지~ 이러는데 어찌나 억울하고 얄미운지. 잘못은 나한테 마음도 없으면서 마음 있는 것처럼 구는 석민이한테 있는 거 아니야? 입밖으로 내지도 못할 억울함을 토해냈다. 그나저나 상처 많이 받았으려나, 하니 당연하다는 듯 지수가 그렇게 대놓고 피하는데 모르는 사람이어도 상처 받지, 더군다나 석민이는 남들보다 더 여리잖아.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괜히 헛웃음이 나오더라. 이래서 헤테로는 마음에 담으면 안 되는데, 이제 정말 끝이다. 계속 피해 다닐 수는 없으니 하루 빨리 마음을 접고 다시 석민을 마주해야 한다. 석민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동생으로, 다시 이석민의 둘도 없는 짱친 윤정한으로. 분명 이렇게 다짐을 한 지 일주일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저 멀리서 화난 얼굴로 네가 달려오는 건지. 환각이라도 보는 건가 싶어 눈을 비비니 이제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정한이 형!"
아, 착각이 아니었다. 저기서 달려오는 인영은 분명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이석민이었다. 그런 다짐을 한 게 무색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네 얼굴을 보니,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더라. 나는 여전히 너에게 약하다는 사실이 허무하기도 하고, 피해 다닌 걸 알고 원망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도망가려던 찰나 너에게 잡힌 손목에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뿌리치고 갈 수 있었겠지만, 숨을 고르던 이석민이 한 말 때문에 가지 못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형, 너 이번에도 나 피하면 진짜 다시는 안 본다!"
어쩌면 겁쟁이는 이석민이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평생 안 볼 자신도 없었으면서. 한참을 가만히 있자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손목을 잡느라 힘을 줬던 손이 스르륵 풀렸다. 그러고는 꽤 오랜 시간을 서로 바라보다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이석민 눈에 눈물이 고인 걸 계속 보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그나저나 잘 피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얘는 대체 나를 어떻게 찾아낸 건지. 설마 이제 같은 마음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금세 생각을 떨쳐냈다. 왜? 이석민은 천성이 다정한 사람이라 윤정한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잠적을 하여도 이렇게 지금과 같이 눈에 눈물을 달고 찾을 사람이니까. 괜히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사랑을 하면 행복하다고 하더니. 순 구라였지, 전부. 행복은 무슨… 차라리 도려내고 싶었다. 이렇게 쓰릴 바에는 텅 비어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야, 승철아. 사랑이 이렇게 아프기만 한 거였냐? 나 심장 부근이 콕콕 쑤시는 게 아무래도 심장병인가 봐… 수신인에게 닿지도 않을 말만 곱씹었다. 물론 그대로 전했으면 미친 건 알았지만 드디어 미쳤냐며 징그럽다고 헛소리하지 말라고 욕을 먹었을 테지만. (나도 진짜 물어볼 생각은 없다 정말로) 그나저나 시간이 아까보다 더 지났는데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정말 나를 왜 찾아온 건지. 마음에도 없는 원망만 하다 한숨을 쉬었다.
잠깐 내리던 소나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과 거칠게 부는 바람이 만나 태풍을 일으킬 줄 누가 알았을까. 가벼운 감정이라 치부했던 지난 시간이 우스워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아, 젠장. 비상이다. 잘못하면 입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다 삼켜버린 흑심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삼킨 감정들이 얽히고 뭉쳐져 더 큰 소용돌이를 만들어 날 벼랑 끝에 내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본인을 더 갉아먹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모습을 홍지수가 봤다면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겠지. 괜한 생각에 갑자기 서러워졌다. 정말이지… 눈물겹도록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띠링, ⚠[중앙마음재난안전대책본부]⚠
마음 깊숙이 묻어둔 순정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마음을 헤집고 있습니다. 마음 내부에 많은 피해가 있는 가운데, 비가 얼마나 내리는지 마음이 침수당해 순애로 변한 지 오래예요. 이 이상은 저희 본부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윤정한은 부디… 알아서 잘 살아남길!
마음 재난 안전 대책 본부라는 게 있었다면 이런 메시지가 왔을지도 모르겠다. 들리지도 않고 올 일도 없는 메시지 알림음이 들리는 기분이랄까. (마음 주인을 닮은 건지 상당히 무책임한 메시지인 것 같지만) 너에게 닿을 수 없는 마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나도 알 수가 없어서 생긴 두려움이, 남들이 보면 유난일지도 모르는 약도 없다는 지독한 사랑 병이, 망가지지 않고 더욱 견고해지는 애정을 너에게 보일 날이 올까. 견고해진 마음에 비해 한바탕 휘몰아친 소용돌이가 지나간 머릿속은 모든 게 뒤엉키고 부스러졌다. 그냥 좋아한다고 해버릴까… 괜히 하지도 못할 말을 곱씹으며 우산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석민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쪼그려 앉아서 고개만 든 채,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형, 오늘이면 장마도 끝난대."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으면 얘기해 주면 안 돼?"
"…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그럼 그동안 나 왜 피했는데."
"..."
"무슨 일인지 안 알려 줄 거야?"
"안 피했어."
"피했잖아, 나 형 한 달 만에 보는 것 같아."
"하여튼 윤정한... 진짜 치사해."
"뒤에 형은 어디 갔어."
"내가 먹었다, 왜!"
"형, 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죽어도 모를걸."
"그거에 비하면 형 안 붙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 석민이 뒤끝 긴 건 여전하네."
"다 울었니."
"그러게 누가 말도 없이 피해 다니라고 했나."
"그리고 나 안 울었어."
"울었으면서."
"안 울었다니까?"
"헐, 비 그쳤다."
"이번만 봐주는 거야, 알았어?"
"다음에는 이유 말해 줄 때까지 쫓아다닐 거니까."
네 말대로 유난히 길었던 장마 끝에 그친 비가, 점차 걷어지는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에 비친 네가 웃는 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운 날, 나는 역시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나는 오늘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석민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야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달까.
"저기요, 윤정한 씨~ 내 말 듣고 있지?"
"형, 듣고 있냐고오."
진부한 사랑 이야기, B급 로맨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독백. 내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지만 어느새 붉게 물든 마음이, 천천히 색이 채워지는 스케치 위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피어나 번져갔다. 여름의 존재는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마음에 스며들어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 그렇게 내가 너에게.
윤정한이 이석민에게 또 한 번 사랑에 빠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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