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elst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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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JH&DK Collaboration

문을 열면 반겨줄
익명

누구나 인생에서 후회하는 것이 한 가지쯤 있겠지. 정한의 경우 누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남자친구에게 카메라를 사준 일이라고 할 것이다.

 

 

정한의 남자친구 석민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그만큼 모든 사랑하는 것에 깊게 마음을 두는 사람은 아니었다. 석민이 사랑하는 모든 것에 깊게 마음을 썼다면 석민의 마음은 이미 한참전에 엥꼬가 났을 것이니 다행인 일이다. 어차피 정한은 석민의 몇 안되는 '사랑하고 마음도 깊게 쓰는 것' 리스트에서 당당히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정한에게는 석민의 그런 성격이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고ㅡ하지만 친구들에게 뽀뽀는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ㅡ오히려 모든 것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보는 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카메라를 사주게 된 계기도 단순했다. 술자리에 민규가 들고 나온 카메라를 신기해하는 눈빛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마침 이전 데이트에서 '나도 뭔가 남들처럼 진득한 취미 갖고싶은데..' 라고 지나가듯 말했던 석민이 생각났고, 마침 석민의 인스타그램 활동이 뜸했던 시기여서 카메라를 사주면 귀여운 사진 업뎃 많이 해주겠거니 하고 가볍게 생각했을 뿐이다. 정한은 그동안 석민이 잠깐 발 담궜다가 뒷전으로 미뤄버린 각종 취미활동 도구들을 생각하며, 적당히 너무 비싸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누구한테 자랑하기 쪽팔릴 정도의 가격은 아닌 카메라를 한대 선물해줬다.

 

 

그런데 평소처럼 가볍고 얕은 사랑으로 지나갈 거라던 정한의 예상과 달리, 사진은 석민의 '사랑하고 마음도 깊게 쓰는 것' 리스트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나 보다.

 

 

'찍고 싶은 게 많아.'

 

어느 날 문득 그렇게 말한 석민은 비행기 편도 표를 끊어 훌쩍 떠나버렸다. 정한과 여수-순천-구례-곡성 여행 코스를 돌고 온 지 3일도 안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빡센 국내 여행으로 영혼까지 다 털려있어 아직 여행 짐도 다 정리하지 못했던 정한은 가지말라고 남자친구한테 땡깡도 못 부려봤다. 사실 안 부린거다. 석민이 같이 갈래? 덧붙인 말에 이번엔 혼자 다녀와 보는건 어떻겠냐고 가볍게 대답했다. 석민도 가볍게 알았다고 하길래 왕복이 아닌 편도 표 끊어서 출국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언제 돌아갈지도 안 정했고 여유자금도 얼마 없어 로밍은 안했어. 요즘은 와이파이 에그도 빵빵 잘 터지네. 하고 웃는 전화기 너머 석민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한은 마른 세수만 박박 했다. 그 조악한 와이파이 에그마저도 한달이 지나자 안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대신 세계 각국에서 뒷면에 편지가 적힌 사진들이 날아왔다.

 

 

사진은 칠레, 페루같은 생소한 나라에서 올 때도 있었고, 일본, 대만 등 비교적 익숙한 나라에서 올 때도 있었다. 끔찍하게 비효율적인 엉망진창의 동선이었다. 석민의 다음 동선을 함부로 짐작하기 어려웠다. 처음 일본 도쿄 소인이 찍힌 엽서가 온 날, 정한은 석민을 잡겠다고 그대로 제일 가까운 시간의 비행기 표를 끊어 도쿄로 날아갔다. 일본에서 한국까지 가장 저렴한 요금의 우편이 도착하는 데에는 10일 이상이 걸린다는 사실은 나리타 공항에 섰을 때에나 깨달았다.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달에 한 번 쯤은 생소하고 낯선 숫자의 배열로 전화가 왔다. 이 극악무도한 전화 연결 텀은 석민의 배려에서 기인하였는데, 아무래도 시차가 있을 수 있으니 잠귀가 예민한 형이 괜히 잠에서 깰까봐 피해주기 싫다는 이유였다.ㅡ석민이 뉴욕에서 보내온 편지에서 발췌ㅡ가끔 시차가 별로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민이 전화를 걸어 올 때마다 정한은 제발 그딴 거 신경 안써도 좋으니 나라 옮길 때마다라도 전화해달라고 화도 내보고 우는 소리도 내봤지만 석민이 그냥 히히 웃기만 하고 대답은 안 해서, 정한은 애가 그냥 앞으로도 지 쪼대로 전화 안 하겠구나 했다.

 

다음 통화때는 헤어지자고 말해야지.

 

석민이 보내준 사진들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석민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사랑하는 것을 늘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랑이 많은 석민의 마음 속에서 정한의 순위는 어느 정도일지, 이미 사랑하는 게 너무 많아져서 한참 밀려난 건 아닐지. 정한은 이런 걱정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고, 이 기묘한 연애 지속 상태를 끝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뒷면마다 손에 힘 꽉 주고 꾹꾹 눌러 쓴 글씨가 애틋해서, 자신이 선물해 준 카메라를 소중하게 쥐고 찍은 거울 셀카의 얼굴이 귀여워서, 한낮에 전화하는 주제에 혹시 형 낮잠 자고 있던건 아니지? 라고 한 번씩 확인하는 배려가 사랑스러워서 정한은 한 두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이별할 찬스를 날려버렸다. 그렇게 다음 통화때는, 다음 통화때는.. 하며 이별을 미룬지 일년 쯤 되었을 무렵

 

 

"형 아직도 레고 하나?"

 

 

석민이 돌아왔다.

 

 

 

 

문을 열면 반겨줄

 

 

 

 

"...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형 뭐야? 부처야? 예수야? 지수형, 형 이제 예수 그거 하지마. 윤정한한테 양도해. 오쪼쪼 거리는 민규의 말에 지수가 사람 좋게 뇨롱 웃었다. 부처도 예수도 아니고 이런 건 호구라고 해. 나오는 말은 사람 좋지 않았지만.

 

평소라면 앙냥냥 거리는 발음으로 오쪼쪼와 뇨롱의 합심 공격에 대응했을 정한은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아먹었다. 다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1년만에 돌아온 석민은 마치 어제도 집에 있었던 사람 마냥 자연스럽게 귀가한 정한에게 인사를 하더니, 자연스럽게 정한의 손에 들려있던 김치찜 포장지를 뜯어 식탁에 세팅을 하고 자연스럽게 햇반을 돌려 정한의 맞은편에 앉아서 밥을 냠냠 먹었다. 와 나 진짜 김치찜 먹고 싶어 죽는줄.. 나 이제 질려서 당분간은 피자 안 먹으려고. 어때 형은 좋지?! 하는 말이 아니었다면 정한은 제가 보낸 1년이 다 꿈이었나 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욕실에 꽂혀있던 석민의 칫솔을 1년동안 치우지 못한 것은 정한의 잘못이었다. 1년이 지나도 자신의 칫솔색은 까먹지 않았는지 석민은 제 칫솔로 양치까지 야무지게 하고 거실에서 티비를 보며 깔깔 거리다가 둘이 같이 누워자던 안방으로 쏙 들어갔다. 칫솔은 남겨놨어도 석민이 베고 자던 베개는 이미 한참 전에 정한의 안고자는 쿠션으로 전락하여 벽면 한켠에 세로로 구겨져 있었는데, 석민은 입을 삐죽이며 쿠션감 다 빠졌다고 한번 투덜거리더니 쿠션감 다 빠진 그 베개를 그대로 베고 10분만에 골아떨어졌다. 뜬 눈으로 밤 꼴딱 새운 건 정한 뿐이었다. 와중에 순순하게 석민 옆에 누워있긴 했다.

 

 

 

"하긴 예전부터 정한이가 석민이한테 약간 호구처럼 구는 면은 있었지."

"맞아, 이 형 어디가서 절대 호락호락하게 져주는 성격아닌데 이석민은 엄청 봐줬잖아. 기억나? 그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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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민이랑 나랑 동아리 가입한지 얼마 안됐을 때 있잖아. 그 때 무슨 신입생 환영회 겸 동아리 엠티 간다고 중간고사 끝나자마자 엠티 갔던 거 기억나지. 아 왜 기억이 안나 우리 다 같은 조였는데! 무튼 그 때 굳~이 윤정한이 자차로 같이 가자고 해서 우리 조만 지하철 말고 형 차 타고 갔던거 기억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이석민 꼬실라고 그런거였겠지? 나랑 이석민이랑 친하니까 괜히 나까지 끼워서 자기 차에 태워가지고 으이구...

 

그렇게 가다가 놀러가는 기분 내겠다고 뭔.. 가평 휴게소였나 암튼 어디 휴게소 들러가지고 거의 다 왔으니까 술 안주로 먹을 아이스크림 사가자고 해서 이석민이랑 나랑 배라 사러 갔잖아. 근데 우리끼리 보냈으면 어땠겠어. 당연히 민트초코 넣지. 아니 그 때 형들도 아무거나 사라고 했다니까? 아 뭔 민트초코가 자잘구리한 아이스크림이야 이 형은 한국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단어 선택이 이래?!

 

암튼 그렇게 룰루랄라 다시 차 타고 펜션가서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딱 아이스크림 뜯었을 때 정한이 형 표정 진짜 볼 만 했는데. 나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그 때는 형들이랑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어서 내가 실수한 거 그 때 깨달았잖아. 다같이 먹는 아이스크림은 좀 호불호 덜 갈리는 맛으로 사야된다는 걸... 생각을 안 했지. 그 땐 애기였으니까. 근데 이석민은 약간 눈치 없는 거 알지. 형한테 왤케 팍팍 안 떠먹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진짜 등에서 식은 땀이 삐질 흘렀다 아오.

 

근데 형이 그걸 또 먹대? 나 그 때는 진짜 감동했잖아. 아 우리가 신입생이라 혼내면 실수했다고 풀 죽을까봐 선배님이 안 좋아하는 거 드셔주시는 구나 하고. 신입생 꼬셔먹으려는 건 줄도 모르고... 순수했다 내가.... 심지어 한 입 먹고 내려놓은 것도 아니었어! 그니까 내가 감동하지! 이석민이 막 자기는 민트초코가 제일 좋은데 선배님은 뭐 좋아하시냐고 물어보니까 형이 대박 느끼한 말투로

형도 제일 좋아..... 민트초코가.

이러기까지 했다니까? 아!! 왜 때려!!! 진짜야!!!! 장난같애???? 홍지수 기억나지 웃는거 봐 거봐 이 형도 기억난다잖아!!!!!!!

 

.... 근데 나 궁금한 거 있는데, 형 사실 피자 같은 것도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 날 안주로 나온 피자도 이석민 때문에 시키고 이석민 때문에 억지로 먹은거야? 아 그치 지수형 맞지? 아 뭔 형이 피자를 원래 좋아해 그 이후로 먹는 꼬라지를 못 봤구만... 이석민이랑 맨날 피자 먹으러 다니길래 난 쟤만큼 피자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나 했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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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민 한국 왔다매??????"

"아씨발깜짝이야!!!!!!!!!!!!!!!"

 

싸고 맛좋은 동네 카페의 단점, 아는 사람들을 다 만날 수 있다. 민규의 썰보따리에 반박할 말을 찾으려 정한이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지나가던 승관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실 그거 가지고는 그렇게 놀랄 거리는 아니었는데 윤정한 놀려먹으려고 자기 얘기에 심취해있던 민규가 놀라 펄쩍 의자에서 공중부양을 하며 소리를 빽 질러서 그 소리에 더 놀랐다. 근데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니.

 

"형은 내가 소식 늦게 듣는 거 봤어? 아니 소식 듣고 전화 거니까 신호음이 가대?? 석민이형 진짜 아무렇지도 않게 어 승과나 받아가지고 난 이 형이 1년동안 행방불명 된 게 내가 꿈꾼거인줄 알았네."

 

내말이.

 

"욕 안 했냐?"

"당연히 했지.. 욕 시원하게 한 번 갈겨주고 주말에 삼쏘 먹자고 하니까 엄청 좋아하던데? 주말에 나올 사람?"

"야, 애 오랜만에 온 건데 돼지말고 소고기 먹지."

 

 

실수다. 석민의 얘기에 냅다 끼어드는 건 정한의 오랜 습관이었다. 여섯개의 눈이 똥그래져서 쳐다봐서 머쓱해진 정한이 괜히 머리를 쓸어 넘기며 투덜거렸다. 아니, 석민이도 돼지고기보다 소고기 파 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 말과 동시에 세 명의 눈빛이 더욱 더 오묘해진다. 뭐, 뭐야. 눈빛들 왜 이래.

 

"이석민 완전 돼지고기 파인데 뭔 소리야."

"고기 구울 때 섹시한 남자~ 이거 정한이 앞에선 안했나?"

"이석민도 남친 앞에선 내숭 까는 놈이란 거지.. 웩.."

 

지수와 민규가 너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주고 받는 얘기에 당황한 정한이 너만은 내 편이지, 하는 눈으로 승관 쪽을 쳐다봤다. 그런데 승관은 되려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앞에 놓여있던 민규의 커피를 한 입 쪼르륵 빨아마시고는,

 

"소고기 좋아해서 살치살 타령한 건 형이지."

 

정한의 넋을 한 층 더 빼놓고야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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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는 뭔 언제부터야. 내가 안 이래로 그 형은 고기 먹으러 가자고 하면 무조건 돼지고기였구만. 애초에 석민이 형은 덜 익힌 고기 잘 못 먹던데? 그 형이 괜히 고섹남 어쩌고 하면서 자기가 집게 잡는줄 아나... 근데 진짜 형 앞에서는 고기 구울 때 섹시한 남자 그거 안했어? ...아... 했구나... 섹시했어? 아니 그냥 그게 먹혀서 형이 사귀었던 건가 궁금할 수도 있지 어메? 이 형 또 삐진 척 한다??

 

왜~ 그 때 우리 제주도 같이 갔을 때도... 형들 비밀 연애 할 때 괜히 나 낑겨서 한번 제주도 간 적 있잖아, 또 섭섭하게 기억 안난다 해라? 아무튼 그 때도 흑돼지 삼겹살 먹으러 가서 형 맥인다고 차돌박이까지 시키길래 내가 그 때부터 딱~ 이거는 뭔가 이상하다, 이 형이 소고기 좋아하지도 않는데 계속 차돌박이 시켜야된다고? 이거는 뭐가 있다. 했다는 거 아니냐. 형이랑 같이 뭐? 그? 박이박이 차돌박이??? 그거 하면서 아주 신나가지고 내가 그 때 추궁을 못했어. 둘이 내 정신을 쏙 빼놔가지구. 와, 나 근데 생각해보니까 고기 먹으러가서 석민이 형이 집게 안 잡는 거 그 때 처음 본 거 같애!! 그 날 형이 다 구웠지?? 어우 징그러 나 여기 소름 돋았어!!!!!!!

 

그것도 그건데, 그 다음 다음 날엔가 저녁에 와인바 가서 안주로 스테이크랑 뭐 다른거 여러 개 시켰는데 형이 자연스럽게 미디엄 레어로 시켜서 나 진짜 놀랬잖아. 내가 알기론 석민이 형은 무조건 웰던이거든? 아 뭘 내가 착각을 해, 같이 빕스 갔을 때 스테이크 시켜먹는데 그 형이 웰던 아니면 못 먹는다고 박박 우겨서 김민규랑 나랑 촌스럽다고~ 촌스럽다고~ 얼마나 놀렸는데. 그치 만규야. 기억나지. 그렇게 먹을거면 함박스테이크 먹으라고. 아! 옛날 얘긴데 왜 노려봐!!! 진짜 이 형 섭섭하게 구네!!!!!

 

아무튼 그렇게 놀려도 절대 웰던 고집하던 사람이 미디엄도 아니고 미디엄 레어 시키는데 조용히 있길래 나는 고 사이에 취향이 바뀌었나 했는데 음식 나오니까 잘 안 집어 먹더라고. 사실 난 거기서 확신했지, 이 형들 뭔 사이구나.. 지금 커플 여행 가는데 연막용으로 나 끼워서 온 거구나.... 형 화장실 갔을 때 내가 석민이 형 옆구리 팍 찌르면서 뭐야. 딱 말해. 하니까 웃으면서 바로 실토하던데? 함박스테이크에서 미디엄 레어로 많~이 진화했다고 놀리니까 뭐랬는지 알아?

형이 좋으면 나도 좋아.

좋아, 홍지수 김민규 표정 아주 불손하고 마음에 들어. 저기요 저는 실제로 그걸 그 자리에서 듣는데 어땠겠냐고요. 내가 그 날 먹은 고등어회랑 스테이크랑 와인이랑 기타 등등 다시 다 만날 뻔 했어 어우.

 

근데 형 눈치 없는 편도 아니면서 아예 눈치 못 챘어? 물론! 내가! 눈치가! 쫌 좋긴 하지만!! 형도 원래 눈치 엄청 빠르잖아. 아~ 내가 이렇게 또 윤정한을 이겨보네? 역시 사랑에 눈이 멀면 못 쓰는구만. 근데 진짜로?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 지금까지 몰랐다고?? 에이 그건 좀 심했다. 그래도 둘이 같이 괴기 썰러 간 적 꽤 있었을 거 아니야?? 그 때마다 미디엄레어로 먹었어? 아이고 그 형이 또 고생 좀 했겠네. 나야 뭐.. 알고싶지도 않고 잘 모르지만 그 형 성격상 이런 식으로 맞춰주는 것들이 좀 있지 않았겠어??

 

 

 

"나.. 가 볼게."

 

승관의 얘기를 들으며 어쩐지 미묘한 표정이 된 정한이 급하게 짐을 챙겨 일어섰다. 자리에 앉아있던 모두가 정한이 어디로 갈지 너무 잘 알 것 같았으나 평소처럼 쉽게 놀릴 수 없었던 건, 그 미묘한 표정이 어쩌면 울 것 같은 표정처럼 보여서 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안 헤어질 것 같지?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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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겁지겁 집으로 돌아 온 정한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랩에 싸인 그릇 하나였다. 형 좋아하는 베이컨 넣은 마늘 볶음밥! ♡~♡ 1년이 지나도 여전히 삐뚤빼뚤, 하지만 정한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글씨체의 쪽지가 랩 위에서 팔랑거렸다. 1년동안 정한이 비슷한 맛을 내 보려고 노력했지만 맘대로 되지않았던 마늘 볶음밥. 먹어 보지 않아도 너무 익숙하고 그리워했던 그 맛일 것이라는 건, 집 안에 가득찬 냄새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치만 이번에도 틀렸어 바보야. 내가 베이컨 넣은 마늘 볶음밥보다 좋아했던 건 맞은 편에 앉아서 신난 표정으로 맛있냐고 백번 물어보던 너란 말이야.

 

"이석민 이제 어디 가지마."

"..... 형 아침부터 어디 갔다왔어어.."

"빨리 이제 아무데도 안 간다고 약속해 지금."

 

아까 승관과 잠깐 전화통화도 했다더니 우렁각시처럼 밥만 해놓고 다시 잠들어버린 듯 석민은 침대 한 켠에 몸을 둥그렇게 말고 곤히 자고 있었다. 식탁 위에 놓여있는 마늘볶음밥, 오래 외출했다가 들어와도 훈훈하게 데워져있는 방 안, 그리고 남자 둘이 자기엔 조금 작게 느껴지는 더블 침대에서 혹시라도 잠 잘 때 예민한 정한이 깰까봐 벽에 찰싹 달라 붙어 자는 버릇을 가진 석민이. 모든 것이 1년 내내 너무 그리워 한 풍경이라, 정한은 울컥하는 얼굴을 숨기려고 석민을 마구 끌어안으며 등에 얼굴을 묻고 떼를 썼다. 그러면 석민은, 자다 깨서 짜증낼 법도 한데도, 그냥 퉁퉁 뿔은 얼굴로 눈도 못 뜨고 등 뒤로 손을 뻗어 정한을 토닥, 토닥.

 

"밥 따뜻하게 해먹일라구 했는데에... 눈뜨니까 형 없어가지구 놀랬네... 밥 해놨는데 먹었어?"

"너 왜 대답안해. 어디 안간다고 약속 할 때까지 나 밥 안 먹을거야."

"윤정한 왜 더 어려졌지... 알았어 약속~..."

"...."

"형 울어??"

 

이씨잉, 바보. 아까부터 울고 있었거든.

한참을 눈도 못 뜨고 정한을 토닥토닥 거리다가, 이제야 등이 축축하게 젖어들어가고 있는 걸 눈치 챘는지 화들짝 하며 정한의 얼굴을 보려 이리 저리 몸을 뒤튼다. 안 보여줄거야, 1년동안 너도 니 맘대로 니 얼굴 안 보여줬으니까, 나도 내 맘대로 얼굴 안 보여줄거야. 절대로 1년만에 보여주는 얼굴이 눈물콧물 범벅인 얼굴이라 못생겼을까봐 안 보여주는 게 아니고. 석민은 한창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정한을 떼내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정한이 아득바득 힘주고 절대 안 놔주자 이내 곧 포기했다. 사실 진짜 힘으로 겨루면 이기고 남는데 그냥 봐준거라는 걸 정한도 알았다.

 

"형."

"....."

"정한이형~"

"........"

"알겠어 나 이제 어디 안갈게에~.."

"응...."

"내가 미안해 형. 그만 울어라, 응?"

 

발음이 어디까지 둥글둥글해질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처럼 한의 ㅎ이 모자를 벗고 ㄴ도 다음 음절로 넘어가버리는 저 발음이 너무 그리웠다고, 억지로 뒤돌아 누울 수도 있는데 정한이 마음 정리 다 할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기다려줄 것 처럼 토닥거려주는 따뜻한 손이 너무너무 그리웠다고 말하고 싶은데. 1년 지났다고 고 사이에 늙었는지 눈물이 많아져서, 정한은 대답도 못하고 한참동안 석민을 끌어안은 팔에 더더욱 힘만 주고 있었다.

 

 

 

-

 

 

 

그 뒤로는 언제 헤어질 생각을 했었냐는 듯, 1년 전과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순탄한 연애생활의 연속이었다.

 

주말에는 들었던 대로 승관과 약속이 있어 나간다는 석민의 뒤를 졸졸 따라가 삼겹살에 소주를 먹었다. 잔뜩 신나가지고 고기 구울 때 섹시한 남자!!!! 외치는 걸 너무 오랜만에 봐서 정한이 왈칵 울어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승관에게 놀림당했다. 진짜 덜 익힌 고기는 잘 못 먹는지, 삼겹살도 튀기듯 바싹 익혀먹는 모습에 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정한은 자꾸 삼겹살집 천장을 바라봐야 했다.

또 어느 날에는 정한이 퇴근하는 길에 사 온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패밀리 사이즈를 가운데 두고 같이 영화를 봤는데, 영화 내용이 너무 슬프고 OST가 마음에 들어서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버려 석민을 당황시키는 일도 있었다. 형.. 나 지금 눈물이 나오다가 쏙 들어갔어. 못 본 새에 왤케 눈물이 많아졌어?! 석민이 황당해하며 하는 말에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영화 주인공보다 더 드라마틱해진 정한을 보고 석민은 웃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고 콧구멍을 확장해보았으나 금새 눈치 챈 정한이 히잉씨 하면서 팔뚝을 찰싹 때렸다.

 

또 또 어느 날에는, 습관적으로 배달 어플을 뒤적이다가 문득 눈에 띈 피자집에서 페퍼로니 피자를 시켰는데 잠시 후 배달 온 배달원이 봉투를 세개나 주고 갔다. 하나만 시켰는데요? 아니예요, 세 개 다 여기 맞는데. 의아해하며 영수증을 확인하니 정한이 좋아하는 짜글이와 생선구이 백반이었다. 어, 형.. 그거 내가 시켰는데. 마침 방 안에서 비척비척 걸어나온 석민이 봉투 세 개를 들고 있는 정한을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그 날 사람은 둘인데 메뉴는 세 개에 양은 5인분 정도 되는 밥상을 식탁에 올려두고, 배 터지게 서로가 시킨 메뉴를 열심히 퍼먹었다. 근데 너 당분간 피자 안 먹겠다는 거 아니었어? 웅 근데 한국 피자는 또 맛있네... 이 날 정한은 석민이 아직도 제가 좋아하는 우삼겹 짜글이를 기억해뒀다가 시킨 것을 보고 감동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울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에는.

 

 

정한은 본래 천성이 예민하고 잘 때는 그것이 배로 심해지는 타입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뜨끈한 석민을 옆구리에 꿰차고 잘 때면 그렇게 잠이 잘 올수가 없었다. 석민은 자꾸 자신이 잠꼬대가 심한 편이라며 잘 때 예민한 정한을 방해할까봐 침대 안쪽에서 벽에 꼭 붙어자곤 했지만 사실 석민이 잠들면 은근슬쩍 석민 쪽으로 몸을 붙여 거대한 핫팩을 끌어안듯 꼬옥 안는 것은 정한 쪽이었다. 석민이 돌아옴과 동시에 한동안 함께 하던 불면증이 가신듯이 나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석민을 끌어안고 잠에 빠진 지 얼마 안됐을 무렵, 정한은 오랜만에 새벽에 선 잠에서 깨어났다. 팔 안에 있던 뜨끈한 온기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석민이 침대 위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정한은 용수철처럼 파드득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 간다며, 아무데도 안간다고 했으면서. 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몸에 감겨있던 이불을 걷어내는 급한 손길이 휘적휘적 헛도는 게 열받아서 정한의 눈에 눈물이 점점 고였다. 일어서다가 한 번 기우뚱, 해서 넘어질 뻔 하다가 후다닥 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을 때,

석민이 거기 있었다.

 

"어, 형... 왜 일어났어?"

"...."

"나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됐나봐. 목 말라서 깼는데 잠이 다시 안 와가지구... 그래도 형 깰까봐 음소거 해놓고 있었는데... 형 표정이 왜 그래, 악몽 꿨어?"

 

조용하고 어두운 거실에 소리 없이 하얗게 켜져있는 티비와 소파에 앉아 멍하니 티비를 바라보고 있던 석민. 방 문을 열고 나온 저를 발견하자마자 혼자만의 시간동안 짓고 있던 표정을 재빨리 지우고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지만, 정한은 이미 봐 버리고 말았다.

 

티비에서 방영되고 있는 여행 프로그램.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석민의 표정은, 정한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석민이 한창 사랑에 빠져있는 얼굴이었다.

 

정한의 시선이 티비 화면에 머물고 있자, 정한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석민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정한의 시선을 따라가게 되었다. 아, 저거는.. 나 진짜 다시 어디 가고 싶어서 본 거 아니구, 내가 러시아 가긴 갔었는데 오로라를 못 봐가지구... 그 때 내가 3일동안이나 오로라 스팟에 있었는데... 석민이 덧붙이는 말이 길어졌으나 그 것이 변명이라는 것을 정한은 알고 있었다. 아직 석민이가 사랑하고 싶은 게 많구나. 1년동안 충분히 사랑하고 돌아온 게 아니고 그냥 나 때문에 포기한 거였구나. 석민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정한의 손을 잡아 끌어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도 정한의 머릿속을 꽉 채운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약간은 버겁다 싶을 정도로 품 안에 꽉 들어찬 석민의 온기는 평소처럼 따뜻했으나 어쩐지 손가락 끝이 아직도 차기만 했다.

 

 

 

-

 

 

 

"너 이제 가."

 

꿈벅꿈벅. 간짜장의 랩을 벗기던 석민이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온 정한의 말에 대답도 못하고 바보처럼 눈만 깜박거렸다. 석민에게는 다소 당황스럽고 갑작스러운 발언이었지만 사실 정한이 이 말을 가슴에 품고 고민한지가 벌써 2주째였다. 그 말은 즉, 석민이 새벽에 소파에 앉아 가만히 여행프로를 보고있던 그 밤으로부터 2주가 지났다는 말이기도 했으며, 근 2주동안 석민은 3일에 한 번꼴로 그 밤과 동일하게 새벽에 정한의 품을 벗어나곤 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한참을 눈만 깜빡거리면서 아무 말도 못하는 맹한 얼굴. 평소같으면 잔뜩 바람빠진 히읗 소리를 내며 귀여워해줬을 얼굴이지만 정한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일부러 여기 오늘 단무지 왜 이렇게 조금 줬냐, 이런 소리나 하면서 석민의 눈을 피했다. 여기서 울면 석민이 진짜로 아무 데도 못 갈 거라는 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정한이었다.

 

"내가.. 어디를 가..."

"어디든 가."

"....."

"가고 싶잖아."

 

그 말에 맹하게 얼타던 얼굴이 울고 싶은 것 같기도 웃고 싶은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변해서, 정한은 그게 제 마지막 말에 대한 긍정의 답변인 걸 알았다. 대신 이거 하나 꼭 명심해야 돼.

 

"네 1순위는 나야."

"....."

"나보다 더 사랑하는 걸 만들면 안돼."

"..... 형, 당연하지."

"......"

"내가 어떻게 형보다 다른 걸 사랑할 수가 있어..."

 

울먹울먹하던 석민이 결국 그 말을 하며 입술 끝을 주욱 내리고 울어버렸기 때문에, 정말로 정한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쟁반짜장과 간짜장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그 위로 뚝뚝 눈물을 흘리는 남자 두 명이라니, 누가 보면 혀를 쯧쯧 찰 광경이었다.

 

사실은 정한은, 석민의 마음 속에서 아직도 자신이 1순위라는 것을 너무잘 알고 있었다. 정한이 자기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석민이니까.

 

석민은 사랑하는 것이 아주 많고, 은근히 제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고집도 욕심도 있는 편이고, 충동적인 면도 있어 언제든 훌쩍 떠나버릴 수 있는 사람이지만, 정한이 싫어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석민은 제가 사랑한 모든 풍경들을 다 뒤로 하고 정한에게 돌아왔다.

 

그걸 알아서 정한은 더이상 석민에게 가지 말라고 떼를 쓸 수 없었다. 석민이 더이상 저때문에 무언가를 견디거나 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작게는 고기의 익힘 정도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더 넓은 세상으로 사랑을 뻗쳐나가는 일까지 포함하는 마음이라, 정한은 석민을 보내주기로 했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마주보고 짜장면 앞에서 잉잉 울다가, 퉁퉁 부은 눈을 하고 퉁퉁 불은 짜장면을 나눠먹었다. 형.. 간짜장이 너무 뻑뻑해. 그게 간짜장은 원래 그런거야. 형이 이상한 거 시킨거지. 아냐아냐아냐 원래 그런거라니까. 나 바꿔줘, 쟁반짜장이 더 맛있는 거 같애. 웅.

 

 

-

 

 

석민을 배웅하고 공항에서 돌아온 정한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귀신같이 휑해진 집안에 자신의 결정을 조금 후회했다. 석민을 보내주기로 결정한 날부터 약 한 달 가량을 한 몸처럼 꼭 붙어서 지내왔더니 빈 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한 달만 더 있다가 보낼걸.. 왠지 또 코가 시큰해져 왔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공항까지 가서 배웅했고 시차 상관없이 연락 자주 하겠다고 손가락까지 꼭꼭 걸었으니 저번보다는 나을 것이다.

 

으야야야!!! 청승맞게 울지 않으려고 한번 허공에 희한한 소리를 내며 기합을 넣은 정한이 그동안 두명이서 신나게 붙어서 꽁냥거리느라 미뤄놨던 집안일을 시작하기 위해 소매를 걷어올렸다. 들어온 자리는 몰라도 나간 자리는 안다더니, 그 짧은 시간동안 있다가 다시 떠난 주제에 집 안 곳곳마다 석민의 흔적이 잔뜩이었다.

 

왜 다 먹지도 못할 걸 이렇게 여러 종류의 배달 음식을 시켜서, 이거 피자 지나 좋아하지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데 냉동실에 이렇게 잔뜩 얼려놨는지, 물 자주 마신다고 물 마시고 나면 컵 개수대에 가져다 두지않고 정수기 위에 올려놓는 습관은 왜 출국하는 날까지도 똑같았는지, 바닥에 곱슬곱슬한 곱슬머리는 왜 이렇게 많이 떨어져있는지.

투덜투덜 혼잣말을 하면서도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모두 석민이 묻어있어 입꼬리를 올리고 하나 둘 씩 치워나가던 정한이 거실에서 안방으로 들어섰을 때, 정한을 의아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둘이 꼭 붙어 자던 침대와 서랍장 사이 틈에 얌전히 끼워져있는 캐리어 1개.

 

사실 그 캐리어가 거기에 있다는 것은 석민이 돌아온 날부터 알고 있었는데 영 익숙하지 않은 외관의 캐리어길래 길어지는 여행기간동안 석민이 구매한 캐리어인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왜 안 가져갔지? 얘 혹시 이거 깜박하고 놓고 간 건가??

에구 덜렁이... 혀를 쯧 차며 캐리어를 틈에서 끄집어 낸 정한은 문득 캐리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해졌다. 중요한 게 아니니 놓고 간 거겠지, 중요한 것이면 첫 나라에 도착한 석민에게 전화가 올테니 그 때 주소를 받아 부쳐주면 될 일이다. 그리 큰 사이즈의 캐리어도 아니라 깜박했나보다고 결론을 내리고 요리 조리 둘러보다가, 아무생각없이 다이얼을 돌려 1, 0, 0, 4에 맞춰보니 달칵하고 잠금이 풀린다. 뭐야, 이석민! 이런 사랑꾼자식!! 정한이 혼자서 빵 터지며 묘하게 감동받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캐리어가 열렸고, 캐리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은....

 

 

형 아직도 레고 하나?

 

 

일 년만의 재회인데 첫 마디를 그렇게 무드없게 하는 놈이 어딨어. 황당한 마음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건 그렇게 묻는 석민이 평이한 말투나 내용과는 다르게 눈썹을 잔뜩 내리고 울 것같은 얼굴로 입꼬리만 간신히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한은 그 얼굴만 보고, 석민이 저를 기다리며 거실에 앉아서 얼마나 그 말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는지 알 수 있어서, 걔가 떨리는 마음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그 말을 꺼낸 걸 너무 잘 알아서 뭐라고 단 한마디도 따질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말 뒤에 이런 깜찍한 선물도 준비 돼 있었구나.

 

조금 작은 사이즈의 기내용 캐리어를 한 가득 채우고 있는, 얼마나 많은 나라에서 모아온건지 겉 박스에 적혀있는 언어가 가지각색인 레고들 사이에서 정한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수많은 나라에서 계속 계속 자신을 생각하며 잘 알지도 못하는 레고를 하나하나 사 모았을 석민이 너무 귀여워서.

 

 

그 애가 다른 땅에 도착해서 전화가 오면 이제 레고는 질렸다고 알려줘야지. 그러면 미안해할테니까, 그래도 다음에 네가 돌아올 때까지 이 레고들 맞추면서 잘 기다려보겠다고도 씩씩하게 말해줘야겠다. 대신 다음에 돌아올 때는 레고대신 베어브릭 모아달라고도 말하고, 그리고, 곰 모양 장난감을 잔뜩 품에 안은 네가 언제든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오면....

 

 

 

 

문을 열면 반겨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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